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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안항일운동기념탑
소안도는 1909년 당사도 의거사건, 13년에 걸친 토지 소유권 소송 승리, 사립 소안학교 설립, 수의위친계, 소안 배달청년회 창립 등을 통해 줄기차게 조국 광복을 외쳤으며, 소안도 주민 8,000명 중 800여 명이 불령선인으로 감시를 받았던 곳이다. 송내호 등 20여 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됐으며, 면민 전체가 독립운동을 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항일의 함성이 거셌던 곳이다. 소안도 항일해방운동의 뿌리는 갑오년의 동학혁명에서 시작된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동학의 접주 나성대가 동학군을 이끌고 소안도에 들어와 군사훈련을 시켰다. 이때 소안도 출신 이준화, 이순보, 이감락 등이 동학군에 합류했다 동학군의 군사 훈련 때 소안도 주민들은 군사들의 식량을 조달했다. 이준화는 1898년 1월 의병들을 이끌고 소안도 인근의 당사도 등대를 습격해 인본인 간수들을 처단했다. 소안도에서의 항일 운동은 소안 출신 송내호와 김경천, 정남국 등에 의해 주도됐다. 이들에 의해 조직된 수의위친계, 배달청년회, 소안노농대성회, 마르크르주의 사상단체 살자회, 일심단 등의 항일운동 조직이 소안도와 완도 일대의 항일 운동을 이끌었다. 이러한 소안도를 중심으로 한 항일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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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내호 묘
송내호(1895~1928)는 전남 완도 사람이다. 소안면 비자리 송윤삼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4년 서울 중앙고보 졸업 후 귀향하여 사립보통학교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한,일,중,영,독,불어 등 6개 국어에 능통하였다. 1919년 서울에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고향 완도에서도 거사할 것을 계획하고 3월 15일 천도교,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11월에는 만주 관전현에서 조국광복을 목적으로 조직된 대한독립단(大韓獨立)의 취지에 적극 찬동하고 이에 가입하였으며, 전라도 지단(支) 책임을 맡았다. 군자금 모집 활동을 진행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21년 9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조국광복에 대한 염원에는 변함이 없어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1925년 2월 15일 창립총회에서 안재홍(安在鴻)·권동진(權東鎭)·신석우(申錫雨)·김준연(金俊淵) 등 35명과 함께 간사가 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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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호 묘
송기호(1900~1928)는 전남 완도 사람이다. 완도출신 애국지사 송내호 선생의 동생으로 1919년 3월 초 광주농업학교(光州農業學校) 재학 중에 친우 김정수(金丁洙)등과 같이 동년 3월 10일 광주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또한 광주숭일학교(光州崇一學校) 학생들의 규합 책임을 맡아서 활동하고 3월 10일 대시위운동에 광주숭일학교(光州崇一學校) 학생들을 가담케 함으로써 시위진행을 주도하다가 붙잡혔다. 동년 4월 30일에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받았다. 동년 8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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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상 공적(신지항일운동기념탑)
김정상(1894~1965)은 전남 장흥 사람이다. 1925년 5월 완도군(莞島郡) 신지중학교(新智中學校)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동료인 김창선(金昌善)·임재갑(任在甲)·송기호(宋琪浩) 등과 함께 학생들에게 혁명가를 가르치다가 일경에게 붙잡혔다. 이에 1925년 6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받고 목고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만기 출옥하였다. 1927년 3월 1일 이후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장병준(張炳俊)·송내호(宋乃浩) 등과 신간회(新幹會) 활동에 앞장섰으며, 전남 동북지역을 담당하여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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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천 공적(신지항일운동기념탑)
장석천(張錫天, 1903~1933)은 전남 완도 송곡 출생이다. 삼일운동 일어난 해 서울중앙고보 재학 중 17세의 나이로 일본인 체조 교사를 때려눕히고 배재고보로 옮겨 졸업 후 수원고등농림학교를 거쳐 일본 도쿄상과대학 수업 중 귀국하였다. 광주에서 지하운동단체인 성진회를 조직. 노동쟁의 소작쟁의 독서회 동맹휴학 등을 지휘하다가 체포되어 2년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그 진두에서 전국적인 조직 동원을 지휘. 서울로 잠입하였다. 11월 3일 전국 거사를 모의, 김성수 허헌 등과 거사 정치 자금 받아 동분서주하다가 체포되었다. 2년 옥고 치르는 중 몸에 단도를 숨긴 것이 탄로나 혹독한 고문 끝에 옥중 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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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갑 공적(신지항일운동기념탑)
임재갑(任在甲, 1891~1960, 호 후룡)은 전남 완도 임촌 출생으로서 어려서 한문 수학. 서울 융희중학 졸업. 안중근 의거에 감동. 안창호 만나 독립운동에 몸 바치기로 맹세. 일본에 건너가 재일 유학생 지하조직에 가담. 1916년 귀국. 명신강습소 개설. 왜경에 체포되니 전 도민 항의로 석방. 만주로 망명. 신흥군관학교를 거쳐 용정 대성학교에서 교편이어. 김좌진과 함께 독립군 양성에 투신. 운동자금 모금차 귀국. 19년 삼일만세 폭발로 전 도민을 지휘 항거. 다시 만주로 청산리싸움에 가담. 백호장군 호칭 받고 24년 귀국. 사재를 던져 신지 사립학교 설립. 이에 송내호 등 열혈투사들 결집. 인재 양성 전력 중에 27년 교사 전원이 피검 폐교되자 임재갑 사건으로 전국에 확산 3년 옥고를 치르고 출감했다. 다시 신간회 수양동우회 등의 중책을역임. 조국광복에 신명을 불사르다 60년 칠십 풍상의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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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항일독립운동기념탑
이 탑은 1994년 완도군 신지면 대곡리 669에 신지면 출신 애국지사 임재갑, 장석천, 김정상 3인의 공적을 기리고 3·1운동 당시 신지학교 학생들의 항일구국운동을 후세에 알려 자라나는 2세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고양하고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건립되었다.임재갑(1891~1960)은 김좌진 장군 휘하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했고 1927년에 신간회 완도군지회장을 지냈다. 장석천(1903~1935)은 1928년 신간회 광주지회 상무간사였고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시 주도적 역할을 했다. 김정상(1894~1965)는 신지중학교 교사로 학생들에게 혁명가를 가르치다 옥고를 치렀고 출옥후 신간회 활동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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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항일운동기념탑
전라남도 완도는 일제 식민지 암흑기에 가장 치열하게 항일 구국의 횃불을 드높게 쳐들었던 겨레의 섬이다. 1913년 사립중화학원 설립, 1914년 수의위친계 조직, 1920년 배달청년회, 1923년 사립소안학교 설립 개교, 1924년 소안 노농대성회, 1926년 살자회, 1927년 일심단 등 줄기찬 항일운동을 하며 항일독립정신을 잃지 않았고 전국에서 독립 유공자를 가장 많이 배출하였다. 완도 항일독립운동은 절해고도의 지리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국내는 물론 중국.일본까지 무대로 하였고, 완도군에 속하면서 강진,장흥과 인접한 작은 섬이엇던 조약도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의 격동기에 다른 어느 지역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역사의 물결에 참여하였다. 특히 교육사업을 통해서 민족의식을 깨우쳤고, 비밀결사를 통해 요원을 항일 격전지에 파견하였으며, 불법적 법률에 대해 법정에서 맞서 싸웠다. 이러한 완도 약산 출신의 독립운동가를 기리기 위해 공원을 조성하고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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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균 추모비
정남균(1905~1950)은 완도군 약산면 출신으로 광주농업학교 재학중인 1926년 11월 동문인 박인서, 문승수, 정동수 그리고 광주고등보통학교 장재성, 왕재일, 정우채, 외 수명의 동지들과 더불어 항일독립단체인 성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28년 사립약산학교 재직 중에는 배일사상을 담은 유인물 배포로 광주지방법원에서 벌금형을 받았고, 1929년 11월에는 성진회 동지들과 더불어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다음해 고흥에서 왜경에 체포되어 35명의 동지들과 함께 광주지방법원에서 3년형을 언도받고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대한독립촉진회 약산면 지부장으로 활동하다가 1950년 9월 24일 타계하였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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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승수 추모비
문승수(1907~1950)는 전남 완도 사람이다. 1926년 11월 광주농업학교 재학중, 당시 광주 부동정(不動町) 소재 최규창(崔圭昌)의 하숙집에서 광주고보생 등 16명이 함께 모여 조국의 독립, 사회과학 연구, 식민지 노예교육체제 반대 등을 강령으로 하는 항일학생결사인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고 부서 및 결의사항을 정하였다. 그런데 1927년 3월 해체되고 각 학교별로 조직을 하도록 하였다. 그는 그후에도 지용수(池龍洙)·강해석(姜海錫)등의 지도를 받고 광주농고생인 김만복(金萬福)·김재룡(金在龍)·유상걸(柳上杰) 등과 함께 농업학교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1928년 4월에 농업학교 졸업 후에는 완도의 사립 약산보통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직접 간접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29년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그도 붙잡혔다. 1930년 10월 27일 그는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그는 완도에서 황동윤(黃東允)·최창규(崔昌圭)와 함께 비밀결사에 가입하여 야학교사, 독서회원 등으로 민족의식 고취에 전념하였다. 1932년 초 전남운동협의회가 조직되자, 그 산하기관으로 완도군농민조합 건설위원회를 만들고 그는 재정책임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는 야학과 독서회를 통하여 농민계몽과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며, 1933년 8월 강진군 병영주재소 방화사건을 계기로 일경의 집요한 추적을 받게되어 전남운동협의회가 탐지됨에 따라 그도 1934년 2월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옥고를 치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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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도 항일운동기념비 기념탑
전남 완도군 청산면 모도리에서 1923년 9월 청년들이 배달청년회(1925년 모도청년회로 개칭)를 조직하여, 개량서당을 후원하며, 서당 학동들과 주민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항일 활동을 하였다. 이 사건으로 서재만(徐在萬, 1904~1984), 장석칠(張石七, 1905~1952), 정두실(鄭斗實, 1900~1961), 천병섭(千柄燮, 1899~1949), 천홍태(千洪泰, 1903~1927), 최창규(崔昌奎, 1905~1966)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완도군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2002년 1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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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만 묘
서재만(1904~1984)은 전남 완도 사람이다. 1923년 9월 완도군 청산면(靑山面) 모도리(茅島里)의 대모도(大茅島) 서부락(西部落)에서 십수 명의 청년들과 함께 배달청년회(倍達靑年會:1925년에 茅島靑年會로 개칭)를 조직하여 서기(書記)로 활동하였다. 청년회 조직의 목적은 원래 마을의 개량서당(改良書堂)을 후원하는 것이었으나, 회원들간에 점차로 민족 독립사상이 고취되어 감에 따라 그들은 회의를 열 때마다 애국가와 혁명가를 합창하면서 서로를 격려하고, 서당 생도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치며 「조선독립만세」를 삼창(三唱)하기도 하였다. 또한 회원들은 1925년 1월의 월례회의에서 "우리는 절대 일본인 및 친일인(親日人)에게 동정하지 말고 그들과의 교제를 단절할 것"을 결의하였고, 같은 해 4월의 월례회의에서는 "경찰당국 및 일본인을 파괴할 것"과 "우리는 절대로 대한(大韓)을 위해 활동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러한 활동 사실로 인하여 다른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붙잡힌 그는 1926년 6월 29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