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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산사
평산사는 최익현, 기우만, 박임상 등 3인 유학자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받드는 사당이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박임상은 기우만 의진에 참여하였고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제자 수십 명을 규합하여 최익현의 의진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최익현이 대마도로 잡혀가 순국하자 심상3년(心喪三年 : 마음속으로 복을 입는 것)을 마치고 중암 김평묵의 유배지였던 지도(智島)에 두류단(頭流壇)을 설치하고 이항로, 기정진, 김평묵, 최익현 4인의 위패를 봉안하여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그 후 최익현, 기우만의 사우를 건립코자 부지를 다듬다가 일본경찰에게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44년 박임상은 아들 현풍에게 사우를 꼭 세우라는 유언을 남기고 서거하였다. 1946년 1월 1일 박임상의 제자들과 자손은 합심하여 평산사를 건립하고 최익현, 기우만 두 의병장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2년 후에는 박임상도 배향하여 매년 음력 3월 10일에 평산사에서 제사를 받들고 있다. 평산사는 향토문화유산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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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 열화정
보성 열화정은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의 강골마을 의병열사 배출지로서 이 정자는 조선 현종11년(1845)에 이진만이 후진양성을 위해 세웠다고 전한다. 열화(悅話)란 '기쁘게 이야기한다'는 뜻인데 중국 도연명(陶淵明)의「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따온 것으로 일가친척들 간의 우애와 화목을 강조하는 말이다. 이곳에서 이진만의 손자 이방회는 당대의 석학 이건창 등과 학문을 논하였다고 전하며, 한말의 의병으로 유명한 이관회, 이양래, 이웅래 등을 배출한 곳이다. 정자 맞은편의 산에 만휴정(晩休亭)을 지어 전원의 정취를 즐겼다 하나 지금은 흔적만이 남아 있다. 정자의 형식은 앞면 4칸·옆면 2 칸으로 'ㄱ'자형의 누마루집이다. 집의 구성은 가로칸 가운데 2칸에 방이 아래.위로 있고, 세로칸은 누마루가 잇다. 방의 앞.뒤에도 누마루가 있으며, 아랫방 뒤는 골방이고 방아랫 쪽에는 불을 지피기 위한 공간이 있다. 마을 앞에는 아담한 문과 연못이, 정원에는 나무들이 주변의 숲과 어울려 있는 전통적인 조경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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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은거지
김구(1876~1949)는 황해도 해주목 출신이다.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1세대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안창호, 이승만 등과 함께 지도자 출신 중 최순위권에 손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동학 농민 혁명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직접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령,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겸 내무장, 재무장, 군무장을 거쳐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5년까지 주석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 이후에는 본인은 반공주의자였지만 남북 분단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는 반대하면서 통일론을 포기하지 않다가 1949년에 서울 경교장에서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최고 명예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제를 응징하고자, 김구는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鴟河浦)에서 왜병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898년 3월 9일 인천감옥에서 탈옥하여 이곳 쇠실에서 달포 여를 은거하며 동국사기를 가르치며 민족정기를 일깨웠다. 떠날 때 이별의 아쉬움을 담은 이별난시를 남긴 후 중국으로 망망하였고, 해방 후 귀국하여 쇠실의 집집마다 친필휘호를 써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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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선생 은거 기념관
김구(1876~1949 는 황해도 해주목 출신이다.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1세대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안창호, 이승만 등과 함께 지도자 출신 중 최순위권에 손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동학 농민 혁명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직접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령,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겸 내무장, 재무장, 군무장을 거쳐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5년까지 주석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 이후에는 본인은 반공주의자였지만 남북 분단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는 반대하면서 통일론을 포기하지 않다가 1949년에 서울 경교장에서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최고 명예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90년에 주민들의 호응과 보성군의 도움으로 은거비를 세웠으나 내용이 빈약하여 2006년에 주민들의 숙원사업으로 은거기념관을 지을 것을 건의하여 전라남도의 후원 및 백범선생 기념사업회의 도움으로 기념관을 준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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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규홍 파청승첩비
안규홍(1879~1911) 의사는 1879년 4월 10일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에서 안달환의 3남으로 출생하였다.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으며 가세가 빈궁하여 남의 담살이(머슴)로 모친을 극진히 봉양한 효자였다. 1907년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일심계를 조직하여 70여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안극에서 무기와 자금을 제공받아 일분군에 대한 기습작전을 수립하고, 1908년 2월 보성 파청에 복병을 매복하여 일본군 최강의 부대에 대승을 거두었다. 안규홍은 보성, 순천, 여수, 곡성, 구례 등지에서 맹활약하다 토벌대가 대병력을 이끌고 포위망을 압축해오자 의병을 해산시키고 고향으로 돌아오다. 보성군 봉덕면 법화촌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대구감옥으로 이감되었고 1911년 5월 5일 교수형으로 처형되어 한을 남기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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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규 기적비
한말 의병장 설봉 김도규(1885~1967) 선생은 보성군 출신으로 일찍이 나라의 기울어져 감을 탄식하고 있던 차 일제가 한반도 병탄을 노골화하기 시작하자 1908년 분연히 의병에 궐기하여 안규홍 의병부대의 부장이 되어 파청, 진사, 병치, 원봉산전에서 대첩하였으며, 1909년에는 김도규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이를 이끌고 득량면 박골에서 적의 척후대를 유인, 기습하여 대장 등 2명을 사살하고 졸개 수십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 승전을 목격하고 전해들은 고을 사람들은 선생을 '기군대장'이라 부르면서 환호했다. 또한 화순군 동북면 운월치 고개에서 위장 잠복하고 있다가 적군 수색대에 총통을 명중시켜 대장을 즉사케 하고 수십명의 적군에게 중상을 입혔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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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국 기적비
임병국(1882~1957)전라남도 보성(宝城) 출신이다. 당시 보성은 후기 의병운동의 중심지였다. 이곳 의병운동의 양상은 서민이 중심이었다. 즉, 전기 의병운동은 유생들 중심으로 신분차별적 요소가 다분하였으나 후기 의병운동기에 이르러서 서민 출신 의병장의 출현이 있게 된다. 특히 보성에서는 담살이 안규홍(安圭洪)의 의병운동이 구심점을 이루었다. 임병국은 안규홍 의진에 입대하여 좌우익부장(左右翼副將)으로 임명되었다. 임병국은 지도층 인사들과 함께 1908년 2월 이후 파청대첩(巴靑大捷)·진산대첩(眞山大捷)·원봉산전투(圓峰山大捷)에 참가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8월 순천 병치(順天 峙)에서 일군을 공격하여 전과를 올린 후 보성에서의 의병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고흥(高興)·장흥(長興) 등지로 옮겨 활약하였다. 1909년 7월 일군 부석(富石)대위의 의병의 부모 및 형제를 통한 회유공작 등이 주효하여 안규홍 의진은 일단 해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지도층 인사들이 거의 체포되었다. 이후 이 지역에서의 의병운동은 종식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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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 안규홍 박제현 가옥
보성 안규홍과 박제현의 가옥이다. 한말 일제에 항거하고 구국을 위해 헌신한 공로로 머슴과 주인이 함께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것은 유일하다. 호남의병의 대표적 머슴 의병장이었던 안규홍(安圭洪, 1879~1910, 건국훈장 독립장)과 안규홍 의병부대의 운량관이었던 박제현(朴濟鉉, 1871~1909, 건국훈장 애족장)이 함께 살았던 집이다. 안규홍은 보성읍 우산리 택촌마을에서 안달환의 아들은봉 안방준의 10대손로 태어났으나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자 이 집으로 이사 왔다. 안대장이 약 20여 년간 담살이 머슴를 했던 사랑채와 주인이자 고종사촌형인 박제현의 안체가 원형대로 남아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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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인서 사적비
염인서(1863~1910), 이명 염재보는 전남 보성(寶城) 사람이다. 1908년 2월경 안규홍(安圭洪) 의병장이 보성에서 거의(擧義)할 때 그 휘하에 들어가 좌우포장(左右砲將)·좌우익장(左右翼將)이 되어 총으로 무장하고 보성·순천(順天)·동복(同福)·장흥(長興) 등지를 전전하며 일군과 교전을 벌였다. 같은해 4월 6일 동료 의병 30여명과 함께 의병의 이름을 가탁(假託)하여 양민의 재물을 탈취하던 강사문(姜士文 : 龍彦)을 포박, 순천군 문전면(文田面) 고부기산중(古府基山中)에서 총살 단죄하였다. 이어 5월초에는 일진회원(一進會員)으로 일제의 밀정(密偵) 노릇을 하던 염영화(廉永化)를 보성군 봉덕면(鳳德面) 법화촌(法化村) 집에서 역시 총살, 단죄하였으며 12월 17일에도 동복군 내남면(內南面) 주정리(舟町里)에서 양민의 재산을 탈취하던 강모(姜某)를 잡아서 익사시켰다. 이듬해인 1909년 3월 6일에는 역시 양민의 재물을 강탈하던 일진회원 박봉조(朴鳳朝)를 잡아 머리를 난타하여 주살(誅殺)하였고, 9월 4일에도 역시 양민의 재물을 탈취하던 이용서(李用西)를 참살(斬殺)하는 등 주로민간에 폐해를 입히던 일제 앞잡이들을 단죄하는 활동에 주력하였다. 그 뒤 1909년 9월 18일 일경에 붙잡혀 1910년 3월 29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소위 폭동 및 살인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6월 2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어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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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 기념공원
서재필(1864~1951)은 1864년 1월 7일 외가인 보성(寶城)에서 성주이씨(星州李氏)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7살 때 상경, 양외숙인 김성근(根)의 집에서 공부하였으며 1882년 급제(及第)하여 교서관(校書館) 부정자(副正字) 벼슬에 올랐다. 1883년 일본 동경의 육군 호산(戸山)학교에 유학하고 1884년 귀국 후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등과 갑신개혁(甲申改革)을 주도하여 병조참판(兵曹參判) 겸 정령관(正領官)이 되었다. 그러나 개혁의 실패로 부모, 형, 아내는 자살하고 동생은 참형(慘刑)되었으며 어린 아들은 굶어죽는 참변(慘變)을 겪었다. 선생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지금의 워싱턴 대학에서 의학(學)을 공부, 1892년 한국인 최초의 의사(醫師)가 되었다. 1895년 귀국하여 1896년 중추원(中樞院) 고문(顧問)에 임명되었고, 4월 7일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였으며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조직하고 굴욕외교의 상징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獨立門)을 건립하는 등 민족의 자주정신을 고취하였다. 1898년 국내 수구파(守舊派)들의 반대로 다시 미국으로 떠나 문구 및 인쇄업으로 크게 성공하였다. 1919년 3·1운동 소식을 전해듣고 한인회의 개최 및 한국친우회를 결성하고 임시정부(臨時政府) 구미위원회(歐美委員會) 위원장을 맡는 등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전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바쳤다. 그 후 성요셉병원 등에서 임상병리학자로 명성을 떨치다 1947년 미군정의 최고 고문이자 과도정부 특별의정관(特別議政官)으로 귀국하여 통일된 민주국가 건설에 매진하여 국민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았으나 정쟁에 휘말린 시국을 개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1951년 1월 5일 87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정부에서는 그가 독립운동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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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군 독립유공자 추모탑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전남 보성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독립군전투, 대한민국임시정부, 노동운동, 농민운동, 학생운동, 광복군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사단법인 송재서재필기념사업회에서는 위 인물의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2003년 8월 15일 이 탑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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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 집
서재필(1864~1951)은 1864년 1월 7일 외가인 보성(寶城)에서 성주이씨(星州李氏)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7살 때 상경, 양외숙인 김성근(根)의 집에서 공부하였으며 1882년 급제(及第)하여 교서관(校書館) 부정자(副正字) 벼슬에 올랐다. 1883년 일본 동경의 육군 호산(戸山)학교에 유학하고 1884년 귀국 후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등과 갑신개혁(甲申改革)을 주도하여 병조참판(兵曹參判) 겸 정령관(正領官)이 되었다. 그러나 개혁의 실패로 부모, 형, 아내는 자살하고 동생은 참형(慘刑)되었으며 어린 아들은 굶어죽는 참변(慘變)을 겪었다. 선생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지금의 워싱턴 대학에서 의학(學)을 공부, 1892년 한국인 최초의 의사(醫師)가 되었다. 1895년 귀국하여 1896년 중추원(中樞院) 고문(顧問)에 임명되었고, 4월 7일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였으며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조직하고 굴욕외교의 상징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獨立門)을 건립하는 등 민족의 자주정신을 고취하였다. 1898년 국내 수구파(守舊派)들의 반대로 다시 미국으로 떠나 문구 및 인쇄업으로 크게 성공하였다. 1919년 3·1운동 소식을 전해듣고 한인회의 개최 및 한국친우회를 결성하고 임시정부(臨時政府) 구미위원회(歐美委員會) 위원장을 맡는 등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전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바쳤다. 그 후 성요셉병원 등에서 임상병리학자로 명성을 떨치다 1947년 미군정의 최고 고문이자 과도정부 특별의정관(特別議政官)으로 귀국하여 통일된 민주국가 건설에 매진하여 국민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았으나 정쟁에 휘말린 시국을 개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1951년 1월 5일 87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정부에서는 그가 독립운동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