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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삼 순절비
김응삼(1886~1909)은 전남 구례(求禮) 출신으로서 1907년 정미의병(丁未義兵)으로 기의한 고광순(高光洵)의 의진에 입대하였다.1907년 9월 15일 동지 2백 명과 더불어 동복(同福) 순사 주재소를 습격하여 이를 격파하였다. 한편 의병을 소모(召募)하고, 군기(軍器)를 수집하여 전세를 올렸으며, 각지를 전전하며 활동하였다. 1907년 10월 17일 지리산 구례 화개동(花開洞)의 연곡사(燕谷寺)를 본영으로 삼아 그 일대의 적병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광주수비대(光州守備隊)에게 내습을 당하였다. 이때 전군을 2대로 나누어서 적과 교전하였으나 하동(河東) 방면으로부터 다시 적군이 들이닥쳐 의진은 역부족으로 궤멸 당하였다. 이 전투에서 지휘부의 고광순과 고제량이 전사하고, 고광훈은 체포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김응삼 역시 이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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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정사와 봉산사(임현주, 최익현 사당)
오봉정사는 경당 임현주(1858-1934) 선생이 민족정신과 항일정신을 후학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강학소이다. 임현주 선생은 면암 최익현 선생의 문하생으로 태인의 무성서원 의거에 참여한 장수 격인 12인 중의 1인으로 남원, 운봉, 정읍, 태인, 순창, 곡성, 영천 등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병기, 탄환, 군량미 등을 입수, 의병활동을 하였다. 순창에서 일군에 붙잡힌 임현주는 포로가 되어 서울 용산 조선주차사령부로 끌려가 군법재판에 회부된 임현주는 태형 100도에 처해지는 등 극심한 고문을 당하여 반신불수의 몸이 되었다. 석방된 후 면암 최익현이 순국하자 충남 청양군 정산에서 장례를 지내고, 남원에 있는 전 재산을 처분해 1915년 오봉산 기슭에 봉산사(鳳山祠)를 건립하여 면암 최익현 선생을 배향(配享)했다. 또한 이 때 함께 오봉정사를 세우고 후학들에게 민족자존과 항일정신을 심어 후진을 양성하여 여생을 바쳤다. 1934년 임현주 선생이 서거한 후에 제자 270명이 봉산계를 조직하고 매년 음력 3월 15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정부에서는 임현주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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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운동진원기념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직접적인 동기는 1929년 10월 30일 나주에서 광주로 통학하던 한일 학생들이 나주역에서 충돌하면서 비롯되었다. 일본학생들이 한국 여학생들을 희롱하는 모욕적인 행동에 격분한 한국 학생들과의 충돌은 11월 1일까지 지속되었다. 일본인 교사와 경찰의 편파적인 대응에 광주학생들이 격분하여 11월 3일 대규모 학생운동으로 활화산처럼 폭발하여 전국적인 항일 학생독립운동으로 확산되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 6.10만세운동과 더불어 3대 독립운동으로 평가되어,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지정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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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균 묘
김창균(?~1896)은 보훈처 공훈록에는 김창균으로 등록되어 있으며, 이학상(李鶴相) 의진의 좌익장으로 전남 나주(羅州)·보성(寶城) 일대에서 활약하였다.호남지방에서는 1895년 8월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한 을미사변(乙未事變)의 변보(變報)를 전해 듣고 비분강개하여, 기우만(奇宇萬)·기삼연(奇參衍)·고광순(高光洵) 등 유학자들은 원수를 갚고 나라를 구원하자는 의논을 하였다. 이 때 김창균도 비분강개함이 있었지만 거의를 발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해 11월 일제와 친일정권에 의해 단발령까지 강행되자 이에 반발하여 광주의 기우만과 장성의 기삼연이 각기 1896년 3월에 의병을 일으켰다.이 때 김창균은 나주에서 의병진영을 결성하고 주서(注書) 이학상을 의병장에 추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896년 2월 9일 나주고을 아전과 군교 수백 명을 이끌고 관사로 들어가서 참서관 안종수(安宗洙)를 처단하고, 박총순(朴摠巡)·여순검(呂巡檢) 등도 역시 처단한 뒤, 박시찰(朴視察)·복주사(卜主事) 등 여섯 사람을 체포하여 향교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그는 "참서관 및 총순 무리들은 역적의 도당으로서 이제 다 맞아 죽었으니 본 고을의 의병은 처음만 있고 끝이 없어서는 안된다"고 하며 이학상을 추대하여 의진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연리청(椽吏廳)에 창의소(倡義所)를 설치하고 부서를 배정하였는데, 그는 좌익장을 맡고, 참모진은 사인(士人) 나병두(羅秉斗)·전현감 손응설(孫應契), 중군장은 이승수(李承壽), 우익장은 박근욱(朴根郁) 등으로 정하였다. 그리고는 군제를 정하여, 김재환·손상문·장길한·양인환·손신흥·장봉삼은 군무를 맡고, 임홍규·송종희는 서기를 맡고, 유기영은 통장이 되었다.이와 같이 나주의병은 개화파인 참서관 안종수를 처단함으로써 친일정권의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자 관찰사 한기동(韓耆東)은 맨발로 서울까지 도망쳤는데 뒤에 관군을 데려와 의병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896년 5월 5일 전남 보성에서 활동하다가 붙잡혀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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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현 묘
김석현(金晳鉉. ?~1896)은 전남 나주(羅州) 사람이다. 나주 의병장 김창균(金蒼均)의 아들이다. 호남지방에서는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의 변보(變報)를 전해듣고 비분강개하여, 기우만(奇宇萬)·기삼연(奇參衍)·고광순(高光洵) 등 유학자들이 원수를 갚고 나라를 구원하자는 의논을 하였다. 그해 11월 일제와 친일내각에 의해 단발령까지 강행되자 이에 반발하여 광주의 기우만과 장성의 기삼연이 각기 1896년 2월에 의병을 일으켰다. 김창균은 2월 9일 나주고을 아전과 군교 수백 명을 이끌고 관사로 들어가서 참서관 안종수(安宗洙)를 처단하고, 박총순(朴摠巡)·여순검(呂巡檢) 등도 역시 처단한 뒤, 박시찰(朴視察)·복주사(卜主事) 등 여섯 사람을 체포하여 향교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그는 "참서관 및 총순 무리들은 역적의 도당으로서 이제 다 맞아 죽었으니 본 고을의 의병은 처음만 있고 끝이 없어서는 안된다"고 하며 이학상(李鶴相)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다음날 연리청(椽吏廳)에 창의소(信義所)를 설치하고 부서를 배정하였는데, 그는 좌익장을 맡고, 참모진은 사인(士人) 나병두(羅秉斗)·전현감 손응설(孫應楔), 중군장은 이승수(李承壽) 우익장은 박근욱(朴根郁) 등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김재환·손상문·장길한·양인환·손신흥·장봉삼은 군무를 맡고, 임홍규·송종희는 서기를 맡고, 유기영은 통장이 되었다. 나주의병은 개화파인 참서관 안종수를 처단함으로써 친일정권인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김석현은 아버지 김창균과 함께 나주 의병의 핵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나주의병은 전주진위대 중대장 김병욱(金秉旭)부대에 의해 진압되었는데 김석현은 이때 김창균과 함께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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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욱 건국유공비
노병욱(1887~1924)은 전북 임실(任實) 출신으로 이석용 의진(李錫鏞 義陣)에 참여하여 임실·진안(鎭安) 일원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8월 전북 진안에서 거의(擧義)하여 의병대장에 추대된 임실 출신의 유생 이석용은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문인이었다. 이석용은 1908년 9월 성재 기삼연(奇參衍)이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결성하자 종사(從事)로 참여하여 고창(高敞)에서 일본군 병참을 습격하였고, 용담(龍潭)에서는 김동신 의진(金東臣 義陣)과 합세하여 일본군과 접전하기도 하였다. 1908년 9월 임실전투(任實戰鬪)에서 패하여 의병진을 해산하고 유랑하다가 1913년 겨울 임실에서 체포되었다. 1914년 1월 1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공판을 받아 1914년 4월 4일 대구형무소에서 교수되어 순국하였다.이석용의 고향 친구인 노병욱은 임실 지역의 거부(巨富)로 자신은 물론 처가의 재산까지 의병진의 군자금으로 제공하였고, 각처의 부호들에게 군자금을 징발하기도 하였다. 1907년 8월 7일 진안 마이산(馬耳山)에서 이석용 의진에 합류하여 1908년 3월 20일 임실군 성수면(聖壽面) 태평리(太平里) 대운고개에서 일경과 전투를 전개하였다. 또 1908년 음력 4월 11일 전북 전주군 상관면(上關面) 서준보(徐俊甫)의 집에서 그 곳 동장에게 군수품을 갹출(醵出)하였으며, 같은 면의 노동(蘆洞)에서도 동장에게 군수품을 갹출하였다. 뿐만 아니라 4월 15일에는 임실군 상북면(上北面) 사일리(士日里) 김미지(金美旨)에게 ‘엽전 300냥을 기부하라’고 요구하였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1909년 2월 일경에 체포되어 미결상태로 7개월 동안 구금되어 있다가 동년 8월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2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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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욱 구 묘
노병욱(1887~1924)은 전북 임실(任實) 출신으로 이석용 의진(李錫鏞 義陣)에 참여하여 임실·진안(鎭安) 일원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8월 전북 진안에서 거의(擧義)하여 의병대장에 추대된 임실 출신의 유생 이석용은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문인이었다. 이석용은 1908년 9월 성재 기삼연(奇參衍)이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결성하자 종사(從事)로 참여하여 고창(高敞)에서 일본군 병참을 습격하였고, 용담(龍潭)에서는 김동신 의진(金東臣 義陣)과 합세하여 일본군과 접전하기도 하였다. 1908년 9월 임실전투(任實戰鬪)에서 패하여 의병진을 해산하고 유랑하다가 1913년 겨울 임실에서 체포되었다. 1914년 1월 1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공판을 받아 1914년 4월 4일 대구형무소에서 교수되어 순국하였다.이석용의 고향 친구인 노병욱은 임실 지역의 거부(巨富)로 자신은 물론 처가의 재산까지 의병진의 군자금으로 제공하였고, 각처의 부호들에게 군자금을 징발하기도 하였다. 1907년 8월 7일 진안 마이산(馬耳山)에서 이석용 의진에 합류하여 1908년 3월 20일 임실군 성수면(聖壽面) 태평리(太平里) 대운고개에서 일경과 전투를 전개하였다. 또 1908년 음력 4월 11일 전북 전주군 상관면(上關面) 서준보(徐俊甫)의 집에서 그 곳 동장에게 군수품을 갹출(醵出)하였으며, 같은 면의 노동(蘆洞)에서도 동장에게 군수품을 갹출하였다. 뿐만 아니라 4월 15일에는 임실군 상북면(上北面) 사일리(士日里) 김미지(金美旨)에게 ‘엽전 300냥을 기부하라’고 요구하였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1909년 2월 일경에 체포되어 미결상태로 7개월 동안 구금되어 있다가 동년 8월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2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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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토평비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관군이 동학농민군과 싸워 나주성을 지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뉘어 농민운동이 일어나 나주에까지 동학농민군이 쳐들어오게 된 과정, 당시 나주목사 민종렬(閔種烈, 1893.11.25~1895.9.21 재임)이 여러 장령들을 지휘하여 치밀한 방어계획을 세웠던 사실, 그리고 관군과 동학농민군이 나주목에서 싸우는 과정 등을 자세하게 서술하였다. 동학농민군에 반대했던 유림들이 뜻을 모아 세운 것으로 보인다. 비문은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이 짓고 글씨는 송재회(宋在會)가 쓰고 제액 전서는 송재면(宋益勉)이 써서 1895년(고종 32)에 세웠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나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지방의 역사적 사실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여 동학농민혁명의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1990년 2월 24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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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항일학생운동 유적지 표지석(구 금남금융조합 옆)
1892년 11월 27일 나주 오일시장에서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 학생시위대가 북망문을 거쳐 다시 시내로 진입해 시위를 벌이다 진압 당한 곳이다. 일본경찰은 학생시위 당시 광주에서 응원대까지 불러와 학생시위를 진압했고 시위학생들과 그들을 지도했던 항일운동가들은 이곳에서 말할 수 없는 모진 고초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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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항일학생운동 유적지 표지석(구 나주경찰서 앞)
1892년 11월 27일 나주 오일시장에서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 학생시위대가 북망문을 거쳐 다시 시내로 진입해 시위를 벌이다 진압 당한 곳이다. 일본경찰은 학생시위 당시 광주에서 응원대까지 불러와 학생시위를 진압했고 시위학생들과 그들을 지도했던 항일운동가들은 이곳에서 말할 수 없는 모진 고초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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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채 집
박준채(1914 ~ 2001)는 전남 나주(羅州 : 현재 錦城) 사람으로서 광주·나주간을 통학하던 광주고등보통학교 2학년생이던 그는 1929년 10월 30일 하교길에 나주역 입구에서 당시 광주서중 3학년생인 일인 학생 복전수삼(福田修三)·전중(田中) 등이 광주여고보 3학년생 박기옥(朴己玉)·이금자(李錦子)·이광춘(李光春) 등을 희롱하는 것을 목격하고 이에 격분하여 일인 학생들을 불러 힐책하였던 바 이때 일인 학생들은 오히려 모욕적인 언동으로 맞섰기 때문에 이를 응징한 일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곧 광주·나주간 통학생들에게 알려지고, 다음날 한일학생간의 충돌로 확대되었으며, 이는 다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점화로 발전되었다.그런데 이는 단순한 한일학생간의 감정에서 돌발된 것이 아니었고 당시 식민통치하 민족적 감정의 표출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맹휴와 독서회 활동을 통하여 항일민족의식을 고양시켰던 광주학생들은 이를 계기로 민족의식을 결집시켜 1929년 11월 3일에 광주학생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거사가 일어나자 그는 적극 참여 활동하다가 동월 4일에 일경에 붙잡혔고 이로 인하여 광주고보에서 퇴학을 당하였다. 붙잡힌 후 혹독한 심문을 받았으나 1929년 12월에 연소자라는 이유로 기소유예되어 출옥하였다.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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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인 순절비
조정인(1872 ~ 1909)은 전남 나주 사람으로 1907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에 이어서 대한제국군이 강제로 해산되자, 더 이상 일제의 만행과 내정간섭을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의거의 기치를 올렸다.1907년 12월 6일 호남의병장 김태원(金泰元, 金準)·기삼연(奇參衍)과 함께 의병 수백 명을 총기 4백여 정으로 무장시켜 헌병대 및 경찰과 접전을 전개하여 크나큰 전과를 올렸다. 1908년 6월 나주 가산(佳山)에서 의병 심수근(沈守根)과 함께 의병운동에 사용할 탄약을 제조하던 중에 일본 헌병대에 체포당하였다.그후 광주지방에서 소위 내란죄의 주모자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대구복심원에 항소하였으나 기각되고 다시 대심원(大審院)에 상고하였으나 역시 기각되어 1909년 1월 18일 대구 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