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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유도 3.1독립만세 기념비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하순 용유면 남북리에 살던 조명원·조종서·최봉학·문무현 등이 혈성단(血誠團)의 명의로 부근 남북리·거잠리·을왕리·덕교리 등 주민에게 격문을 배포하여 3월 28일 관청리 광장에 150여명의 주민이 모여 태극기를 휘날리며 독립만세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 날 시위에서 조명원(趙明元), 조종서(趙鍾瑞), 최봉학(崔奉學, 1897-1955), 문무현(文武鉉), 김윤배(金潤培), 윤치방(尹致芳), 윤보신(尹寶臣), 류웅렬(柳雄烈, 1897-1940), 오기섭(吳基燮), 구길서(具吉書, 1896-1971), 이난의(李蘭儀, 1885-1957) 등 11명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았다. 인천 덕교동 주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83년 3월 28일 이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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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임시정부 13도 대표자 회의 집결지 표지석
인천 만국공원(현재 자유공원)은 1919년 3월 9일 인천에서의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난 곳이자, 4월 2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13도 대표자 회의가 열린 곳이다. 1919년 3월 7일과 8일 인천부 각지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3월 9일에는 만국공원과 시내에 수백명의 시위대가 모여 독립만세를 외친 후 해산하였다. 만세운동이 한창이던 3월 이교헌, 윤이병, 윤용주, 최전구, 이용구, 김규 등이 이규갑에게 임시정부 수립을 제안하였다. 인천시내 만세운동이 잦아들던 1919년 4월 2일 만국공원에서 홍진, 이규갑, 홍면희, 안상덕 등 13도 대표들은 이날 독립운동의 실효를 거두기 위해 임시정부 수립을 결의하였다. 이 임시정부는 상해 및 노령 대한국민의회와 더불어 3대 임시정부의 하나로서 임시정부 정통성의 근간이 된 한성임시정부이다. 13도 대표들은 임시정부 선포문을 통하여 국민대회 취지를 포고하였다. 따라서 한국이 독립국임과 함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음을 대내외에 알린 것이다. 이때 발표된 정부 주요 인사는 이승만, 이동휘 등 24명이었다. 이후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헌법이 공포되면서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통합하게 되었다. 홍진(1877 - 1946)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법무총장, 외무총장, 한국독립당 중앙감찰위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8월 나라가 일제에 강점당하자 검사직을 사임하고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한 뒤, 1919년 2월까지 독립운동가를 위해 법정투쟁을 계속하였다. 그 해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 가담하여 충청북도 청주군 연락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4월 인천시 만국공원에서 비밀리에 13도 대표들과 국민대회를 열고 한성임시정부를 조직한 뒤 법무차장에 선임되었다. 그 뒤 상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임시의정원의원·법제위원장을 지냈고, 또한 충청북도 충주군 조사위원과 충청도선거위원장으로도 활약하였다. 1921년 4월 상해 대한교민단 단장에 선임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23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에 선임된 뒤 내무총장·외무총장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1926년 7월 국무령에 임명되었고, 9월에는 외무총장까지 겸임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시정 3대 강령을 제시하였다. 1930년 7월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그 당수로서 군민회의의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당군을 한국독립군으로 개편하고 총사령에 지청천을 선출, 항일 중국군과 연합전선을 펴 치열하게 싸웠다. 1932년 일제가 만주국을 세우자 1933년 난징으로 가 산해관 이남과 미주·노령 등지에 흩어져 있는 각 혁명단체들이 하나로 합쳐 항일전선을 펼 것을 절규하였다. 1934년 동삼성에서 조직된 한국독립당과 난징에서 조직된 한국혁명당을 통합하여 신한독립당을 재조직하고 조소앙과 같이 지도하였다. 이어서 미주에 있는 대한독립단동지회·국민회·부인애국단·단합회·애국단 등과 교섭하여 1937년 8월 1일 한국광복진선이 출범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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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영희 동상
길영희(1900 - 1984)는 해방 이후 인천중학교 교장, 제물포고등학교 교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이다. 평안북도 희천출생. 평양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학년 때 3·1운동에 학생대표의 1인으로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다. 경성 의학전문학교에서 퇴학당한 뒤,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廣島高等師範學校)에서 역사를 전공하였고, 1929년 졸업과 함께 귀국, 운동 전력 때문에 공립학교 임용을 거절당하고, 배재고등보통학교와 경신학교에서 10년간 봉직했으나, 1939년 일제의 압박으로 교단을 물러나 농과대학 설립의 꿈을 안고 장기려(張起呂)·박원선(朴元善) 등 동지들과 더불어 인천에서 후생농장을 경영하였다. 광복 후 인천중학교 학부형과 학생 대표들의 요청으로 인천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일본인 중학이었던 인천중학교를 민족교육의 도장으로 바꾸는 한편, 1954년 제물포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을 겸임하였다.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라는 신념 아래 무감독시험, 개가식 도서관 등 독특한 제도를 운영하였고 나라의 선비(國士)를 기르는 자신의 교육철학을 실천하였다. 5·16으로 1962년 인천중 학교·제물포고등학교 교장에서 물러난 뒤, 1969년 충청남도 덕산(德山) 가루실에 가루실농민학원 을 설립, 낙향하여 젊은시절부터 오랜 꿈이었던 농민교육에 헌신하였다. 그의 교육철학은 한국교육이 정치가들의 권력에 의해서가 아닌 교육자들 자치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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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신 기념물
1946년 5월 경찰당국에서 여경찰을 모집할 때 지원 조건은 20세 이상 35세 이하의 나이, 고등학교 졸업 수준의 학력을 요구하였다. 당시 15세 이상 여성 인구 중 중학교 재학 이상 학력을 가진 여성이 2%에 불과하였던 점을 감안하면 당시 여경찰의 학력 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당시의 지식인이자 사회지도층 여성들이 다시 경찰에 입문하는 배경이 되었고, 그 가운데에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도 있었다. 그중 인천여자경찰서 2대 서장인 전창신(1901~1985)은 1919년 3월 함흥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8개월간 옥살이를 한 독립운동가로, 광복 후 1946년 조국치안의 선봉에 서기 위해 경찰이 되었다.1950년 11월 인천여자경찰서장으로 부임하여 1951년 10월 퇴임할 때까지 여성피해자 및 피난민 등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힘썼으며, 특히 경찰애육원을 설치하여 전쟁고아와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여성 보호에 주력하였다.퇴임 후 1981~1983년까지 3.1운동 여성동지회 8대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85년 별세하였다. 1992년 정부는 전창신 경감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고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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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종탑
이 종탑은 1919년 4월 4일 강진독립만세 운동의 신호를 알린 독립만세종으로서 2020년 6월 19일 강진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914년 1월 강진읍 남성리 207번지(현, 강남교회)에 세웠던 것을 1964년 현재의 선전을 건축할 때 종탑도 함께 옮겨와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 제1차 만세운동은 3월 23일이었으나 밀고로 발각되어 김안식, 김영수, 김윤식, 김현상, 김위균, 김성수, 양경천, 양병우, 김만철, 김영호, 김학수, 김계명 등이 구속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2차는 4월 4일 강진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강진의 기독교인과 천도교인들이 주동하여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였는데 이를 강진읍교회 최복삼좌와 박영옥 등이 전달받았다. 만세운동 당일, 강진읍교회 타종 소리를 시점으로 기독교인, 천도교인, 농민, 상인, 학생 등 4천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함성은 하늘은 진동하고 우드봉을 뒤흔드는 성공적인 독립만세운동이었으며, 이기성, 김현본, 황호경, 오승남, 김후식, 김춘석, 오응추, 김제문, 김성수, 박영옥, 강주형, 박일춘, 이은표, 최덕주, 김두현, 차성모, 김재민, 차명진, 전봉진, 김은식, 강주영 등이 구속되고 최복삼 조사는 구타와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강진읍 교회는 매년 4.4 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 때마다 정오가 되면 33번을 타종하여 구국지사들을 투모하고 후손들에게 나라 사랑의 가르침을 일깨워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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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시비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 65-25 군립도서관 앞에 위치한 영랑 김윤식 시인의 시비이다. 영랑 김윤식(1902-1950)은 1902년 12월 18일 강진읍 남성리 김종호의 장남으로 태어나 향리에서 보통교육을 마치고 취문의숙을 거쳐 1919년 강진독립만세운동으로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뤘다. 그후 일본 청산학원 재학 중 동경재지진으로 귀향하여 박용철, 정지용과 시문학지를 간행하여 한국순수 서정시의 개척자로써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시와 같은 불후의 업적을 남겼으며 영랑시집과 영랑시선은 사계의 지표가 되었다. 1948년 한국문총 사무국장과 공보처 출판국장을 역임했고 1950년 9월 29일 당년 49세로 서거하였다. 2018년 정부에서는 김윤식을 건국포장에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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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집(영랑생가)
영랑 김윤식(1902-1950)은 1902년 12월 18일 강진읍 남성리 김종호의 장남으로 태어나 향리에서 보통교육을 마치고 취문의숙을 거쳐 1919년 강진독립만세운동으로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뤘다. 그후 일본 청산학원 재학 중 동경재지진으로 귀향하여 박용철, 정지용과 시문학지를 간행하여 한국순수 서정시의 개척자로써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시와 같은 불후의 업적을 남겼으며 영랑시집과 영랑시선은 사계의 지표가 되었다. 김윤식은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숨겨서 강진으로 내려왔다. 김현상(金炫庠) 등과 정세를 논의하였다. 이후 3월 23일 밤 김현균의 집에서 김현상을 비롯해 김성수(金晟洙) 등과 함께 강진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하지만 3월 26일 이들의 준비와 계획이 강진경찰서(康津警察署)에 발각되어,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5일 광주지방법원(光州地方法院)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해 공소(控所)를 제기하였다. 5월 5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무죄(無罪)’를 선고받았다. 그러자 검사 측에서 다시 상고(上告)를 제기하였다. 6월 9일 서울 고등법원(高等法院)에서 기각되어 무죄가 확정되었다. 이후 1930년대에 「독(毒)을 차고」·「가야금」·「달마지」·「춘향」 등 다수의 민족적인 시(詩)를 발표하여 저항의식을 표출하였다. 2018년 정부에서는 김윤식을 건국포장에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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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릉학교
사립금릉학교(私立金陵學校)는 1906년 강진 유지들의 후원으로 설립되어 1907년 4월 1일 현재 금서당(琴書堂) 자리에서 개교하였고, 1911년 6월 강진공립보통학교로 개편되었다. 1914년 4월 현재 해남세무서 강진지서(강진읍 남성리 108-2) 위치로 이전하였고, 1923년 4월 1일 현재 강진중앙초등학교 위치(강진읍 평동리 235)로 이전하였다. 개교 당시 강진 군수인 조중관이 교장, 조병균이 교감이었고, 이듬해는 방규석이 잠시 교장을 맡기도 하였다. 설립 직후 학생이 100여 명에 이를 만큼 발전하여 언론에 자주 보도되었다. 특히 1907년에는 전국에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에 호응하여 금릉학교에서도 국채보상금릉협성회를 조직하고 모금하여 1차로 1백환을 황성신문사에 기탁하였으며, 당시 『황성신문』에 성금을 낸 교사와 학생들의 명단이 실리기도 하였다. 1919년 강진읍 3·1운동 때 김윤식(김영랑)을 비롯한 이 학교 출신들이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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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3.1운동기념비
강진군 강진읍 예당리에 위치한 기념비이다.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4일 강진읍 장날 이기성·오승남(吳承南)·황호경(黃鎬京)·강주형·박영옥(朴英玉)·김춘석(金春錫) 등의 준비로 1천여명이 장터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다. 이 시위로 강주형(姜宙馨, 18871976), 김제문(金濟文, 18881935), 김후식(金厚植, 18961959), 오승남(吳承南, 18991982), 오응추(吳應秋, 18981969), 이기성(李基性, 18941944) 등이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강진 지역 3·1운동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92년 8월 20일 이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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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4.4독립만세운동터 표지석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4일 강진읍 장날 이기성·오승남(吳承南)·황호경(黃鎬京)·강주형·박영옥(朴英玉)·김춘석(金春錫) 등의 준비로 1천여명이 강진 장터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다. 이 시위로 강주형(姜宙馨, 1887~1976), 김제문(金濟文, 1888~1935), 김후식(金厚植, 1896~1959), 오승남(吳承南, 1899~1982), 오응추(吳應秋, 1898~1969), 이기성(李基性, 1894~1944) 등이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를 기록하기 위해서 장터에 표지석을 세웠다. 2010년 3월 5일 영랑 김윤식 선생의 친필을 집자하여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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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응추 기적비
오응추(1898-1969)는 전남 강진(康津) 사람으로 1919년 4월 4일 강진군 강진읍(康津邑) 장터에서 이기성(李基性)·오승남(吳承南) 등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주민들을 규합, 장터에 모인 1,000여명의 시위군중과 같이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해 4월 15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長興支廳)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여, 5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5월형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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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3.1운동기념비
강진군 강진읍 서성리 산 10번지에 위치한 현충시설로서 일제치하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희생당한 넋을 위로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1919년 4월 4일 26인의 강진 지방 의사와 수천 군중이 일제히 궐기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던 3.1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자 1976년 5월 9일 화응석화강암으로 제작되었다. 당시 이기성, 김후식, 김학수, 김윤식 등 26인의 의사는 실형을 언도 받았다. 강진군에서는 매년 3월 1일 군내 각급 기관 및 단체장, 그리고 다수의 군민들이 이곳에 모여 추념행사를 거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