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아카데미 역사기록 백과사전

만세종탑

유형
기념탑·기념공원·기념관
주소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 42-4

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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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이 종탑은 1919년 4월 4일 강진독립만세 운동의 신호를 알린 독립만세종으로서 2020년 6월 19일 강진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914년 1월 강진읍 남성리 207번지(현, 강남교회)에 세웠던 것을 1964년 현재의 선전을 건축할 때 종탑도 함께 옮겨와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 제1차 만세운동은 3월 23일이었으나 밀고로 발각되어 김안식, 김영수, 김윤식, 김현상, 김위균, 김성수, 양경천, 양병우, 김만철, 김영호, 김학수, 김계명 등이 구속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2차는 4월 4일 강진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강진의 기독교인과 천도교인들이 주동하여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였는데 이를 강진읍교회 최복삼좌와 박영옥 등이 전달받았다. 만세운동 당일, 강진읍교회 타종 소리를 시점으로 기독교인, 천도교인, 농민, 상인, 학생 등 4천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함성은 하늘은 진동하고 우드봉을 뒤흔드는 성공적인 독립만세운동이었으며, 이기성, 김현본, 황호경, 오승남, 김후식, 김춘석, 오응추, 김제문, 김성수, 박영옥, 강주형, 박일춘, 이은표, 최덕주, 김두현, 차성모, 김재민, 차명진, 전봉진, 김은식, 강주영 등이 구속되고 최복삼 조사는 구타와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강진읍 교회는 매년 4.4 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 때마다 정오가 되면 33번을 타종하여 구국지사들을 투모하고 후손들에게 나라 사랑의 가르침을 일깨워 오고 있다.

인물정보

성명
강주형
한자명
姜宙馨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7 ~ 1976
본적
전라남도 강진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4.4 전남(全南) 강진군(康津郡) 강진읍(康津邑) 장터에서 이기성(李基性) 오승남(吳承南) 등과 함께 장날에 모인 다수 군중을 선도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주도하다 피체되어 징역5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계명
한자명
金鷄鳴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902 ~ 미상
본적
전라남도 강진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20

공적개요

1919년 3월 전남 강진군 강진면에서 김윤식(金允植)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 태극기 제작을 위한 비용을 지원하고 직접 제작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무죄를 받음.

인물정보

성명
김두현
한자명
金斗鉉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4 ~ 미상
본적
경상남도 하동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18

공적개요

1919년 9월 경남(慶南) 하동군(河東郡)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 송부할 목적으로 은화(銀貨)와 은메달을 제작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고, 경남(慶南) 통영군(統營郡)에서 김두옥(金斗玉)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법을 협의하였으며, 경남(慶南) 부산(釜山)에서 오재영(吳哉泳)으로부터 ‘‘조선임시정부(朝鮮臨時政府) 13도(道) 총감부’(總監部’)’ 명의의 사령서(辭令書)와 유고문(諭告文)을 전달받고 군자금 모금에 종사하고, 김덕봉(金德峰)으로부터 『독립신문(獨立新聞)』과 경고문(警告文) 등을 받아 강우석(姜佑錫)에게 배포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음.

김두현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만철
한자명
金萬哲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901 ~ 1948
본적
전라남도 강진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20

공적개요

1919년 3월 전남 강진군 강진면에서 김윤식(金允植)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 태극기 제작을 위한 비용을 지원하고 직접 제작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무죄를 받음.

인물정보

성명
김성수
한자명
金成洙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01 ~ 1965
본적
제주도 기타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05

공적개요

1918년 10월 6, 7일 제주 법정사 신도로 김연일(金蓮日) 등과 함께 서귀포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해 방화․파괴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음.

인물정보

성명
김성수
한자명
金成洙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01 ~ 1965
본적
제주도 기타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05

공적개요

1918년 10월 6, 7일 제주 법정사 신도로 김연일(金蓮日) 등과 함께 서귀포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해 방화․파괴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음.

인물정보

성명
김영수
한자명
金榮守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1 ~ 미상
본적
미상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13

공적개요

1919년 3월 함북(咸北) 성진군(城津郡) 성진면(城津面)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징역 6월, 벌금(罰金) 30원(圓), 노역(勞役) 30일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영호
한자명
金英鎬
운동계열
만주방면
생몰년도
1907 ~ 1931
본적
함경북도 명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11

공적개요

1928년 중국(中國) 길림성(吉林省) 용정(龍井)에서 재동만청년총동맹(在東滿靑年總同盟)의 상무서기(常務書記)로 활동하고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 동만도(東滿道) 용정군(龍井郡) 간부로서 표현단체인 근북회원(槿北會員)을 지도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을 받고 복역 중 폐병으로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출옥하여 1931년 3월 21일 사망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윤식
한자명
金允植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02 ~ 1950
본적
전라남도 강진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2018

공적개요

1919년 3월 25일 전남(全南) 강진군(康津郡) 강진면(康津面) 장날에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김현상(金炫庠), 김현균(金玄均) 등과 함께 태극기를 만드는 등 준비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복심법원과 고등법원에서 무죄(無罪)를 받음. 1930년대 「독(毒)을 차고」, 「가야금」, 「달마지」, 「춘향」 등의 시를 발표하여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해 저항의식을 표출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함.

인물정보

성명
김재민
한자명
金在珉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86 ~ 1910
본적
전라남도 광주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1

공적개요

1909.4월~5월 전남(全南) 광주군(光州郡) 일대(一帶)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활동(活動)하며 군자금(軍資金)을 모집(募集)하고 밀고자(密告者)를 응징(膺懲)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제문
한자명
金齊文
운동계열
노령방면
생몰년도
1896 ~ 1923
본적
평안북도 선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02

공적개요

러시아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21년 6월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을 겪은 후 러시아 적군(赤軍)에게 체포되어 이르크츠크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순국(殉國)한 사실(事實)이 확인(確認)됨.

인물정보

성명
김춘석
한자명
金春錫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902 ~ 미상
본적
전라남도 강진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22

공적개요

1919년 4월 3일 전남 강진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사용할 독립가 20매를 등사하고, 다음 날 강진시장에서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되어 징역 5월, 집행유예 2년을 받음.

인물정보

성명
김학수
한자명
金學秀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미상 ~ 1909
본적
미상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2003

공적개요

강원도(江原道) 회양(淮陽) 등지(等地)에서 김억석(金億石)의 엽수장(獵手長)으로 활동하다 1909. 6. 10 평강 수비대(平江守備隊)의 공격을 받고 전사 순국(戰死殉國)한 사실(事實)이 확인됨.

김학수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현봉
한자명
金玄鳳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82 ~ 1909
본적
미상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2003

공적개요

1907년부터 이진룡 의진(李鎭龍義陣)의 상등병(上等兵) 등으로 황해도 일대에서 활동하였으며, 1909. 9. 2 황해도(黃海道) 평산군(平山郡) 문구면(文區面)에 정찰하러 왔다가 일병(日兵)에 체포된 후 동월 8일 일병(日兵)의 강요로 황해도 서흥(瑞興)의 의병근거지에 갔다 돌아오던 중 탈출하였으나 일병(日兵)의 발포(發砲)로 피살(被殺) 순국(殉國)한 사실(事實)이 확인됨.

김현봉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후식
한자명
金厚植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07 ~ 1961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2000

공적개요

1931. 7월 중순경 경북(慶北) 안동군(安東郡) 임하면(臨河面) 천전동(川前洞) 임하 청년동맹 지부(臨河靑年同盟支部) 회관(會館)에서 안상윤(安相潤)의 권유로 한국(韓國)의 독립과 공산주의 사회 실현을 목적으로 한 안동(安東) 콤그룹에 가입하고 동지획득 등을 위해 활동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執行猶豫) 4년을 받고 1년 1월여(月余)의 옥고(獄苦)를 치름.

인물정보

성명
박영옥
한자명
朴英玉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8 ~ 미상
본적
전라남도 강진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20

공적개요

1919년 4월 전남 강진군(康津郡) 강진면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사용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무죄를 받음.

인물정보

성명
박영옥
한자명
朴英玉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8 ~ 미상
본적
전라남도 강진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20

공적개요

1919년 4월 전남 강진군(康津郡) 강진면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사용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무죄를 받음.

인물정보

성명
박일춘
한자명
朴一春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902 ~ 미상
본적
전라남도 강진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21

공적개요

1919년 4월 4일 전남 강진군 강진면 강진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군중을 주도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태 90도를 받음.

인물정보

성명
오응추
한자명
吳應秋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8 ~ 1969
본적
전라남도 강진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 4. 4 전남(全南) 강진군(康津郡) 강진읍(康津邑) 장터에서 이기성(李基性) 오승남(吳承南) 등과 함께 장날 모인 다수(多數)군중을 선도(先導)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주도(主導)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5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기성
한자명
李基性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4 ~ 1944
본적
전라남도 강진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4. 4 강진(康津) 3.1 운동에 참가 1919. 5. 21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징역 2년형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은표
한자명
李殷杓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8 ~ 1987
본적
전라남도 강진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20

공적개요

1919년 4월 4일 전남 강진군 강진면 강진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이기성(李基性) 등과 함께 군중을 주도하며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태 90도를 받음.

인물정보

성명
최덕주
한자명
崔德柱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6 ~ 1967
본적
전라남도 강진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16

공적개요

1919년 4월 4일 전남(全南) 강진군(康津郡) 강진면(康津面) 강진시장(康津市場)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군중들에게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 등을 나누어주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등 활동하다 체포되어 태(笞) 90도(度)를 받음.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