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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기념탑
3.1독립운동기념탑은 일본 제국주의의 잔혹한 식민통치로부터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전개된 3.1독립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ㆍ발전시켜 널리 국민들의 호국애족정신을 고양하고자 온 겨레의 정성을 모아 중구 장충동 남산공원에 건립되었다.199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제50주년 기념일에 착공하여 3.1독립운동 80주년 기념일인 1999년 3월 1일 준공하였으며, 탑의 높이가 19m 19cm로 이는 3.1독립운동의 거사일인 1919년을 의미한다. 3.1독립운동은 세계 최초의 비폭력 평화운동이며 세계 최초의 천도교ㆍ기독교ㆍ불교의 종교연합운동으로 중국의 5ㆍ4운동, 인도의 무저항운동을 비롯하여 전세계 비폭력 평화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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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당기념관
조만식(1883 - 1950)은 일제강점기 조선물산장려회 회장, 신간회회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고당(古堂). 평안남도 강서 출신. 1883년 2월 1일 출생. 아버지는 조경학(曺景學)이며, 어머니는 진강 김씨(鎭江金氏)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수학하고 15세에부터 22세까지 평양성 내 상점에서 일하며 소년시절을 보냈다. 23세에 평양 숭실중학(崇實中學)에 입학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를 거쳐 1910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에 입학하였다. 유학 중 백남훈(白南薰) · 김정식(金貞植)과 함께 장로교 · 감리교연합회 조선인교회를 설립하였고, 간디(Gandhi, M. K.)의 무저항주의주3에 심취하여 민족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1913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평안북도 정주에 동지인 이승훈(李承薰)이 설립한 오산학교(五山學校)의 교사가 되었으며, 2년 후인 1915년 교장이 되었다. 1919년 교장직을 사임하고 3 · 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잡혀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오산학교 교장으로 복귀하였으나 일본관헌의 탄압으로 제대로 재직하지 못하고 평양으로 돌아가 1921년 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에 취임하는 한편,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의 장로가 되었다. 이 무렵 알게 된 평생의 심우(心友) 오윤선(吳胤善)과 함께 1922년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를 조직, 그 회장이 되어 국산품애용운동을 벌였다. 1923년 송진우(宋鎭禹) · 김성수(金性洙) 등과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발기하여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를 조직하였으나 일제탄압으로 실패하였고, 숭인중학교(崇仁中學校) 교장을 지내다가 1926년 일제에 의해 강제 사임당하였다. 1924년 신간회(新幹會)에 참여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활동이 좌절되었다. 1930년 관서체육회(關西體育會) 회장으로 민족지도자 육성에 이바지하였고, 1932년 조선일보사 사장에 추대되어 언론을 통하여 민족의 기개를 펴는 데 앞장섰다. 1936년 전국적인 민족정신 앙양운동의 일환으로 평양에서 을지문덕장군수보회(乙支文德將軍修保會)를 설립하였다. 이 무렵에 평양조선인사회의 유일한 공회당이었던 백선행기념관(白善行記念館)을 개설하고 인정도서관(仁貞圖書館)을 세웠다. 1943년 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협조를 간청해온 재조선군일본인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의 면담요청을 거절하여 한때 구금당하였다. 광복 직후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위원장이 되었다. 소련군정당국이 그들이 만든 최고행정기관인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거절하였다. 1945년 11월 3일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다. 이 조선민주당을 통하여 북한에서 반탁운동을 전개하다가 1946년 1월 5일 소련군에 의해 고려호텔에 연금당하였다. 그 뒤 생사가 분명하지 않은 가운데 1950년 6 · 25전쟁 직전 평양방송이 그와, 체포된 간첩 김삼룡(金三龍) · 이주하(李舟河)의 교환을 제의하였다. 공산군의 평양철수시 그들에 의하여 총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평생을 기독교정신의 실천가로서 생활하였고, 일제에 대하여는 비폭력 · 무저항 · 불복종의 간디즘으로 대항하였다.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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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주 집(정동제일교회)
이필주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경기도 고양(高陽) 출신이며, 기독교(基督敎)인이다. 선천적인 무인 기질로서 20세에 한말(韓末) 군대에 입대, 단시일에 승진하여 장교로서 8년간 복무하였다. 1907년(융희 1)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군대생활을 청산하고, 남대문에 있는 상동(尙洞) 예배당의 전덕기(全德基) 목사를 중심으로 한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에 가입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주권이 완전 상실되자, 통분하여 일주일간 단식하고 두문불출하였다. 그 후 종로 청년회관(y.m.c.a.)의 초대 체육교사로 재직하다가 상동 공옥소학교(尙洞攻玉小學校) 체육교사로 취임하여, 애국정신과 광복의 큰 뜻을 청소년에게 가르쳤다. 또 모범적인 기독교 신자로서 미신타파와 신분차별의 배격 등 신생활 운동도 전개하였다. 그 후 신학교(神學校)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정동교회(貞洞敎會)에서 목자생활을 하며 조국독립에 대한 이상을 품고 이상재(李商在)·최병헌(崔炳憲)·최성모(崔聖模)·오화영(吳華英)·신홍식(申洪植)·박동완(朴東完)·오정도(吳貞道)·현 순(玄楯) 등과 자주 만나 친분을 두터이 하였다. 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이 거의 구체화되던 1919년 2월 27일 자기의 집에서 이인환(李寅煥)·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함태영(咸泰永)·김창준(金昌俊)·신석구(申錫九)·오화영·최성모·박동완 등의 기독교측 대표들과 만나 함태영이 최 린(崔麟)으로부터 가져온, 최남선(崔南善)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서류의 초안을 회람하고, 기독교측의 민족대표로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기로 하였다. 28일 밤에는 재동(齋洞)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최종적으로 독립운동 전개에 따른 계획을 검토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孫秉熙) 등과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서울의 여러 교회에서 종교활동과 육영사업에 힘쓰다가, 말년에는 수원 남양교회(南陽敎會)를 맡아보면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하는 등 일제에 항거하다가 병사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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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여성상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면서 남녀 학생들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친 서울 중구 정동 거리에 항일여성을 표현한 동상이 설치됐다. ‘거사 전야’는 한복을 입은 여학생이 등불을 비추고, 교복을 착용한 다른 여학생이 독립선언서를 찍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동상 건립위원회는 취지문에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는 독립투쟁에 여성은 남성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며 “항일여성들은 자주독립 의지를 일깨우는 교육사업과 계몽운동, 문화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였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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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억 집 터
남궁억(1863 - 1939)는 일제강점기 황성신문 사장, 대한협회 회장, 배화학당 교사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교육자, 언론인이다. 본관은 함열(咸悅). 자는 치만(致萬), 호는 한서(翰西). 서울 출신. 아버지는 도사(都事) 남궁영(南宮泳)이다. 1884년(고종 21) 영어학교인 동문학(同文學)을 수료하고 해관(海關)의 견습생으로 있다가, 1886년(고종 23) 내아문(內衙門) 부주사(副主事)가 되었다. 1887년 전권대신 조민희(趙民熙)의 수행서기관으로 영국 · 러시아 · 독일 순방길에 올라 홍콩까지 갔으나, 청나라주1의 간섭과 방해로 2년간 홍콩에서 머물다가 소환되어 돌아왔다. 1889년 궁내부(宮內府)별군직(別軍職)을 거쳐, 1893년 칠곡군수를 지냈다. 1894년 갑오개혁 내각에 내부 토목국장으로 중용되어 서울 종로와 정동 일대 및 육조 앞과 남대문 사이의 도로를 정비하고 파고다공원을 세웠다. 1896년 2월 아관파천 후에 관직을 사임하고, 그 해 7월 서재필(徐載弼) · 이상재(李商在)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 중앙위원 · 서기 · 사법위원 · 평의원 등에 선출되는 등 고위급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독립협회 기관지인 『대조선독립협회회보(大朝鮮獨立協會會報)』의 발행에도 참가하였다. 1898년 9월 나수연(羅壽淵) · 유근(柳瑾) 등과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 국민 계몽과 독립협회 활동을 지원하는 데 힘을 쏟았다. 대한제국의 정치체제를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개혁, 의회를 설립하고 대대적 개혁을 단행하려는 독립협회운동 지도자로 활동하다, 1898년 11월 17명의 지도자와 함께 붙잡혔다. 독립협회가 해산당한 뒤인 1900년 7월 『황성신문』에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분할설을 외국 신문에서 옮겨 실어,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 침략 야욕을 폭로하고 경각심을 촉구하는 논평을 실었다가 경무청에 구금되었다. 1902년 5월에도 『황성신문』에 일본이 1894년 동학농민운동 이래 우리나라를 침략해 들어오면서 러시아와 맺은 러 · 일협정의 침략적 성격을 논박한 사설을 실었다. 이 사건으로 총무 나수연과 함께 다시 경무청에 구속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4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1903년 영관(領官)을 지낸 유동근(柳東根)이 『황성신문』 사장 남궁억과 총무 나수연이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朴泳孝) 등과 공모,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였다고 모함하였다. 이 때문에 다시 경무청에 구속되었으나, 진상이 밝혀져 4개월 뒤에 석방되었다. 출옥한 뒤 황성신문 사장직을 사임하였다. 1905년 3월 고종의 간곡한 요구로 다시 관직을 맡아 성주목사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 해 11월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을 참지 못하고 사임한 뒤 귀경하였다. 1906년 2월 다시 양양군수에 임명되자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 7월 양양의 동헌 뒷산에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설립하고 구국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년 일본이 헤이그특사사건을 구실삼아 고종을 강제 양위시키고 정미칠조약주2을 체결,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관직을 사임하고 상경하였다. 1907년 11월 권동진(權東鎭) · 여병현(呂炳鉉) · 유근 · 이우영(李宇榮) · 오세창(吳世昌) · 윤효정(尹孝定) · 장지연(張志淵) · 정운복(鄭雲復) · 홍필주(洪弼周) 등과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창립하고 회장으로 취임,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기관지로 『대한협회월보』와 『대한민보』를 발행하였다. 1908년 4월 강원도 지방의 애국계몽운동단체로 관동학회(關東學會)를 창립해 회장으로 활동하며, 교육구국운동 잡지로서 『교육월보』를 발행하였다. 1910년 8월 일본이 우리나라를 병탄하자 새세대 교육현장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 그 해 10월 배화학당(培花學堂) 교사가 되었다. 1912년에는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 원장을 겸하면서 독립사상 고취, 애국가사 보급, 한글서체 창안 및 보급에 힘썼다. 1918년 건강이 악화되어 친지들의 권고에 따라 선조의 고향인 강원도 홍천군 서면 보리울[牟谷]로 낙향하였다. 1919년 9월 모곡학교(牟谷學校)를 설립한 뒤 학교 안에 무궁화 묘포를 만들어 나라꽃인 무궁화를 전국에 보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애국적 찬송가를 만들어 전국의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들에 보급하였다. 1933년 11월 기독교 계열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십자당(十字黨)을 조직, 활동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8개월간 투옥되었다. 노령이 참작되어 석방되었으나 일본 경찰로부터 받은 잔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사망하였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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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사 표지석
『독립신문』은 1896년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이다. 국문판과 영문판으로 구성되었다. 계몽적 신문의 필요성을 인식한 서재필과 유길준, 개화파 내각의 합작으로 탄생했다. 거액의 정부 예산이 지원되어 1896년 4월 7일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근대민족주의·민주주의·자주화 근대화 사상을 강조하며 국민을 교육·계몽하는 일에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독립협회가 수구파정부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하면서 위기에 봉착했다. 결국 정부의 매각 강요에 굴복해 1899년 12월 4일자 신문을 끝으로 종간했다. 정부는 신문사 매수 후 속간을 약속했다가 영구 폐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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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진, 이위종 집
이위종(1887 - 미상)은 일제강점기 헤이그특사로 파견된 독립운동가이다. 주러시아 한국공사 이범진(李範晋)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7세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유럽 각국을 순회했으며,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 외국어가 유창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에 의하여 외교권이 박탈되어 각국에 있는 한국공사관이 폐쇄되고 주재 공사에게는 철수령이 내렸으나, 주 러시아 한국공사 이범진은 2등참사관으로 일하고 있는 아들 이위종과 함께 철수하지 않고 러시아 수도 페테르부르그에 체류하였다. 1907년 6월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세계 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있자, 서울에서는 이 회의에 한국대표를 참석시켜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하고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기 위하여 정사(正使)에 이상설(李相卨), 부사(副使)에 이 준(李儁)과 이위종 등 세 밀사를 임명하였다. 이준은 황제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가지고 1907년 4월 21일 서울을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톡에 가서 이미 1년 전에 망명해 와 있는 이상설과 만나 합류하고 함께 페테르부르그에 가서 이위종을 만나 세 밀사의 진용을 갖추었다. 세 밀사는 러시아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하고 협조를 요청하였으며 1907년 6월 25일 경 헤이그에 도착하여 한국 대표로서 공식으로 회의장에 참석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활동에는 프랑스어와 영어에 유창한 이위종이 교섭과 문서 작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일본대표와 영국대표의 방해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으며, 열강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반면에 신문기자들과 네덜란드의 현지 여론은 한국대표들의 활동에 호의적인 인사들도 있었다. 이에 일제의 한국 침략을 폭로 규탄하고 「을사조약」의 무효임을 알리는 공고사(控告詞)를 이상설 이 준 이위종 등 세 특사의 연서로 작성하여 6월 27일 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들에게 제출하는 한편, 신문을 통하여 이를 공표해서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다. 프랑스어로 된 이 장문의 공고사와 그 부속문서의 프랑스어 본은 이위종이 작성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위종은 7월 9일에 열린 각국신문 기자단의 국제협회(國際協會)에서 프랑스어로 「한국을 위한 호소(a plea for korea)」란 강연을 하여,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은 일본이 무력으로 위협하여 강제 체결된 것으로 무효이며, 한국의 국민과 황제는 한국의 독립과 세계 평화를 열망하고 있으므로 세계가 한국독립에 협조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 회합에는 각국대표와 이름 있는 언론인 및 각국 수행원들까지 광범위하게 참석했는데, 이위종의 연설은 모든 참석자들로 하여금 감명과 찬사를 금치 못하게 했다. 그 결과 즉석에서 한국의 입장을 동정하는 결의안을 만장의 박수로서 의결하게 까지 하였다. 이위종의 이 강연의 성과는 당시 헤이그에서 발행되던 신문인 『헤이그신보(haagsche courant)』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국제여론의 환기에 상당히 큰 작용을 하였다. 밀사들은 투숙한 호텔정문에 태극기를 걸고 열성적으로 활동하다가 밀사 중의 이 준이 7월 14일 순국하였다. 이위종은 이상설을 따라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을 순방하고 러시아로 돌아가서 군정부(軍政府)와 권업회(勸業會)에 참가하는 등 구국운동에 생애를 바쳤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범진(1852 - 1911)은 1879년(고종 1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1887년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部事)가 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친로정책을 표방할 때, 친로파에 가담하여 농상공부협판(農商工部協辦)으로 대신서리가 되었으나 명성황후시해사건 후에 사임하였다. 1895년 11월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을 주도하였으나 실패하여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이듬해 귀국하여 아관파천을 일으켜 김홍집(金弘集) 등을 몰아내고 친러내각을 성립시키고 법부대신 겸 경무사가 되었다. 이후 1897년에 자원하여 주미공사로 가서 외교에 노력하였다. 1900년에는 주러시아공사로 전임되어 독일 · 오스트리아 · 프랑스 공사를 겸임하였다. 그런데 주러시아공사로 있을 때 러시아의 용암포(龍巖浦) 조차(租借) 요구에 대해 대한제국정부가 승인한다는 공문이 도착하자, 용암포 조차를 강경하게 반대하며 공문을 러시아정부에 전달하지 않아 파면되었다. 그 뒤 서리공사 김인석(金仁錫)이 공문을 러시아에 전달하면서 복직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외교권 등 국권을 박탈한 다음 각국 주재 한국공사들을 소환하자 이에 불응하였다. 그리고 양국 황제의 밀사(密使)의 명목으로 러시아 수도 페테르스부르크에 체류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07년 헤이그만국평화회의주1에 고종이 파견한 밀사 이상설(李相卨) · 이준(李儁) 등이 페테르스부르크에 도착하자, 그들과 협의하여 고종의 친서를 작성하고 아들 이위종(李瑋鍾)을 밀사의 일원 겸 통역으로 동반하게 하였다. 그리고 러시아 황제에게 후원을 요청하여 밀사들이 러시아 호위병의 보호를 받아 헤이그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또한 러시아대표의 알선으로 각국 신문기자들에게 한국밀사들이 연설할 기회를 만드는 등 헤이그밀사 파견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1908년 연해주에서 이범윤(李範允)이 의병을 조직할 때 지원금을 보냈다. 보냈다. 1910년 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못이겨 1911년 1월 권총으로 자살을 기도했고 실패하자 목을 매 자결하였다. 1912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한민학교(韓民學校)가 양옥 대건물로 신축해 다시 개교할 때 유지로 남겼던 1,000루블의 거액이 기금으로 쓰였다. 1963년에 대통령표창이,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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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탁 흉상
양기탁(1871~1938)은 1896년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1898년에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간부로 적극적 활동을 하다가, 그 해 말 독립협회가 강제해산될 때에는 한때 체포되기도 하였다. 독립협회 해산 후에는 선교사의 알선으로 3년간 일본과 미국을 여행하여 견문을 넓히었다. 1902년에 이상재(李商在) 민영환(閔泳煥) 이 준(李儁) 이상설(李相卨) 이동휘(李東輝) 등과 개혁당(改革黨) 운동에 참가하였다. 1904년에 일제가 러 일전쟁을 일으키고 일본군을 한국에 상륙시켜 내정에 간섭하면서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이를 반대하는 보안회(輔安會) 운동에 참가했고, 보안회가 해산 당하자 이상설 이준 등과 함께 그 후속단체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의 지방부장의 책임을 맡아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요구를 저지하는데 성공하였다. 1904년 7월에 영국인 베델(earnest thomas bethell)과 합작하여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창간하였다. 당시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사장은 영국인 베델이 맡고, 총무를 양기탁이 맡았으나 실제로는 양기탁이 신문사를 총지휘하였다. 처음에는 1896년의 『독립신문』의 모범을 따라 1일 6면에 국문전용의 한글판과 영문판을 같이 수록하여 발간하다가, 1905년 8월 11일부터 국문판은 국한문혼용의 『大韓每日申報』로 바꾸고 영문판은 별도로 『korea daily news』라는 제호로 나누어 발행했으며, 뒤에 1907년 5월 7일부터 국문전용판으로서 『대한매일신보』를 역시 별도로 발행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공식적으로 사장이 외국인(영국인) 이었으므로 일제통감부의 「신문지법」에 의한 검열을 받지 않고 발행할 수 있었다. 이 점을 활용하여 양기탁은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를 규탄하는 격렬한 필봉을 휘두르고 「을사조약」의 파기를 요구했으며,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쓴 논설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을 즉각 전재하고 영문판 『korea daily news』에도 영어로 번역 게재해서 세계에 알리었다. 특히 양기탁은 『대한매일신보』에서 의병운동을 상세히 보도하여 애국운동으로 높이 평가하고 의병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당시 다른 신문들은 일제의 「신문지법」의 제약 때문에 의병운동을 보도하지 못하거나 보도하는 경우에는 「폭도」라고 표현하여 비난하면서 보도하는 실정이었다. 오직 양기탁이 제작하는 『대한매일신보』만이 「의병」이라고 당당하게 호칭하면서 이를 국권회복운동으로 높이 평가하고 지원하였다. 이 때문에 양기탁이 제작하는 『대한매일신보』는 애국계몽운동 뿐만 아니라 의병운동의 대변지까지 되어 이 시기의 모든 국권회복운동의 중심적 언론기관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1월에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일어나자, 이를 적극 지지하고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대한매일신보사 안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國債報償志願金總合所)를 개설하여 그 총무를 맡았다. 일제는 『대한매일신보』의 국권회복운동으로 양기탁을 극도로 증오하고 있었는데 국채보상운동까지 전국화하므로 이를 탄압하기 위하여 그를 근거도 없이 국채보상의연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하였다. 그러나 터무니없는 날조가 오래 갈 수는 없어서 대한매일신보 사장 베델이 법정에 서서 공소사실이 허위조작된 것임을 과학적으로 증거를 들어 부인함으로써 결국 양기탁은 무죄로 석방되었다. 1907년 4월에 안창호(安昌浩) 전덕기(全德基) 이회영(李會榮) 이동휘(李東輝) 이동녕(李東寧) 이 갑(李甲) 유동열(柳東說) 최광옥(崔光玉) 노백린(盧伯麟) 조성환(曺成煥) 등 동지들과 함께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新民會)를 창립하여 총감독을 맡았다. 신민회는 전국의 주도적 애국계몽운동가 800여명을 입회시키어 한말 애국계몽운동을 실질적으로 배후에서 모두 지도하고 발전시켰다. 신민회의 본부를 대한매일신보사 안에 두고 전국적으로 신민회의 국권회복운동을 지도하고 지휘하였다. 일제의 병탄이 가까워 오자 1909년 봄에 그의 집에서 신민회 전국간부회의를 개최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최고전략으로서 독립전쟁전략(獨立戰爭戰略)을 채택함과 동시에 그의 실천을 위하여 만주에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독립군기지를 창건하고 독립군(獨立軍)을 양성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하여 1910년 8월에는 자신이 직접 독립군기지 후보지를 물색하기 위하여 만주를 답사했으며, 1910년 12월에는 이동녕 이회영 등을 출발시키어 결국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는데 성공하였다. 일제는 황해도에서 안명근(安明根)의 군자금 모금사건이 일어나자 양기탁 등의 독립군기지 창건운동과 국권회복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1911년 1월 양기탁 등 16명을 체포하여 투옥하였다. 또한 신민회를 탄압하고 해체하기 위하여 1911년 9월에는 신민회가 일제 총독 사내정의를 암살하려고 기도했다는 소위 「사내총독암살음모사건(寺內總督暗殺陰謀事件)」이라는 것을 날조하여 신민회 회원 800여명을 체포하고, 그 중 105명에게 실형을 선고했으며 양기탁에게는 최고형인 징역 10년을 선고하였다. 양기탁 등은 완강한 공판투쟁을 전개하여 항소심에서 징역 6년을 확정 받고 4년간 옥고를 치렀다. 석방 후 1916년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위한 동지규합에 노력하다가 중국 천진(天津)에서 또다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고국으로 압송되어서 2년간의 유배(거주제한)에 처하여졌다. 1919년 3·1운동 후 1920년 4월에 『동아일보(東亞日報)』가 창간되자 언론계의 원로로서 유 근(柳 瑾)과 함께 그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21년 미국의원단이 서울에 오자 일제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독립요청서를 제출하여 다시 일제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며, 복역 중 어머니 인동 장씨의 별세로 일시 가출옥된 것을 이용하여 거듭 망명을 결행해서 만주로 갔다. 1923년에 편강렬(片康烈)·남 정(南正) 등 동지들과 함께 독립군단체로서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하였는데 의성단은 봉천(奉天)의 만철(滿鐵) 병원을 습격하는 등 장춘선(長春線)일대에서 활약한 용감한 독립군 단체였다. 1925년 1월에는 김동삼(金東三) 등 동지들과 함께 의성단, 길림주민회, 광정단(匡正團), 대한군정서 등을 통합하여 독립군단체로서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였다. 1926년 4월에는 정의부의 대표로서 소련에서 돌아 온 주진수(朱鎭洙), 천도교 혁신파인 고려혁명위원회의 김봉국(金鳳國), 형평사(衡平社)의 이동구(李東求) 등 다수의 동지들과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조직하여 그 위원장(당수)이 되었다. 고려혁명당은 주로 정의부의 무장투쟁을 지원하였다. 양기탁은 임시정부의 국무령 또는 주석으로 몇 차례 추대되었으나 거절해 오다가 1933년 10월에 국무령(국무위원)에 취임하여 1935년 10월까지 2년간 임시정부의 대표로 있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1937년에는 조선혁명당의 대표로서 한국국민당 및 한국독립당과 연합하여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하였다. 이렇게 조국광복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던 중 1938년 중국 강소성(江蘇省) 담양현(潭陽縣) 고당암(古堂庵)에서 병으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독립운동에 끼친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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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민관폭파의거터 표지석
부민관폭파의거는 1945년 서울 부민관(府民館)에서 친일단체 대의당(大義黨)이 개최한 아세아민족분격대회(亞細亞民族憤激大會)장에, 조문기(趙文紀) 등 애국 의사들이 폭탄을 설치, 일제 고위간부와 친일 민족반역자들의 제거를 기도한 의거이다. 1945년 5월 일제의 단말마적인 탄압정책과 수탈에 대항하기 위해 20세 안팎의 조문기·유만수(柳萬秀)·강윤국(康潤國)·우동학(禹東學)·권준(權俊) 등은 서울 관수동유만수 집에서 비밀결사 대한애국청년당(大韓愛國靑年黨)을 조직하였다. 이들 애국청년당원들은 일제의 고위간부나 친일파를 제거, 민족의 정기를 드높이고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마침 친일파의 거두 박춘금(朴春琴)이 대의당을 조직하고 일제에 대한 충성을 맹세함과 동시에 태평양전쟁에서 아시아민족의 전쟁 수행을 강조하기 위해, 7월 24일서울 부민관에서 아세아민족분격대회를 개최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이들은 대회에 참석하는 일제 고위간부와 친일도배들을 한꺼번에 폭사시키고자 부민관대회장의 폭파계획을 수립하였다. 애국청년당원들은 수차에 걸친 비밀회의를 통해 폭파계획에 만전을 기하며, 유만수가 서울 수색변전소(水色變電所) 작업장에서 입수한 다이너마이트를 가지고 폭탄 2개를 제조하였다. 이렇게 만든 사제폭탄 2개를 휴대하고 대회 전날 밤 자정이 지난 뒤, 부민관 뒷담을 넘어 부민관에 들어가 무대 뒤에서 화장실로 통하는 통로에 폭탄을 장치하고 거사시간만 기다렸다. 24일 저녁 주최자인 박춘금을 비롯해 조선총독·조선군사령관 등 일제 총독부 고관과 중국측 대표 정원간(丁元幹)·정유간(鄭維幹), 만주국 대표 강춘전(康春田), 일본측 대표 다카야마(高山虎雄) 및 국내 친일파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대회가 진행되었다. 주최자인 박춘금이 등단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위한 매국매족의 궤변을 토하고 있던 순간, 요란한 폭음소리와 함께 장내가 수라장으로 변하였다. 대의당원 한 사람이 폭탄 선을 잘못 건드려 예정보다 빨리 폭발하였던 것이다. 비록, 침략자와 그들의 주구들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회의 자체를 좌절시키고 독립을 열망하던 대한인의 기개를 다시 한 번 과시한 사건이었다. 이 폭음에 놀란 일본 경찰은 황급히 모든 문을 잠그고 범인을 찾기에 혈안이 되었으나, 조문기 등 애국청년당원들은 이미 그 자리를 피해 붙잡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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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승 학덕 추모비
이희승(李熙昇, 1896년 6월 9일 ~ 1989년 11월 27일)은 대한민국의 국어학자, 시인, 수필가이다. 자(字)는 성세(聖世), 호(號)는 일석(一石),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서기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1913년까지 주시경(周時經)의 조선어강습원(朝鮮語講習院)에서 한글과 국문법을 학습하고 독립사상을 섭취하였다. 1929년에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가 중심이 된 조선어사전편찬회(朝鮮語辭典編纂會)의 조직에 참가하였으며, 1935년의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회(朝鮮語標準語査定委員會)의 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1년 1월부터 1940년 6월까지 조선어학회(조선어연구회를 1931년 1월에 확대 개편)의 〈외래어 표기 및 보수문제 협의회〉의 책임위원으로 이극노(李克魯)·정인섭(鄭寅燮)과 함께 선임되어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발표하였다. 1934년 5월 국사와 국어국문을 중심으로 한국학연구단체 진단학회(震檀學會)창립의 발기인이 되어 국학운동에 진력하였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한국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와 한글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운동(朝鮮語學會運動)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으며, 1945년 1월 16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의 선고를 받고 1945년 8월 13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8·15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1945년 8·15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의 교수와 한글학회 이사를 역임하면서 국어국문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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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동상
김구(1876~1949)는 황해도 해주목 출신이다.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1세대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안창호, 이승만 등과 함께 지도자 출신 중 최순위권에 손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동학 농민 혁명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직접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령,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겸 내무장, 재무장, 군무장을 거쳐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5년까지 주석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 이후에는 본인은 반공주의자였지만 남북 분단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는 반대하면서 통일론을 포기하지 않다가 1949년에 서울 경교장에서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최고 명예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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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동상
안중근(1879 - 1910)은 일제강점기 이토저격사건과 관련된 독립운동가. 의병장, 의사(義士)이다. 본관은 순흥(順興). 황해도 해주 출신. 할아버지는 진해현감 안인수이다. 아버지 진사 안태훈(安泰勳, 安泰勛)과 어머니 조씨(趙氏) 사이의 3남 1녀 중 맏아들이며, 아내는 김아려(金亞麗)이다. 어려서는 안응칠(安應七)로 불렸고 해외생활 중에도 안응칠이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해 자(字)가 되었다. 6, 7세 때에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하였다. 이곳의 아버지가 만든 서당에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사서(四書)와 사기(史記) 등을 읽었다. 또 틈만 나면 화승총을 메고 사냥해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16세가 되던 1894년, 아버지가 감사(監司)의 요청으로 산포군(山砲軍: 수렵자)을 조직해 동학군 진압에 나섰을 때 참가하였다. 다음 해에 천주교에 입교해 토마스[多默]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한때는 교회의 총대(總代)를 맡았다가 뒤에 만인계(萬人契: 1,000명 이상이 계원을 모아 돈을 출자한 뒤 추첨이나 입찰로 돈을 융통해주는 모임)의 채표회사(彩票會社: 만인계의 돈을 관리하고 추첨을 하는 회사) 사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교회 신자들과 함께 만인계의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등 수완을 발휘하였다.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해외 망명을 결심, 산둥[山東]을 거쳐 상해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알고 지내던 프랑스인 신부로부터 교육 등 실력 양성을 통해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충고를 듣고는 다음 해 귀국하였다. 1906년 3월에 진남포 용정동으로 이사해 석탄상회를 경영하였다. 정리한 뒤에는 서양식 건물을 지어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였다. 곧이어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해 학교 경영에 전념하였다. 1907년에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이 되면서 반일운동을 행동화하였다. 이 해 7월에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3, 4개월 뒤에는 노령으로 갔다. 노브키에프스크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한인청년회 임시사찰이 되었다. 이곳에서 이범윤(李範允)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고, 엄인섭(嚴仁燮) · 김기룡(金起龍) 등 동지를 만나 동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의병 참가를 권유하였다. 의병지원자가 300여 명이 되자 김두성(金斗星) · 이범윤을 총독과 대장으로 추대하고 안중근은 대한의군참모중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무기를 구해 비밀리에 수송하고 군대를 두만강변으로 집결시켰다. 1908년 6월에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이 되어 함경북도 홍의동의 일본군을, 다음으로 경흥의 일본군 정찰대를 공격, 격파하였다. 제3차의 회령전투에서는 5,000여 명의 적을 만나 혈투를 벌였지만 중과부적으로 처참하게 패배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탈출한 뒤 노브키에프스크 · 하바로프스크를 거쳐 흑룡강의 상류 수천여 리를 다니면서 이상설(李相卨) · 이범석(李範奭) 등을 만났다. 노브키에프스크에서는 국민회 · 일심회(一心會) 등을 조직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해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 훈련을 담당하였다. 1909년 3월 2일, 노브키에프스크 가리(可里)에서 김기룡 · 엄인섭 · 황병길(黃丙吉) 등 12명의 동지가 모여 단지회(斷指會, 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안중근 · 엄인섭은 침략의 원흉 이토[伊藤博文]를, 김태훈(金泰勳)은 이완용(李完用)의 암살 제거를 단지(斷指)의 피로써 맹세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하였다. 9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동보(遠東報)』와 『대동공보(大東共報)』의 기사를 통해 이토가 러시아의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Kokovsev, V.N.)와 하얼빈에서 회견하기 위해 만주에 오는 것을 알았다. 안중근은 우덕순(禹德淳, 일명 禹連後) · 조도선(曺道先) · 유동하(劉東夏)와 저격 실행책을 모의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를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코코프체프와 약 25분간의 열차 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이토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안중근은 침착하게 걸어가 이토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4발을 쐈다. 다시 이토가 아닐 것을 대비해 주위 일본인에게 3발을 쐈다. 처음 쏜 4발 가운데 3발은 이토, 1발은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도시히코[川上俊彦]의 오른팔을 맞혔다. 이어서 쏜 3발은 비서관 모리타이지로[森泰二郞], 만주철도이사 다나카세이타로[田中淸太郞]를 맞혔다. 1발은 플랫폼에서 발견되었다.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한국의용병 참모중장, 나이 31세로 자신을 밝혔다. 거사 동기에 대한 질문을 받자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감옥(旅顺监狱)의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