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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회관터 표지석
조선어학회는 각 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치던 주시경(周時經)의 제자들이 1921년 “조선어의 정확한 법리를 연구”할 목적으로 설립한 조선어 연구회의 후신이다. 조선어 연구회는 주로 한글 철자법을 연구하였고, 동인지 『한글』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에는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을 맞아 훈민정음 반포일을 ‘가갸날’ 혹은 ‘한글날’로 명명하고 기념식을 개최하는 등 한글 보급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조선어 연구회는 ‘조선어 사전 편찬회’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정확한 한글 사전 편찬을 통해 우리말과 우리글의 의미를 정리하고 체계화시키며, 민족의 글과 정신을 일깨워 궁극적으로는 민족의 갱생을 꾀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사전 편찬을 위해서는 통일된 표준어와 맞춤법 등이 필요하였다. 이에 1930년 12월 조선어 연구회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1931년 1월 조선어 연구회를 “조선어문의 연구와 통일”을 위한 기관인 조선어 학회로 개편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한글 사전 편찬 사업을 추진하였다. 조선어 학회는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시작으로 ‘조선어 표준어 사정안’,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차례로 확정하였다. 1940년에는 그동안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수정 발간하였으며, 본격적으로 한글 사전 편찬에 노력을 기울였다. 한글 사전은 1940년 조선 총독부에 『조선어대사전』 출판을 허가받았고, 1942년 원고를 출판사에 넘겨 간행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1942년 10월에 발생한 이른바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한글 사전 편찬은 중단되었고, 원고와 서적은 전부 압수되었다. 조선어 학회 사건은 일제가 사전 편찬에 참여하던 교사 정태진(丁泰鎭)에게서 강제로 조선어 학회가 민족주의 단체로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자백을 받아내면서 시작되었다. 일제는 1942년 10월부터 1943년 4월까지 조선어 학회 핵심 회원과 사전 편찬을 후원하는 찬조 회원을 대거 검거하였다. 이들에게는 치안유지법의 내란죄가 적용되었고, 재판 과정에서 이윤재(李允宰)와 한징(韓澄)은 옥사하였으며, 이극로, 최현배(崔鉉培), 이희승(李熙昇), 정인승(鄭寅承), 정태진의 5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으로 조선어 학회의 활동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해방 후 석방된 조선어 학회 회원들은 조선어 학회를 재건하고, 한글날 행사를 부활시켰다. 그리고 일제의 탄압으로 결실을 맺지 못한 한글 사전 편찬은 1945년 10월 서울역 창고에서 일제에 압수되었던 사전 원고를 되찾으며 다시 추진되었다. 조선어 학회는 1947년 한글날을 기해 『조선말 큰사전』 1권을 간행하였으며, 이후 1957년 6권 발간을 마지막으로 한글 사전 편찬을 마무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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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 집
해공 신익희(1894 - 1956) 선생은 경기도 광주(廣州) 출신으로, 1919년 김시학, 윤치호, 이상재, 이승훈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고,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 지사들과 연락하다가, 4월 10일에 각 지방 출신과 대표자들을 의원으로 하는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어 국호, 관제, 정부 관원 및 임시헌장 등을 의결 선포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과 함께 임시의정원의 의원이 되어 법무차장으로 임명되었고, 나중에는 법무총장, 외무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2년 6월 임시정부에서는 외교연구위원회를 설치, 선생은 연구위원으로 선임되어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3년 4월부터는 새로이 대한민국 잠행관제(暫行官制)가 실시됨과 함께 정부 행정부의 한 부처로 선전부가 새로 설치되어 조소앙, 엄항섭, 유림 등과 함께 선전 계획 수립, 선전 진행 방침에 관한 사항 등을 의결하는 선전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임시정부의 초창기부터 시작하여 내무차관, 내무총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총장, 내무·외무·문교부장 등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끈질기게 항일 독립투쟁을 계속하였다. 광복 후에는 민주당 최고위원, 민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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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수 집 터(김상옥 순국지)
1923년 1월 12일, 김상옥 의사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일로 김상옥 의사를 검거하기 위한 수사대가 꾸려졌다. 당시 동아일보의 기록에 따르면(2면 전면 호외/1923.03.15) 김상옥 의사는 본래 김상옥 의사와 이웃으로 알고 지내던 효제동 이태성의 집으로 숨어들었는데, 이태성 선생의 장녀가 바로 이혜수 선생이시다. 1923년 1월 22일 새벽 일제는 군경 1,000여 명을 동원 효제동 73번지 이혜수 집 주변을 4중으로 포위하였다. 김상옥은 양손에 권총을 쥐고 효제동 73, 74, 75, 76-2, 72번지 집들의 담을 넘나들면서 3시간여 동안이나 혼자서 지붕 위와 담벼락 등에서 공격해오는 일제 경찰과 총격전을 벌여 16명을 사상케 했다. 그러나 탄환이 다해 가자 상하이를 떠나오면서 “절대로 굴복하지 않겠다”라고 했던 말처럼, 마지막 남은 한 발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향년 34세, 그곳 효제동 72번지는 김상옥의 순국 장소가 되었다. 일제 경찰들은 지난 열흘 동안 계속 신출귀몰한 김상옥에 혼비백산해 온지라 두 손에 권총을 쥐고 벽에 기대선 채로 숨을 거둔 그의 죽음을 감히 다가가 확인하지 못하고 어머니 김점순을 불러와 사망 여부를 확인하게 하였다. 유해는 이문동 뒷산 공동묘지에 묘비도 없이 묻혔다. 서울 한복판에서 단신으로 수백 명의 무장경찰과 3시간이나 총격전을 벌인 예는 일제 35년 동안 전후무후한 일이었다. 임시정부에서는 김상옥 의사의 장렬한 죽음이 알려지자 1923년 2월 17일 상하이의 삼일당에서 추도식을 거행하고, 3월 1일자 『독립신문』에 그의 생애와 장렬한 서거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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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 의사비, 김상옥 어록비
김상옥(1876 - 미상)은 1919년 3·1 운동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항일 운동에 뛰어들어, 반일 비밀 조직인 혁신단을 결성한 뒤 지하 신문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해 배포했다. 다음 해에는 풍기 시절부터의 동지인 한훈, 북로군정서의 김동순과 함께 요인 암살을 위한 조직을 만들어 구체적인 암살 계획까지 세운 것이 드러나 상하이로 망명했으며, 이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이시영, 신익희, 이동휘, 조소앙 등과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였다.1922년 10월 권총 3정과 실탄 800발 및 폭탄 그리고 항일 문서를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한 뒤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인 경찰 및 어용신문 매일신보사의 사원 1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당시 종로경찰서가 독립 운동 탄압의 본산으로 악명이 높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투척 사건 이후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피신하던 중, 사이토 총독이 회의에 참석하러 도쿄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암살할 목적으로 서울역 주위를 수일간 배회하다가 종로경찰서 무장 경찰 20여 명에게 포위되었다. 그들과 총격전을 벌여 형사부장을 사살하고 경부 20여 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김상옥은 1월 22일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서 1,000여 명의 일본 군경과 3시간 동안 접전을 벌이며 저항하다가 자결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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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녕 집
이동녕은 본관 연안(延安). 호 석오(石吾). 자 봉소(鳳所). 충청남도 천안(天安)에서 출생하였다. 1904년 제1차 한일협약(韓日協約) 체결로 국권이 위축되자 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 등과 상동(尙洞)청년회를 조직, 계몽운동을 벌였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약폐기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그 해 북간도로 가서 이상설(李相卨)·여준(呂準) 등과 용정(龍井)에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교포교육에 힘썼다. 1907년 귀국, 안창호(安昌浩)·김구(金九)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 총무로서 활약하였다. 1910년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 소장이 되어 독립군 양성과 교포교육에 힘썼다.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대동신문(大東新聞)》 《해조신문(海潮新聞)》을 발행하였으며, 1913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고, 1919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議政院) 의장·내무총장, 1921년 국무총리 서리를 역임 중 파벌싸움으로 임시정부가 위기에 놓이자, 안창호·여운형(呂運亨)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 단결을 촉진하였다. 1924년 재차 국무총리가 되어 군무총장(軍務總長)을 겸직하고 이어 대통령대리가 되었으며, 1926년 국무령(國務領), 1927년 주석(主席)이 되었다. 1929년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 이사장에 피선되고, 같은 해 재차 의정원 의장이 되었으며, 임시정부 주석은 계속 역임하였다. 1935년 양우조(楊宇朝) 등과 한국국민당을 조직, 당수가 되었는데,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에 가담하여 항일전을 구상하며, 1939년 김구와 전시내각을 구성, 조국광복을 위하여 싸우다가 쓰촨성[四川省]에서 병사하였다. 임시정부 국장(國葬)으로 장례가 거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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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3.1독립운동기념터 표지석(선은전 광장)
선은전광장 3·1운동 만세시위지는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를 부르며 남산 조선총독부를 향해 행진하던 수천 명의 시위대가 모여 독립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뒤, 오후 3시경 고종 황제의 빈전이 마련된 덕수궁 대한문 앞에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연설을 한 시위대의 일단은 만세를 부르며 장곡천정(현 소공로)을 거쳐 남산 조선총독부를 향해 행진하였다. 행렬이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앞 광장에 이르자 학생과 시민들이 합류하여 인파가 3천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총독부를 향해 본정통(현 충무로)으로 들어서며 이를 저지하는 일제 군경과 맞섰다. 일부는 저지선을 뚫기도 했으나, 용산 조선군사령부에서 보병 3개 중대와 기병 1개 소대를 긴급히 배치함으로써 시위대는 강제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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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군 서울시가전투지
대한제국군 서울시가전투지는 1907년 대한제국 군인들이 일제의 강제적인 군대 해산에 항거했던 곳이다. 일제는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킨 데 이어 1907년 8월 1일 군대마저도 강제 해산시켰다. 군인들의 무장봉기는 군대해산식 당일 시위 보병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이 군대 해산에 반대하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으로 자결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8월 1일 오전 8시경 장병들이 무장해제된 상태로 군대 해산식이 거행되는 훈련원으로 출발하려 할 즈음 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하자, 격분한 장병들은 탄약과 무기를 탈취해 무장을 하고 병영 주위에 초병을 배치한 뒤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였다. 서소문 일대에서 총성이 울려 퍼지자 숭례문 안에 있던 시위 보병 제2연대 제1대대의 병사들도 호응하여 무장을 하고 일본군을 향해 사격을 개시하였다. 한국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힌 일본군은 9시 30분 보병 제51연대 제3대대 전 병력과 제1·2대대의 응원병력을 투입하는 한편, 숭례문 성벽 위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막강한 화력과 숫자의 열세를 이기지 못한 한국군은 결국 10시 50분경 남대문 병영을 점령당한 데 이어 11시 40분경 서소문 병영마저 점령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두 병영에서 퇴각한 한국군의 일부는 서소문밖 고지 일대를 배경으로 저항을 계속 했고, 각지로 흩어져 의병진에 합류함으로써 의병전쟁으로 발전한 정미의병의 기초를 놓고 의병의 전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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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용 흉상
이길용(1899-미상)의 호는 파하, 월강이며,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체육기자, 조선일보 기자 등을 역임한 언론인이다. 어릴 때 아버지가 인천으로 생활 근거지를 옮김에 따라 인천에서 영화학교(永和學校)를 마쳤다. 1916년배재학당(培材學堂)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지샤대학(同志社大學)에서 공부하였으나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 1918년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철도국에서 근무하던 중 1919년 3·1독립선언서와 임시정부의 기밀문서를 철도편으로 운송하는 책임을 맡아 활동하다 발각되어 3년간 복역하였다. 그 뒤 출감하여 동아일보 사장이던 송진우(宋鎭禹)의 권고로 동아일보 체육기자로 활약하였다. 1923년부터 매년 개최되는 전조선여자정구대회를 전담, 주관하였다. 한때는 심판을 보기도 하였으며, 1932년에는 『신동아』에 「여자정구 10년사」를 연재하였다. 1924년 11월 조선체육회 실무위원이 되었으며, 1925년 제1회 전조선축구선수권대회 임원, 전조선중학교 농구선수권대회 위원 등을 지냈다. 1924년 조선일보로 이적했다가 1927년송진우의 간곡한 부름을 받고 동아일보로 다시 돌아와 체육 발전에 헌신하였으며, 다른 신문사 기자들과 뜻을 모아 1927년 8월서울영금정(令今亭)에서 조선운동기자단(朝鮮運動記者團)을 조직하여 운동경기의 전문화에 기여하였다. 1932년 8월 로스엔젤레스올림픽에 출전한 김은배(金恩培)와 권태하(權泰夏) 선수가 골인하는 사진에서 가슴의 일장기를 없애 버렸고, 1936년 8월『동아일보』에 「名譽의 우리 孫君 世界制覇의 凱歌」라는 제목 아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시상식 사진에서도 일장기를 없앴으며, 『신동아』에 실린 사진에도 일장기가 지워졌다. 이 사건으로 사직당하고 『동아일보』는 정간되었으며, 『신동아』는 폐간되었다. 그 뒤 네 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르고 광복이 되자 조선체육동지회 결성에 적극 참여하였고, 그 결과 조선체육회(현재 대한체육회)를 부활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1945년 조선체육회 상무이사로 선임되었고, 이듬해『동아일보』가 복간되자 사업부 차장으로 복직하였다. 1948년 정부수립 후 서울특별시 고문, 이화여자대학교 이사, 국민당 중앙당 상임위원 등의 사회활동을 하였다. 1949년 10월 대한체육회 공로상을 받았으며, 체육사를 정리하여 『체육연감』과 『대한체육사』가 발간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며, 1989년 한국체육기자연맹에서는 이길용체육기자상을 제정, 매년 수여하고 있다. 1990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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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이시영 6형제 집
이회영(1867-1932)의 호는 우당이며, 일제강점기 신민회 중앙위원, 항일구국연맹 의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07년 2월 귀국한 안창호(安昌浩)를 중심으로 4월경 이갑(李甲)·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이동녕(李東寧)·신채호(申采浩) 등과 같이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정치·경제·교육·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활약하였다. 한편,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할 것을 협의하여 간도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이상설(李相卨)을 책임자로 하여금 교포 교육에 주력하도록 하였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릴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이 특사로 파견되자 서전서숙의 경영을 위해 여준(呂準)을 만주로 파견하였다. 그 뒤 1908년 헤이그에서 돌아온 이상설을 만나기 위해 만주로 찾아가서 앞으로의 진로를 협의한 끝에 국외활동은 이상설이, 국내활동은 자신이 담당하기로 협의하고 귀국하였다. 우선 교육진흥운동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판단, 동지들을 각 학교에 파견하여 교육에 진력하도록 하고, 자신도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학감으로 취임, 교육사업에 진력하였다. 1909년 봄 양기탁의 집에서 김구(金九)·이동녕·주진수(朱鎭洙)·안태국(安泰國)·이승훈(李昇薰) 등과 비밀리에 신민회간부회의를 소집하고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것을 결의,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를 후보지로 결정하였다.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의해 강탈당하자 전가족이 만주로 건너가 황무지를 개간하며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매진하였다. 1911년 교민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1912년 독립군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뒤의 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였다. 1918년 미국대통령 윌슨(Wilson, W.)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에 자극되어 국내외에서 독립기운이 활발해지자 오세창(吳世昌)·한용운(韓龍雲)·이상재(李商在) 등과 밀의한 뒤, 고종의 국외망명을 계획하고, 시종 이교영(李喬永)을 통해 고종에게 상주하여 쾌락을 얻었으나,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上海)에 수립되었으나 의견 차이로 분란이 끊이지 않자 상해보다는 북경(北京)에 체류하며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4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중국에 있던 동지들이 상해로 집결하여 조직한 항일구국연맹의 의장에 추대되었다. 1932년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행동강령으로 일본군기관 및 수송기관 파괴, 일본요인 및 친일파 숙청, 일본외교기관 폭파 등을 결정하고, 중국국민당과 교섭하여 자금과 무기지원을 확약받았다. 그 해 11월 만주에 연락근거지를 확보하고 지하공작망을 조직하여, 주만일본군사령관 암살을 목적으로 상해에서 대련(大連)으로 향하던 도중, 대련의 일본수상경찰에 잡혀 악독한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1962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시영(1869-1953)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885년(고종 22) 관직에 나아가 10여 년간 형조좌랑 · 홍문관교리 · 승정원부승지 · 궁내부수석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895년 관직을 물러난 뒤로는 중형 이회영(李會榮) · 이상설(李相卨) 등과 근대학문탐구에 몰두하였다. 1905년 외부 교섭국장에 임명되었으나 을사조약의 강제체결을 계기로 사직하였다. 그러나 1906년 재차 평안남도 관찰사에 등용되었고, 근대학교설립 및 애국계몽운동에 종사하였다. 그 뒤 1907년 중추원칙임의관, 1908년 한성재판소장 · 법부 민사국장 · 고등법원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안창호(安昌浩) · 전덕기(全德基) · 이동녕(李東寧) · 이회영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국권피탈 후 신민회의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 계획에 의거하여 6형제의 가재(家財)를 재원으로 삼아, 1910년말 서간도(西間島)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추가가(鄒家街)로 가족을 거느리고 망명하였다. 1911년 4월 유하현 삼원보 대고산(大孤山)에서 노천군중대회를 개최하여, 교육진흥 및 독립군양성을 표방한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설립을 주도하였다. 경학사 초대사장에는 이상룡(李相龍)이, 신흥강습소 초대교장에는 이동녕이 추대되었다. 1912년 통화현 합니하(通化縣 哈泥河)에 토지를 매입하여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확대 발전시켰다. 그 뒤 신흥무관학교는 유하현 고산자로 이전하였고, 합니하의 교사는 분교역할을 하는 등 1910년대 서간도지역 독립군양성의 총본산이 되었다. 특히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폐교 때까지 재만항일독립군의 핵심 간부로 양성된 독립군들은, 청산리대첩의 주역으로 활동하는 등 1920년대 국외독립전쟁의 골간으로 성장하였다. 1935년 10월 김구 등과 함께 임시정부 지원정당인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창당하여 감사를 맡았다. 1938년 중일전쟁 발발로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이동한 이후 임시정부 국무위원 · 재무부장 · 의정원의원 등을 역임하며, 광복 직전 임정활동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과 함께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자격으로 환국한 이래 1946년 봄 성균관총재와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위원장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종교(大倧敎) 활동에 진력하여 사교교질(司敎敎秩) · 원로원장 · 사교(司敎) · 도형(道兄) 등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다. 또한, 환국 직후부터 신흥무관학교부활위원회를 조직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건학이념 계승과 인재양성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1947년 2월 재단법인 성재학원(省齋學園)을 설립하고, 이후 신흥전문학관(新興專門學館)으로 발전시켜 1 · 2회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 뒤 한국전쟁으로 일시 침체국면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현재의 경희대학교로 계승되었다. 한편, 1947년 9월 공직사퇴 성명을 발표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직을 사퇴하였다. 그러나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 실시된 정 · 부통령선거에서 대한민국 초대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전횡에 반대하여 1951년 5월 9일 국회에 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국정혼란과 사회부패상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는 요지의 대국민성명서를 발표하고 이승만정부를 떠났다. 1949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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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의거터
이재명(1887-1910)은 일제강점기 이완용피습사건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평안남도 평양 출신으로, 8세 때 평양 아청리(衙聽里)로 이사하였다. 1904년 미국노동이민사(美國勞動移民社) 모집으로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제1·2차 한일협약이 강제체결되자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1907년 10월 동경·나가사키[長崎]를 거쳐 귀국하였다. 그리고 1909년 1월 전 통감 이토[伊藤博文]가 순종과 함께 평양을 순행하기로 되었을 때, 이토를 암살하고자 동지 몇 사람과 평양역 부근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안창호(安昌浩)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원산을 거쳐 연해주로 갔다. 그 뒤 안중근(安重根)에 의해 하얼빈역에서 이토가 사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친일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이용구(李容九)·송병준(宋秉畯) 등을 먼저 없애는 것이 국권수호의 첩경이라 생각하고, 여러 동지와 야학당에 모여 이완용은 이재명이, 이용구는 김정익(金貞益)이, 송병준은 이동수(李東秀)가 담당하여 죽이기로 계획하였다. 그 해 9월 상경하여 기회를 엿보던 중, 12월 22일 서울 종현천주교회당(鐘峴天主敎會堂)에서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그달 17일 사망)의 추도식에 이완용 등 매국노들이 참석한다는 신문보도를 보고 군밤장수로 변장한 뒤 교회당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11시 30분경 이완용이 식장에서 나와 인력거를 타고 지나가려는 것을 칼로 허리와 어깨 등을 세번이나 찔러 쓰러뜨리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본경찰에 왼쪽 넓적다리를 찔려 중상을 입고 잡혔다. 이 때 운집한 구경꾼들에게 담배를 얻어 피우면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또한 서울지방재판소에서 방청석을 향해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하라.”고 열변을 토하였다. 그리고 일본인 재판장이 “피고와 같이 흉행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하고 묻자, 눈을 부릅뜨고 “야만 섬나라의 불학무식한 놈아! 너는 흉자만 알았지 의자는 모르느냐. 나는 흉행이 아니고 당당한 의행을 한 것이다.” 라고 고함을 치기도 하였다. 그 뒤 재판장이 또 “그러면 피고의 일에 찬성한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라고 물었을 때, “2000만 민족이다.”라고 대답하자, 창밖에서 “옳다!” 하는 소리와 함께 흥분한 방청객들이 유리창을 부수었다. 또, 재판장에게 호령하며, “야만 왜종들은 퇴청시켜라. 그리고 창밖에 나열한 한국인을 모두 입장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너의 심문에 대답하지 않겠다.” 하고 노기를 띠었다. 사형이 선고되어 공소하였으나 형이 확정되자, “왜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을 빼앗을 수는 있지만,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라고 재판장을 꾸짖었다. 의거에 공모한 조창호(趙昌鎬)·이동수·김정익 등은 징역 15년, 김태선(金泰善)·김병록(金炳祿)·김용문(金龍文) 등은 징역 10년, 박태은(朴泰殷)은 징역 7년, 김이걸(金履杰)·이응삼(李應三)·김동현(金東鉉) 등은 징역 5년, 이연수(李年遂)는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으며, 이동수는 도피하였다가 그 뒤 잡혔다. 1962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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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3.1독립운동기념터 표지석(세브란스병원)
3·1운동기념 터(세브란스병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세브란스병원 제약 지배인으로 근무하던 이갑성(李甲成, 1886~1981)이 기독교 계통의 주요 지도자들과 더불어 당시 세브란스병원이었던 이 자리에서 사전 연석회의를 개최한 곳이다. 이갑성은 1919년 2월 11일 남대문 밖 교회를 방문한 이승훈으로부터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 사이에 독립운동을 위한 거사가 논의되고 있음을 전해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 날인 2월 12일 밤 세브란스병원 음악회가 끝난 뒤 지난 1월 27일 대관원(大觀園) 모임에 참석한 바 있는 한위건·김원벽·김형기·윤자영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김문진·이용설·배동석을 병원 구내 자신의 사택으로 불러 국내외 정세에 대해 이야기하며 독립운동에 대한 의사를 타진하였다. 그 뒤 이갑성은 한 차례 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대표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의 독립운동 추진상황을 알렸다. 한편 2월 21일 밤에는 장로회 측의 이승훈·함태영·이갑성·안세환·김세환·김필수·오상근, 감리회 측에서 박희도·오화영·신흥식·오기선·현순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제1차 장로회·감리회 양 교단의 지도자 연석회의가 이갑성의 집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양 교단 지도자들은 천도교 측과의 합동문제에 대해서는 이승훈과 함태영에게 전적으로 일임하기로 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할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 각자 역할을 분담하였다. 3·1운동에서 기독교와 천도교가 하나로 힘을 합칠 수 있기까지의 과정은 순탄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는 3·1운동 계획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현상윤의 노력이 컸다. 현상윤은 3·1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동경 유학생의 2·8독립선언이 이루어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고, 동경 유학생 대표로 송계백이 국내로 왔을 때 그를 만나 2·8독립선언이 실행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동경에서의 독립운동 소식을 천도교 측에 알림으로써 천도교 측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천도교 측과의 교섭은 최남선·최린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3·1운동은 천도교·기독교·불교의 3대 종교계 지도자들이 연합함으로써 전개될 수 있었다. 이러한 종교계 연합의 아이디어는 현상윤·송진우·최남선 등에 의해 제안되었다. 이를 위해 이들은 기독교 측의 이승훈과 연락하여 천도교 측과의 연합을 성사시켰다. 이로써 3·1운동의 실천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송진우·최남선·최린 등의 의견이 맞지 않아 연합이 결렬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현상윤이 이를 중간에서 조정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이갑성은 1919년 3·1운동 당시 34세의 나이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함으로써 옥고를 치렀다. 3·1운동기념 터(세브란스병원) 표석은 1993년에 서울역 지하철1호선 4번 출구 앞, 현재 세브란스빌딩 맞은편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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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3.1독립운동기념터 표지석(남대문역전 시위)
서울역전광장 3.1운동은 1919년 3월 5일 서울 시내 전문학교 학생들의 주도로 남대문역[현 서울역] 광장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시위운동이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자 한국의 독립 문제를 국제사회에 부각시키기 위해 천도교, 개신교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전 민족적 독립 의사 표명을 위한 3·1독립운동이 추진되었다. 이때 서울 시내 전문학교 학생 대표자들을 중심으로 학생단 주도의 독자적인 독립운동이 준비되고 있었다. 3월 5일 남대문역 광장에서 학생단이 이끈 독립 만세시위는 3월 3일 고종 황제의 국장에 참관했다 귀향하던 수만 명의 군중이 참여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3월 1일의 독립선언의 당위성을 재확인하면서 전국에 만세 시위운동을 확산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학생들은 독자적인 독립선언서를 준비하는 등 독립운동의 새로운 주도 세력으로 등장했으며, 이후 국내 독립운동에서 주역으로 활동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