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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책원지비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위치하고 있는 본 비는 1919년 중앙고등학교 교장이던 송진우, 김성수, 그리고 교사이던 현상윤 등이 중앙고등학교 숙직실에 모여 독립운동에 필요한 독립선언문 작성 등 3.1운동 계획을 세우던 것을 기념하여 1973년 6월 1일 동아일보사가 3·1운동의 태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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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고보 숙직실 터
중앙고보 숙직실이었던 이 곳은 일본에서 추진하던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계획을 국내에 알려 3.1운동을 촉발시킨 곳이다. 일본 도쿄 유학생 송계백이 1919년 1월 중앙고보를 방문하여 숙직실에서 교사 현상윤, 교장 송진우와 만나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알리고, 2.8독립 선언서 초안을 전달함으로써 3.1운동을 촉진하였다. 중앙고보 숙직실은 1917년 김성수가 계동 교사를 지으면서 교장 사택으로 사용하였던 곳이며, 현재의 강당 정문 앞에 있던 당시 숙직실은 강당을 지으면서 철거하고 1973년 '3.1기념관'으로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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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카우트발상지비(조선소년군)
조철호(1890 - 1941)는 일제 치하의 청소년들에게 독립사상과 민족적 단결을 고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조선소년군을 창설했다. 1922년 10월 5일 중앙고등보통학교(현 중앙고등학교)의 솔밭 후원에서 8명의 학생을 단원으로 조선소년군 경성제1호대(京城第一虎隊)를 발대하여 조선소년군이 창설됐다. 이것이 연원이 되어 현재의 한국스카우트운동이 시작됐다. 중앙고등학교는 한국스카우트운동의 본산이자 발상지다. 조선소년군의 창설을 기리고자 중앙중·고등학교는 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2008년 3월 22일 교정에 '한국스카우트발상지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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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집
몽양 여운형(1886~1947)은 경기도 양평 출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회숙(會叔). 호는 몽양(夢陽). 아버지는 여정현(呂鼎鉉)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14세 때에 유세영(柳世永)의 장녀와 혼인하였으나 사별하고, 충주의 진상하(陳相夏)와 재혼하였다. 1900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흥화학교(興化學校)와 통신원 부설의 관립 우무학당(郵務學堂)에서 수학하였다. 1911년 평양의 장로교회연합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학하고, 1914년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독립운동가ㆍ언론가ㆍ정치가. 호는 몽양(夢陽). 대한민국 임시 정부 조직에 참가하였으며, 조선중앙일보사 초대 사장을 지냈다. 광복 후에는 건국 준비 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여 좌우익의 합작을 추진하다가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에게 저격을 당해 서거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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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유적지(유심사 터)
본 사적이 위치한 곳은 3.1운동 당시 불교 잡지 「유심」을 발행하던 출판사 유심사가 있던 곳이다.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이 이곳에서 불교계의 3.1운동 참여를 주도하였다.유심사는 1918년 9월에 창간되어 <유심(惟心)>이라는 잡지를 그 해 12월 까지 제3호를 발간하였으며 주로 불교 수양 잡지를 출판하던 곳이다. 1919년 2월 28일 만해 한용운 선생이 중앙학교 학생 200여명을 이곳에 모이게 하고 독립선언과 거사 준비 경위 등을 설명하고 불교 청년의 역량발휘를 강조하면서 독립정신을 심어주었던 곳이다. 한용운은 계동 43번지에 1918년 8월부터 살다가 1919년 3.1운동과 관련하여 투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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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우회 동판
근우회는 1927년에 조직되었던 독립운동 및 여성운동 단체이다. 1919년 3·1운동은 조선총독부의 통치 방침에 영향을 주어 이른바 ‘문화통치’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문화통치’는 경찰력의 증강을 바탕으로 한 기만적 통치방침이었으나 역설적으로 그간 조선인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언론·출판·집회·결사의 공간이 일부나마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공간 위에서 각 분야로부터 사회운동이 활발해졌고, 여성운동도 그중 하나였다. 먼저 여성교육과 계몽을 중심에 두었던 여성단체들이 1920년대 전반 주된 여성운동의 명맥을 형성하였다. 조선여자교육협회(朝鮮女子敎育協會)와 조선여자고학생상조회(朝鮮女子苦學生相助會) 등 여성의 교육 및 계몽을 통한 생활개선을 도모하는 단체들이 여럿 생겨나 활동하였다. 특히 종교 단체, 그중에서도 기독교에 기반을 둔 여성들은 활발하게 여성단체를 조직하여 1920년대 초반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대표적으로는 유각경(兪珏卿), 김활란(金活蘭) 등이 주축이 되었던 조선여자기독청년회연합회(YWCA)가 있었다. YWCA는 근우회 창립 전까지 조선에서 가장 규모가 큰 여성단체였다. 이들은 강연회, 강습 등을 통해 여성에게 신지식을 보급하고 여성의 지위 향상 및 해방을 주창하는 한편, 축첩 폐지, 공창제 폐지 등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여성단체들의 활동은 1920년대 민족주의 여성운동의 흐름을 형성했다. 한편 1920년대 초 조선에 사회주의 사조가 소개되고 사회주의 이론에 입각한 사회운동 단체들이 결성되기 시작하면서 여성운동에서도 사회주의적 여성해방 이론이 점차 등장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여성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기보다는 무산계급 여성, 여성노동자들이 여성운동 및 여성해방의 주체라고 보았으며 궁극적으로는 무산계급운동에 합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단순한 여성의 지위 향상에 운동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여성운동이 사회변혁운동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적 기반 위에서 1924년 5월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가 창립되었으며, 사회주의 여성단체들이 각 분파마다 조직되었다. 북풍파(北風派)·화요파(火曜派) 계열의 경성여자청년동맹(京城女子靑年同盟) 및 서울파의 경성여자청년회(京城女子靑年會)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위의 민족주의 계열 여성운동과 사회주의 계열 여성운동은 각기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민족주의 계열에서는 종교적 기반으로 인하여 여성의 권리에 대해 보수적인 인식을 보이고 있었다. 따라서 여성 대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무산계급 여성들의 현실을 타개해 줄 구체적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1923년 이후부터는 비교적 침체 상태에 접어든 상태였다.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운동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성에 대한 첨예한 이론적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지만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에 의한 도시 중심의 운동이었기 때문에 역시 여성의 대다수인 지방과 농촌 여성들에까지 대중적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1926년 초 조선 사회운동계에 민족협동전선을 결성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 결과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었다. 자연스럽게 여성운동 진영에서도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을 아우르는 전국적 규모의 여성단체를 결성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민족주의 계열에서는 이념 및 지도력 부재를 협동전선을 통해 돌파하고자 하였고, 사회주의 계열에서는 봉건유습 타파라는 실질적인 여성해방 과제를 포용하고 기존의 대중성 부족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근우회는 여성해방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서로 다른 가치와 방법론을 가지고 있었던 운동 진영들이 모여 만들어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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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3.1독립운동기념터 표지석(보신각 앞)
본 사적이 위치한 보신각 앞은 1919년 3.1독립만세시위의 중심지로서 4.23국민대회를 개최하고 한성정부(漢城政府)를 선포한 곳이다. 이곳에서 일어난 항일운동의 성과를 기념하고자 본 안내석이 건립되었다. 한성정부는 일제 강점기인 1919년 4월 23일 한성(서울)에서 선포된 임시정부로, 3.1운동 이후 국내외 애국지사들이 조선의 독립에 대비해 결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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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세 순국지(충훈부)
조병세(1827 - 1905)는 개항기 한성부판윤,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순국지사이다.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치현(穉顯), 호는 산재(山齋). 현감 조유순(趙有淳)의 아들이다. 음관(蔭官)으로 참봉에 임명되었다가 1859년(철종 1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고 1864년(고종 1) 실록청도청낭청으로서 『철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874년 함경도암행어사, 1877년 대사헌에 승진되었고 이어 의주부윤, 다시 대사헌, 1887년 공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예조·이조의 판서, 1889년 한성부판윤을 지내고 곧이어 우의정에 올랐다. 1893년 좌의정이 되었으나, 이듬해 동학농민운동·청일전쟁·갑오개혁 등 큰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고, 일제의 침략이 가중되면서 세상이 어수선하게 되자 정계를 떠나 가평으로 은퇴하였다. 뒤에 다시 중추원의장(中樞院議長)과 의정부의정(議政府議政)을 역임하고 국왕의 고문인 특진관(特進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주로 가평에 은퇴하고 있으면서, 1896년 폐정개혁을 요구하는 시무(時務) 19조를 상소하였다. 그 뒤 1898년 재상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으며, 1900년 다시 입궐하여 국정 개혁을 건의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5조약이 체결되자 국권회복을 위해 79세의 노구를 이끌고 상경, ‘을사5적’의 처형을 주청하려 하였으나 일본군의 방해로 고종과의 면담이 거절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당시 장지연(張志淵)이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써서 민족의 울분을 터뜨리고, 13도유생들이 5적의 처형과 조약폐기를 상소하였다. 그리고 19일에는 특진관 이근명(李根命),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이상설(李相卨) 등을 비롯한 조관(朝官) 30여 명이 개별 상소하여 5적의 처형과 조약폐기를 요청하였으나, 국왕의 확고한 대답은 내려지지 않았다. 이에 26일 참정(參政) 심상훈(沈相薰),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閔泳煥), 이근명 등과 함께 백관을 인솔하고, 입궐하여 정청(庭請)의 소두(疏頭)로서 을사조약의 무효, 5적신의 처형, 새로 충량(忠良)한 인재를 뽑아서 외부대신에 임명하고, 각국 공사와 협의하여 5조약을 파기할 것 등을 연명으로 상소하다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고 표훈원(表勳院)에 연금되었다. 곧 방면되었으나 다시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석고대죄하며 을사조약의 파기를 주장하다가 또다시 일본 헌병에 강제 연행되었다. 연행당한 뒤 민영환이 대신 소두가 되었다. 그러나 민영환도 곧이어 평리원(平理院)에 연금되었다가 특명으로 풀려났다. 그 뒤 비분을 참지 못하여 29일 자결하였다. 강제연행된 뒤 곧 가평 시골집에 추방되었으나 30일 다시 상경하였다. 표훈원에 되돌아와 유소(遺疏)와 일본공사 및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상소하였다. 그런데 또다시 일본군이 가마에 태워서 강제추방하자 가마 안에서 음독하여, 조카 조민희(趙民熙)의 집에 당도하여 죽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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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 자결 터
한말의 충신 민영환은 을사늑약의 폐기를 궁궐 앞에서 주장하다가 일본 헌병의 강제해산으로 실패하자 1905년 11월 30일 새벽 6시에 청지기의 집에서 국민, 외교사절, 황제에게 보내는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순국후 피묻은 옷과 칼을 상청(喪廳)마루방에 걸어두었는데 이듬해 5월 상청의 문을 열어보니 대나무 네 줄기가 마루바닥과 피묻은 옷을 뚫고 올라왔으므로 사람들은 그의 충정이 혈죽(血竹)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이 나무를 절죽(節竹)이라 하였다. 선생의 집은 견지동 27-2 현 조계사 경내에 있었다. 종로구 인사동 공평빌딩 부근 민영환의 자결터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민영환(1861 - 1905)은 당대 최고의 권문세가 집안 출신으로 예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낸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순국지사로,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 후 국가의 제반 제도의 개혁을 시도하였고, 친일적인 각료들과 대립하여 일본의 내정간섭을 비판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한일협약을 적극 반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1905년 11월 종로 이완식(李完植)의 집에서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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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단본부 표지석
대동단은 1919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이다. 흔히 대동단으로 알려진 이 조직은 1919년 3월 말경에 서울 전협(全協)의 집에 모여, 첫째 한국을 일본제국의 통치에서 이탈하게 해 독립국을 형성하게 할 것, 둘째 세계의 영원한 평화를 확보할 것, 셋째 사회주의를 철저히 실행할 것 등의 3대 강령을 제창하고, ‘조선민족대동단’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하였다. 단원은 귀족·관리·유학자·종교인·상공인·청년·학생·부녀자 등 각계각층 11개 사회단체 대표자들로 구성되었으며, 비밀 유지를 위해 점조직으로 조직되었다.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군자금 등 재정은 전협이, 선전활동 및 대외활동은 최익환(崔益煥)이 맡았다. 그 밖에 김찬규(金燦奎)·박영효(朴泳孝)·민영달(閔泳達) 등이 참가하였다. 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평안도·함경도·만주 등에 지부를 설치해 조직을 확대하였다. 1919년 4월부터 1년간 지하문서를 배포하고, 특히 『대동신보(大同新報)』를 제작하였다. 임시정부수립 이후에는 본부를 상해로 옮기려 했고, 의친왕 이강(李堈) 을 상해로 탈출시키려는 거사를 기도했으나 관련자가 붙잡혀 실패하였다. 의친왕 탈출 기도는 실패했지만 그 일을 통해 대동단이 국내외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이들은 1920년 6월 예심을 거쳐 12월 1심판결에서 전협과 최익환 등 31명이 징역 6개월에서 8년까지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 뒤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가진과 나창헌(羅昌憲) 등이 대동단의 활동을 계승해 정남용(鄭南容)이 붙잡히기 전까지 각종 선언서·기관방략(機關方略)·포고문 등을 등사해 전국에 배포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을 선전, 유도하였다.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이종욱(李鍾郁) 등을 파견해 대동단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1919년 12월에 독립대동단규칙서에는 모두 8장 45개조에 달하는 규칙과 세칙 44개조가 첨가되어 대기관의 조직 구성을 볼 수 있다. 단원 중 의병장 임병찬(林炳瓚)의 큰아들 응철(應喆), 넷째아들 수명(守明), 동생 병대(炳大) 등 일가가 대를 물려 조국의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하였다. 또, 주동자 전협 등은 한때 일진회원으로 친일파였으나 이를 계기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어 더욱 그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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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원 표지석
한양의원은 한성의사회 회장, 조선의사협회 초대 간사장을 역임한 근대 초창기의 양의 박계양이 운영하던 병원으로, 홍명희·정인보·최남선 등 당대 문사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동계 박계양(1882~1970)은 경기도 양주군 누암리에서 태어났다. 원래 그의 집안은 유학자 집안으로 신학문을 공부하겠다는 그의 선택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서양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산수와 일본어 등을 준비하여 의학교 입학시험을 쳐서 1904년에 입학한 그는 1907년 대한의원 교육부 1회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는 이비인후과를 더욱 깊이 공부하기 위해 1912년 교토제국대학 의학부 이비인후과학 교실에 유학하였다. 귀국 후 총독부의원에서 잠시 근무하였으나 일본인 병원에 근무하기 싫어 사직하고 개업했다. 그는 직접 독립운동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독립운동가들이나 그 가족들을 도와주는 일에 앞장섰다. 한번은 중국에서 활동하는 여운형의 가족에게 생활비를 대주었다가 상해에 독립군 자금을 보내었다는 혐의를 받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또 천도교 교주 손병희와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등을 도와주어 당국으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당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수재가 났을 때는 이재민들을 무료 진료하는 봉사활동을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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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정부 유적지 표지석
한성정부는 1919년 4월 서울에서 세워진 임시정부이다. 1919년 3월 초 이교헌(李敎憲)·윤이병(尹履炳)·윤용주(尹龍周)·최전구(崔銓九)·이용규(李容珪)·김규(金奎) 등이 이규갑(李奎甲)에게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의하였다.이들의 권유로 각 방면의 대표들이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 모여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할 것을 결정하였다. 여기에 참석한 사람은 천도교 대표 안상덕(安商德), 예수교대표 박용희(朴用熙)·장붕(張鵬)·이규갑, 유교대표 김규, 불교대표 이종욱(李鍾郁) 등 20명이다. 4월 중순에 안상덕·현석칠(玄錫七) 등의 발기로 국민대회를 소집하기로 하여 13도 대표를 서울 서린동 봉춘관(逢春館)에 모아 협의하였다. 그 결과 간부 현석칠·안상덕 등과 학생 김사국(金思國)·장채극(張彩極)·김옥결(金玉玦) 등이 서울에서의 국민대회 개최를 준비하기로 하였다. 그 날 임시정부 각원을 선거하기로 하였다. 4월 23일 봉춘관에 ‘국민대회(國民大會)’ 간판을 걸고, 임시정부 선포문과 국민대회 취지서, 결의사항, 각원 명단과 파리강화회의 대표, 그리고 6개조로 된 약법(約法)과 임시정부령 제1·2호를 발표하였다. 임시정부 선포문에서 “……아민족은 세계만방에 대하여 조선의 독립이오 조선민족의 자유민임을 선언하고 아울러 전민족의사에 기하여 임시정부의 성립되었음을 자에 포고하노라…….” 하였다. 국민대회 취지서에서 “3·1독립선언의 권위를 존중하고 독립의 기초를 공고히 하여 인간필연의 요구에 보답하게 하기 위해 이에 민족일치의 동작으로써 대소의 단결과 각 지방대표자들로서 분회를 조직해 이를 세계에 선포한다.”고 하였다. 결의사항으로 ① 임시정부 조직, ② 일본의 조선통치권 철거와 군대의 철퇴 요구, ③ 파리강화회의 대표 선정, ④ 일본관청의 관공리 퇴직, ⑤ 납세 거절, ⑥ 일본관청에 청원급 소송 금지 등을 결의하였다. 각원으로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 이승만(李承晩), 국무총리총재 이동휘(李東輝), 외무부총장 박용만(朴容萬), 내무부총장 이동녕(李東寧), 군무부총장 노백린(盧伯麟), 재무부총장 이시영(李始榮), 재무부차장 한남수(韓南洙), 법무부총장 신규식(申圭植), 학무부총장 김규식(金奎植), 교통부총장 문창범(文昌範), 노동국총판 안창호(安昌浩), 참모부총장 유동열(柳東說), 참모부차장 이세영(李世永), 그리고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이승만·민찬호(閔瓚鎬)·안창호·박용만·이동휘·김규식·노백린 등을 선임하였다. 약법(約法)은 제1조 국체(國體)는 민주제를 채용함, 제2조 정체(政體)는 대의제(代議制)를 채용함, 제3조 국시(國是)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고 세계평화의 행복을 증진하게 함, 제4조 임시정부는 일체 내정, 일체 외교의 권한을 가짐, 제5조 조선국민은 납세·병역의 의무가 있음, 제6조 본 약법은 정식국회를 소집하여 헌법을 발표할 때까지 적용함 등이다. 그리고 임시정부령 1호는 납세를 거절하라, 2호는 적의 재판과 행정상 모든 명령을 거절하라는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한성정부는 연합통신(UP)에 보도되었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더욱 선포 효과가 있었다. 이것은 이 정부가 서울에서, 그것도 ‘국민대회’라는 국민적 절차에 의해 조직되었다는 점과 더불어 뒷날 여러 정부의 통합과정에서 정통성을 가지게 되는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