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아카데미 역사기록 백과사전

근우회 동판

유형
안내판·표지석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공평동 17
관련인물
관련사건

사적지 지도 안내

길찾기   |   로드뷰

사적지 개요

근우회는 1927년에 조직되었던 독립운동 및 여성운동 단체이다. 1919년 3·1운동은 조선총독부의 통치 방침에 영향을 주어 이른바 ‘문화통치’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문화통치’는 경찰력의 증강을 바탕으로 한 기만적 통치방침이었으나 역설적으로 그간 조선인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언론·출판·집회·결사의 공간이 일부나마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공간 위에서 각 분야로부터 사회운동이 활발해졌고, 여성운동도 그중 하나였다. 먼저 여성교육과 계몽을 중심에 두었던 여성단체들이 1920년대 전반 주된 여성운동의 명맥을 형성하였다. 조선여자교육협회(朝鮮女子敎育協會)와 조선여자고학생상조회(朝鮮女子苦學生相助會) 등 여성의 교육 및 계몽을 통한 생활개선을 도모하는 단체들이 여럿 생겨나 활동하였다. 특히 종교 단체, 그중에서도 기독교에 기반을 둔 여성들은 활발하게 여성단체를 조직하여 1920년대 초반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대표적으로는 유각경(兪珏卿), 김활란(金活蘭) 등이 주축이 되었던 조선여자기독청년회연합회(YWCA)가 있었다. YWCA는 근우회 창립 전까지 조선에서 가장 규모가 큰 여성단체였다. 이들은 강연회, 강습 등을 통해 여성에게 신지식을 보급하고 여성의 지위 향상 및 해방을 주창하는 한편, 축첩 폐지, 공창제 폐지 등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여성단체들의 활동은 1920년대 민족주의 여성운동의 흐름을 형성했다.
한편 1920년대 초 조선에 사회주의 사조가 소개되고 사회주의 이론에 입각한 사회운동 단체들이 결성되기 시작하면서 여성운동에서도 사회주의적 여성해방 이론이 점차 등장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여성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기보다는 무산계급 여성, 여성노동자들이 여성운동 및 여성해방의 주체라고 보았으며 궁극적으로는 무산계급운동에 합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단순한 여성의 지위 향상에 운동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여성운동이 사회변혁운동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적 기반 위에서 1924년 5월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가 창립되었으며, 사회주의 여성단체들이 각 분파마다 조직되었다. 북풍파(北風派)·화요파(火曜派) 계열의 경성여자청년동맹(京城女子靑年同盟) 및 서울파의 경성여자청년회(京城女子靑年會)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위의 민족주의 계열 여성운동과 사회주의 계열 여성운동은 각기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민족주의 계열에서는 종교적 기반으로 인하여 여성의 권리에 대해 보수적인 인식을 보이고 있었다. 따라서 여성 대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무산계급 여성들의 현실을 타개해 줄 구체적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1923년 이후부터는 비교적 침체 상태에 접어든 상태였다.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운동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성에 대한 첨예한 이론적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지만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에 의한 도시 중심의 운동이었기 때문에 역시 여성의 대다수인 지방과 농촌 여성들에까지 대중적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1926년 초 조선 사회운동계에 민족협동전선을 결성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 결과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었다. 자연스럽게 여성운동 진영에서도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을 아우르는 전국적 규모의 여성단체를 결성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민족주의 계열에서는 이념 및 지도력 부재를 협동전선을 통해 돌파하고자 하였고, 사회주의 계열에서는 봉건유습 타파라는 실질적인 여성해방 과제를 포용하고 기존의 대중성 부족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근우회는 여성해방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서로 다른 가치와 방법론을 가지고 있었던 운동 진영들이 모여 만들어낸 것이었다.

인물정보

성명
정종명
한자명
鄭鍾鳴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6 ~ 미상
본적
서울 서울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2018

공적개요

1922년 4월 서울에서 여자고학생상조회(女子苦學生相助會)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하고, 1924년 4월 서울에서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를 창립하여 집행위원, 상무 등 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6년 4월 서울에서 정우회(正友會) 창립에 참여하여 검사위원 등 간부를 역임하고, 1927년 5월 서울에서 근우회(槿友會)를 창립하여 중앙집행위원장 등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1929년 7월 서울에서 신간회(新幹會) 중앙집행위원, 신간회(新幹會) 경성지회(京城支會) 서기 등으로 활동하다 여러 차례 검거됨. 1931년 3월 서울에서 적색구원회(赤色救援會) 창설에 참여하여 간부로 활동하고, 1931년 5월 서울에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재건운동으로 체포되어 징역 3년을 받음.

정종명의 발자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