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별 검색
TOTAL. 4,004 건
-
서기창 묘
서기창(1893 - 1930)은 경기 고양(高陽) 사람이다. 1919년 3월 31일 경기도 이천군(利川郡) 신둔면(新屯面) 수하리(水下里)에서 이상혁(李商赫)·김영익(金永益) 등과 같이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튿날 독립만세시위에 참여를 권유하는 통문을 작성하여 주민에게 배포하고 신둔면사무소(新屯面事務所) 앞에서 많은 주민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다가 붙잡혔다. 동년 5월 8일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동년 6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되고 동년 8월 14일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지만 또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이상재 집
월남 이상재(1851 - 1927)는 1896년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의 창립을 주도하였고, 1906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도왔으며, 1913년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YMCA) 총무로 YMCA 운동에 전념하면서 3.1독립만세운동과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1924년 소년척후대(보이스카웃 연맹의 전신)의 초대 총재와 조선일보 사장으로 인재 양성은 물론 민족언론 문화창달에 힘썼다. 1927년 2월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幹會)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같은 해 3월 노환으로 서거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손병희 집
손병희(1861-1922)는 충청북도 청원 출신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1882년 동학에 입교하여 1884년 교주 최시형을 만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의 동학혁명 때에는 통령으로서 북접(北接, 동학 교단 조직의 하나)의 동학혁명군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호남과 호서지방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전하자 원산, 강계 등지에서 은신 생활을 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후임자로서 3년간 지하에서 교세 확장을 위해 힘쓰다가, 1908년 박인호에게 교주 자리를 인계하고 우이동으로 은퇴하여 수도에 전념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국에 가까워져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려던 때에,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평소에 뜻을 같이하고 있던 보성고등보통학교장(普成高等普通學校長) 최린, 천도교 도사 권동진, 오세창 등과 함께 독립을 위한 제반 사항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1월 말, 그들과 함께 먼저 동지를 모아서 민족의 대표자로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하여 국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한편,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 참가국 위원들에게 조선의 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고, 또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써 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그 제반 계획의 실행을 최린에게 맡겼다. 이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에 대한 동지 규합이 진행되었다. 2월 26일 최린이 최남선과 수차 협의 끝에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및 의견서 등의 초안을 작성하자, 손병희는 권동진, 오세창과 함께 이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있었던 천도교 기도회 종료 보고와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천도교 도사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나용환, 장로 이종훈, 홍병기, 교인 김완규 등에게 독립만세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권유하여 승낙을 받았다.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에는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 가운데, 길선주(吉善宙),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정춘수(鄭春洙)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참석하였다. 손병희는 민족대표 중의 대표자로서 엄숙한 독립선언식의 진행을 주도하여, 이종일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100매를 탁상 위에 놓고 돌려보도록 한 후, 한용운의 인사말에 이어 만세삼창을 외치고,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어,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병사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진단학회 창립지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위치한 진단학회 창립 터 표지석이다. 본 터는 한국 역사 및 문화를 연구하기 위해 1934년 5월에 창립된 진단학회 사무소가 1936년 초에 성북동으로 옮겨갈 때까지 자리했던 곳이다.
-
민영환 집
민영환(1861 - 1905)은 당대 최고의 권문세가 집안 출신으로 예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낸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순국지사로,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 후 국가의 제반 제도의 개혁을 시도하였고, 친일적인 각료들과 대립하여 일본의 내정간섭을 비판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한일협약을 적극 반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1905년 11월 종로 이완식(李完植)의 집에서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
조선중앙일보 사옥 표지석
조선중앙일보는 여운형이 『중앙일보』를 개제하여 1933년에 창간한 일간신문이다. 여운형(呂運亨)이 『중앙일보』의 제호를 바꾸어 1933년 3월 7일 발행하였다. 편집인 겸 발행인은 최선익(崔善益), 사장은 여운형이었으나 1935년 5월 31일부터는 출자자인 최선익이 물러가고 새 출자자인 윤희중(尹希重)과 함께 경영을 담당하였다. 증자와 함께 취체역 사장에 여운형, 전무에 윤희중, 고문에 권동진(權東鎭) · 윤치호(尹致昊), 편집국장에 이관구(李寬求) 등으로 진영을 갖추었다. 체재는 대형판 13단제로, 조간 4면, 석간 4면의 8면을 발행하였다. 원래 이 신문의 계보는 『중외일보(中外日報)』(1∼1492호)→『중앙일보』(1493∼1871호)→『조선중앙일보』(1872∼3059호)로서 모두 제호를 바꾸어 인수하기 전의 호수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중외일보』는 1926년 11월 15일 창간되었는데 이상협(李相協)이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아 경영하다가 1929년 9월에는 안희제(安熙濟)가 출자하여 사장에 안희제, 부사장에 이상협으로 개편하였으나 경영난으로 1931년 9월 2일 해산을 결의하여 자진 폐간하였다. 『중앙일보』는 『중외일보』의 판권과 신문호수를 그대로 이어받아 1931년 11월 27일 속간한 일간신문으로, 발행인 겸 편집인에 김찬성(金贊成) · 노정일(盧正一) · 최선익 등이 계승하여 주간(主幹) 중심체제로 운영하였다. ‘여론의 대표기관, 정의의 옹호기관, 엄정한 비판기관’이라는 3대 신조를 내세우면서 민중의 공기로서의 소임을 다짐한 신문으로 다른 신문들과 달리 일요부록으로 2면을 발행하여 학예 · 가정 · 운동 · 아동 · 산업 등을 다루고 독자의 교양과 취미를 넓히고 값싸고 가장 좋은 신문이 되고자 노력하였다. 다른 신문들과 같이 총독부의 탄압과 재정적 운영난으로 1932년 5월 5일에 60일간의 휴간계를 내는 등 사원의 월급을 지급하지 못하여 분규가 일어나는 현상까지 초래하기도 하였다. 그 뒤 1933년 2월 16일에 여운형을 사장으로 하여 새 출발을 하였으나 1933년 3월 6일에 마지막 호를 내고 폐간하였다. 『조선중앙일보』는 『중앙일보』의 제호와 호수를 이어받아 발행한 일간신문이다. 자본금 50만 원으로 증자하여 사업확장을 위하여 경비행기를 도입, 백두산탐험비행을 단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8월 13일자 조간 4면에 제11회 베를린올림픽대회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의 가슴에 단 일장기(日章旗)를 말소한 사진을 보도하여 9월 5일부터 무기정간 당하였다. 그 뒤 성낙헌(成樂憲) 등과의 재정적인 물의와 사장 여운형의 총독부에 의한 강제적인 사장 사임 등으로 곤경에 빠져 1937년 11월 5일 발행허가 효력의 자연상실로 폐간되고 말았다. 이 신문이 『조선중앙일보』로 제호를 고친 것은 중국에서도 『중앙일보』가 발행되고 있다는 이유도 있지만, ‘조선’을 붙여 민족적 정신을 부각시키고 독립의 의지를 불어넣으려는 뜻도 함축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민족반역자의 행태를 폭로 보도하여 사회적으로 경각심을 일으키기도 하고, ‘조선민란사화(朝鮮民亂史話)’를 연재하는 등 민중의 지지와 여론의 대변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그만큼 총독부의 탄압을 받아 수없이 차압을 당하고 기사삭제의 고난을 겪었던 신문이다.
-
서북학회 표지석
서북학회는 1908년 서북 · 관서 · 해서지방 출신자들이 서울에서 조직한 애국계몽단체이다. 애국계몽운동은 1907년 중엽에 이르러 관서와 관북지방에서 뿌리를 내려 일정한 성과를 거두게 되자 전 민족적 전 국가적 차원으로의 확산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강압책으로 국권회복운동이 더욱 어렵게 되자, 이러한 제약을 보다 적극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를 통합하여 1908년 1월 조직하였다. 구성원은 주로 평안도·함경도·황해도민이다. 주요 임원은 이동휘(李東輝)·안창호(安昌浩)·박은식(朴殷植)·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최재학(崔在學) 등이었다. 임시회장 이동휘의 지도 하에 서우회관(西友會館)에서 조직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회장으로 정운복(鄭雲復), 부회장 강윤희(姜玧熙), 총무 김달하(金達河)를 선출하였다. 1909년에는 회장으로 오상규(吳相奎), 부회장 정운복, 총무 김명준(金明濬)을 선출하였다. 조직은 서우학회·한북흥학회를 토대로 하였다. 서울에 총사무소를 두었으며, 회장 1명, 부회장 1명, 총무·부총무 각 1명, 평의원 30명, 사찰원(司察員), 회계 각 1명, 서기 2명이었다. 월보(月報) 간행을 위해 주필 1명, 편집 1명, 협찬원(協贊員) 19명을 두었다. 개별 사무를 처리할 때는 위원이나 총대(總代)를 정하여 담당하게 하였다. 31개 지역에 지회를 설치하고 69개 지역에 지교(支校)를 두었다. 「사립학교령(私立學校令)」·「학회령(學會令)」 등 애국계몽운동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자, 1909년 2월 이후에는 37개 지역에 학사시찰위원(學事視察委員)을 선정, 지회·지교 활동을 보완하였다. 서북지방민으로 국권 회복을 원하는 사람이면 관(官)·민(民)을 막론하고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회원은 2,300명 정도에 이른 것으로 추산되며, 신지식층·신흥시민층을 중심으로 한 광범한 시민층이었다. 항일교육구국운동은 국민들에게 신교육의 절실한 필요를 계몽하는 것이었다. 교사 양성에 주력하는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 노동자 교육을 위한 수상야학(水商夜學)·측량과(測量科)·심학강습소(心學講習所)·농림강습소(農林講習所) 등을 설치,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각 지역 사립학교 교무의 지도와 후원을 통하여 전개되었다. 계몽강연활동은 학회의 여러 모임, 특히 운동회를 통해 광범위하게 파급되었다. 당시 상황을 알리고 애국심을 고취시켰으며 실력양성운동에의 참여를 촉구하였다. 1908년 2월부터 『서북학회월보』라는 학보를 발간, 1910년 1월까지 계속하였다. 학보를 통해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과 민권론(民權論)에 기반을 둔 실력양성론·단체론·애국론·교육구국론·실업진흥론·사회관습개혁론 등을 전달하여 민중의식을 계발하고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민족산업진흥운동이 중요시된 것은 서북학회의 사회적 기반이 신흥시민층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업교육을 장려하고, 특히 일제의 경제적 침략과 관련해 농림(農林)의 진흥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좀더 광범한 지역과 대중에게까지 애국계몽운동을 확산시키고자 하였다. 「사립학교령」·「학회령」·「기부금품모집취체규칙(寄附金品募集取締規則)」·「지방비법(地方費法)」 등 일제의 탄압에 대한 구체적 대응책을 제시하여 민중들이 적극 대처하도록 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 뒤 일제의 탄압이 더욱 강화되고 서북학회 분쇄책이 시도되자, 1909년 독립전쟁 전략을 채택하여 국외에서는 독립군기지 건설과 무관학교 설립운동에 주력하였다. 국내에서는 사립학교 유지방법 강구 등의 교육운동과 농회·농림강습소 설립, 민족산업 진흥운동 등을 계속 추진하였다. 이 학회는 애국계몽운동을 광범위하게 확산시켰을 뿐 아니라 애국계몽운동을 진정한 국권회복운동으로 전개되게 하였다. 1909년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만주 등지로 근거지를 옮겨 독립군 기지를 조성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애국계몽운동을 국외 독립군운동으로 전환시키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기관지로는 『서우(西友)』를 계승한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가 있다. 1910년 9월 강제 해산되었다. 서북학회는 1909년 초 신민회와 같이 독립전쟁전략을 최고전략으로 채택하여 독립군기지건설에 주력하여 국외독립운동의 초석이 되었으며, 국내활동 특히 교육운동은 일제하 민족운동의 원동력이었다.
-
조선건국동맹터 표지석
조선건국동맹은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에 여운형(呂運亨) 등이 조국 광복에 대비하기 위해 1940년대에 비밀리에 조직한 단체이다. 1944년 8월 10일에 국내의 사회주의자들이 일제의 패망과 조선의 해방을 대비하기 위해 여운형을 위원장으로 내세우고 현우현의 집인 서울 경운동 삼광의원(三光醫院)에서 조직한 비밀결사이다. 이여성(李如星)·이만규(李萬珪) 등의 건국동맹 가담으로 조직이 더욱 확대되자 전국적인 조직망을 펴 많은 사람들을 모았다. 건국동맹은 문서로 남기지 않는다는 ‘불문(不文)’, 말하지 않는다는 ‘불언(不言)’,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는 ‘불명(不名)’ 등 3대 원칙을 세웠다. 아울러 각인각파(各人各派)를 대동단결하여 거국일치로 일제의 모든 세력을 구축(驅逐)하고 조선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것, 반추축(反樞軸) 제국과 협력하여 대일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저해하는 일체 반동세력을 박멸할 것, 건설부면(建設部面)에 있어 일체 시위를 민주주의적 원칙에 의거하고 특히 노농대중의 해방에 치중할 것 등의 3대 강령에 따라 활동하였다. 연맹은 보조단체로 농민동맹, 부인동맹, 청년노동자운동, 학교 학생운동, 철도종업원운동, 교원세포조직운동 등을 직능별 조직으로 두어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다.또한 식량대책준비위원회와 함께 일본군 후방을 교란하고 군대를 만들 목적에서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특히 결정적 시기에 해외 한인 반일무장역량과 힘을 합쳐 해방을 주체적이고 자주적으로 쟁취하기 위해서 좌우의 이념과 상관없이 해외의 한인 항일단체와 적극적으로 결합을 추진하여, 중국 옌안[延安] 독립동맹과 연계하면서 조선의용군과의 협동 작전을 펴나가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4일에 일본 경찰에 발각된 뒤 조동호·이걸소 등 간부들이 붙잡혀 투옥되었다. 하지만 8월 11일에 일제의 항복을 미리 알고서 이만규가 독립선언문을 작성하였고,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여운형 등 몇몇 간부는 출옥 후 치안을 염려하여 건국청년치안대를 결성하였다. 해방 후에는 비밀 조직이었던 탓으로 조직 활동의 혼란과 분열이 일어났다. 8월 15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발족과 더불어 구성원 사이의 공로 다툼으로 조직의 정통성은 깨졌고, 구성원들은 각각 여러 정당과 정파에 흡수되거나 분산되고 말았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된 뒤에는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 별도의 사무실을 설치하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파견 구성원과 조선건국동맹본부 고수파가 함께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 뒤 건국동맹을 발전적으로 해체한다는 결의에 의하여, 1945년 11월 12일에 조선인민당이 결성되면서 사실상 해체되었다.
-
독립선언문 배부 터(이종일 집)
이종일(1858-1925)은 충청남도 태안 출신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1898년에 최초의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하였으며, 대한황성신문 사장에 피임되었다. 고종황제의 탄신일 경축 기사에 성수만세(聖壽萬歲)가 성수망세(聖壽亡歲)로 오기되어 불경죄로 투옥되었으나 중상모략으로 판명되어 석방되었다. 1906년에 천도교에 입교하여 천도교 월보 과장과 보성 인쇄주식회사의 사장직을 맡았다. 1919년 2월, 오세창으로부터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자신도 이 계획에 참여하여 민족대표로 서명하기로 결심하였다. 2월 27일 이종일이 사장으로 있던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공장 감독 김홍규에게 명하여, 최남선이 경영하던 신문관의 직공이 짜서 최린의 집에 보관 중이던 독립선언서 활자판을 가져오게 하여 이를 인쇄하도록 하였다. 이에 김홍규는 인쇄 직공 신영구에게 인쇄하도록 하였다. 이종일은 독립선언서 중에서 2천 매를 28일 보성사 간사인 인종익에게 주어, 1천 5백 매는 전주 천도교구에 보내고, 나머지는 충주로 보내어 밤중에 살포하도록 하였다. 또한 독립선언의 취지를 국내에 보도하고, 독립운동 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박인호, 윤익선과 함께 독립신문을 발간하기로 협의하였다. 이에 송현동에 있는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손병희와 함께 민족대표로 서명한 독립선언서 전말을 기재하고,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한 원고를 작성하여 윤익선의 명의로 발간하기로 했다. 또 3월 1일 자신이 경영하는 보성사에서 김홍규로 하여금 독립신문을 인쇄케 하여 임준식에게 배포하도록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에 인사동 태화관에 손병희 등과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자신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약 100매를 탁상에 놓고, 이 자리에 모인 민족대표에게 돌려보게 하고 함께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으며,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3년에 걸쳐 ≪한국독립비사(韓國獨立秘史)≫를 집필하여 발간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압수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3.1운동책원비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위치하고 있는 본 비는 1919년 중앙고등학교 교장이던 송진우, 김성수, 그리고 교사이던 현상윤 등이 중앙고등학교 숙직실에 모여 독립운동에 필요한 독립선언문 작성 등 3.1운동 계획을 세우던 것을 기념하여 1973년 6월 1일 동아일보사가 3·1운동의 태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
이상화 시비
이상화(1901 - 1943)는 대구(大邱) 사람이다.일제에 대한 저항시인이며, 대구고보 재학시인 1919년 3월 8일의 대구서문외(西門外) 장날을 이용하여 이만집(李萬集)·김태련(金兌鍊)·김영서(金永瑞) 등과 함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학생 시절인 1918년, 일제에 대한 민족 저항시 「신라제(新羅祭)의 노래」를 발표하여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으며, 3월 8일의 서문외 장날의 독립만세 운동 때는 계성중학교(啓聖中學校) 학생들과의 연락책으로 활약하면서 연합시위를 전개하여, 여기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군중에게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그 뒤에도 저항시를 통하여 민족혼을 일깨웠는데 1922년에는 『백조(白潮)』지 창간호에 「나의 침실로」를, 1926년에는 『개벽(開闢)』지 6월호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을 발표하였다. 1923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잡지 향영(響影)을 발간하였으며, 이듬해 귀국하여 1924년부터 1934년까지 문단을 제패했던 카프(KAPF : Korea Proletarian Artist Federation)를 발기하여 활동하였다.1935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친형인 이상정(李相定) 중국군 장군과 조국의 독립을 위한 국내조직을 협의하고 1937년 귀국하였다. 그러나 곧 대구경찰서에 붙잡혀 2개월간 구금되어 고문을 받고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3.1기념관(중앙고보 숙직실)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 숙직실에서 인촌 김성수를 비롯 고하 송진우, 기당 현상윤 등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모여 3.1운동을 모의했다. 구체적인 거사 게획은 인촌, 고하, 기당 세사람이 이곳에서 처음 발의했고 인촌을 배후에 두고 49인이 거사를 주도했으며 이들 중 33인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낭독했다. 중앙학교는 개교 65주년 기념사업으로 1973년 당시 숙직실을 복원하여 3.1기념관을 설치하고 3.1운동 책원지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