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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일보 사옥 표지석

유형
안내판·표지석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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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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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조선중앙일보는 여운형이 『중앙일보』를 개제하여 1933년에 창간한 일간신문이다. 여운형(呂運亨)이 『중앙일보』의 제호를 바꾸어 1933년 3월 7일 발행하였다. 편집인 겸 발행인은 최선익(崔善益), 사장은 여운형이었으나 1935년 5월 31일부터는 출자자인 최선익이 물러가고 새 출자자인 윤희중(尹希重)과 함께 경영을 담당하였다. 증자와 함께 취체역 사장에 여운형, 전무에 윤희중, 고문에 권동진(權東鎭) · 윤치호(尹致昊), 편집국장에 이관구(李寬求) 등으로 진영을 갖추었다. 체재는 대형판 13단제로, 조간 4면, 석간 4면의 8면을 발행하였다. 원래 이 신문의 계보는 『중외일보(中外日報)』(1∼1492호)→『중앙일보』(1493∼1871호)→『조선중앙일보』(1872∼3059호)로서 모두 제호를 바꾸어 인수하기 전의 호수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중외일보』는 1926년 11월 15일 창간되었는데 이상협(李相協)이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아 경영하다가 1929년 9월에는 안희제(安熙濟)가 출자하여 사장에 안희제, 부사장에 이상협으로 개편하였으나 경영난으로 1931년 9월 2일 해산을 결의하여 자진 폐간하였다. 『중앙일보』는 『중외일보』의 판권과 신문호수를 그대로 이어받아 1931년 11월 27일 속간한 일간신문으로, 발행인 겸 편집인에 김찬성(金贊成) · 노정일(盧正一) · 최선익 등이 계승하여 주간(主幹) 중심체제로 운영하였다. ‘여론의 대표기관, 정의의 옹호기관, 엄정한 비판기관’이라는 3대 신조를 내세우면서 민중의 공기로서의 소임을 다짐한 신문으로 다른 신문들과 달리 일요부록으로 2면을 발행하여 학예 · 가정 · 운동 · 아동 · 산업 등을 다루고 독자의 교양과 취미를 넓히고 값싸고 가장 좋은 신문이 되고자 노력하였다. 다른 신문들과 같이 총독부의 탄압과 재정적 운영난으로 1932년 5월 5일에 60일간의 휴간계를 내는 등 사원의 월급을 지급하지 못하여 분규가 일어나는 현상까지 초래하기도 하였다. 그 뒤 1933년 2월 16일에 여운형을 사장으로 하여 새 출발을 하였으나 1933년 3월 6일에 마지막 호를 내고 폐간하였다. 『조선중앙일보』는 『중앙일보』의 제호와 호수를 이어받아 발행한 일간신문이다. 자본금 50만 원으로 증자하여 사업확장을 위하여 경비행기를 도입, 백두산탐험비행을 단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8월 13일자 조간 4면에 제11회 베를린올림픽대회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의 가슴에 단 일장기(日章旗)를 말소한 사진을 보도하여 9월 5일부터 무기정간 당하였다. 그 뒤 성낙헌(成樂憲) 등과의 재정적인 물의와 사장 여운형의 총독부에 의한 강제적인 사장 사임 등으로 곤경에 빠져 1937년 11월 5일 발행허가 효력의 자연상실로 폐간되고 말았다. 이 신문이 『조선중앙일보』로 제호를 고친 것은 중국에서도 『중앙일보』가 발행되고 있다는 이유도 있지만, ‘조선’을 붙여 민족적 정신을 부각시키고 독립의 의지를 불어넣으려는 뜻도 함축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민족반역자의 행태를 폭로 보도하여 사회적으로 경각심을 일으키기도 하고, ‘조선민란사화(朝鮮民亂史話)’를 연재하는 등 민중의 지지와 여론의 대변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그만큼 총독부의 탄압을 받아 수없이 차압을 당하고 기사삭제의 고난을 겪었던 신문이다.

탐방로그

서울 종로구 견지동 111 농협중앙회 종로지점 앞 조선중앙일보 옛 사옥 표지석을 찾았다.

인물정보

성명
여운형
한자명
呂運亨
운동계열
임시정부
생몰년도
1885 ~ 1947
본적
경기도 양평
포상훈격
대한민국장
포상년도
2008

공적개요

<대한민국장 공적> 해방이후에도 대한민국 건국 및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한 공적으로 2008. 3. 1.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로 서훈 하였음.(행안부 추천) <대통령장 공적> 1918년 중국 상해에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 당수(黨首)로서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를 제출하는 한편, 국내에 김철(金徹), 선우혁(鮮宇爀) 등을 파견, 3·1운동을 촉발시키고 1919년 4월 상해임정 수립 과정에서 독립운동 정당(獨立運動政黨) 결성을 주장했으나, 임정 수립 후 외무부 차장, 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 임정(臨政)이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하는데 기여했으며, 민단(民團) 단장으로 상해거주 교포들의 권익향상에 노력하였고 인성학교(仁成學校)를 설립, 교포자제의 교육에 힘쓰고 1919년 11월 동경(東京)을 방문, 고위 관료들을 상대로 한국독립을 역설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1921년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결성에 참여, 한·중 양민족의 공동 투쟁과 이해증진을 모색하였으며,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조선대표 일원으로 참석, 조선독립을 역설하였고, 독립을 실현할 목적으로 김구(金九) 등과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고 1923년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서 임정의 수호를 위해 개조론(改造論)을 개진하였으며, 1936년 8월 베를린올림픽대회 손기정(孫基禎)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본인은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사장직에서 물러나고 신문은 폐간되었고 1940∼1942 5차례 동경(東京) 방문을 통해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고 1944년 8월 비밀리에 건국동맹(建國同盟)을 조직, 조국광복을 준비하는 등 28년에 걸친 지속적인 독립운동으로 2차례에 걸쳐 징역 3년과 징역 1년에 집행유예(執行猶豫) 3년을 받아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