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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연 집
정오연(1928-1945)은 1943년 봄 부산공업학교 재학 중 국민학교 동창생인 차병곤(車炳坤)·박정오(朴禎五) 등이 주도한 독서회(讀書會)에 가입하여 항일의식을 길러 갔다.이후 이들은 동지를 포섭함으로써 조직을 확대하고, 보다 구체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44년 5월 1일에 독서회를 비밀결사 순국당(殉國黨)으로 개편·발전시켰다. 순국당이란 명칭은 자신의 희생을 통하여 조국독립을 쟁취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 때 순국당의 강령은 '민족독립·국권회복을 위해 투쟁한다'였으며, 행동 목표로 총독 처단·군사시설 파괴·일인 집단거주지 방화 등을 설정하였다. 이같은 행동 목표는 순국당이 단순히 민족의식을 고취하거나 교내에 머무는 학생운동조직이 아니라 독립군적 조직으로 전환해 갔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당시 이들은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들면서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조국독립에 대비한 운동방침을 세워갔는데, 그는 폭약 연구책을 맡았다. 또한 그는 차병곤 등과 함께 부산 시내 영도다리에 '대한독립 만세'라고 쓴 벽보를 붙이는 등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의 폭압적인 탄압과 경계를 뚫고 국내에서 무력투쟁을 전개하기가 여의치 않자, 이들은 중국으로 넘어가 광복군(光復軍)에 참가하기로 결의하고 해외 망명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44년 7월 1차 선발대로 차병곤 등이 국경을 넘어 중국 길림(吉林)에 무사히 도착하고 뒤이어 2진이 출발했으나, 이러한 사실이 일경에 발각되어 붙잡혔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5년 5월 9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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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일신여학교 3.1운동 만세시위지
부산진일신여학교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부산진일신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1919년 3월 11일 부산에서 제일 먼저 3.1운동을 일으킨 곳이다. 부산진일신여학교 교사 주경애는 동료 교사,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위해, 3월 10일 태극기 50개를 만들었다. 이들은 다음날 오후 9시, 준비한 태극기를 손에 들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날 시위를 주도한 학생과 교사들은 일경에 붙잡혀 각각 6개월과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부산진일신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의거는 부산지역 3.1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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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천택 묘
최천택(1897-1962)은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언론인이다. 1896년 6월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서 2대 독자로 태어났다. 부산공립상업학교 2학년 때인 1912년 당시 금서였던 『동국 역사(東國歷史)』를 절친한 학우들인 박재혁(朴載赫)·김병태(金鉼泰)·김흥규(金興奎)와 돌려 가며 읽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돌린 것이 발각되어 10여 일간 구속되었다. 윤독회를 통해 결속을 다진 학우들과 함께 북로 군정서의 국내 연락을 담당하고 유사시 항일 비밀 결사대로 전환한다는 목적 아래 1913년 비밀 결사인 구세단(救世團)을 조직하였다. 1919년 3·1 운동 당시 과거 구세단 동지를 통해서 정보를 입수하여 울산, 경주, 포항 등지에 3·1 운동 상황을 알렸다. 부산에서 다시 시위를 일으키기 위해 서울에서 지하 신문으로 발행되던 『독립신문』을 등사해 집집마다 뿌리면서 3·1 운동을 다시 선동하였다. 또 1920년 과거 구세단의 동지였던 의열단원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파 사건을 함께 모의하였으며, 1920년 12월 최수봉(崔壽鳳)의 밀양경찰서 폭파 사건과 1923년 강홍렬의 의열단 군자금 모집 사건에도 연루되어 일본 경찰의 혹독한 취조에 시달렸다. 이와 같이 최천택은 의열단원의 국내 활동에 상당한 연계를 맺고 있었다. 또한 1920년 부산청년회가 결성되었을 때 부산진구락부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1921년 8월 노동자들의 주택 문제를 해결하고자 백산상회의 안희제(安熙濟)와 김철수(金喆壽)[해방 후 경남도지사] 등과 함께 주택 구제 부산 시민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일본으로 건너가는 도항민(渡航民)을 위한 권익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24년에는 김국태와 시대일보사 부산지국을 설치해 언론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친일 종교 단체인 보천교(普天敎)에서 시대일보사를 인수하려 하자 전국 지국의 단결을 조성하여 이를 무산시켰다. 청년 운동 단체의 통일이 시도되면서 부산에서 부산청년연맹과 부산부청년연맹이 대립할 때, 최천택은 노건상 그룹의 부산청년연맹에서 집행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부산의 청년 단체들이 단일의 부산청년동맹으로 통일될 때 최천택은 30세가 넘은 나이 때문에 활동 공간을 신간회(新幹會)로 옮겼다. 1927년 7월 신간회 부산지회가 결성되었을 때 상무 간사로 활동하면서, 1928년 부산보통학교 일본인 교사의 여학생 능욕 사건에 대한 규탄 대회에 앞장섰다. 1929년 2월 신간회 부산지회장이 된 후, 11월 광주 학생 운동이 일어나자 부산제2상업학교 학생들과 접촉하며 시위를 확산시키려 하였다. 이후 신간회 해소론이 등장할 때까지 신간회 부산지회의 회보 발간, 신간회 경남연합회 발기 등을 추진하였다. 1941년에는 장건상(張建相) 해외 탈출 사건과 소설가 김동리(金東里)의 형인 김범부(金凡夫)의 해인사(海印寺)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해방 후에도 왕성하게 사회 활동을 하였다. 1946년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 경남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으며, 1948년 민주중보사의 사장에 취임하였다. 1950년 5월 2대 제헌 의원 선거 때 부산시 동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혁신 성향의 장건상 선거 본부의 사무장을 맡아 당선시켰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좌익계로 분류되어 해방 직후 민주주의민족전선 경남위원장이었던 김동산(金東山)과 함께 육군 특무대에서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6·25 전쟁 이후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을 사수하다 전사한 정발(鄭撥) 장군의 정공단(鄭公壇)을 개수하고 봉제(奉祭)하면서 자유당 정권의 붕괴를 지켜보았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혁신동지총연맹의 최고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부산시 동구 을구에 출마하였으나 혁신계의 난립으로 낙선하였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군사 정권이 들어서자 서면 육군형무소에서 수개월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육군형무소에서의 후유증 때문인지 1961년 11월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자택에서 파란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2003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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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3.1독립운동기념탑
부산3.1독립운동기념탑은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부산광역시에서 기념탑을 세우기로 기획하였다. 1995년 8월 15일 착공하고, 1996년 1996년 3월 1일 완공되었다. 부산 지역의 3·1 운동의 역사와 정신을 후대에 계승하고 살아 있는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기념탑을 세웠다. 상징탑과 내부 조형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21m의 높이로 솟아 있는 상징탑은 창조하는 미래를 상징하고 있다. 내부 조형 탑은 선열들의 독립운동 정신을, 천장의 8괘 마당은 결집하는 민족정기를 표현하고 있다. 면적은 2,707㎡이다. 1996년부터 2002년까지 기념탑 앞에서 3·1 운동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다 2003년부터 3·1 운동의 주역을 기리는 의미에서, 기념식 장소를 동래고등학교[옛 동래고등보통학교]로 옮겨 기념식을 개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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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근우회 동래지부 표지석
동래 일성관 건물은 1923년 동래청년회(東萊靑年會)의 회관으로 건립되었다. 당시 동래기영회[한말 동래부의 퇴임관리들이 조직한 일종의 계(契)로서 동래 지역 애국 계몽운동 주도]는 회관 설립을 위하여 동래청년회에 건물 1채와 밭 462.81㎡[140평]를 기부하였다. 동래 청년 회관은 일제 강점기에 동래 지역의 대표적인 항일 운동 단체들이 모여 있던 곳이었다. 동래청년회뿐 아니라 신간회 동래지회(新幹會東萊支會)·근우회 동래지회(槿友會東萊支會)·청년동맹·동래노동조합·소년동맹 등 여러 단체들의 사무실이 들어오면서 동래 청년 회관은 동래 지역 항일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동래 일성관 건물은 동래 지역 사회 운동 단체가 입주하여 활동하던 항일 운동의 거점이자 현장이었다. 따라서 일제 시기 항일 의식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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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시장 만세거리 기념비
동래 만세거리는 1995년 광복 50주년 기념사업으로, 1919년 동래 장터 3·1 운동의 역사와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부산광역시 동래구지명위원회에서 동래 장터 3·1 운동의 중심지였던 옛 남문 터와 동래 시장 주변을 동래 만세 거리로 지정하였다. 1919년 3월 4일 서울에서 연락책인 김법린과 김상헌이 범어사로 내려와 승려들과 청련암에서 시위를 계획하였다. 3월 6일 오후 범어사에서 선언식을 거행한 후, 3월 7일 동래 장날에 맞춰 30여 명이 시장 중앙에서 선언서를 배포하고 함께 만세를 부르며 경찰서로 돌진하였다. 이 시위에 참여자들은 대부분 체포되었다. 3월 17일 범어사 명정학교 및 지방학림 졸업생 송별회 모임에서 18일 새벽 동래시장 인근 불교포교당(현 동래구청 내로 추정)으로 집결하기로 계획하였으나 밀고로 실패하였다. 18일 밤 40여명의 범어사 학생들이 동래읍성 서문에서 남문으로 이르기까지 만세시위를 하고 자진해산하였다. 또 19일에는 범어사 학생들이 3차례에 걸쳐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경찰에 체포되었다. 동래고보에서도 3월 초 부산상업학교 대표와 서울학생대표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김귀룡·고영건·엄진영 등이 거사를 도모하였고, 3월 10일 경성고등공업 전문학교에 다니던 곽상훈이 독립선언서를 들고 동래고보 교사 이환을 찾아가 전달하면서 더 계획적으로 진행되어 3월 13일 동래 장날 망미루와 동래읍성 남문 부근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여, 시위참여자 대부분이 체포되었다. 1996년부터 매년 3월 1일 독립 만세 시위를 재현하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1999년부터는 동래문화원에서 주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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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임갑 기적비
박임갑(1902-1990)은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1919년 3월 13일 당시 동래고등보통학교(東萊高等普通學校) 4학년 학생이었던 박임갑은 동래군(東萊郡) 동래읍(東萊邑) 장날을 기하여 엄진영(嚴進永)·고영건(高永建)·김귀룡(金貴龍) 등이 주도한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다. 같은 학교 학생 수 백 명과 장터에 모인 군중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3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형을 선고 받고 부산형무소(釜山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렀다. 1992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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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차정 집
박차정(1910-1944)는 부산광역시의 독립운동가이다. 1924년 5월 조선소년동맹(朝鮮少年同盟) 동래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동래(東萊) 일신(日新)여학교에 재학 중 조선청년동맹(朝鮮靑年同盟) 동래지부 집행위원장인 숙부 박일형의 권유로 조선청년동맹 및 근우회(槿友會) 동래지부 회원, 동래노동조합 조합원, 신간회 동래지회 회원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3월 일신학교를 졸업한 뒤, 동년 7월 서울 수운회관(水雲會館)에서 개최된 근우회 제2회 전국대회에 동래지부 대의원 자격으로 참석하여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동년 9월에는 조사연구부장, 상무위원, 선전 및 출판 부장 등의 직책을 맡아 여성들의 민족운동 활성화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또한 동년 12월에는 근우회 중앙간부들과 함께 서울 시내의 각 여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광주학생운동 동조 시위를 주도하여 전국적으로 반일 학생운동으로 확산시키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 후 1930년 1월 부산방직(釜山紡織) 파업 사건을 주도하다가 동래에서 붙잡힌 박차정은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으나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출옥 후 1930년 2월에 중국 북경으로 망명한 박차정은 1931년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을 만나 결혼하고 의열단 단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2년 의열단이 한중 연합항일투쟁의 일환으로, 장개석의 도움을 받아 남경(난징)에 위치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中國中央陸軍軍官學校) 교외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를 설립하자 제1기 여자부 교관으로 선정되어 사관생도 양성을 담당하였다. 1935년 6월에는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부녀부(婦女部)를 담당하고, 1936년 7월에는 이청천의 처 이성실과 함께 민족혁명당원 가족들을 규합할 목적으로 남경조선부인회(南京朝鮮婦人會)를 조직하여 일선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 후 1937년 11월 의열단의 한중민족연합전선(韓中民族聯合戰線)의 일환으로 파견된 박차정은 대일본 라디오방송을 통해 선전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1938년 4∼5월경에는 기관지 『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線)』에 「경고, 일본의 혁명대중」, 「조선부녀와 부녀운동」이라는 글을 투고하여 총체적인 무장 궐기를 촉구하였다. 그 후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창설되자,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婦女服務團)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선임되어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다가 1939년 2월 강서성 곤륜산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하던 중 부상을 입었다. 그 후 부상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44년 5월 27일 중경에서 서거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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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운동기념탑
항일운동기념탑은 1898년 동래부학교로 개교한 이래 일제강점기에 동래지역 3.1운동을 비롯하여 부산항일학생의거(일명 노다이사건)등 무려 10여차례 항일민족운동을 주도하고 그 선봉에 섰던 동래고 출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이를 애국 애족 애교 봉사의 동고정신과 신종여시의 동고교풍으로 승화시켜 만세에 길이 전하고자 전 동문의 성금과 동래기영회, 부산광역시, 부산광역시교육청의 찬조금으로 개교100주년을 앞두고 제34회 동고의 날에 즈음하여 1995년 11월 4일에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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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혁 추모비
박재혁(1895-1921)은 일제강점기 의열단에서 부산경찰서장 하시모도에게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이다.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무역상회의 고용인으로 일하다가, 1917년경부터 상해 등 중국 각지와 싱가포르 등지를 돌아다니며 무역에 종사하였으며, 중국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교유를 가졌다. 1920년 8월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과의 연락으로 상해로 가 의열단에 입단하고, 9월 상순 고서(古書) 짐 속에 폭탄을 숨겨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13일 부산에 돌아왔다. 이튿날 부산경찰서로 찾아가 평소 안면이 있던 서장 하시모도[橋本秀平]를 만나 진기한 고서를 보여준다며 봇짐을 풀고 짐 속에 있던 폭탄을 꺼내어 서장을 죽이려는 의도를 밝힌 다음, 폭탄을 던졌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두 사람 모두 중상을 입었다. 중상을 입고 붙잡혀, 1921년 3월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과 폭탄으로 인한 상처로 고통을 겪다가 단식을 하던 중 옥사하였다. 1962년에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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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항일학생의거기념탑
부산 학생 항일 의거 기념탑은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성지곡로에 있는 1940년 부산 항일 학생 의거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탑이다. 1940년 11월 23일 구덕 운동장에서 개최된 제2회 경남 전력 증강 국방 경기 대회에 참가한 동래중학교[현 동래고등학교]와 부산제2상업학교[구 부산상업고등학교, 현 개성고등학교] 학생들이 일제의 민족적 차별에 항거하였는데, 이것이 부산 항일 학생 의거, 일명 ‘노다이 사건’이다. 2003년 6월 부산항일학생의거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항일 의거의 뜻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 부산 항일 학생 의거 기념탑 설치 부지를 확보하고 9월에 건립비를 마련하였다. 2004년 3월 착공에 들어가 2004년 10월에 완공하여, 11월 23일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부산 항일 학생 의거 기념탑은 일제 말기 전시 체제 아래 전개된 국내 최대 규모의 학생 항일 운동으로,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장 역할을 하고 있으며, 부산 시민의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 높이가 11.3m이고, 탑 좌우에 항쟁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이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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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장터3.1운동기념비
1919년 3월 29일 구포장터에서 일어났던 3.1만세운동을 기념하고 만세운동에 참가한 선열들의 민족혼을 기리기 위하여 광복 50주년인 1995년 8월 15일 조성하였다. 구포장터 3.1운동은 1919년 3월 29일 구포 장터를 중심으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이다.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 양봉근이 내려와 구포면 서기 임봉래와 상의하고 다음날 윤경(尹涇)과 유기호(柳基護)와도 만나 거사를 당부하고 상경하였다. 임봉래·유기호·윤경·김옥겸(金玉兼)·김윤길·허정·김용이 등은 1919년 3월 27·28일 박영초(朴永初)·이수련 집에서 논의를 거듭한 끝에 3월 29일 구포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이들은 교대로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고, 의거 전날 밤 큰 태극기 하나와 ‘대한 독립 만세’라고 크게 쓴 현수막도 만들었다. 3월 29일 정오 박덕홍(朴德弘)·손진태(孫晉泰)·김장학(金章鶴)·이몽석(李夢石)·양태용(梁太溶)·김영길·정치호(鄭致浩)·권용학(權龍鶴)·안화중(安華重)·허희중(許希中) 등 청년 동지들과 비밀리에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고 장꾼 1,000여 명과 시위에 들어갔다. 일부는 시위를 위하여 시장 철시를 호소하면서 장꾼을 지휘하였고, 김윤길 등은 구포면사무소로 달려가 면장에게 민족적 양심으로 뉘우치고 동참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 후 김옥겸 외 11명의 주도 인물이 구포주재소에 구금되자 임봉래·윤정은(尹正殷) 등은 1,200여 명의 시위 군중을 이끌고 석방을 요구하며 구포주재소로 돌진하였다. 일제 경찰들은 시위 군중들에게 무차별 발포를 하여 강제 해산시켰다.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 과정에서 일본 군경 3명과 한국인 경찰 1명이 중상을 입었고, 시위 군중들은 9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재판에 회부된 인물은 42명으로 대부분이 20~30대의 청년들이었다.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은 부산부와 동래읍 시위가 학생들이 중심이었던 것과 달리 노동자, 농민, 상인이 중심이 되어 전개된 데 큰 특징이 있다. 따라서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은 1920년대 구포 지역 청년 운동 및 농민 운동 등 사회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