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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장터3.1운동기념비

유형
비석
주소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1065

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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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1919년 3월 29일 구포장터에서 일어났던 3.1만세운동을 기념하고 만세운동에 참가한 선열들의 민족혼을 기리기 위하여 광복 50주년인 1995년 8월 15일 조성하였다. 
구포장터 3.1운동은 1919년 3월 29일 구포 장터를 중심으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이다.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 양봉근이 내려와 구포면 서기 임봉래와 상의하고 다음날 윤경(尹涇)과 유기호(柳基護)와도 만나 거사를 당부하고 상경하였다. 임봉래·유기호·윤경·김옥겸(金玉兼)·김윤길·허정·김용이 등은 1919년 3월 27·28일 박영초(朴永初)·이수련 집에서 논의를 거듭한 끝에 3월 29일 구포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이들은 교대로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고, 의거 전날 밤 큰 태극기 하나와 ‘대한 독립 만세’라고 크게 쓴 현수막도 만들었다. 3월 29일 정오 박덕홍(朴德弘)·손진태(孫晉泰)·김장학(金章鶴)·이몽석(李夢石)·양태용(梁太溶)·김영길·정치호(鄭致浩)·권용학(權龍鶴)·안화중(安華重)·허희중(許希中) 등 청년 동지들과 비밀리에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고 장꾼 1,000여 명과 시위에 들어갔다. 일부는 시위를 위하여 시장 철시를 호소하면서 장꾼을 지휘하였고, 김윤길 등은 구포면사무소로 달려가 면장에게 민족적 양심으로 뉘우치고 동참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 후 김옥겸 외 11명의 주도 인물이 구포주재소에 구금되자 임봉래·윤정은(尹正殷) 등은 1,200여 명의 시위 군중을 이끌고 석방을 요구하며 구포주재소로 돌진하였다. 일제 경찰들은 시위 군중들에게 무차별 발포를 하여 강제 해산시켰다.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 과정에서 일본 군경 3명과 한국인 경찰 1명이 중상을 입었고, 시위 군중들은 9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재판에 회부된 인물은 42명으로 대부분이 20~30대의 청년들이었다.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은 부산부와 동래읍 시위가 학생들이 중심이었던 것과 달리 노동자, 농민, 상인이 중심이 되어 전개된 데 큰 특징이 있다. 따라서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은 1920년대 구포 지역 청년 운동 및 농민 운동 등 사회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탐방로그

구포장터 3.1운동 기념비가 있는 부산 북구 구포동 1065를 찾아왔지만,
저쪽은 차량을 세울 수 없고, 반대편 이곳에서는 접근이 불가능하다.
조금 떨어져 있는 구포역에 차량을 세우고 산책로를 통해 접근이 가능했다.

인물정보

성명
강석이
한자명
姜碩伊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65 ~ 미상
본적
경상남도 동래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14

공적개요

1919년 3월 29일 경남(慶南) 동래군(東萊郡) 귀포면(龜浦面)에서 다수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구금된 동지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구포주재소(龜浦駐在所)에 돌진하여 유리창및 기물(器物)을 파괴하고 순사를 응징하는 등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권용학
한자명
權龍鶴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1 ~ 미상
본적
경상남도 동래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17

공적개요

1919년 3월 29일 경남(慶南) 동래군(東萊郡) 구포시장(龜浦市場)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활동하다 체포되어 징역 4월, 집행유예(執行猶豫) 2년을 받음.

권용학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달수
한자명
金達洙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8 ~ 1924
본적
경상남도 부산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5

공적개요

1919. 3. 29 부산(釜山) 동래(東萊) 구포(龜浦) 시장에서 면민(面民) 1천 2백여명의 군중(群衆)을 지휘(指揮)하여 독립만세 시위(獨立萬歲示威)를 주도(主導)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덕원
한자명
金德元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59 ~ 미상
본적
경상남도 동래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14

공적개요

1919년 3월 29일 경남(慶南) 동래군(東萊郡) 구포면(龜浦面) 구포리(龜浦里) 구포시장(龜浦市場)에서 독립만세시위 도중 일본 경찰에 구금된 시위 참가자 김옥겸(金玉兼) 등 12명을 구출하기 위해 1,2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구포 경찰관 주재소(龜浦警察官駐在所) 순사를 응징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징역 8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영길
한자명
金永吉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24 ~ 1962
본적
경상북도 영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 1942. 박기수(朴基秀) 등 6인과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2. 1943. 4 경북 영천신사를 방화. 3. 1943. 4 대구신사를 방화하였으나 실패. 4. 1943. 5 대구 주둔 일군 80연대 맨홀 내에 세균(細菌)을 투입. 5. 1943. 민심교란을 위하여 야간에 대구시내 관공서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시내 요소에 일군 패전 전황삐라를 살포. 6. 1943. 일군 24부대 병기고를 폭파케 함. 7. 1944. 군자금 모집 중 발각되어 징역 4년 형을 받음. (복형증명서(服刑證明書) 당시변호인 3인의 입증)

인물정보

성명
김옥겸
한자명
金玉兼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2 ~ 1957
본적
경상남도 김해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구포(龜浦)시장에서 3.1운동을 주도하다가 1년형을 받고 복역한 사실이 있고 출옥 후 정의부(正義府)에 가담하여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윤길
한자명
金潤吉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9 ~ 1931
본적
경상남도 동래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2008

공적개요

1919년 3월 경남(慶南) 동래군(東萊郡) 구포면(龜浦面) 구포시장(龜浦市場)에서 독립만세 시위 운동(獨立萬歲示威運動)을 전개하였다가 체포(逮捕)되어 징역 10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김윤길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장학
한자명
金章鶴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5 ~ 미상
본적
경상남도 김해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19

공적개요

1919년 3월 상순부터 경남 동래군 구포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하고 같은 달 29일에 시장에 모인 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되어 징역 4월, 집행유예 2년을 받음.

김장학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노원필
한자명
盧源弼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75 ~ 1957
본적
경상남도 동래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14

공적개요

1919년 3월 29일 경남(慶南) 동래군(東萊郡) 구포면(龜浦面) 구포시장(龜浦市場)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구포 경찰관 주재소(龜浦警察官駐在所)에 구금된 김옥겸(金玉兼) 외 11명의 동지들을 구출하기 위해 활동하다 체포되어 징역 4월, 집행유예(執行猶豫) 2년을 받음.

인물정보

성명
도우황
한자명
都宇黃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1 ~ 미상
본적
경상남도 동래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17

공적개요

1919년 3월 29일 경남(慶南) 동래군(東萊郡) 구포면(龜浦面) 구포리(龜浦里) 소재 구포(龜浦)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이끌던 11명이 체포되자 이들을 구하기 위해 군중을 이끌고 구포 경찰관 주재소(龜浦警察官駐在所)를 공격하여 기물을 부수고 일본 순사(日本巡査) 등을 응징하는 등 활동하다 체포되어 징역 4월, 집행유예(執行猶豫) 2년을 받음.

인물정보

성명
박덕홍
한자명
朴德弘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6 ~ 미상
본적
경상남도 동래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2022

공적개요

1919년 3월 29일 경남 동래군 구포면 구포시장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되어 징역 8월을 받음.

인물정보

성명
박도백
한자명
朴道伯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2 ~ 1939
본적
경상남도 김해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6

공적개요

1919. 3. 29 경남(慶南) 구포(龜浦)시장에서 장날에 모인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다 일경(日警)에 피체(被逮)되어 징역 1년 3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박석오
한자명
朴碩五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900 ~ 미상
본적
경상남도 동래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22

공적개요

1919년 3월 29일 경남 동래군 구포면에서 구포시장 시위 도중 체포된 김옥겸 등을 구출하기 위해 구포경찰관 주재소를 공격하다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됨.

인물정보

성명
백인봉
한자명
白仁鳳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7 ~ 미상
본적
경상남도 동래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17

공적개요

1919년 3월 29일 경남(慶南) 동래군(東萊郡) 구포면(龜浦面) 구포리(龜浦里) 소재 구포시장(龜浦市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이끌던 11명이 체포되자 이들을 구하기 위해 군중을 이끌고 구포 경찰관 주재소(龜浦警察官駐在所)를 공격하여 기물을 부수고 일본 순사(日本巡査) 등을 응징하는 등 활동하다 체포되어 징역 6월을 받음.

인물정보

성명
신성집
한자명
申性執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63 ~ 미상
본적
경상남도 동래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22

공적개요

1919년 3월 29일 경남 동래군 구포면 구포시장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하는 한편 당시 시위 현장에서 체포된 김옥겸(金玉兼) 등을 구출하고자 구포경찰관주재소를 공격하다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됨.

인물정보

성명
안화중
한자명
安華重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2 ~ 1921
본적
경상남도 동래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14

공적개요

1919년 3월 29일 경남(慶南) 동래군(東萊郡) 구포면(龜浦面) 구포시장(龜浦市場)에서 천여 명의 군중과 시장 상인들의 독립만세운동 참여를 지휘하다 체포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양태용
한자명
梁太鎔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3 ~ 1937
본적
경상남도 부산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7

공적개요

1919. 3. 30 부산(釜山) 동래군(東萊郡) 구포시장(龜浦市場)에서 임봉래(林奉來), 윤정은(尹正殷) 등과 같이 시장에 모인 군중들을 지휘하며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4월에 집행유예(執行猶豫) 2년을 받고 5개월간(個月間)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유기호
한자명
劉基鎬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56 ~ 미상
본적
황해도 서흥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22

공적개요

1919년 3월 10일 황해도 서흥군 능리시장에서 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음.

인물정보

성명
윤장수
한자명
尹章守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5 ~ 1958
본적
경상남도 동래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5

공적개요

1919. 3. 30 부산(釜山) 동래군(東萊郡) 구포시장(龜浦市場)에서 임봉래(林鳳來), 윤정은(尹正殷) 등과 같이 시장에모인 군중들을 지휘하며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4월에 집행유예(執行猶豫) 2년을 받고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윤정은
한자명
尹正殷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52 ~ 1920
본적
경상남도 동래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1

공적개요

1919. 3. 29 경남 동래 구포 장터에 모인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주재소로 진행하다가 피체된 주동자의 구조를 위하여 1,200여 명의 시위자를 선도하여 주재소를 습격하고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며 활동하다 피체되어 징역 1년 3월을 받아 복역 중 옥중사 순국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몽석
한자명
李夢石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8 ~ 1929
본적
경상남도 부산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14

공적개요

1919년 3월 29일 경남(慶南) 동래군(東萊郡) 구포면(龜浦面) 구포시장(龜浦市場)에서 군중 천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한국독립 만세(韓國獨立萬歲)를 외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징역 4월 집행유예(執行猶豫) 2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임봉래
한자명
林鳳來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0 ~ 1968
본적
경상남도 부산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년 3.1운동시 부산(釜山) 진구(鎭區) 화명리(華明里) 화명학교(華明學校) 앞에서 학생(學生) 및 주민(住民)을 동원(動員) 독립만세’(獨立萬歲)를 부르며 양산(梁山)까지 행진(行進)하다가 일본수비대(日本守備隊)에 피체(被逮)되어 2년간(年間) 복역(服役)함.

인물정보

성명
조해규
한자명
趙海奎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78 ~ 1959
본적
경상남도 동래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19

공적개요

1919년 3월 29일 경남 동래군 구포면 구포시장에서 장에 모인 천여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된 김옥겸(金玉謙) 등을 구출하기 위해 주재소를 습격하고 순사와 헌병을 응징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름.

인물정보

성명
진유관
한자명
陳有寬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1 ~ 1946
본적
경상남도 동래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19

공적개요

1919년 3월 29일 경남 동래군 구포면 구포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체포된 동지를 구출하기 위해 주재소와 일본인 순사를 공격하다 체포되어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받음.

인물정보

성명
최한봉
한자명
崔漢鳳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2 ~ 1961
본적
경상남도 동래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22

공적개요

1919년 3월 29일 경남 동래군 구포면에서 구포시장 만세시위 도중 체포된 김옥겸 등을 구출하기 위해 구포경찰관주재소를 공격하다 체포되어 면소됨.

인물정보

성명
허정
한자명
許楨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4 ~ 1948
본적
경상남도 동래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21

공적개요

1919년 3월 29일 경남 동래군 구포면 구포시장에서 장에 모인 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된 김옥겸(金玉謙) 등을 구출하기 위해 주재소를 습격하고 순사와 헌병을 응징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름.

인물정보

성명
허치옥
한자명
許致玉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4 ~ 1924
본적
경상남도 동래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3.29 임봉래(林鳳來) 김옥겸(金玉兼)등과 함께 동래(東萊) 구포(龜浦)장터에 모인 1,200여명(餘名)의 군중(群衆)과 함께 독립만세’(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고 구금(拘禁)된 동지(同志)들의 석방(釋放)을 요구(要求)하며 주재소(駐在所)에 돌진(突進)하여 유리창과 기물(器物)을 파괴(破壞)하는등 시위(示威)를 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1년을 받아 1년 4월여(月餘)의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허희중
한자명
許希中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7 ~ 1954
본적
경상남도 동래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06

공적개요

1919년 3월 29일 경남(慶南) 구포면(龜浦面) 구포리(龜浦里) 구포(龜浦)시장에서 김옥겸(金玉兼) 등과 모의하여 1000여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太極旗)를 흔들고 한국독립만세를 고창(高唱)·연호(連呼)하다가 체포되어 4개월(個月) 이상(以上)의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