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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락 묘
김흥락(1827 - 1899)의 본관은 의성, 자는 계맹, 호는 서산이며, 조선 말기 안동 출신의 의병장이다. 1895년 12월 30일 내려진 단발령 소식이 안동에 전해지자 김흥락은 의병을 일으키려는 논의를 이끌어 냈다. 논의 과정에서 김흥락은 1차 의병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지병과 대묘(大廟: 학봉 김성일의 사당)를 모시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하고, 봉화 닭실[酉谷] 출신의 참봉 권세연(權世淵)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권세연이 이끄는 1차 의진이 결성되자 안동부성에 머물며 여러 문중의 협력을 이끌어 내는 데 주력하였다. 한편, 안동의진은 1896년 1월 하순 안동부성 탈환에 성공하고, 3월 7일 지휘부를 포(砲)를 중심으로 하는 전투적인 편제로 편성하였다. 일주일 뒤 권세연이 의병장에서 스스로 물러나자, 김흥락은 후임으로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를 선출하고 하회의 류도성(柳道性)과 함께 지휘장(指揮將)을 맡아 안동의진의 활동을 뒷받침하였다. 의병이 해산된 뒤 검제 서산재(西山齋)에서 병약한 몸으로 학문에 몰두하다가 1899년 세상을 떠났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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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철 묘
전성철(1894 - 1950)의 자는 덕수, 이명은 전성영이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전성철은 1919년 3월 23일 3차 안동면 시위에 참가하였다. 3차 안동면 시위는 안동군민들이 대거 참가하여 군 전체가 벌인 만세 시위로 일본 경찰의 공격과 탄압이 극심하였다. 그리고 또다시 김후성(金後性)·권영헌(權寧憲) 등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인 30여 명과 함께 3월 24일 풍산장날을 이용하여 풍산시장 부근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출동한 일본 수비대에 체포된 전성철은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형을 선고 받고 항소하였으나, 5월 12일 대구복심법원과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2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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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락 묘
김회락(1844 - 1896)의 자는 현우, 경승이며, 조선 말기 안동 출신의 의병이다. 김회락은 일찍이 서산사숙(西山私塾)에서 수학하였고,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등으로 전국에서 의병 항쟁이 펼쳐지자 안동의진(安東義陳)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특히 일직면 귀미리 출신인 김도화(金道和)가 의병장으로 추대된 뒤 안동의진의 포장(砲將)을 맡아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북후면 옹천 전투에서 패한 뒤 서후면 금계리 의성김씨 학봉 종택에서 척후장 김진의(金鎭懿)와 함께 일본군과 관군에게 체포되어, 1896년 7월 22일 새벽 안동부로 끌려가 순국하였다. 김회락은 순국하면서 아내에게 “보수(報讎: 원수를 갚음)를 가르쳐라” 하고 고함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 총에 맞아 피가 흐르자 “이 피가 어떤 피인데 이렇게 흘릴 수가 있나” 하면서 도포 자락으로 감쌌다고 한다.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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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암회 집
이암회(1896 - 1919)는 1919년 3월 18일 2차 안동면 시위에 참가한 데 이어 3월 23일 발생한 3차 안동면 시위에도 참여하였다. 3차 안동면 시위는 안동면민뿐만 아니라 안동 관내의 여러 주민들이 함께 참여하여 규모가 군 전체에까지 이르렀다. 3,000여 명의 시위 군중은 경찰서와 안동지원을 파괴하고 “구금된 사람을 구출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경찰서와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원으로 대거 몰려갔다. 일본 수비대 앞에서도 기세를 잃지 않고 격렬히 맞서다가 30여 명의 사망자와 5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암회는 안동면 출신의 김옥진, 서후면 출신의 권두경, 와룡면 출신의 김필수 등과 함께 일본 수비대가 쏜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82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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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암회 묘
이암회(1896 - 1919)는 1919년 3월 18일 2차 안동면 시위에 참가한 데 이어 3월 23일 발생한 3차 안동면 시위에도 참여하였다. 3차 안동면 시위는 안동면민뿐만 아니라 안동 관내의 여러 주민들이 함께 참여하여 규모가 군 전체에까지 이르렀다. 3,000여 명의 시위 군중은 경찰서와 안동지원을 파괴하고 “구금된 사람을 구출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경찰서와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원으로 대거 몰려갔다. 일본 수비대 앞에서도 기세를 잃지 않고 격렬히 맞서다가 30여 명의 사망자와 5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암회는 안동면 출신의 김옥진, 서후면 출신의 권두경, 와룡면 출신의 김필수 등과 함께 일본 수비대가 쏜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82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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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식 정자(하락정)
송기식(1878 - 1949)의 자는 치공, 호는 해창이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13년 송천동에 설립된 봉양서숙(鳳陽書塾)에서 교사로 활동하던 송기식은 1919년 3월 18일에 일어난 안동면 2차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이끌었다. 안동면 2차 시위는 안동교회와 송기식을 비롯한 유림들에 의해 두 갈래로 준비되었다. 3월 18일 장날 낮 12시경, 삼산동 곡물전(현 신한은행과 농협안동지부 중간지점) 앞에서 기독교인 30여 명이 부르는 만세의 함성이 울리자 송기식은 류동붕(柳東鵬)·송장식(宋章植)·송홍식(宋弘植)·권중호(權中鎬) 등 유림들과 시위대를 이끌고 여기에 합세하였다. 장터에 모인 다수의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을 벌이던 송기식은 출동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된 뒤 1919년 4월 7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형을 언도 받았다. 이후 항소하였으나, 5월 2일 대구복심법원과 6월 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6개월의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저술 및 작품] 『해창문집(海窓文集)』이 전한다.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받았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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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화 묘
김도화(1825 - 1912)의 자는 달민, 호는 척암이며, 안동 출신의 의병장이다. 1893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김흥락(金興洛), 류지호(柳止鎬) 등과 더불어 안동의진 결성을 결의하고 「안동통문(安東通文)」 작성에 참여하였다. 1896년 1월 20일 안동의진이 구성될 때 여러 지도자들과 협의하여 봉화 유곡(酉谷, 닭실) 출신 권세연(權世淵)을 의병장으로 뽑았다. 안동의진의 1차 대장 권세연이 물러나자 김도화는 3월 13일 안동의진의 대장에 추대되었다. 3월 14일 대장에 취임한 후 류난영(柳蘭榮)을 도총(都摠)에, 김흥락과 류도성을 지휘장에 선임하는 등 조직을 정비하였다. 또 의병을 일으킨 뜻을 왕에게 아뢰는 「창의진정소(倡義陳情疏)」를 올리고 각지로 격문을 발송하는 한편 인근 지역에도 의병을 모으는 소모관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태봉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기 위해 권문팔(權文八)을 대표로 삼아 안동의병 250여 명을 파견하였다. 3월 26일 예천에서 안동 지역의 6개 의진과 제천의 호좌의진(湖左義陳)은 연합전투를 다짐하였고, 3월 29일 태봉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격렬한 공방전 끝에 태봉 함락은 실패로 돌아갔다. 태봉 전투의 패배 이후 다시 병력을 보충하여 의진을 정비하고 전투 준비를 갖추었으나 8월 영남 지역 의병의 해산을 종용하는 고종의 칙령이 안동부에 도착하고 이어 9월 11일 관군이 안동부에 도착하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의진을 해산했다. 이에 따라 약 9개월에 걸친 안동의진 항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청파오조약소(請罷五條約疏)」, 「포고만국문(布告萬國文)」, 「포고각국공사문(布告各國公司文)」을 작성하였다. 1910년 끝내 일제 강점으로 나라가 망하자 “국가의 통치 권한이 폐하의 사유가 아니고, 한 치의 땅도 한 사람의 백성도 폐하 사물(私物)이 아닙니다. 폐하, 어찌하여 필부들이 자기 논밭을 매매하듯이 해버렸습니까?”라는 내용을 담은 상소문을 올리고, 1912년 8월 7일 세상을 떠났다. 1983년에 대한민국 건국포장이, 1990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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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감옥 안동분감 터 표지석
대구감옥 안동분감 터 표지석은 안동분감이 있었던 자리였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지석이다. 일제는 1908년 전국의 감옥서를 폐지하고 경성감옥을 비롯한 8개의 감옥을 설치하고 본감을 두었다. 8개 감옥의 감방면적을 집계하면 298평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지만 수용인원은 2,000명을 넘었다. 밀려드는 수감자로 인해 누울 수가 없어 1/2내지, 1/3씩 교대로 잠을 잘 정도로 환경이 매우 열악했다. 대구감옥은 감방 3개 15평에 150명이나 되는 수감자가 수용됐었다고 한다. 이렇듯 일제에 맞서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면서 감옥의 수용인원이 급격히 증가하자 점차 본감 예하로 분감을 지방 곳곳에 설치해 식민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1921년 7월 설치된 안동분감은 일제의 주요 탄압기군 가운데 하나였다. 1920년대 사회운동, 1930년대 안동콤그룹, 1940년대 안동농림학교 학생항일운동 참여자 등 수많은 항일지사들이 이곳에서 고초를 겪었다. 안동분감은 1945년 11월 안동형무소로 승격되었고, 1961년 12월 안동교도소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1985년 안동시 풍산읍으로 자리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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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산고택
향산고택은 향산 이만도 등 3대에 걸쳐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여 ‘삼대독립운동가문’으로 지정된 고택으로, 독립운동사의 지역적 상징성과 역사성을 간직하고 있으며, 2014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집의 형태는 정면 5칸, 측면 1칸 규모의 一자형 사랑채와, 정면 5칸 측면 3칸 반 규모의 ㄷ자형의 안채가 튼 口자형을 이루고 있다.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수몰로 인하여 1976년 현 위치로 옮겨졌다. 집안 내력과 독립운동에 관한 3,000여점 이상의 전적류 및 유품 등의 유물도 잘 보전되고 있다.이만도(1842 - 1910)의 자는 관필, 호는 향산이며, 조선 후기 사간원정언, 교리, 중학교수 등을 역임한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866년(고종 3) 정시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다가 병조좌랑에 제수되었다. 이어 사간원정언에 임명되고, 홍문관부수찬으로서 남학교수(南學敎授)를 겸하였다. 또한 대신(문신)으로서 선전관을 겸하기도 하였다. 이 후 부교리·장령·지평·우통례(右通禮)·병조정랑·충청장시도사(忠淸掌試都事)·교리·응교·사간·집의·중학교수(中學敎授) 등을 역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명성이 높았다. 또한 시강(侍講) 및 빈대(賓對) 때에 이만도가 상주하는 말을 고종이 모두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1876년 일본대사 구로다[黑田淸隆]가 와서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 최익현(崔益鉉)이 반대 상소를 올리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한목소리로 공격을 하였다. 그 때 집의로서 탄핵문의 문구가 사리에 맞지 않다고 없앴다가 대사헌의 미움을 받아 집의직을 삭탈당하였다. 그 뒤 다시 복직되고, 사성·응교·장악정(掌樂正) 등을 역임하였다. 그 해 가을 양산군수에 제수되어 굶주리는 백성을 보살피고 탐관오리를 소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878년 다시 집의에 임명되어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882년 통정대부에 올라 곧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였다. 세상이 어수선해지자 벼슬길을 단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백동(柏洞)에 작은 서재를 지어 놓고 경서를 연구하며 날을 보내다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예안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매국죄를 통렬하게 공박하는 소를 올렸다. 1907년 순종이 즉위한 뒤 가선대부에, 1910년 자헌대부에 승자되었다. 그 해 8월 일제에 의해 한국이 병탄되자 유서를 지어 남긴 뒤 단식 24일 만에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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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우, 권성 집
이명우(1872 - 1921)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이후 국사를 애통해 하고 염려하였으며, 1905년 을사늑약에 즈음하여 문을 닫고 은거하였다. 그리고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근심과 분노로 깊은 병을 얻었다. 1912년 봄 가족을 데리고 속리산 아래 갈평리(葛坪里)에 우거하며 부모를 모셨다. 1918년 12월 고종이 죽은 후 삼년상이 끝난 1920년 12월 20일 새벽 두 시, 이명우, 권성 부부는 독약을 마시고 눈을 감았다. 이명우는 유서에 “나라를 잃고 10여 년 동안 분통함과 부끄러움을 참았으나 이제는 충의(忠義)의 길을 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위정척사 세대에게 있어서는 ‘왕권이 곧 국권’으로 이해되었으니 황제의 죽음을 따르는 것이 곧 충의였던 것이다. 부인 권성은 네 통의 한글 유서를 남겼다. 아들 삼형제와 두 며느리에게 남긴 글에는 ‘충의의 길’을 따르는 남편을 따라 가겠다는 간곡함이 담겨 있다. “임금과 신하사이에 의리가 있듯이 부부사이에도 의리가 있으니 자신은 ‘의부(義婦)의 길’을 가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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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대표마을 부포마을 표지석
안동의 부포마을은 15명의 독립유공 포상자를 배출한 마을이다. 경북 최초로 예안에서 의병을 일으키자는 취지의 예안통문을 올린 사람이 바로 부포 출신의 이만응이었다. 이명우는 고종의 삼년상이 끝나던 날 유서를 남기고 자정순국自靖殉國하였다. 그러자 아내 권성도 남편을 따라 순절하였다.부포 마을 3⋅1 만세 운동은 예안 장터와 안동 장터에서 발생했다. 이곳에 참가한 사람들은 금용문, 금용운, 이성호, 이회벽, 조방인, 조병건, 조사명, 조수인 등이었다. 의병에서 계몽 운동으로 전환하는 과도기적인 조직인 충의사에 가담했던 이규락의 아들인 이동하는 퇴계 종가를 도와서 보문의숙을 설립하여 개화사상을 보급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교육을 통한 독립 운동에도 앞장섰다. 이동하의 아우 이경식은 장진홍, 이원기, 이원록 등과 함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경식의 딸 이병희는 종연방적에서 노동 운동을 전개하고 1940년에는 북경으로 망명, 이육사와 같이 의열단원으로 활약하다가 처녀의 몸으로 북경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고, 북경 감옥에서 순국한 이육사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이병하의 종손녀 이효정 또한 항일 의식 고취에 주력하다가 경찰에 검거되어 약 13개월 동안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한편 이선호는 1925년에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창립하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에는 6·10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였을 뿐 아니라, 순종 인산 당일에 종로3가 단성사 앞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하며 격렬한 시위를 주도하다가 감옥에 갇혔다. 1929년 일본으로 망명하여 항일 운동을 펼쳐 나가던 중 수상 관저를 습격한 주모자로 지목되어 일본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동생 이면호와 함께 1933년 메이데이 기념 투쟁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선호의 부친 이중진은 예안협동조합을 결성하여 사회 운동을 펼쳤다. 이밖에 이 마을 출신으로 독립 대열에 선 사람으로 이원혁과 이원태를 들 수 있다. 이원혁은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신간회 서울지회와 본부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광주 학생 운동 진상 규명과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신간회가 주도한 조선민중대회 개최를 준비하고, 광주 학생 운동에 대한 결의문을 발표한 죄로 검거되어 징역을 살았다. 이원태는 제2차 유림단 사건에 연루되어 역시 징역을 살았다. 1925년 김창숙이 몽골 지역 독립군 기지 건설 자금을 모은 일로 6천여 명의 유림이 일제에 검거되었다.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항거하여 독립 운동의 길로 나선 부포 사람 가운데 대다수가 진성 이씨 문중 사람들이었고, 거기에 횡성 조씨와 봉화 금씨 문중 사람들이 다소 가세하였다. 이 마을 독립 운동가 가운데 국가로부터 포상이 추서된 사람은 다음과 같다. 금용문, 이경식, 이동하, 이명우⋅권성 부부, 이병희, 이선호, 이성호, 이원태, 이원혁, 이효정, 조방인, 조병건, 조사명, 조수인 등 15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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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포애국지사공원
안동시 예안면에 위치한 부포애국지사공원은 예안면 주민자치위원회에서 2022.12.30일 조성한 공원으로 부포리 선착장 옆에 있다. 공원에는 이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의 약력을 새긴 조형물들이 함께 건립되어있다. 안동의 부포마을은 15명의 독립유공 포상자를 배출한 마을이다.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항거하여 독립 운동의 길로 나선 부포 사람 가운데 대다수가 진성 이씨 문중 사람들이었고, 거기에 횡성 조씨와 봉화 금씨 문중 사람들이 다소 가세하였다. 이 마을 독립 운동가 가운데 국가로부터 포상이 추서된 사람은 다음과 같다. 금용문, 이경식, 이동하, 이명우⋅권성 부부, 이병희, 이선호, 이성호, 이원태, 이원혁, 이효정, 조방인, 조병건, 조사명, 조수인 등 15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