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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 묘
이승희(1847-1916)의 자는 계도, 호는 강재, 대계, 한계이며, 대한제국기 위정척사운동에 앞장선 유학자이자 항일운동가이다. 20세 전후부터 평생을 위정척사운동에 앞장서 흥선대원군에게 시국대책문을 올려 당시의 정국을 바로 잡으려고 하였다. 무분별한 개국(開國)에 대해서는 척사소를 올려 성리학적 전통사회의 질서를 옹호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곽종석(郭鍾錫) 등 문인과 함께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각국 공사관에 전달하였다. 그 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참수하고 조약을 파기하라는 상소를 올려 대구감옥소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1907년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일제의 침략을 폭로하는 서한을 보내고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노령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유인석(柳麟錫)·이상설(李相卨)·김학만(金學滿)·장지연(張志淵) 등을 만나 국외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이상설 등과 함께 소만국경에 있는 길림성(吉林省) 봉밀산(蜂密山) 밑 황무지를 사들여 한인(韓人)을 집단 이주시켜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여, 청소년을 교육하고 민중계도와 독립정신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1914년 요동으로 가서 한인공교회(韓人孔敎會)를 창립하고, 북경 등의 유교성적지(儒敎聖跡地)를 순례하면서 유교의 진흥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한편, 동삼성(東三省)총독 등 중국고관들과 접촉하여 독립운동에 대한 원조를 청하였다. 그리고 위안스카이[袁世凱]와 손문(孫文)에게 서한을 보내어 한중 양국의 친선결속을 호소하였다. 유고로는 『한계유고』가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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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숙 사적비
김창숙(1879-1962)의 자는 문좌, 호는 심산, 벽옹이며, 조선후기 『심산만초』, 『벽옹만초』, 『벽옹칠십삼년회상기』 등을 저술한 유학자,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리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매국오적을 성토하였다. 1908년(순종 2) 대한협회 성주지부를 조직하여 계급타파를 부르짖었다. 1909년 일진회(一進會)가 한일합병론을 제창하자 동지들을 규합하여 중추원에 그들의 반역을 성토하는 글을 보냈으며, 단연회(斷煙會)의 기금으로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하여 신교육을 시도하였다.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음주로 세월을 보내다가 어머니의 교훈에 따라 유학에 정진하였다. 유학적 소양과 한학의 조예는 주로 이 시기에 기반이 닦여졌다. 3 · 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을 규합해서 130여 명의 연명으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중국 상해로 망명한 뒤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유림단사건’이다.1924년 만주와 몽고 접경지대의 황무지를 빌려서 개간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을 추진하였다. 그 곳에 군정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조달문제로 국내에 잠입하여 모금운동을 전개하다가 탄로 나자, 거듭 출국하는 이른바 ‘제2차 유림단사건’을 일으켰다. 독립운동을 고양시키기 위해 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독립운동지인 『천고(天鼓)』를 발행했고, 이어 박은식(朴殷植) 등과 협력하여 『사민일보(四民日報)』도 발간하였다. 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해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45년 일제 말기의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광복 직전에 발각되어 구속되었으며, 왜관경찰서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이후 곧 상경하여 민주의원(民主議院)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정당의 난립과 신탁통치의 찬반, 미소공동위원회 참가여부의 문제 등으로 일반 정치인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육영사업에 힘썼다. 1946년 봄 전국유림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자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 위원장으로 선출되고, 성균관장을 겸임하였다. 이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하였다. 이석구(李錫九)로부터 재단법인 학린회(學鄰會)의 토지재산을 기부 받고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병합하여 1946년 9월 25일 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인가받고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1953년 2월 6일 전국에 흩어져 있는 향교재단을 규합하여 성균관대학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초대총장에 취임하였으며, 1955년 재단 내 분규로 사임하였다. 1962년 세상을 떠나자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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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군 국채보상운동기념비
성주군 국채보상운동기념비는 1907년 대구에서 발의된 국채보상운동에 성주 유림의 대표였던 한계 이승희, 심산 김창숙 등이 주축이 되어 대부분의 문중과 마을이 동참한 업적을 기리고, 선조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세워진 비이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국채를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기 위하여 전개된 국권회복운동이다. 1907년 2월 중순대구의 광문사(廣文社) 사장 김광제(金光濟)와 부사장 서상돈(徐相敦)은 단연(斷煙)을 통하여 국채를 갚아 나가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하였다. 당시의 광문사는 지식인과 민족 자산가로 구성되어, 주로 실학자들의 저술을 편찬하고 신학문을 도입하여 민족의 자강 의식을 고취하고 있던 출판사였다. 또, 서상돈은 일찍이 독립협회 회원과 만민공동회 간부로서 자주독립 운동에 참여해 온 인사였다. 김광제ㆍ서상돈은 1907년 2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에 “국채 1천 3백만 원은 바로 우리 대한제국의 존망에 직결되는 것으로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인데, 국고로는 해결할 도리가 없으므로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국고를 갚아 국가의 위기를 구하자”고 발기 취지를 밝혔다. 취지문을 발표한 뒤 대동광문회(大同廣文會 : 대구 광문사)는 민회소(民會所), 즉 단연회(斷煙會)를 설립하여 직접 모금 운동에 나섰다. 대동광문회의 국채보상운동 발기가 『대한매일신보』ㆍ『제국신문』ㆍ『만세보』ㆍ『황성신문』 등에 보도되자 각계각층의 광범한 호응이 일어났다. 서울에서는 2월 22일김성희(金成喜) 등이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를 설립하고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기성회는 회칙까지 제정하여 본격적인 운동의 채비를 갖추었다. 또, 수전소(收錢所)는 서점ㆍ약국ㆍ대한매일신보사ㆍ잡지사 등으로 지정하였다.그 뒤 전국에서 ‘국채보상’의 이름을 붙인 20여 개에 달하는 국채보상운동단체가 창립되었다.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1907년 4월부터 12월까지였다. 특히, 6월∼8월에는 가장 많은 의연금이 모아졌다. 그러나 운동은 일제의 탄압과 운동주체역량의 부족으로 인하여 1908년에 들어서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운동을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꾸준히 추진해 간 중심체는 양기탁(梁起鐸)과 베델(Bethell, E.T.裵說)이 이끄는 대한매일신보사였다. 따라서, 이 운동은 사실 국권회복운동의 하나로서 전개되고 있는 셈이었고, 이에 일제는 갖은 방법을 다하여 방해, 탄압하려 들었다. 일제는 1907년 이후 베델을 국외로 추방하는 공작을 펴, 1908년 5월 3주(週)의 금고와 벌금형을 선고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7월통감부 당국은 “대한매일신보가 보관한 국채보상금을 베델ㆍ양기탁 두 사람이 마음대로 하여 3만원을 소비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양기탁을 구속해 버렸다. 이른바 일제는 ‘국채보상금소비사건(國債報償金消費事件)’을 조작한 것이다. 통감부의 공작에 따라 전 국채보상지원금 총합 소장이었던 윤웅렬(尹雄烈)은 “보상금 중 삼만 원을 영국인 베델이 사취하였으므로 그 반환을 요청한다.”는 반환청구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이를 근거로 운동의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감을 민중들에게 심어 주고자 하였다. 양기탁은 공판 결과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통감부의 공작으로 운동의 주체는 분열되어, 운동 자체가 암초에 부딪쳐 끝내는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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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공적충훈비
성주공적공훈비는 조국의 광복과 국가발전의 초석이 된 선열들의 애국정신과 자유국가 수호를 위하여 헌신하신 우리 고장 독립유공자와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후세에 길이 계승 발전시키고,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나라사랑 정신을 깨우치는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2004년 1월 건립한 비이다. 이 조형물은 높이 8m의 주조형물과 머릿돌, 명각비, 설명비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성주출신 독립유공자 65명과 6·25전쟁 참전유공자 1,984명, 월남참전유공자 262명 등 총 2,311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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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규 기념비
김희규(1894-1959)의 자는 우문, 호는 호당이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어려서부터 집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하여 만세 시위를 펼쳤다. 기독교인이었던 김희규는 1919년 3.1 운동 이후 성주 유림의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과 족친 송회근(宋晦根)·송우선(宋祐善)·송수근(宋壽根)·이봉희(李鳳熙) 등이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에 있는 성주 백세각(百世閣)[경상북도 유형 문화재]에서 제작한 「국내 통고문(國內通告文)」을 배포하는 한편, 4월 2일 만세 시위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의 교회 조사 유진성(兪鎭成), 초전면 동포리의 기독교인 오임오(吳任吾) 등을 규합하여 유림 측의 송회근을 만나 4월 2일의 만세 시위에 함께 참여하기로 결정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의 준비를 하였다. 김희규는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 오후 1시를 기해 경산리 관제묘(關帝廟) 뒷산에서 기독교도들과 함께 성주읍 시장으로 나아가며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시장 중앙에 모여 있던 유림 측도 이에 호응하며 송우선·송회근의 주도하에 송수근·송훈익(宋勳翼)·송문근(宋文根)·송규선(宋圭善)·이봉희 등이 함께 태극기를 손에 들고 만세를 불렀다. 일제 경찰이 주도 인물 몇 명을 경찰서로 연행하자 군중들이 분노하였다. 경찰서 앞으로부터 남쪽의 군청 앞과 그 양쪽 작은 길에 700명~800명의 군중들이 몰려들었고, 동쪽 우체국 앞으로부터 시장 통로에는 약 1,500명의 군중이 몰려들었다. 일제 군경의 발포로 이태희(李兌熙)와 성명 미상자 2명이 현장에서 순국했고, 이봉희 등 7명이 부상을 입었다. 군중들은 일제 군경이 발포할 때 물러나 서북쪽 산 위에 모여 불을 피우고 독립 만세를 고창하다가 밤 10시경에 해산하였다. 김희규는 장석영(張錫英)·송규선·송준필·이봉희·이기정(李基定)·성대식(成大湜)·송우선·송회근·송훈익·송문근 등과 함께 일제 군경에 검거된 후에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불복하여 공소를 제기했으나, 8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며 징역 10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59년 11월 5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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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재사(해사정)
김정호(1871-1919)의 자는 회원, 호는 해사이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일제의 강압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김노규·류완무·성태영 등과 함께 “우리의 광복 운동은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의 구토(舊土)에 근거를 두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라고 하며, 중국의 만주(滿洲) 지역과 러시아의 연해주(沿海洲) 지역을 답사하고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동지 규합 활동을 하였다. 1909년 2월 연해주에서 구국 활동을 펼치던 류완무가 이범윤(李範允)에게 살해당하자, 크게 낙담하고 귀국하여 국내에서 만주 지역의 동지들과 연락하며 독립운동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노력하였다. 이후 1919년 2월 고종 황제의 국장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3월 1일 김창숙·성태영 등 여러 유생들과 함께 3.1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서울 탑골[파고다] 공원의 독립 선언문 낭독 현장에 참석하였다. 독립 선언서 말미에 이름을 올린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유림 대표가 빠진 것을 보고, “독립 선언서의 민족 대표 명단에 유림에서 한 사람도 참여치 못하였음은 우리 유림[吾儒]의 수치”라고 하며 통탄하였다. 이에 김창숙이 “지금 열국의 강화 회의가 열리고 있으니 우리 유림의 연명(聯名)으로 독립 승인의 요청을 함이 좋겠다.”고 하면서, 파리에서 열리는 국제 평화 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보내자고 제안하자, 즉시 찬동하며 실행에 동참하기로 하였다. 먼저 곽종석(郭鍾錫)과 전우(田愚)를 유림 대표로 추대하고, 고종 황제의 인산(因山)을 계기로 상경한 이중업(李中業) 등의 유생들을 규합하기로 하였다. 이어 1919년 3월 3일 김창숙과 뜻을 같이 하기로 한 유생들과 모임을 가지고, 파리 장서[독립 청원서]의 서명자를 규합할 지역별 대표를 정해 실행에 옮기기로 한 후 각자 맡은 지역으로 떠났다. 김정호는 충청남도 및 충청북도 지역을 맡아 여장을 꾸리기 위해 귀가하다가, 3월 18일 성주 가천(伽泉)에서 강도의 피습을 받고 사망하였다. 당시 나이 마흔여덟이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5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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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구 묘
김정호(1871-1919)의 자는 회원, 호는 해사이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일제의 강압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김노규·류완무·성태영 등과 함께 “우리의 광복 운동은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의 구토(舊土)에 근거를 두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라고 하며, 중국의 만주(滿洲) 지역과 러시아의 연해주(沿海洲) 지역을 답사하고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동지 규합 활동을 하였다. 1909년 2월 연해주에서 구국 활동을 펼치던 류완무가 이범윤(李範允)에게 살해당하자, 크게 낙담하고 귀국하여 국내에서 만주 지역의 동지들과 연락하며 독립운동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노력하였다. 이후 1919년 2월 고종 황제의 국장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3월 1일 김창숙·성태영 등 여러 유생들과 함께 3.1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서울 탑골[파고다] 공원의 독립 선언문 낭독 현장에 참석하였다. 독립 선언서 말미에 이름을 올린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유림 대표가 빠진 것을 보고, “독립 선언서의 민족 대표 명단에 유림에서 한 사람도 참여치 못하였음은 우리 유림[吾儒]의 수치”라고 하며 통탄하였다. 이에 김창숙이 “지금 열국의 강화 회의가 열리고 있으니 우리 유림의 연명(聯名)으로 독립 승인의 요청을 함이 좋겠다.”고 하면서, 파리에서 열리는 국제 평화 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보내자고 제안하자, 즉시 찬동하며 실행에 동참하기로 하였다. 먼저 곽종석(郭鍾錫)과 전우(田愚)를 유림 대표로 추대하고, 고종 황제의 인산(因山)을 계기로 상경한 이중업(李中業) 등의 유생들을 규합하기로 하였다. 이어 1919년 3월 3일 김창숙과 뜻을 같이 하기로 한 유생들과 모임을 가지고, 파리 장서[독립 청원서]의 서명자를 규합할 지역별 대표를 정해 실행에 옮기기로 한 후 각자 맡은 지역으로 떠났다. 김정호는 충청남도 및 충청북도 지역을 맡아 여장을 꾸리기 위해 귀가하다가, 3월 18일 성주 가천(伽泉)에서 강도의 피습을 받고 사망하였다. 당시 나이 마흔여덟이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5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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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기 묘
정재기(1890-1974)는 하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6일 고전면에서는 3·1운동의 영향으로 박영묵(朴永默)의 지도 아래 민족 대표 33인을 본뜬 33인의 일신단(一身團)이 조직되어 배다리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하게 된다.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성천리 출신인 정재기는 이때 일신단의 일원으로 만세 운동을 준비하고 주도했던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같은 마을에 사는 이종인(李宗仁)·정상정(鄭相正)·정의용(鄭宜鎔)·정윤용(鄭潤鎔) 등이 마을의 청장년층을 모았고, 일신단원인 추홍순(秋鴻順)은 금남면 궁항리와 덕천리까지 진출하여 청장년들을 설득하고 참여를 유도하였다. 이때 정재기는 하동읍으로 가서 「독립선언서」를 구해 오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독립선언서」를 구하여 돌아오던 중 하동읍내에서 「독립선언서」를 구하러 다니는 청년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되고 말았다.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면서도 정재기는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으며, 끝까지 일신단 조직을 발설하지 않아 고전면의 만세 운동은 계획대로 진행될 수 있었다. 이후 정재기는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0년 2월 2일 출옥하였고, 1938년 흉년으로 주민들이 기근에 시달리자 자신의 곡식 창고를 열어 주민들을 구휼하였다. 은혜를 입은 주민들이 정재기를 적선지가(積善之家)로 추앙하고, 뜻을 모아 마을 어귀에 정재기 불망비(鄭在淇不忘碑)를세웠다. 정재기는 1974년 1월 27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8년 8월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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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호 사적비
정종호(1875-1961)의 자는 한조, 호는 뇌헌이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1 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독립 선언문(獨立宣言文)이 발표되었으나 유림 측은 민족 대표 33인의 명단에 이름도 올리지 못하였다. 이에 곽종석(郭鍾錫)·장석영(張錫英)·송준필(宋浚弼)·김창숙(金昌淑) 등은 유림단의 이름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글을 제출하기로 하였다. 이때 작성된 것이 파리 장서[독립 청원서]이다. 파리 장서는 김창숙이 가지고 비밀리에 용산역을 출발하여 중국 상하이[上海]로 가 프랑스 파리 강화 회의 의장에게 우편으로 발송하는 형태로 추진되었다. 한편, 1915년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 중앙총부 통령(統領) 윤상태(尹相泰)도 곽종석과 장석영 등 유림단이 작성한 파리 장서를 구해 영문본으로 만들어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 단원 김응섭(金應燮)과 남형우(南亨祐)로 하여금 상하이로 가지고 가서 김창숙과 합류하도록 하였다. 이때 정종호는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 통령 윤상태와 경상북도 달성군 월배면 상인동[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단양 우씨 문중 사이에 파리 장서를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후 윤상태에 이어 정종호도 1919년 7월 31일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10월 1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관련 사실을 부인하였으나 위증죄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항소하였으나 1919년 12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 판결대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1961년 1월 3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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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 집
이승희(1847-1916)의 자는 계도, 호는 강재, 대계, 한계이며, 대한제국기 위정척사운동에 앞장선 유학자이자 항일운동가이다. 20세 전후부터 평생을 위정척사운동에 앞장서 흥선대원군에게 시국대책문을 올려 당시의 정국을 바로 잡으려고 하였다. 무분별한 개국(開國)에 대해서는 척사소를 올려 성리학적 전통사회의 질서를 옹호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곽종석(郭鍾錫) 등 문인과 함께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각국 공사관에 전달하였다. 그 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참수하고 조약을 파기하라는 상소를 올려 대구감옥소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1907년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일제의 침략을 폭로하는 서한을 보내고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노령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유인석(柳麟錫)·이상설(李相卨)·김학만(金學滿)·장지연(張志淵) 등을 만나 국외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이상설 등과 함께 소만국경에 있는 길림성(吉林省) 봉밀산(蜂密山) 밑 황무지를 사들여 한인(韓人)을 집단 이주시켜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여, 청소년을 교육하고 민중계도와 독립정신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1914년 요동으로 가서 한인공교회(韓人孔敎會)를 창립하고, 북경 등의 유교성적지(儒敎聖跡地)를 순례하면서 유교의 진흥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한편, 동삼성(東三省)총독 등 중국고관들과 접촉하여 독립운동에 대한 원조를 청하였다. 그리고 위안스카이[袁世凱]와 손문(孫文)에게 서한을 보내어 한중 양국의 친선결속을 호소하였다. 유고로는 『한계유고』가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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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각 항일의적비, 통고국내문
백세각은 이 마을(초전면 고산리 542)에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송희규(1494∼1558)가 세운 곳으로 명종 6년(1551)에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한 건물로, 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구멍을 뚫어 싸리로 엮은 점과 대패를 쓰지 않고 다른 연장(자귀)으로 나무를 다듬은 점이 특이한 건물이다. 1919년 3ㆍ1운동 당시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을 위시한 문인들이 배포한 독립청원장서 3,000장을 복사한 곳이라고 전하며, 1919년 파리만국평화회의에 유림단이 장서를 건네주기 위해 모임을 가졌던 장소로, 3·1독립운동과도 관련이 있는 유서깊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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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기 추모비
이정기(1898-1951)의 자는 여일, 호는 백아이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중동중학교(中東中學校) 재학 중 유교계의 파리 장서 운동[독립 청원 운동]에 참여하였다. 파리 장서[독립 청원서]의 서명과 관련해서는 일제 측 자료인 『고등 경찰 요사(高等警察要史)』의 139명 명단에는 이름이 올라 있지만, 『면우연보』하[권3] 137명의 연서인 명단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할아버지 이덕후가 서명하였으므로, 당시 유가(儒家)의 1가(家) 1인(人) 서명 원칙이 돌았다는 것을 짐작하면 최종 명단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그렇지만 1919년 4월 30일 대구지방검찰청에서 기소 중지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는 것은 파리 장서 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이 된다. 1925년 음력 1월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北京]에서 군자금 모집을 위해 출판사를 설립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또한 베이징에서 남형우(南亨祐)·김창숙(金昌淑) 등을 만나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대해 상의하고 의열 투쟁에 참여하였다. 이어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는 파괴와 암살 등과 같은 모험적인 방법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고, 1925년 9월 귀국하여 대구에서 장진홍(張鎭弘), 이원록(李源祿) 등과 함께 비밀 결사 암살단(暗殺團)을 결성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1928년 1월 6일 장진홍의 대구은행 폭탄 의거와 관련된 혐의로 평양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온갖 고초를 겪다가, 1929년 12월 9일 대구지방검찰청 예심에서 면소를 받고 석방되었다. 1951년 8월 20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