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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각 항일의적비, 통고국내문

유형
비석
주소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523-3

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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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백세각은 이 마을(초전면 고산리 542)에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송희규(1494∼1558)가 세운 곳으로 명종 6년(1551)에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한 건물로, 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구멍을 뚫어 싸리로 엮은 점과 대패를 쓰지 않고 다른 연장(자귀)으로 나무를 다듬은 점이 특이한 건물이다.
1919년 3ㆍ1운동 당시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을 위시한 문인들이 배포한 독립청원장서 3,000장을 복사한 곳이라고 전하며, 1919년 파리만국평화회의에 유림단이 장서를 건네주기 위해 모임을 가졌던 장소로, 3·1독립운동과도 관련이 있는 유서깊은 곳이다.

탐방로그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523-3에 위치한 백세각 항일의적비를 찾았다. 백세각 항일의적비 옆에는 그와 관련된 독립유공자를 소개하는 통고국내문을 함께 찾아볼 수 있다.

인물정보

성명
송규선
한자명
宋圭善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0 ~ 1948
본적
경상북도 성주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파리(巴里) 장서사건을 주동하여 활약한 사실과 동년 4. 2 성주(星州) 군민 500여명을 만세시위에 동원한 주모자로 체포되여 징역 1년 6월형을 받은 공적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송명근
한자명
宋命根
운동계열
학생운동
생몰년도
1912 ~ 1971
본적
경상북도 대구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31.10월 대구사립(大邱私立) 교남학교(嶠南學校) 재학중(在學中) 학생운동(學生運動)을 주도(主導)하다가 퇴학(退學)당하고 동년(同年) 12월 「아나키즘 그룹」을 만들어 일 군용열차(日軍用列車)에 “제국주의 침략전쟁 반대(帝國主義侵略戰爭反對)”등의 격문(檄文)을 살포(撒布)하는 활동(活動)을 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8월을 받고 미결기간(未決其間)을 합산(合算)하여 1년간(年間)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송문근
한자명
宋文根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5 ~ 1963
본적
경상북도 성주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4.2 경북(慶北) 성주군(星州郡) 성주읍(星州邑)에서 이기정(李基定), 송인집(宋寅輯)등과 함께 성주읍(星州邑) 장날을 기하여 거사하기로 결정한 후 이날 모인 700~800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였으며 일경들의 발포로 계속적인 만세시위가 어렵게 되자 산상(山上)에 올라가서 불(화(火))을 피워놓고 독립만세를 연창하며 활동하다 피체되어 징역 10월을 받았으나 미결기간을 합산하여 11월 18일간의 옥고를 치른 주동자로서의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송수근
한자명
宋壽根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6 ~ 1969
본적
경상북도 성주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4. 2 성주(星州)장터에서 독립만세시위에 주동자로 참가하면서 또한 파리평화회의(巴里平和會議)에 보내는 독립청원장서(獨立請願長書)에 서명하고 활동하다 피체되어 징역 10월을 받았으며 미결기간을 합산하여 11월간 옥고를 치렀으며 신간회 성주지부(新間會星州支部)를 조직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며 군자금모집 등에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송우선
한자명
宋祐善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4 ~ 1942
본적
경상북도 성주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4. 2 성주(星州) 읍내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를 감행하려는 야소교 측 운동에 유생다수를 동원하여 500여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받은 공적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송인집
한자명
宋寅輯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6 ~ 1961
본적
경상북도 성주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4. 2 성주군(星州郡) 성주읍내(星州邑內) 장날의 독립만세 시위(獨立萬歲示威)를 주모(主謀)하고 야소교측(耶蘇敎側)과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제출(提出)하기 위(爲)하여 장서(長書) 서명 운동(署名運動)에 활동(活動)하고 있는 유생측(儒生側)과 동거사(同擧事)를 이룩되도록 하여 500여명(余名)의 시위 군중(示威群衆)과 함께 독립만세(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며 시위(示威)하다가 일경(日警)의 검거(檢擧)가 시작(始作)되자 피신(避身), 궐석재판(闕席裁判)으로 징역10월형(月刑)을 받은 사실(事實)과 당해 운동(當該運動)의 주모자(主謀者)로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송준필
한자명
宋浚弼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69 ~ 1944
본적
경상북도 성주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년 3.1운동(運動)에 참가 후(參加後) 김창숙(金昌淑) 등과 함께 활동중(活動中) 피포(被捕)되어 징역 2년을 받음.(동아일보(東亞日報), 계년사(季年史))

인물정보

성명
송천흠
한자명
宋千欽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8 ~ 1951
본적
경상북도 성주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 1919 3.1 운동시 한국의 독립을 청원코저 파리평화회의(巴里平和會議)에 장서(長書)를 보내고 성주(星州)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日警)의 체포령이 내리자 도주하였음. 궐석판결로 10월형을 받았음(판결등본) 2. 동년(同年) 김좌진(金佐鎭)과 내통(內通)하여 군자금 700원(圓)을 거출(據出)코 만주(滿洲)로 탈출 직전에 신의주(新義州)에서 체포되었으나 호송경관을 구타하고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도만(渡滿)치 못함. 3. 1920년 경남출신 의열단원(義烈團員) 이국필(李國弼)과 접선(接線)하여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고 동인(同人)의 주선으로 도일(渡日)하여 약송시(若松市)를 근거로 비밀활동을 하였음 4. 1923. 비밀결사『상화회(相和會)』에 가입하였으며 동경(東京) 대지진(大地震) 시(時) 항서(抗書)를 일본 요로(日本要路)에 제출(提出)하였음. 5. 1924. 의열단(義烈團)의 비밀지령를 받고 김지섭(金祉燮)을 맞아 폭탄을 자택에 은닉하여 이중교폭탄사건을 직접, 간접적으로 도왔음. 6. 1924. 교포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키 위하여 동경(東京)에서 일인 공사주(日人工事主)와 담판타가 충돌하여 일인 수십명과 격투하였음. 7. 1925. 기부현(岐阜縣) 철도 공사장(鐵道工事場)의 한국동포의 권익을 옹호하고, 차별대우에 분격, 항의하다가 일인 20여인과 충돌하여 심한 부상을 받고 일경(日警)에 피체(被逮)되었음. 8. 1927. 의열단(義烈團) 이국필(李國弼) 등과 같이 소화(昭和)를 암살코저 만반의 준비하고 즉위식(卽位式)날을 기다리던중 동지(同志)들과 예비검속되므로서 목적을 달(達)하지 못함. 9. 1927~1942 수십차의 예비검속을 받았음.

인물정보

성명
송홍래
한자명
宋鴻來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66 ~ 1953
본적
경상북도 성주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1995

공적개요

1919.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창숙(金昌淑) 등이 유림대표(儒林代表)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유림(儒林)의 한 사람으로 서명(署名)하는 등 활동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6월, 집행유예(執行猶豫) 2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송회근
한자명
宋晦根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77 ~ 1949
본적
경상북도 성주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4. 2 경북(慶北) 성주(星州) 장날에 독립만세시위를 하려고 계획하고 태극기 제작과 동지 규합 등 거사준비에 주력하고 시위 당일에는 선봉역할을 하였으며 파리장서(巴里長書) 서명 운동에도 참여하여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언도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송훈익
한자명
宋勳翼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4 ~ 1961
본적
경상북도 성주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4.2 경북(慶北) 성주군(星州郡) 성주읍(星州邑)에서 이기정(李基定), 송인집(宋寅輯)등과 함께 성주읍(星州邑) 장날을 기(期)하여 거사(擧事)하기로 결정(決定)하고 이날 모인 700 ∼ 800 명(名)의 시위 군중(示威群衆)과 함께 독립만세(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다가 일경(日警)들의 발포(發泡)로 계속적인 만세 시위(萬歲示威)가 어렵자 산상(山上)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놓고 독립만세(獨立萬歲)를 연창(連唱)하며 활동(活動)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10월을 받았으나 미결기간(未決期間)을 합산(合算)하여 11월 18일간의 옥고(獄苦)를 치른 주동자(主動者)로서의 공적(功績)이 인정(認定)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