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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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구미란전적지
구미란 전적지는 전봉준 장군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여 많은 동학농민군이 희생당한 곳이다. 우금치 전투 이후 동학농민군은 논산, 전주를 거쳐 원평으로 재기의 항전을 준비하였다. 1894년 12월 21일(음력 11월 25일) 동학농민군 원편 구미산에 품자 모양의 진을 치고 있었고, 관군과 일본군은 구미산에서 진을 친 동학농민군을 공격하였다. 이날 전투는 손시(오전8시30분~9시30분)부터 신시(오수3시~5시)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날 흩어진 동학농민군이 구미산에 남기고 간 군수품은 탄환 7섬, 화약 5궤짝, 쌀500섬 돈 3,000냥 등 이었다. 현재 구미란 전적지에는 당시 전투에서 전사한 이름없는 농민군의 무덤이 다수 남아있는데 1994년부터 구미마을에서는 위령제를 지내오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금구 원평집회(원평장터 만세운동)
동학농민혁명 금구 원평집회는 본디 보은집회에 참가하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서 의지를 다졌던 집회였으나 오히려 보은집회의 방향을 돌리는 구실을 하였다. 단순한 포교의 공인을 넘어서 사회 운동·정치 운동으로 집회의 목적을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1893년 계사년에 일어난 금구 원평집회를 주도한 인물은 김덕명과 전봉준으로 확인된다. 1892년부터 공주와 삼례에서 교조 신원 운동(敎祖伸寃運動)을 계속하던 동학 교단은 이듬해에 교조(敎祖) 최수운(崔水雲)이 1864년(고종 1) 대구감영에서 참수당한 날인 3월 10일을 기해 충청도 보은과 경상도 밀양, 전라도 원평에서 일제히 교조 신원 운동을 전개하였다. 북쪽의 충청도 보은집회와 때를 같이하여 남쪽의 전라도 원평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김덕명을 비롯하여 전봉준·김개남(金開男)·손화중(孫化中)·최경선(崔景善) 등이 거느리고 있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집회를 주도하였다. 또 남접에 속하는 서장옥(徐璋玉)·황하일(黃河一)의 세력들도 섞여 있었다. 그러기에 원평집회는 곧 터질 듯한 강렬한 분위기였다. 불갑사·백양사·선운사 등 전라도 유명 사찰의 승려들도 참여하였고, 이들 속에는 각지에서 농민 봉기를 주도한 직업적 봉기꾼들이 끼어 있었다. 이들은 조용히 눈치를 살피는 보은집회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곧바로 제물포로 달려가자고 외치기도 하였다. 전봉준은 원평집회를 이끌면서 관의 주목을 피하고자 이름을 자(字)인 명숙(明叔)으로 바꾸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명성은 이때부터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무장에서 봉기한 전봉준의 농민군은 황토현에 이어 장성에서 승리를 거두고, 대오를 정비한 뒤 나팔 소리를 크게 울리면서 갈재를 넘어 내달아 1893년 3월 13일 원평에 이르렀다. 원평에 설치한 대장소에는 활기가 넘쳐흘렀다. 전봉준이 원평에 주둔하고 있을 때 홍계훈(洪啓薰)의 경군(京軍)이 보낸 이효응(李效應)과 배은환(裵垠煥)이 왕의 편지를 들고 대장소로 전봉준을 찾아왔고, 이주호는 하인 2명을 데리고 내탕금(內帑金) 1만 냥을 들고 찾아왔다. 전봉준은 내탕금을 빼앗은 뒤 원평 장터에 군중을 모아 놓고 이들의 목을 베어 시체를 마을 뒤에 버리고, 그들이 지니고 있던 증명서와 문서는 시체 위에 던졌다. 왕이 보낸 편지는 읽어 보지도 않았다. 좀처럼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 전봉준이 이런 행동을 한 것은 어떤 회유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강렬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제 전봉준과 농민군은 감영군과 중앙군을 격파하고 왕이 보낸 사자를 죽이고 내탕금마저 빼앗았으니 영락없는 역적의 무리가 되었다.
김덕명 추모비
김덕명(1845 - 1895)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활동하였던 동학농민군 대접주이다.1886년에 동학에 입도(入道)하였다. 김덕명은 전봉준, 김개남, 최경선, 손화중 등과 더불어 동학농민혁명을 대표하는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으며, 금구 지역의 대접주(大接主)였다. 1886년에 동학에 입도한 그는 1887년에 원평에 도소(都所)를 설치하여 포교에 힘썼고, 1891년 6월에는 교주 최시형이 원평에 있는 김덕명의 집으로 와서 많은 도인들을 만나 포덕(布德) 행사를 벌였다. 1892년 교조신원운동 과정에서는 원평집회를 주도하였으며, 1893년 2월에는 광화문 복합상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894년 4월 무장기포 이후 백산집회, 전주성 점령, 원평전투 등에서도 중요한 지위에 있었다. 아울러 전주화약(全州和約) 이후에는 원평 지역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지휘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본군에 맞서 저항하다가, 1895년 3월 29일 전봉준 · 손화중 · 최경선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동학농민혁명 원평집강소
이곳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농민군이 집강소를 설치했던 곳이다. 1894년 전주화약 이후 동학농민군 전봉준 장군과 전라감사 김학진은 관민상화의 원칙에 따라 전라도 53개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이 건물은 백정 출신 동록개가 대접주 김덕명 장군에게 "신분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헌납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이곳에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신분을 해방하는 등 평등사회를 만들고자 하였다. 전라도 일대에 설치되어 농민통치를 실시했던 집강소는 지방 자치 기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동학농민군들은 집강소를 바탕으로 폐정개혁을 추진하는 등 행정권을 장악하였다. 이와 같은 집강소를 통한 농민의 권력 참여는 한국 근대사의 새 장을 연 것이라 할 수 있다. 집강소의 운영은 동학농민혁명에서 거둔 가장 큰 성과이다.
동학혁명유적지 남원성 북문
이곳은 남원성 4대문 중 북문(공진루)터 앞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남원은 전라좌도 농민군의 대도회소와 집강소가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방아치 패전후 세력이 급격하에 떨여져 남원성을 지키고 있었으나 승세를 탄 운봉,남원 연합의 민보군이 (음)11월 18일 남원성을 공격하였고 다시 패전한 농민군이 이 북문을 통하여 물러나면서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다.
동학농민혁명군유적 교룡산 표지석
교룡산은 수운 최제우가 저술과 포교활동을 하던 곳이자, 전라좌도 동학농민군 김개남 군의 주둔지 및 방아치 전투의 근거지이다. 전주화약 후 6월 25일 남원성으로 들어간 김개남은 전라좌도 동학 대도회소(大都會所)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추진하였다. 이에 맞선 운봉 박봉양의 민보군 규모가 커지자 운봉에서 산동으로 넘어오는 방아치 아래에 있는 부동(釜洞, 부절리)의 동학농민군 1천여 명은 8월 21일 교룡산성을 공격하여 무기를 빼앗았다. 당시 임실 상이암에 있던 김개남은 8월 25일 임실, 태인, 장수, 진산, 금산, 용담, 무주, 진안 등 전라좌도를 비롯한 여러 고을의 농민군 7만여 명과 함께 남원으로 들어왔다. 이들의 규모에 놀란 남원부 내 사족들과 백성들은 모두 도망가고 남원 읍내는 농민군들로 가득 찼다고 한다. 이때 김개남은 농민군들을 남원성과 교룡산성 두 곳에 주둔시키고 재기포를 준비하였다. 교룡산성 입구에는 2006년 11월 26일 남원시와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현 위치에 <동학과 동학농민군의 유적지 교룡산> 소공원을 건립하였다. 비 기단부 전면에는 동학 및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사실을, 우측 측면에는 동학의 〈검가〉를 새겨놓았다.
김개남 동학농민군 주둔지
동학농민혁명 당시 김개남 군의 주둔지였던 교룡산성과 그 입구에 세운 표지목이다. 1894년 5월 8일 동학농민군은 ‘전주화약’을 맺고 전주성에서 철수하였고, 이때부터 농민군은 각지로 돌아가 도소를 중심으로 폐정개혁활동을 추진하였다. 김개남(金開南, 1853-1895)은 같은 해 6월 25일에 남원성으로 들어왔고, 이때부터 김개남은 좌도지역을 맡아 폐정개혁 활동을 추진하였다. 교룡산성은 김개남이 집강소 시기에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주둔한 곳으로 알려져있다.<김개남 동학농민군 주둔지> 표지목은 교룡산성 입구에 있는데, 이는 1993년 역사문제연구소에서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동학농민혁명 방아치전투지 표지석
동학농민군이 민보군과 맞서 싸운 전투지이다. 방아치전투는 1894년 9월 17일 남원의 농민군과 박봉양이 이끄는 운봉 민보군과의 사이에서 방아치 일대에서 전개되었다. 박봉양의 민보군이 규모가 커지자 남원 동학농민군들은 남원성과 교룡산성의 무기들을 빼앗아 운봉에서 산동으로 넘어오는 방아치 아래의 부동(釜洞, 부절리) 지역으로 옮겨 민보군에 대비하였다.박봉양은 100여 명의 포창군(砲鎗軍)과 이의경의 수성군 및 함양의 원병과 합세하여 농민군을 10여 리 밖으로 몰아냈는데 농민군측의 사상자는 17명, 부상자는 다수였다. 이에 반해 수성군 사망자는 1명, 부상자는 20명으로 이 전투에서 승리한 박봉양은 운성(雲城)을 방어하기 위해 순무영 참모관으로 임명되었다. 현재 학계에서는 9월 17일의 전투와 11월 14일의 전투 모두를 방아치전투, 혹은 관음재 전투로 혼재되어 기록되어 있으나 9월의 전투는 방아치, 11월의 전투는 관음치 전투가 맞는 것으로 보인다.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요천 표지석
이곳은 집강소 시기 남원대회 및 군사훈련지이다. 전주성 점령 후 김개남은 6월 25일에 남원성으로 돌아와 전라좌도 동학 대도회소(大都會所)를 설치하고 개혁 활동을 전개하는 동시에 농민군에 대한 훈련을 지속하였다. 이때 훈련을 하였던 곳이다. 또한 7월 15일 전봉준과 함께 이곳에서 ‘남원대회’를 개최하였다.남원대회 이후 김개남은 7월 17일경 100여 명의 정예농민군만 거느리고 임실 상이암(上耳庵)으로 들어갔으며 8월 25일 남원으로 돌아올 때 임실, 태인, 장수, 진산, 금산, 용담, 무주, 진안 등의 농민군과 함께 왔으며 이때 숫자가 무려 7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김개남은 군제를 오영(五營)으로 편제하고 요천변에서 훈련을 하며 재기포를 준비하고 10월 14일에 5천여 명을 이끌고 남원을 떠나 전주로 향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유치 표지석
유치는 유치재를 줄여서 부르는 명칭이다. 남원과 운봉의 사이에 있는 고남산의 봉우리다. 집강소 통치기 동안 남원에 머물렀던 김개남 부대가 청주 방향으로 진격하면서 남원에 남아있던 동학농민군은 운봉의 민보군을 격파하기 위해 나섰다. 남원의 농민군 지도자 김홍기, 유복남, 남응삼, 유태홍 등은 11월 13일 전라좌도에서 모인 농민군들을 방아치와 여원치의 갈림 길목인 쪽뚤에 진을 쳤다. 어느 쪽으로 공격해 갈 지를 눈치 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여원치로 향하는 깃대바위에 부대기를 꽂아놓고 승리를 다짐하였다. 전투는 11월 14일 새벽 4시경 시작되었다.농민군들의 공격 낌새를 눈치 챈 운봉 수성군은 14일 새벽 2시에 2천명의 병력을 관음치 일대에 배치하였다. 박봉양은 민보군의 절반을 이끌고 산 밑으로 내려가 선제공격하여 접전할 기세를 보이다가 후퇴하여 산상, 곧 방아치 쪽으로 적을 유인하여 진을 치고 있던 민보군과 합세하여 농민군을 역공하였다고 한다. 이 때 운봉 수성군은 경상도로부터 300정의 무기를 지원 받아 전투력을 강화한 후였다.담양의 남응삼, 남원 관노 김원석과 남원 오수 접주 김홍기, 임실 접주 최승우 등을 중심으로 남원 부동촌(釜洞村)에 둔취하고 있던 농민군은 군악을 울리며 수천 명의 병력을 산상으로 진격시켰다. 이때 농민군들을 소 떼들을 앞세우고 공격해 갔다고 한다. 11월 14일 새벽 4시경부터 시작된 전투는 다음날 아침 8시까지 약 28시간에 걸쳐 이어졌다.방아치를 중심으로 여원치, 관음치 등 운봉과 산동 및 남원의 경계 일대 전체가 전장이었다. 치열한 전투가 끝난 결과 관군도 30여 명이 전사하였지만, 농민군 측이 입은 피해는 더 컸다. 이용석(李用石), 박중래(朴仲來), 고한상(高漢相), 조한승(趙漢承), 황경문(黃京文) 접주급 인물 5명도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박봉양경력서〉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전사한 농민군은 2천여 명에 달한다 하였다. 이 방아치 전투에서 타격을 받은 동학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운봉에서 병력을 재정비한 박봉양은 11월 28일에 재차 남원으로 출동하였다. 방아치 전투에서 기세가 꺾인 농민군들은 완강하게 방어하였으나, 서문과 남문이 불타 버리자 밀려드는 민보군을 막을 길이 없어 중과부적으로 북문으로 빠져나갔다. 〈박봉양경력서〉에는 농민군 30여 명을 사살하고 백여 명을 생포했으며, 민보군도 5명이 전사하고 부상자가 84명이라 하였다.격렬했던 남원전투는 고남산을 중심에 두고 남원쪽에서 여원재에서 방아치로 방안치에서 유치로 이어졌다. 유치재가 자리잡은 곳이 바로 남원시 운봉읍의 매요리다. 매요리는 백두대간 등산로의 한 중심에 있다.
박봉양 장군비
박봉양은 이족(吏族) 출신으로 봉양은 자(字)이고 보명(譜名) 문달(文達)이다. 운봉 서천리에 서 있는 〈박봉양(一目) 장군비〉의 원래 이름은 〈갑오토비사적비(甲午討匪事蹟碑)〉이며, 〈박봉양 장군비〉는 최근 박씨 후손들이 기단부에 새겨놓은 것이다. 일목(一目)이라는 별칭은 그가 한쪽 눈이 없었기 때문에 붙은 것이다.1891년(고종 28)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에 7위로 급제하여 주서(注書, 정7품)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운봉의 대표적 부자로서 권세가 막강하였다. 〈오하기문〉에 따르면 성품이 다소 거친 그는 지방 관리들을 마음대로 꾸짖고 욕보였으며, 지방 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렸으며, 금을 수레로 실어 나르며 조정의 권세가를 섬겼다. 그의 뜻을 조금이라도 거슬렀다가는 바로 보복을 당하였기 때문에 지방 전체가 그의 난폭한 위세에 복종하였다고 한다. 전형적인 악질 토호였다. 1891년에는 암행어사 이면상에게 걸려 체포되어 압송되던 도중 포졸에게 뇌물을 주고 풀려난 뒤 민씨척족의 실력자 민영준에게 15만 냥을 바치고 과거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고 전주성에서 물러난 농민군이 각 고을로 돌아가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활동을 시작하면서 세상이 바뀐 것을 목도하며 위협을 느낀 그는 가재(家財)를 약탈당할까 두려워 장수의 농민군 접주 황내문(黃乃文)에게 입도하였다. 한 달 가량 부적과 주문(呪文)을 익혔지만, 신통한 영험이 없고 입도자의 재물도 계속 약탈하여가자 동학과 단절하였으며, 오히려 재물을 풀어 민보군을 조직하여 농민군에 대적하였다.그는 1894년 7월 26일 조상의 영전에 곡하고 족친들과 뜻을 같이 하는 30여 명과 하인 10여 명을 모아 민보군을 조직하였다. 당시 김개남은 남원을 떠나 임실 상여암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운봉에 대한 농민군의 영향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또한 운봉은 고원지대로 남원에서 운봉에 가려면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야 했으므로 천혜의 요새와 같은 지형을 가졌다. 박봉양은 이런 지형을 이용하여 농민군으로부터 운봉을 지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8월 22일에 새로 부임한 현감 이의경(李義絅)이 협력하고 나서자 더욱 자신이 생겼다. 운봉의 민보군에는 함양의 포군 150명이 합세하고, 경상감사 조병호가 총통(銃筒) 300정과 화약 수천 근을 제공하는 등 경상도와 인근 지역에서 호응하는 자들이 몰려들어 그 규모가 5,000여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이에 따라 남원 동학농민군들은 배후를 위협하는 운봉 민보군에 대한 방비를 위해 운봉에서 산동으로 넘어오는 방아치 아래에 있는 부동(釜洞, 부절리) 농민군에게 방어하도록 하였다. 영상일기에는 8월 19일 부동의 농민군 강감역(姜監役)과 유학규(劉學圭)가 다른 읍의 농민군 수천 명을 거느리고 남원부에 있던 활과 포와 화약을 부동으로 실어갔다고 하였다. 이 무렵 남원에 들른 전봉준이 직접 박봉양을 찾아가 농민군과 대적하지 말 것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그는 거절하였다.박봉양은 김개남이 이끄는 남원 농민군의 주력이 북상한 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개남은 10월 14일에 5천 병력을 이끌고 남원을 떠나 전주로 향하였다. 김개남은 남원의 화산당(花山堂) 접주인 이문경(李文卿)과 남원 오수 접주 김홍기, 임실 접주 최승우, 흥양 접주인 유복만, 담양 접주 남응삼, 장수 접주 황내문에게 남원성을 지키도록 맡겼다. 이들이 거느린 병력은 약 3천명 정도였다.
동학농민혁명유적지 방아치
이 고개는 북쪽의 남원평원과 남쪽의 운봉고원을 가로지르는 백두대간의 방아치이다. 1894(갑오) 동학농민혁명 때 전라좌도를 관장하던 김개남 장군이 농민군의 정예 부대를 이끌고 북상한 뒤 남원의 김홍기, 장수의 황내문, 담양의 남응삼, 임실의 최승우, 진안의 이사명 등의 농민군이 영남지방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 고개를 통하여 운봉현을 공격하였다.운봉현은 박봉양이 민보군을 이끌고 수성군과 함께 농민군의 집강소 설치를 거부하면서 영남지방의 막강한 지원을 받아 방어했는데 1894년 11월 14일~15일의 방아치 전투에서 농민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남원성으로 패퇴하였다. 이때 민보군은 방아산 산성의 성돌을 중요한 무기로 이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