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TOTAL. 138 건
이승만 묘
이승만(1875-1965)의 호는 우남, 초명은 이승룡이며,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제1, 2, 3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98년에는 러시아의 이권침탈을 규탄하기 위해 열린 만민공동회에 참여하면서 독립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4월 일간지인 『매일신문』을 창간해 기재원(기자)과 주필을 지냈으며, 8월에는 『제국신문』을 창간해 편집과 논설을 담당하였다. 11월 투서사건으로 독립협회 간부들이 체포되자 이에 대한 항의 시위를 주도하였고, 이들이 석방된 뒤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899년 1월 박영효(朴泳孝)와 관련된 고종 황제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1904년 8월까지 5년 7개월 간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그가 구금된 직후 주한미국공사였던 알렌이 이승만의 석방을 요구하였지만 거부당하였고, 1899년 1월 말 탈옥을 시도하다 실패해 종신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감옥에서 『청일전기(淸日戰紀)』를 편역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또한 『신영한사전』을 편찬하였으며, 『제국신문』에 논설을 투고하였다. 『독립정신』은 그가 출옥한 이후인 1910년 LA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청일전기(淸日戰紀)』는 1917년 하와이에서 출간되었다. 1904년 8월 9일 특별 사면령을 받고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같은 해 11월 민영환(閔泳煥)과 한규설(韓圭卨)의 주선으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1905년 2월 워싱턴 DC의 조지워싱턴 대학(George Washington University)에 2학년 장학생으로 입학한 직후 한국에 왔던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Hugh A. Dinsmore), 국무장관 존 헤이(John Hay)와 면담하였다. 1905년 4월 세례를 받았고, 8월에는 태프트(William H. Taft) 국무장관의 주선으로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과 만났다. 이승만은 이 자리에서 한국의 독립 보존을 청원하였지만 러일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일본을 지지하는 정책을 취하게 되어 성과를 거두지 못 하였다. 대학 재학 시 미국의 대외정책이 일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도록 활동하였던 스티븐슨(Stevens, D.W.)을 암살한 전명운(田明雲)과 장인환(張仁煥)의 재판에 통역요청을 받았으나, 미국 사회 내의 부정적 여론을 이유로 거부하였다. 1910년 3월 재미동포 조직이었던 국민회에 가입하였으며, 같은 해 8월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청년부 간사이자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하던 중 1912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의 압박을 받자, 같은 해 4월 감리교 선교부의 도움으로 미국 미네소타에서 열린 국제감리교대회 참석을 빌미로 도미하였다. 이후 1945년 10월 귀국 때까지 계속 미국에서 활동하였다. 국제감리교대회 참석 후 네브라스카(Nebraska)에 갔다가 1900년대 초 옥중에서 만났던 박용만(朴容萬)의 도움으로 1913년 2월 하와이 호놀룰루(Honolulu)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다. 같은 해 8월부터 호놀룰루에서 한인감리교회의 한인기독학원을 운영하였으며, 『태평양잡지』를 발간하였다. 이승만은 이 시기 ‘105인 사건’의 실상을 다룬 『한국교회핍박』을 저술하였고, 옥중 저서인 『독립정신』과 『청일전기』를 출판하였다. 또한 ‘한인기독학원’을 ‘한인중앙학원’으로 개명하고 민족교육과 선교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하와이에서 활동한 지 1년이 지날 무렵 박용만이 무력투쟁을 위해 국민군단을 창설하자, 이에 이승만은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을 주장하면서 서로 대립하였다. 이승만은 재미동포의 가장 큰 조직이었던 국민회 회장 선출과 자금 사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고, 국민군단의 일본군 선박 폭파미수사건을 계기로 박용만이 하와이를 떠난 후 국민회를 주도적으로 운영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윌슨(Thomas Woodrow Wilson)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 주창하면서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을 구상하였고, 이승만은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둘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1919년 2월 25일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하여 장차 완전한 독립을 준다는 보장 하에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는 것이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은 1919년 9월 6일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하여 1920년 12월부터 약 6개월 동안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그는 1921년 5월 워싱턴에서 개최될 군축회의(The Washington Disarmament Conference)에 참석을 목적으로 상해에서 미국으로 갔다. 1925년 3월 11일 임시정부 의정원은 이승만을 탄핵해 대통령직을 박탈하였다. 임시정부 인사들은 이승만이 주장한 국제연맹 위임통치안을 미국에 의한 위임통치로 오해하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가 상해 임시정부에서 직접 직책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임시정부 의정원의 결의를 무시하였다는 것도 주요한 이유였다. 조소앙은 이 탄핵안을 반대하였지만, 대다수 임시정부 요인들이 주도한 탄핵안은 통과되었다. 의정원의 폐지령에도 불구하고 구미위원부의 활동은 1929년까지 계속되었고, 이승만은 여기에서 외교활동을 계속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조병옥, 허정, 장택상 등이 당시 구미위원부의 활동을 도왔던 유학생들이었다. 구미위원부에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재정을 도맡았던 이승만은 1932년 11월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임무를 받고 전권대사에 임명되었다. 1933년 1월과 2월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국제연맹에서의 활동이 인정받으면서 1933년 11월 이승만은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출되었고, 1934년에는 외무위원회 외교위원, 1940년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942년 8월 29일부터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 일본의 패망과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방송을 시작하였고, 같은 해 9월에는 미국 전략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과 연락해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미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연결하는 활동을 하였다. 또한 태평양 전쟁 시기 미국과 소련이 얄타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합의한 후에는 소련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10월 16일 귀국하였다. 귀국 직전 일본 도쿄에서 맥아더 장군, 하지 미군정 사령관과 회합을 한 후 귀국한 이승만은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과 한국민주당의 영수직을 거절하였다. 그 대신 1945년 10월 23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에 추대되었다.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 요양원에서 사망하였다. 같은 해 7월 27일 가족장으로 영결식이 있었고,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4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임시정부 요인묘역
국립서울현충원은 1993년 상해만국공묘에 안치되어 있던 상해 임시정부 요인 5위의 영현을 환국봉안하면서 임시정부요인 묘역을 조성하였다. 임시정부요인 묘역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직위를 역임한 순국선열 18위가 모셔져 있다. 한국통사, 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해 민족혼을 일깨웠던 박은식 대한민국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비롯해 신규식, 노백린, 김인전, 안태국 지사의 유해 5위를 1993년 8월 상해만국공묘로부터 모셔 오면서 조성된 묘역이다. 위쪽 묘역에는 국가원수급인 박은식, 이상룡, 홍진, 양기탁 4위가 모셔져 있고, 아래쪽 묘역에는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노백린, 외무총장을 역임했던 신규식, 광복군총사령관을 역임했던 지청천 장군 등 14위가 모셔져 있다. 이 곳에 계신 순국선열 18위는 다음과 같다. 양기탁 국무령, 홍진 국무령, 박은식 2대 대통령, 이상룡 초대국무령, 황학수 생계부장, 이유필 내무총장, 박찬익 외무총장, 김인전 의정원의장, 신규식 국무총리, 노백린 국무총리, 김동삼 국무원, 조경한 국무위원, 지청천 군무부장, 오영선 법무총장, 김성숙 국무위원, 이강 의정원의장, 손정도 의정원의장, 윤세용 국무원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위치한 국가보훈부 소속 박물관이다. 기념관은 이전에 서대문구의회 건물이 있었던 부지에 건설됐고, 본래 2021년 11월 23일[2]에 개관할 예정이었으나 추가 공사로 연기되어 2022년 3월 1일에 정식 개관했다. 지상 4층, 지하 3층 건물로 상설전시실 3개와 특별전시실 1개로 구성되어 있다. 2019년 3.1 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계획이 추진됐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기념 시설들이 상하이, 충칭 등 중국에 소재하고 있기 때문에 접근성이 떨어졌다. 이에 국내에도 기념관을 건립해 자주독립과 민주공화제의 정신을 후대에 전승하는 것이 기념관 건립의 목적이 됐다.
심산기념관
김창숙(1879-1962)의 자는 문좌, 호는 심산, 벽옹이며, 조선후기 『심산만초』, 『벽옹만초』, 『벽옹칠십삼년회상기』 등을 저술한 유학자,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리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매국오적을 성토하였다. 1908년(순종 2) 대한협회 성주지부를 조직하여 계급타파를 부르짖었다. 1909년 일진회(一進會)가 한일합병론을 제창하자 동지들을 규합하여 중추원에 그들의 반역을 성토하는 글을 보냈으며, 단연회(斷煙會)의 기금으로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하여 신교육을 시도하였다.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음주로 세월을 보내다가 어머니의 교훈에 따라 유학에 정진하였다. 유학적 소양과 한학의 조예는 주로 이 시기에 기반이 닦여졌다. 3 · 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을 규합해서 130여 명의 연명으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중국 상해로 망명한 뒤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유림단사건’이다.1924년 만주와 몽고 접경지대의 황무지를 빌려서 개간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을 추진하였다. 그 곳에 군정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조달문제로 국내에 잠입하여 모금운동을 전개하다가 탄로 나자, 거듭 출국하는 이른바 ‘제2차 유림단사건’을 일으켰다. 독립운동을 고양시키기 위해 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독립운동지인 『천고(天鼓)』를 발행했고, 이어 박은식(朴殷植) 등과 협력하여 『사민일보(四民日報)』도 발간하였다. 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해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45년 일제 말기의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광복 직전에 발각되어 구속되었으며, 왜관경찰서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이후 곧 상경하여 민주의원(民主議院)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정당의 난립과 신탁통치의 찬반, 미소공동위원회 참가여부의 문제 등으로 일반 정치인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육영사업에 힘썼다.1946년 봄 전국유림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자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 위원장으로 선출되고, 성균관장을 겸임하였다. 이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하였다. 이석구(李錫九)로부터 재단법인 학린회(學鄰會)의 토지재산을 기부 받고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병합하여 1946년 9월 25일 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인가받고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1953년 2월 6일 전국에 흩어져 있는 향교재단을 규합하여 성균관대학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초대총장에 취임하였으며, 1955년 재단 내 분규로 사임하였다. 1962년 세상을 떠나자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백범학원, 김구주택 기념비
김구(1876~1949)는 황해도 해주목 출신이다.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1세대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안창호, 이승만 등과 함께 지도자 출신 중 최순위권에 손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동학 농민 혁명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직접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령,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겸 내무장, 재무장, 군무장을 거쳐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5년까지 주석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 이후에는 본인은 반공주의자였지만 남북 분단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는 반대하면서 통일론을 포기하지 않다가 1949년에 서울 경교장에서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최고 명예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건국실천원양성소
건국실천원양성소는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1947년에 설립된 단체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金九)가 귀국한 뒤 국가 건설에 따른 인재의 필요성을 느껴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에 있던 원효사를 본부로 설립하였다. 단체는 김구의 자주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임시정부가 1940년 9월 충칭(重慶)에서 제정, 공포한 <대한민국건국강령>을 기초로 하였다. 건국강령은 제1장 총칙, 제2장 복국(復國), 제3장 건국으로 구성되었고, 그 내용은 정치·경제·교육의 균등한 발전을 통하여 복국(復國), 건국(建國), 치국(治國), 더 나아가서는 구세(救世)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삼균주의(三均主義)를 바탕으로 하였다. 독립운동 과정 중 복국의 단계에서 광복군(光復軍)이 필요했던 것처럼, 건국의 단계에서는 건국의 동량이 필요했고, 이 필요에 의하여 1947년 3월 이 양성소가 설립되었다. 명예소장에 이승만(李承晩), 소장에 김구로 출발한 이 양성소는 전국 각지의 우수한 애국청년들을 선발하여 건국운동의 중견 일꾼으로 양성하고자 교육을 시켰다. 이러한 인재 양성의 발상은 청년들이 국가를 건설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김구 개인의 신념에서 나왔다. 양성소의 매기 교육 인원은 100명 내외였다. 교육기간은 제1기가 2개월이었고, 제2기부터 마지막 교육을 받은 제9기까지는 1개월이었다. 교육내용은 독립운동사·정치·경제·법률·헌법·역사·선전·민족문화·국민운동·철학·약소민족문제·농촌문제·협동조합·사회학·공산주의 비판·여성문제 등과 특별강의였다. 강사는 조소앙(趙素昻)·조완구(趙琬九)·신익희(申翼熙)·지청천(池靑天)·나재하(羅在夏)·김성주(金成柱)·김경수(金敬洙)·최호진(崔虎鎭)·엄상섭(嚴詳燮)·김정실(金正實)·민영규(閔泳珪)·엄항섭(嚴恒燮)·양주동(梁柱東)·김학규(金學奎)·설의식(薛義植)·김기석(金基錫)·이상조(李相助)·주석균(朱碩均)·홍병선(洪秉璇)·김하선(金昰善)·김석길(金錫吉)·안재홍(安在鴻)·정인보(鄭寅普)·황기성(黃基成)·이인(李仁)·김활란(金活蘭)·김법린(金法麟)·박순천(朴順天)·이은상(李殷相) 등 각계의 인사들이었다. 김구가 암살된 뒤, 1948년 9월에 본부인 원효사를 홍익대학교에서 인수함으로써 해체되었다.
김구 묘
김구(1876~1949)는 황해도 해주목 출신이다.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1세대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안창호, 이승만 등과 함께 지도자 출신 중 최순위권에 손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동학 농민 혁명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직접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령,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겸 내무장, 재무장, 군무장을 거쳐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5년까지 주석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 이후에는 본인은 반공주의자였지만 남북 분단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는 반대하면서 통일론을 포기하지 않다가 1949년에 서울 경교장에서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최고 명예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백범기념관
김구(1876~1949)는 황해도 해주목 출신이다.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1세대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안창호, 이승만 등과 함께 지도자 출신 중 최순위권에 손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동학 농민 혁명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직접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령,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겸 내무장, 재무장, 군무장을 거쳐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5년까지 주석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 이후에는 본인은 반공주의자였지만 남북 분단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는 반대하면서 통일론을 포기하지 않다가 1949년에 서울 경교장에서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최고 명예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조성환 묘
조성환(1875 - 1948)은 대한제국 무관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차장, 북로군정서 군사부장, 임시정부 군사특파단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로, 1900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으나 군부의 부패를 바로잡으려 시도하다가 발각돼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3년 만에 특사로 풀려나서 장교로 임관했다가 사직했다. 1906년에는 신민회를 조직해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했고 연해주로 망명해 헤이그 특사 파견 때 이상설을 도왔다. 1912년에는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가 만주를 시찰하는 기회를 이용해 암살을 기도했으나 발각되어 체포된 후 거제도에 1년간 투옥된 바 있다. 1919년에는 김좌진 등과 함께 군정부를 조직하고 북로군정서로 개편해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이후 중국 북경과 만주 일대에서 독립군 양성에 진력하다가 1936년 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 취임해 이동녕 등과 함께 한국광복군 창설을 주도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임시정부 요인과 함께 귀국한 후 성균관 부총재 등을 역임하다가 1948년 사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차이석 묘
차이석(1881 - 1945)은 독립신문사 기자, 임시의정원 의원,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비서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이명은 서입환(徐立煥), 호는 동암(東岩)이고 평안북도 선천 출신이다. 1907년 평양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를 졸업한 뒤 신민회(新民會)에 가입, 안창호(安昌浩) 등과 평안도에서 대성학교(大成學校)를 경영하며 인재 육성에 진력하였다. 1910년 12월 일제가 날조한 105인사건으로 1911년 1월에 잡혀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 · 1운동 때는 향리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4월에 상하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의 기자로도 활약하였다. 1922년 2월 임시의정원의 평안도 선출 의원이 되었으며, 1930년 개최된 의정원회의에서 부의장에 피선되었으며 상임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30년 1월 민족진영의 독립지사들을 한데 묶기 위해 조직된 한국독립당에 참여하여 그 주요 실무간부로 활동하였다. 이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홍보선전책자로 「한보(韓報)」 · 「한성(韓聲)」 등을 발행, 배포하는 등 당의 기본 강령 실천과 그 이념 전파에 진력하였다. 1933년 항저우[杭州]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어 대일투쟁 의욕을 드높이는 데 노력하였고, 임시의정원 부의장으로도 활약하였다.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에 의한 5당[ 의열단(義烈團) ·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 ·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 미주대한인독립당(美洲大韓人獨立黨)] 통합을 통해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이 조직될 때, 5당 통일에 주도적인 임무를 담당했던 김원봉(金元鳳) · 김두봉(金枓奉) 등 의열단계가 임시정부폐쇄를 강력히 주장, 임시정부가 곤경에 처한 적이 있었다. 더욱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중 김규식(金奎植) · 조소앙(趙素昻) · 최동오(崔東旿) · 양기탁(梁起鐸) · 유동열(柳東說) 등 5명이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 임시정부 자체가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이때 송병조(宋秉祚)와 함께 김구(金九) · 이시영(李始榮) · 조완구(趙琬九) · 김붕준(金朋濬) · 양묵(楊墨) · 이동녕(李東寧) · 안공근(安恭根) · 엄항섭(嚴恒燮) 등과 임시정부를 유지하기로 뜻을 모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계승, 발전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193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가 개최되어 주석에 이동녕이 선출되었을 때 비서장(祕書長)에 선출되었다.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창당에 참여하였다.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서 독립운동에 진력하다 충칭[重慶]에서 사망하였다. 1947년 김구의 주선으로 유해가 운구되어 서울 효창원에 이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동녕 묘
이동녕(1869 - 1940)은 천안 목천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석오(石吾), 자는 봉소(鳳所)이다. 북간도 용정에 이상설 정순만 등과 같이 서전의숙을 설립하고 청소년 교육에 힘 썼다. 1907년 귀국하여 안창호, 이회영, 김구, 이동휘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고 활약하였으며, 1910년 서간도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13년에는 남만에서 청년운동을 하다가 해삼위로 가서 이상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1925년부터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국무위원 겸 주석을 역힘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후 반평생을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이끌어 조국광복의 일념에 투쟁하던 그는 1940년 3월 13일 72세 때 사천성기강(四川省綦江)에서 과로로 영면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국장(國葬)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광복 후인 1948년 9월 22일 김구의 주선으로 유해를 봉환 사회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순교기념비(산정현교회)
산정현교회 출신 순교자 9명은 신사참배 반대 투쟁을 벌여 일제의 잔혹한 핍박에 저항하였다. 그 중 주기철 목사와 최봉석 목사는 옥고투쟁으로 순교하고 다른 이들은 모두 공산당에 의해 순교했다. 위 순교자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순교신앙' 정신을 나누고자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위치한 산정현교회내에 본 비를 건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