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서울현충원은 1993년 상해만국공묘에 안치되어 있던 상해 임시정부 요인 5위의 영현을 환국봉안하면서 임시정부요인 묘역을 조성하였다. 임시정부요인 묘역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직위를 역임한 순국선열 18위가 모셔져 있다. 한국통사, 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해 민족혼을 일깨웠던 박은식 대한민국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비롯해 신규식, 노백린, 김인전, 안태국 지사의 유해 5위를 1993년 8월 상해만국공묘로부터 모셔 오면서 조성된 묘역이다. 위쪽 묘역에는 국가원수급인 박은식, 이상룡, 홍진, 양기탁 4위가 모셔져 있고, 아래쪽 묘역에는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노백린, 외무총장을 역임했던 신규식, 광복군총사령관을 역임했던 지청천 장군 등 14위가 모셔져 있다. 이 곳에 계신 순국선열 18위는 다음과 같다. 양기탁 국무령, 홍진 국무령, 박은식 2대 대통령, 이상룡 초대국무령, 황학수 생계부장, 이유필 내무총장, 박찬익 외무총장, 김인전 의정원의장, 신규식 국무총리, 노백린 국무총리, 김동삼 국무원, 조경한 국무위원, 지청천 군무부장, 오영선 법무총장, 김성숙 국무위원, 이강 의정원의장, 손정도 의정원의장, 윤세용 국무원
탐방로그
동작구 동작동 215-5에 위치한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았다. 대한독립군무명용사위령탑 바로 아래쪽이 임시정부요인 묘역이었다.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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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 ~
1937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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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
남만(南滿)의 한교자치기관으로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였고 3.1 운동시 남만(南滿)을 통한 한족회(韓族會)를 결성하였으며 상해민족대표대회(上海民族代表大會)에 한족회(韓族會) 대표로 출석하고 흥경현(興京縣)에 남만(南滿)의 자치군사기관으로 통의부(統義府)를 조직하여 총장이 되어 만주독립군(滿州獨立軍)의 주도역할이 되었으며 중한 합작(中韓合作)으로 국제운동을 추진하고 양측대표회의(兩側代表會議) 의장(議長)이 되었다. 만주사변 중(滿洲事變中) 합이빈(哈爾賓)에서 피체(被逮)되어 경성옥(京城獄)에서 10년형 복역(服役) 중(中) 서거(逝去)함.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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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 ~
1969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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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철산
1919년 3.1운동을 주동하다가 징역 8월형을 받은 후 1923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義烈團) 선전부장, 조선민족연맹(朝鮮民族聯盟) 선전부장, 임정(臨政) 국무위원 등을 역임한 사실이 확인됨.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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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 ~
1923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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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천
임시정부(臨時政府) 의정원(議政院) 의원(議員)으로 재무(財務) 예결위원(豫決委員), 정무(政務) 조사특별위원(調査特別委員), 전원위원장(全院委員長) 부의장(副議長), 국무원학장(國務院學長) 총무대리(總務代理), 의정원(議定院) 의장(議長)(제(弟) 4대(代))등을 역임하여 현저한 공적이 확인됨.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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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 ~
1926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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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송화
1. 일본(日本) 경응의숙 보통과(慶應義塾普通科)와 육사(陸士)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육군정령(陸軍正領)(대령(大領)) 관립무관학교장(官立武官學校長). 교육국장(敎育局長)으로 후진 육성(後進育成)에 진력(盡力) 2. 1919년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 후(後) 상해(上海)에 망명하여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조직하고 군무총장(軍務總長)이 됨. 3. 그 후 해삼위(海蔘威)로 갔다가 1925년 상해에서 객사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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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 ~
1925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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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황주
1. 을사보호조약시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주필로 애국독립사상 고취 2. 합병 후 망명하여 만주, 상해에서 다시 연해주, 니꼬리스크 한인동포의 요청을 받아 잡지를 발간하고 독립운동 계속 3. 임시정부 대통령 4.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안중근전, 건국지, 단조사고, 동명성왕실기 등을 저술하여 애국사상을 고취.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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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 ~
1949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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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
1. 1904년 관립상공학교(官立商工學校)재학시 독립운동모의로 퇴학 당하고 1906년에는 안창호(安昌浩), 이시영(李始榮)등의 조직체 신민회(組織體新民會)에 가입하다. 2. 1910년 합병이 되자 북만주(北滿洲)로 망명하다. 3. 북간도(北間島)에서 이상설(李相卨), 나철(羅喆), 백순(白純) 등의 지도로 대종교(大倧敎)에 투신하여 교육에 주력하였고 1912년에는 화능현(和能縣) 삼도구(三道溝) 청파동(靑坡洞)에 한인학교를 설립하여 애국사상을 고취시키다. 4. 1912년 2월 상해(上海)의 신규식선생(申圭植先生)의 지령으로 서북간도(西北間島)와 노령(露領)의 동지와 연락하여 동월 27일에는 길림(吉林)에서 조소앙(趙素昻), 여시형(呂時亨), 김좌진(金佐鎭)등 39인명의로 대한독립의용군(大韓獨立義勇軍)을 조직하다. 5. 1917년 북경(北京)에 와서 이시영(李始榮), 이동녕(李東寧), 신규식(申圭植)등 선배와 활동하고 상해(上海)에서 동제사(同濟社) 창립하다. 6. 군자금조달차 국내에 잡입하였다. 7. 상해 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에 들어가 1921년 7월 7일에는 외무부외사국장 겸 외무차장대리(外務部外事局長兼外務次長代理)를 하다.(조선민족운동연감(朝鮮民族運動年鑑) p. 142) 8. 1922년 신규식선생(申圭植先生) 서거로 동제사(同濟社) 이사장(理事長)이 되다. 9. 윤봉길(尹奉吉)의 상해공원 사건(上海公園事件)이 발생하자 김구 선생(金九先生)의 도피를 방조하다. 10. 1933년 5월 김구(金九)와 같이 남경중앙군관학교 구내(南京中央軍官學校構內)에서 장개석(蔣介石)과 면담하여 낙양군관학교내(洛陽軍官學校內)에 한국 독립군 양성(韓國獨立軍養成)을 위하여 특별반(特別班)을 설치하고 군간부를 양성하도록 하다.(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p. 348) 11. 1940년 9월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중경(重慶)으로 이전시키고 10월에 국무위원(國務委員)이 되다.(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p. 353, 375, 377) 12. 1945년 임정주화단(臨政駐華團) 단장(團長)으로 활동하다.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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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 ~
1931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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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남도 강서
1. 평양숭실학교(平壤崇實學校)를 마치고 1910년 선교사(宣敎師)로 만주(滿洲)에 파견(派遣)되어 조국광복에 획책(劃策)함. 2. 1912년 합이빈(哈爾濱)에서 계태랑(桂太郞) 암살 음모(暗殺陰謀)의 혐의(嫌疑)로 왜적(倭敵)에게 피포(被捕)되어 진도(珍島)로 유배(流配)되었다가 1914년 갑인(甲寅)에 석방되었다. 3. 1919년 3월 상해(上海)로 탈출하여 임정(臨政)을 조직할때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장(議長)으로 활동하였으며, 4. 1922년 만주(滿洲) 길림(吉林)으로 전주(轉住)하여 운동을 하다가 1931년 2월 19일 병서(病逝)하였다.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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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 ~
1922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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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원
1. 육군사관학교(陸軍士官學校)를 졸업하고 군에 복무타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됨에 지방군대에 연락하여 거사하려다가 기밀이 누설(漏泄)되어 실패하고 음독 자살(飮毒自殺)을 꾀하여 우안(右眼)을 개상(腉傷)하였다. 2. 1911년 11월 중국에 건너가 동맹회(同盟會)에 가입하고 손문(孫文)의 무창기의(武昌起義)에 참가하였고 호한민(胡漢民), 송교인(宋敎仁), 대계도(戴季陶)등이 경영하는 상해(上海)의 민권보(民權報)를 보조하였으며 상해 불조계(上海佛祖界)에 피신하여 한중인(韓中人)으로 동제회(同濟會)를 조직하여 광복운동의 중심체를 삼고 3.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결성하여 국민당의 진영사(陳英士), 호한민(胡漢民)등과 교결(交結)하여 인재양성에 온 정력을 경주하였다. 4. 1919년 임정(臨政)의 법무총장(法務總長)에 선임되고 다음해에는 국무총리(國務總理) 겸(兼) 외무총장(外務總長)이 되었으며 동년 10월 임정의 특파 전사(特派傳使)로 광동(廣東)에 가서 중국 호법정부(中國護法政府)와 교섭한 결과 임정 승인(臨政承認)에 성공하였음.
- 생몰년도
-
1871 ~
1938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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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남도 강서
1. 1905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후 고종(高宗)의 후원을 얻어 영인(英人)「벳셀」과 같이「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발행하고 안창호(安昌浩)와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그 회장이 됨 2. 1911년 사내총독(寺內總督) 암살하려든 105인사건에 10년 언도를 받었으나 특사(特赦)되어 해외로 망명 독립운동을 하다가 실패하여 완도(莞島)로 유배(流配) 3. 동아일보(東亞日報) 창간과 동시에 고문(顧問)으로 있다가 남만주(南滿洲)로 망명하여 오동진(吳東振)과 협력하여 광복군(光復軍)을 조직하였고 유동열(柳東悅)과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조직하였고 상해 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에 가담 독립운동 하다가 1938년 중국에서 병사(病死)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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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 ~
1939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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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고양
1919년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議員)으로 선출(選出)된 이래(以來) 1931. 11월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 국무원(臨時政府國務院) 비서장(秘書長), 국무원(國務員), 법무총장(法務總長), 군무부장(軍務部長), 외무부장(外務部長)등을 역임(歷任)하며 활동(活動)한 사실이 확인됨.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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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 ~
1940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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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
1. 국치 후(國恥後) 수만의 가재(家財)를 정리하여 남만(南滿)에 망명 동창학교(學校)를 설립 청년들에게 애국사상을 고취. 혁명지사와 연결하여 조국의 광복을 도모 2. 임정 요인(臨政要人)들에게 자금제공 3. 1926년 육군주만참의부장(陸軍駐滿參議副長)으로 시국 수습(時局收拾)에 노력하다가 1941년 2월 12일 북만(北滿)에서 병서(病逝)
- 생몰년도
-
1858 ~
1932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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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
1. 국치 후(國恥後) 만주(滿洲)에 이주(移住)하여 조국 광복 사업(祖國光復事業)에 노력(努力)하였고 남만 교포(南滿僑胞)의 자치기관(自治機關)으로 부민단(扶民團)을 조직(組織)하여 단장(團長)이 되었으며 2. 3.1운동 당시(運動當時) 한족회(韓族會)를 조직(組織)하였고 남만(南滿)의 군사기관(軍事機關)으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組織)하였다. 3. 1925년에 상해 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의 국무령(國務領)이 되었으나 남만(南滿)에서 노환(老患)으로 서거(逝去)하였음.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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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 ~
1945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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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의주
1. 1912년2월12일 사내총독 암살음모 사건(寺內總督暗殺陰謀事件)으로 진도(珍島)에 1년간 유배(一年間流配) 2. 1919년 상해(上海)로 망명(亡命)하여 내무부 비서국장(內務部秘書局長)(1920.2.17일한(日限)) 상해대한인민거류민단 의사원(上海大韓人民居留民團議事員), 등 직(職)을 역임활약(歷任活躍)하다. (조선민족운동연감 소록(朝鮮民族運動年鑑所錄)) 3. 1920.8.5일에 미국의원단(美國議員團)이 중국(中國)에 왔을때 해단 교제원(該團交祭員)으로 활동(活動)한 의정원(議政院) 대표(代表)이었다. 4. 1920년11월9일 상해(上海) 대한인민거류의원(大韓人民居留議員)으로 선임(選任)되다. 5. 1922년7월에 시사책진회회원(時事策進會會員)이되었으며 동년(同年)10월1일19시(時) 상해법계맥실이라로(上海法界麥實爾羅路)24호(號)에서 김구등(金九等) 육인(六人)과 한국독립(韓國獨立)에 필요(必要)한 실력준비(實力準備)를 위해 군인 양성(軍人養成) 및 전비조성(戰費造成)을 목적(目的)으로 하는 노병회(勞兵會)를 발기 조직(發起組織)할 것을 협의(協議)하다 동년(同年)10월7일 노병회 기초위원(勞兵會起草委員)으로 선정(選定)되었으며 동월(同月)28일에는 한국노병회 이사(韓國勞兵會理事)가 되다. 6. 1923년4월2일 제(弟)1회 한국노병회정기총회 간부 선거(韓國勞兵會定期總會幹部選擧)에서 이사(理事)로 선출(選出)되었으며 경리부장(經理部長)으로 결정(決定)되다. 동년(同年)8월25일에는 민단장겸(民團長兼) 인성학교장(人成學校長)에 임명(任命)되었다. 7. 1924년9월8일 교민단 의사원 총선거(僑民團議事員總選擧)에서 의원(議員)으로 당선 동월(同月) 22일에는 교민단 의사회(僑民團議事會)에서 회계검사원(會計檢査員)으로 임명(任命)되다. 8. 1925년 10월 10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서 국무원(國務圓)으로 임명(任命)되었으나 취임(就任)치 않고 자퇴(自退)했으므로 1926.2.18일에 해직(解職)되었다. 9. 1926년10월10일에 국무원(國務圓)에 임명되었고 동년(同年) 4월1일에는 한국노병회(韓國老兵會) 제4회 정기총회(定期總會)에서 이사장(理事長)에 당선(當選) 동년8월에 국무원(國務圓)에 임명(任命) 재무장(再務長)을 역임하다 10. 1927년4월1일 농민호조사 발기인(農民互助社發起人)이 되었다. 11. 1928년3월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組織)하다 12. 1929년2월5일 한국노병회(韓國老兵會) 제7회정기총회(定期總會)에서 간부 개선(幹部改選)에 이사장(理事長)에 선임(選任)되었으며 윤봉길 폭탄 사건(尹奉吉爆彈事件)의 직접명령자(直接命令者)로 협의 받다. 13. 1933년3월9일 피포(被捕)되어 평북도경(平北道警)에 이송(移送)3년 징역(年懲役) 14. 1945년11월28일 월남도중(途中)38선(線) 청단(靑丹)에서 검거(檢擧)하다(기상(記上)의 2,3,4,5,6,7,8,9,10,23 항(項) 내용(內容)은 조선민족운동연감 급(朝鮮民族運動年鑑及) 동아일보(東亞日報),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등 소(所) 수(收))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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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
1993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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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승주
1. 1940년 9월 광복군 사령부 조직 (경리부장) 2. 임정요인 (비서장)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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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 ~
1957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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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울
1. 일본육군중위가 되었다가 대한독립에 뜻을 두어 1916년 만주(滿洲)에 가서 양로군정서(兩路軍政署) 부속인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교성대장(敎成隊長)으로 있었음 2. 1920년 일본의 양협(兩狹)작전에서 반항하여 이를 격퇴하고 동년 12월 김좌진(金佐鎭) 장군과 합류하여 영안현(寧安縣)에서 서일(徐一)을 총대로 하는 대한의용군을 조직하여 여단장으로 활약함 3. 익년 정월 독립군의 부사령관이 되어 강양(崗陽) 일본군 수비대의 공격을 물리쳐 점령하고 소령(蘇領)으로 건너감 4. 소령에서 고려군관학교(高麗軍官學校)를 설립하고 독립군 양성에 노력 중 사상적 대립으로 소(蘇)당국은 동년 6월 22일 독립군의 무조건 무장해제를 강요함에 6월 28일 장군은 민족적 절개를 지키기 위하여 항전 끝에 피체되었다가 석방됨 5. 1925년 1월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여 군사위원장 및 조선의용군총사령관을 겸임하여 평안도(平安道) 일대의 일병을 소탕함 6. 1930년 홍진(洪陳), 신숙(申肅) 등과 한독당(韓獨黨)을 조직하여 군사위원장(軍事委員長)에 취임하고 동년 11월 독립군총사령관이 됨 7. 1932년 2월 18일부터 일본의 육공공격을 견디어 다음해 6월에는 대전자령(大甸子嶺) 전투에서 대첩(大捷)하여 다수의 전리품을 획득하였음 8. 하남 낙양(河南洛陽) 군관학교 특설반의 책임장교로서 동포의 군사교육에 힘씀 9. 1941년 중일전쟁(中日戰爭)이 일어나자 9월 17일에 장개석(蔣介石) 총통(總統)의 협력을 얻어 광복군총사령관에 추대되어 해방되기까지 활동 10. 1957년 1월 노환으로 서거하였음.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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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 ~
1946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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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영동
1. 대한제국 당시 한성평리원(漢城平理院) 검사(檢事), 충청검찰청(忠淸檢察廳) 검사를 역임하면서 한인애국자 보호에 진력함 2. 3.1운동 후 상해(上海)에 망명하여 임시정부 법무총장(臨時政府法務總長), 내무총장(內務總長), 의정원의장(議政院議長), 국무령(國務領) 등을 역임하면서 광복 운동(光復運動)을 영도(領導)함 광복후(光復後) 귀국(歸國)하여 1946년 서울에서 병(病)으로 서거(逝去)하였음
- 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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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 ~
1953
-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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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
1. 1903년 육군(陸軍) 참위(參尉) 임관(任官) 2. 1919년 임시정부(臨時政府) 의정원(議政院) 의원(議員) 3. 1921년 남만(南滿)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참모장(參謀長) 4. 1923년 북만(北滿) 신민부(新民府) 집행위원(執行委員), 군민의회(軍民議會) 중앙집행위원(中央執行委員), 한족동향회(韓族同鄕會) 이사(理事),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집행위원(執行委員),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 사령(司令) 5. 1938년 임시정부(臨時政府) 군사위원(軍事委員),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중앙집행위원(中央執行委員), 임정 군사특파원(臨政軍事特派員)으로 서안(西安)에서 의용군(義勇軍) 소집(召集) 6. 1941년 광복군 총사령(光復軍總司令) 대리(代理) 임정 국무위원(臨政國務委員) 생계부장(生計部長)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