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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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138 건
김상덕 사적비
김상덕(1892 - 1956)은 1919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2.8 독립선언을 하고 독립선언서를 국내에 우송한 후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국민대표회와 재만농민동맹, 대한청년동맹회, 조선독립운동자후원회에서 활동했다. 이밖에도 중앙집행위원과 선전부 책임위원으로 활동했고, 중국에 파견되어 대일한중연합전선의 결성에 힘썼으며,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2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고 이듬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회의에 선전위원회 위원에 피선, 학무부 차장 및 민족혁명당 집행위원, 중앙위원 등으로 선출되어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후 반민특위 위원장도 역임했다. 1990년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려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남형우 순국기념비
남형우(1875 - 1943)는 비밀 독립운동 단체 대동청년단에서 활동했고 보성전문학교 법률학 교수로 재직했다. 1915년 대구에서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라는 결사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경남 창원 등지에서 시위를 적극 주도했다. 이후 대한국민의회의 산업총장에 선임되어 활동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법무차장에 임명되었다. 또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고 법무총장, 교통총장, 국민대표회의의 주비위원장 등에 임명되어 활동했으며, ‘다물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 자금 모집, 시사책진회를조직하여 혼란에 빠진 임시정부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1930년에 일경에게 체포되었다가 발병으로 복귀했다. 1983년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김구 은거기념비
김구(1876~1949)는 황해도 해주목 출신이다.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1세대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안창호, 이승만 등과 함께 지도자 출신 중 최순위권에 손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동학 농민 혁명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직접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령,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겸 내무장, 재무장, 군무장을 거쳐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5년까지 주석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 이후에는 본인은 반공주의자였지만 남북 분단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는 반대하면서 통일론을 포기하지 않다가 1949년에 서울 경교장에서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최고 명예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김창숙 집
김창숙(1879-1962)의 자는 문좌, 호는 심산, 벽옹이며, 조선후기 『심산만초』, 『벽옹만초』, 『벽옹칠십삼년회상기』 등을 저술한 유학자,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리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매국오적을 성토하였다. 1908년(순종 2) 대한협회 성주지부를 조직하여 계급타파를 부르짖었다. 1909년 일진회(一進會)가 한일합병론을 제창하자 동지들을 규합하여 중추원에 그들의 반역을 성토하는 글을 보냈으며, 단연회(斷煙會)의 기금으로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하여 신교육을 시도하였다.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음주로 세월을 보내다가 어머니의 교훈에 따라 유학에 정진하였다. 유학적 소양과 한학의 조예는 주로 이 시기에 기반이 닦여졌다. 3 · 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을 규합해서 130여 명의 연명으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중국 상해로 망명한 뒤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유림단사건’이다.1924년 만주와 몽고 접경지대의 황무지를 빌려서 개간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을 추진하였다. 그 곳에 군정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조달문제로 국내에 잠입하여 모금운동을 전개하다가 탄로 나자, 거듭 출국하는 이른바 ‘제2차 유림단사건’을 일으켰다. 독립운동을 고양시키기 위해 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독립운동지인 『천고(天鼓)』를 발행했고, 이어 박은식(朴殷植) 등과 협력하여 『사민일보(四民日報)』도 발간하였다. 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해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45년 일제 말기의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광복 직전에 발각되어 구속되었으며, 왜관경찰서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이후 곧 상경하여 민주의원(民主議院)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정당의 난립과 신탁통치의 찬반, 미소공동위원회 참가여부의 문제 등으로 일반 정치인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육영사업에 힘썼다. 1946년 봄 전국유림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자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 위원장으로 선출되고, 성균관장을 겸임하였다. 이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하였다. 이석구(李錫九)로부터 재단법인 학린회(學鄰會)의 토지재산을 기부 받고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병합하여 1946년 9월 25일 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인가받고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1953년 2월 6일 전국에 흩어져 있는 향교재단을 규합하여 성균관대학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초대총장에 취임하였으며, 1955년 재단 내 분규로 사임하였다. 1962년 세상을 떠나자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김창숙 사적비
김창숙(1879-1962)의 자는 문좌, 호는 심산, 벽옹이며, 조선후기 『심산만초』, 『벽옹만초』, 『벽옹칠십삼년회상기』 등을 저술한 유학자,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리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매국오적을 성토하였다. 1908년(순종 2) 대한협회 성주지부를 조직하여 계급타파를 부르짖었다. 1909년 일진회(一進會)가 한일합병론을 제창하자 동지들을 규합하여 중추원에 그들의 반역을 성토하는 글을 보냈으며, 단연회(斷煙會)의 기금으로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하여 신교육을 시도하였다.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음주로 세월을 보내다가 어머니의 교훈에 따라 유학에 정진하였다. 유학적 소양과 한학의 조예는 주로 이 시기에 기반이 닦여졌다. 3 · 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을 규합해서 130여 명의 연명으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중국 상해로 망명한 뒤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유림단사건’이다.1924년 만주와 몽고 접경지대의 황무지를 빌려서 개간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을 추진하였다. 그 곳에 군정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조달문제로 국내에 잠입하여 모금운동을 전개하다가 탄로 나자, 거듭 출국하는 이른바 ‘제2차 유림단사건’을 일으켰다. 독립운동을 고양시키기 위해 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독립운동지인 『천고(天鼓)』를 발행했고, 이어 박은식(朴殷植) 등과 협력하여 『사민일보(四民日報)』도 발간하였다. 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해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45년 일제 말기의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광복 직전에 발각되어 구속되었으며, 왜관경찰서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이후 곧 상경하여 민주의원(民主議院)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정당의 난립과 신탁통치의 찬반, 미소공동위원회 참가여부의 문제 등으로 일반 정치인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육영사업에 힘썼다. 1946년 봄 전국유림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자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 위원장으로 선출되고, 성균관장을 겸임하였다. 이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하였다. 이석구(李錫九)로부터 재단법인 학린회(學鄰會)의 토지재산을 기부 받고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병합하여 1946년 9월 25일 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인가받고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1953년 2월 6일 전국에 흩어져 있는 향교재단을 규합하여 성균관대학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초대총장에 취임하였으며, 1955년 재단 내 분규로 사임하였다. 1962년 세상을 떠나자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이상룡, 이준형, 이병화 집(임청각)
임청각은 중종 14년(1519)에 형조좌랑을 지냈던 고성이씨 이명(李洺)이 지은 집으로 원래는 99칸의 집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70여 칸만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 중 하나인 이 집은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의 생가이며, 그의 아들과 손자 삼대에 걸쳐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이다. 이상룡(1858 - 1932)의 자는 만초, 호는 석주이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이상룡은 1900년대 초반까지 주로 스승·동문들과 성리철학 문제에 대해 깊이 토론하며, 강회 개최, 향음주례 시행, 향약 제정과 시행 등 성리학적 질서를 향촌에 뿌리내리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본격적으로 의병 활동에 나섰다. 1905년 겨울 영해 출신인 매제 박경종(朴慶鍾)과 함께 1만 5000냥을 모아 가야산에서 거병한 은표(隱豹) 차성충(車晟忠)을 지원하는 한편, 신돌석(申乭石)·김상태(金相台) 등과도 연대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차성충의 기병이 실패로 끝나자 의병 항쟁이 가지는 한계를 깊이 인식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한 끝에 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이에 이상룡은 1909년 4월 계몽운동 단체인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결성하였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자, 1911년 1월 5일 가솔과 가까운 친척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망명 직후인 1911년 4월 유하현(柳河縣) 삼원포에서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고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서간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청년들을 모아 경학사 부속 기관으로 설치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통해 청년들을 훈련시켰다. 1919년에는 만주 한인 사회의 자치기구인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였다. 한족회는 경학사(1911~1913), 공리회(1913~1916), 부민단(1916~1919)의 정신을 계승하여 결성된 만주 한인 사회의 민정기관이었다. 여기에서 이상룡은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4월 군정기관으로 조직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최고 대표인 독판에 선임되었다. 이상룡은 서로군정서의 독판으로 일제에 계속 항쟁하면서 국내에 조직된 의용단(義勇團)과 연결을 꾀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다. 또한 1921년 북경군사통일회의에 참석하였고, 이어 남북만주와 연해주에 각기 일어나고 있던 독립군단과 항일 단체들의 통합을 시도하여 1922년 6월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비롯한 8단 9회의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성립시켰다. 1925년 9월 이상룡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에 추대되었다. 국무령에 취임하여 당시 만주와 중국 대륙에서 독립군을 이끌며 항일 투쟁에서 큰 성과를 올리고 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조각(組閣)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 세력을 조정·통합하려는 노력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26년 봄 국무령 직책을 사임하였다. 1926년 2월 다시 만주로 돌아온 뒤 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참의부(參議府)를 비롯한 만주 지역 광복 단체의 통합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만주에서의 항일 운동이 매우 어려운 국면을 맞았던 1932년 5월 길림성 서란현(舒蘭縣)에서 74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준형(1875 - 1942)의 이명은 이재섭(李在燮)·이중조(李中組)·이동고(李東皐), 자는 문극(文極), 호는 동구(東邱)이며, 이상룡의 아들이고,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이준형은 일찍이 안동 지역의 계몽운동에 앞장섰으며, 1909년 봄 이상룡이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조직하는 데 참여하여 실무를 담당하였다. 1911년 1월경 아버지를 비롯한 안동의 여러 인사들과 함께 고향을 떠나 만주로 망명하여 그해 4월에 경학사 조직에 참여하여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앞장섰다. 1919년에는 한인 사회의 자치기구인 한족회와 1925년 서로군정서 정의부(正義府)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뒤 사회주의 노선으로 전환하여 이광민·김응섭 등과 함께 한족노동당과 남만청년총동맹 등을 조직하였고, 1928년 중국공산당 반석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아버지 이상룡이 순국한 후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1942년 9월 2일 국운을 비관하여 자결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이병화(1906 - 1952)의 자는 경천(敬天), 호는 소파(小坡), 이명은 이대용(李大用)·이계오(李桂五)·이탁(李拓)·이경천(李慶天)·이병화(李秉華)이며, 이상룡의 손자이자, 이준형의 아들이다. 이병화는 1911년 아버지 이준형(李濬衡)과 함께 할아버지 이상룡을 따라 안동을 떠나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다녔다. 1921년 신흥무관학교에 재학 중 이광국(李光國), 김산(金山) 등과 더불어 남만청년총동맹(南滿靑年總同盟)에 가입하여 농민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이상룡과 김동삼 등이 조직한 무장 투쟁 단체인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가담하여 1924년 평안북도 청성진의 일본 경찰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 경찰을 사살한 혐의로 수배되었다. 1927년에 접어들어 길림성(吉林城) 반석현(磐石縣)에 기반을 두고 있던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 및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도간부와 선전부 상무를 역임하였다. 1928년 5월 조직된 재중한인청년동맹(在中韓人靑年同盟)에 가입하였으며, 요동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를 주도하였다. 1934년 5월 청성진 경찰주재소를 습격한 혐의로 신의주경찰서에 구금되어, 그해 6월 25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유창우 묘
유창우(1884 - 1921)는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19년 고종의 죽음으로 전국에서 3·1 만세운동이 펼쳐지자, 1920년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이곳에서 류창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 이향(李香)을 통해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과 만나 독립을 위한 공채(公債) 모집에 종사할 것을 서약하고 신택균(申宅均)·신현휴(申賢休) 등을 보증인으로 하여 공채모집위원으로 임명받았다. 류창우는 독립공채를 휴대하고, 국내로 들어오기 위하여 1920년 9월 26일 일본 장기에 상륙하던 중, 잠복해 있던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 일로 류창우는 1920년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은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11월 2일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1977년 대통령표창을 받았고,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강택진 묘
강택진(1892 - 1926)의 호는 하연이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강택진은 개성 출신으로 서울에서 살다 『정감록(鄭鑑錄)』에 따라 영주 풍기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풍기 지역은 『정감록』에서 말하는 ‘십승지’ 중 하나였기에 이주해 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3·1운동 직전 중국 동북지역으로 건너가 1919년 3월 지린[吉林]에서 결성된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 재무부원으로 독립운동 자금모집에 힘을 쏟았다. 국내 활동을 위해 동년 6·7월경 귀국한 그는 10월 서울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연통제(聯通制) 기관으로 조선13도총간부를 조직하고 교섭부장을 맡았다. 이때 그는 경북 일대를 무대로 독립운동자금 수백원을 모집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송부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1920년 말 연통제 조직이 파괴되는 상황에서 체포되어 1921년 6월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농민운동과 같은 대중운동에 관심을 쏟으며 1923년 1월 풍기소작인조합(豊基小作人組合)과 동년 9월 전조선노농대회준비위원회(全朝鮮勞農大會準備委員會)의 발기에 참여했다. 또한 식민지 사회의 모순을 절감하고 고려공산청년동맹(高麗共産靑年同盟)에 참여하여 청년운동을 전개하였고, 1923년 10월 조선노농대회준비회(朝鮮勞農大會準備會)를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이 결성되자 중앙위원·상무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농민운동 지도자로 활동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범교 추모비
이범교(1888 - 1951)는 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대구에서 동산병원(東山病院)을 개업하여 의료업에 종사하다가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대구에서 시위에 참가하고 일경의 지명수배를 피하여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1919년 4월에 임시정부에서 국내외를 연결시키며 통제하기 위하여 설립한 교통부(交通部)의 교통위원(交通委員)으로 피선되었다. 교통부에서는 정보의 수집 및 검토, 교환, 연락과 기밀문서의 교환 등 통신업무에 치중하는 한편, 독립운동 자금의 수집 업무도 겸하고 있었다. 또한 그 주요 임무로서는 독립운동에 헌신할 의식있는 인물을 발굴하여 양성, 교육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중대한 임무를 띠고 그는 1919년 7월에 임시정부 경북 특파원으로 임명되어 항일선전 및 군자금 조달, 임시정부 연락 임무 등의 사명을 띠고 입국하여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11월에는 국내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체포 위기를 여러 번 모면한 뒤 만주(滿洲), 봉천(奉天)으로 가서 국내 출입 안내역과 연락책으로 활동하였으며, 또한 12월에는 노령(露領) 니코리스크시에 배영학교(培英學校)와 병원을 설립하고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계몽사상을 교육시켰다. 또한 1921년에는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 이만시를 탈출한 이범석(李範奭)이 약 6개월간 배영학교(培英學校)에서 훈련부장으로 재직하면서 2세 교육에 전념하고, 독립운동을 보다 합리적으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정희 묘전비
이정희(1881 - 1955)는 경북 청도(淸道) 사람이다. 그는 1915년 음력 1월 15일 박상진(朴尙鎭)·서상일(徐相日)·이시영(李始榮)·박영모(朴永模)·홍주일(洪宙一) 등과 함께 경북 대구(大邱) 안일암(安逸庵)에서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결성하였다. 동단은 대구를 중심으로 주로 경상우도((慶尙右道) 지역의 중산층 이상의 혁신유림들이 참여하여 사립교육기관과 곡물상의 상업조직을 통하여 독립군을 지원한 구국경제활동단체였다. 조선국권회복단은 1915년 7월 15일에 풍기(豊基)의 광복단(光復團)과 조직을 합쳐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모집, 그리고 무기구입을 목적으로 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로 발전하였다. 그는 대한광복회의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1918년 1월 대구의 광복회 조직이 노출되어 일경에 붙잡혔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동년 10월에 석방되었다. 그는 1920년에 고향인 청도군 매전면(梅田面) 온막동(溫幕洞)에 온명학원(溫明學院)을 설립하고 후진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또한 1921년에 경성북도 초대 평의원(評議員)으로 당선된 후 임시정부(臨時政府) 후원단체인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다가 1922년 일경에 붙잡혀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하여 항일운동과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정희 추모비, 흉상
이정희(1881 - 1955)는 경북 청도(淸道) 사람이다. 그는 1915년 음력 1월 15일 박상진(朴尙鎭)·서상일(徐相日)·이시영(李始榮)·박영모(朴永模)·홍주일(洪宙一) 등과 함께 경북 대구(大邱) 안일암(安逸庵)에서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결성하였다. 동단은 대구를 중심으로 주로 경상우도((慶尙右道) 지역의 중산층 이상의 혁신유림들이 참여하여 사립교육기관과 곡물상의 상업조직을 통하여 독립군을 지원한 구국경제활동단체였다. 조선국권회복단은 1915년 7월 15일에 풍기(豊基)의 광복단(光復團)과 조직을 합쳐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모집, 그리고 무기구입을 목적으로 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로 발전하였다. 그는 대한광복회의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1918년 1월 대구의 광복회 조직이 노출되어 일경에 붙잡혔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동년 10월에 석방되었다. 그는 1920년에 고향인 청도군 매전면(梅田面) 온막동(溫幕洞)에 온명학원(溫明學院)을 설립하고 후진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또한 1921년에 경성북도 초대 평의원(評議員)으로 당선된 후 임시정부(臨時政府) 후원단체인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다가 1922년 일경에 붙잡혀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하여 항일운동과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광주백범기념관
김구(1876~1949)는 황해도 해주목 출신이다.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1세대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안창호, 이승만 등과 함께 지도자 출신 중 최순위권에 손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동학 농민 혁명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직접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령,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겸 내무장, 재무장, 군무장을 거쳐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5년까지 주석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 이후에는 본인은 반공주의자였지만 남북 분단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는 반대하면서 통일론을 포기하지 않다가 1949년에 서울 경교장에서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최고 명예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