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TOTAL. 251 건
유민식 묘
충청남도 천안에 위치한 유민식(유정근)의 묘이다. 유민식(1898-1969)은 충청남도 천안의 독립운동가로, 이명은 유정근, 유만송, 유후단이다. 일제에게 국권이 피탈되자 조국 광복의 염원을 안고 만주 등지에서 국권 회복 운동을 벌이고 1919년 4월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홍진, 신규식, 이명교 등과 함께 충청도 대표로 선임되었다. 1923년 5월에는 만주로 넘어가 김좌진을 보좌하고 1925년에는 김혁, 김좌진 등이 조직한 신민부(新民府)에 참여하기도 하는 등 활약했다. 그러나 중국 군벌의 지원을 받은 하얼빈 일영사관경찰대가 신민부의 비밀본거지를 포위 습격하여 본부 직원 모두가 체포되어 1929년 7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5년형이 확정되었다. 1934년, 유민식은 옥중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나 끔찍한 폭행과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윤병구 기적비
윤병구(1889-1929)는 의열단(義烈團)의 일원이었으며, 1922년 총독 및 일제 고관의 처단과 총독부(總督府)·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경찰서 등을 폭파하기 위한 군자금 모집을 유석현(劉錫鉉)·김지섭(金祉燮) 등과 함께하였다. 총독부 판사 백윤화(白允和)에게 2천원의 자금을 약속받았고, 수령을 위해 집을 찾아갔으나 백윤화의 신고로 일경에 붙잡혔으며,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문양목 생가터(충운사)
문양목(1869-1940)은 1903년 경기도 인천에서 서당교사로 재직 중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며 항일민족운동을 하였다. 1907년 3월 대동보국회(大同輔國會)에 참여하여 이병호와 백일규에 이어 회장이 되었고, 이 단체의 기관지인 『대동공보(大同公報)』의 주필도 맡았다. 1908년 3월 당시 한국정부의 외부고문이던 스티븐스(Stevens, D.W.)가 한국인은 독립할 능력이 없다고 하자, 대동보국회도 항의하였다. 이때 최유섭(崔有涉)·정재관(鄭在寬)·이덕현(李德鉉)·문양목 등이 발언을 정정 취소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스티븐스가 거절하자 그를 구타하고 돌아와 그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후 전명운(田明雲)·장인환(張仁煥)이 스티븐스를 저격, 살해하자 대동보국·독립협회 등은 후원회를 조직하고 변호사 교섭, 통역선택, 경비조달 등을 맡게 되었으며, 변호 비용을 모금하고 판사전담위원이 되어 재무를 맡는 등 구명운동에 힘썼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애국지사 추모탑(오몽근, 가재창, 김정진, 염성한)
대한독립단은 1919년 음력 3월 남만주 유하현에서 조맹선·백삼규·조병준 등이 조직한 독립운동단체로, 국내 진입작전과 남만주 동포사회의 자치를 목표로 했다. 실제 이들은 주로 평안남북도와 황해도지역, 만주 등지에서 항일무장활동을 벌였다.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집중적으로 결사대를 조직해 평안남북도의 조선총독부 경찰을 습격하고, 신의주 등지에서 친일세력을 처단하기도 했다. 대한독립단 안면결사대는 1919년 9월 조직되었고 이종헌이 지단장에 선임되었다. 이들은 군자금 모집, 친일 부호 응징 등 독립활동을 하다가 1920년 일경에 노출되어 단원들이 체포되고 조직이 해체되었다. 지단장 이종헌(1977년 애족장)을 비롯해 가재창(1982년 애족장), 오몽근(1982년 애족장), 김정진(1983년 애족장), 염성환 등이 옥고를 치렀다. 태안 안면 반도청년회는 1983년 8월 대한독립단 안면결사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애국지사 추모탑을 건립하였다.
김좌진 기적비
김좌진(1889-1930)은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출생하였다. 집안은 부유한 명문대가였으며 15세 때 가노(家奴)를 해방할 정도로 진취적 개화사상이 강하였다. 1905년 서울에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을사늑약 체결 이후 국권회복의 신념을 가지고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국운을 바로잡을 것을 결심하였다. 1907년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산(家産)을 정리하여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대한협회 홍성지부를 조직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을 하였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참여하면서 1909년 《한성신보》의 간부를 지냈고,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조직하였다. 1911년 군자금 모금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투옥되어 2년 6개월 간 복역하였다. 1915년 비밀결사 조직 대한광복회에 가입했고, 1916년에는 노백린(盧伯麟)·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광복단에서도 활동하였다. 1917년 대한광복회의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었으나, 예심에서 면소판정으로 석방되었다. 1918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으며, 대한광복회 조직이 와해되면서 체포 위기에 처했으나 만주에 있어 체포는 면했다. 그 해 12월 무오(戊午)독립선언서에 민족지도자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년 대한정의단의 기반 위에 군정부를 조직하여 본거지를 왕칭현[汪淸縣]에 두고 5분단(分團) 70여 개의 지회를 설치한 뒤 광복운동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를 대한민국임시정부 휘하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한 뒤, 그 기관의 총사령관이 되어 1,600명 규모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이어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치하여 사관훈련과 무기입수에도 힘썼다. 기관총 7문 등으로 무장한 김좌진 휘하의 독립정예군은 만주 일대에서는 가장 막강한 실력의 군대로, 1920년 이후 10여 년 간 본격적인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1920년 10월 20~23일 청산리(靑山里) 80리계곡에서 유인되어 들어온 일본군을 맞아, 나중소(羅仲昭:참모총장)·박영희(朴英熙:부관)·이범석(李範奭:연성대장) 등과 함께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마록구(馬鹿溝) 등지에서 일본군과 3회의 격전을 전개, 일본군 3,300명을 일시에 섬멸하였다. 이를 청산리전투라 하여 봉오동전투와 함께 독립전쟁사상 최대의 승리로 꼽는다. 그 후 부대를 이동, 헤이룽강[黑龍江] 부근으로 전진하여 국민회군의 안무(安武), 도독부군의 최진동(崔振東) 등과 연합하고 대한독립군단을 결성,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일본군의 격렬한 보복작전의 전개로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다가 이듬해 헤이허[黑河]사변으로 타격을 받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여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 부교장으로 독립군간부 양성에도 주력하였다. 1927년 만주의 신민부·참의부·정의부의 3부를 통합하려다 실패하자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在滿策進會)를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 단일단결성을 재촉하였다. 1929년 한족연합회를 결성, 주석에 취임하여 황무지 개간, 문화계몽사업, 독립정신 고취와 단결을 호소하였다.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고려공산청년회 김봉환(金鳳煥)의 감언이설에 빠진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경석조 묘
경석조(1881 - 1957)은 충북 괴산 연풍(延豊) 사람이다. 1914년 만주로 망명하여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고 동지를 규합하다 일경에 체포 구금되었다. 1919년에는 대동단(大同團) 충북 지단에서 활약하였다. 1924년에는 다시 만주로 건너가서 길림성(吉林省) 북간도(北間島) 용정촌(龍井村)에서 고사연구회(古事硏究會)를 조직하고 절대독립(絶對獨立)을 외치며 항일활동에 주력하였다. 1929년에는 한족연합회를 결성하여 중앙 총무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 기밀부장에 피선되었다. 1944년에는 중국국민당에 입당하여 재만동포의 생명과 재산보호에 힘을 다하였다. 광복 후 1949년 2월에는 반민특위(反民特委) 충북책임자로 피선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경석조 공적비
경석조(1881 - 1957)은 충북 괴산 연풍(延豊) 사람이다. 1914년 만주로 망명하여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고 동지를 규합하다 일경에 체포 구금되었다. 1919년에는 대동단(大同團) 충북 지단에서 활약하였다. 1924년에는 다시 만주로 건너가서 길림성(吉林省) 북간도(北間島) 용정촌(龍井村)에서 고사연구회(古事硏究會)를 조직하고 절대독립(絶對獨立)을 외치며 항일활동에 주력하였다. 1929년에는 한족연합회를 결성하여 중앙 총무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 기밀부장에 피선되었다. 1944년에는 중국 국민당에 입당하여 재만동포의 생명과 재산보호에 힘을 다하였다. 광복 후 1949년 2월에는 반민특위(反民特委) 충북책임자로 피선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용재 충의비
김용재(1900 - 1928)은 평북 희천(熙川) 사람이다. 조국의 독립운동에 투신할 목적으로 1920년대 중반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서간도 망명 후 1923년 8월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결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에 가입하여 군사교육을 받으면서 독립군의 자질을 배양하던 그는 참의부의 군기 확충과 재정을 위해 국내에 거점을 두고 군자금을 모집 송달하라는 명령을 받고 국내로 파견되었다. 국내로 잠입한 그는 어릴적부터 거주하며 활동하던 소백산중에 거점을 정하고 동지 김찬섭(金燦涉) 등과 함께 군자금 모집을 위한 비밀결사 조직을 결성하였으며, 단양·영월·영주지역은 물론 충청도·강원도·경상도 등을 출입하면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여 일경들의 체포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던 김현구(金顯九)가 일경에 붙잡혀 악형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거처를 자백함에 따라 그의 근거지는 발각되었다. 이에 따라 1928년 9월경 일경 100여 명이 4부대로 나누어 소백산을 포위하고 그를 체포하기 위한 수색작업을 전개해 옴에 따라 소백산 형제봉 밑에 은신하던 그는 동지 1명과 함께 일경을 상대로 총을 쏘며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용태, 이용준 추모비
이용태(1890~1966)는 제천군 백운면장(白雲面長)으로 재직하였고, 1928년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39년 4월 만주로 망명하여 제3세 교주 윤세복(尹世復)으로부터 대종교에 관한 해설을 듣고 전교로 승진하였으며, 경의원장(經議院長)이라는 중책을 담당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 11월 일제의 대종교 말살정책으로 간부 24명과 함께 체포되어 징역 8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이용준(1907~1946)은 신간회(新幹會)에 가담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30년 동아일보 봉천(奉天)지국 보급원으로 만주로 건너갔고, 1931년 5월 상해(上海)에 있는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여 무력적인 항일투쟁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백정기(白貞基)의 권유에 의거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에 입단하여 엄순봉(嚴舜奉)·김성수(金聖秀)와 함께 활동하였다. 1932년 상해사변이 발생하자 일시 피신하였다가 유기석(柳基石)의 권유로 천진 일본총영사관에 수류탄을 던졌으나 큰 피해는 입히지 못하고 일부를 파괴하는데 그쳤다. 1933년 3월, 상해에서 일본공사 유길명(有吉明)의 암살계획을 수립하였으며, 1935년 3월, 정화암(鄭華岩)과 함께 엄형순·이규창(李圭昌) 등으로 하여금 상해 거류민회 부회장인 친일파 이용로(李容魯)를 총살, 처형하도록 하였다.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에 가입하여 중앙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8년 12월 체포되어, 징역 5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용태 흉상
이용태(1890~1966)는 제천군 백운면장(白雲面長)으로 재직하였고, 1928년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39년 4월 만주로 망명하여 제3세 교주 윤세복(尹世復)으로부터 대종교에 관한 해설을 듣고 전교로 승진하였으며, 경의원장(經議院長)이라는 중책을 담당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 11월 일제의 대종교 말살정책으로 간부 24명과 함께 체포되어 징역 8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용준 흉상
이용준(1907-1946)은 신간회(新幹會)에 가담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30년 동아일보 봉천(奉天)지국 보급원으로 만주로 건너갔고, 1931년 5월 상해(上海)에 있는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여 무력적인 항일투쟁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백정기(白貞基)의 권유에 의거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에 입단하여 엄순봉(嚴舜奉)·김성수(金聖秀)와 함께 활동하였다. 1932년 상해사변이 발생하자 일시 피신하였다가 유기석(柳基石)의 권유로 천진 일본총영사관에 수류탄을 던졌으나 큰 피해는 입히지 못하고 일부를 파괴하는데 그쳤다. 1933년 3월, 상해에서 일본공사 유길명(有吉明)의 암살계획을 수립하였으며, 1935년 3월, 정화암(鄭華岩)과 함께 엄형순·이규창(李圭昌) 등으로 하여금 상해 거류민회 부회장인 친일파 이용로(李容魯)를 총살, 처형하도록 하였다.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에 가입하여 중앙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8년 12월 체포되어, 징역 5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연병환 공적비
연병환(1878-1926)은 1908년 7월 이후 중국 길림성 연길현 해관(海關)에서 관리로 근무하면서 1919년 간도 용정(龍井)에서 일어난 3·13 만세시위운동에서 독립운동가를 후원하다가 일제 간도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2개월의 처벌을 받았다. 이후 상해(上海)로 이동하여 1920년 대한인거류민단(大韓人居留民團)의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8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