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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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차정 집
박차정(1910-1944)는 부산광역시의 독립운동가이다. 1924년 5월 조선소년동맹(朝鮮少年同盟) 동래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동래(東萊) 일신(日新)여학교에 재학 중 조선청년동맹(朝鮮靑年同盟) 동래지부 집행위원장인 숙부 박일형의 권유로 조선청년동맹 및 근우회(槿友會) 동래지부 회원, 동래노동조합 조합원, 신간회 동래지회 회원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3월 일신학교를 졸업한 뒤, 동년 7월 서울 수운회관(水雲會館)에서 개최된 근우회 제2회 전국대회에 동래지부 대의원 자격으로 참석하여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동년 9월에는 조사연구부장, 상무위원, 선전 및 출판 부장 등의 직책을 맡아 여성들의 민족운동 활성화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또한 동년 12월에는 근우회 중앙간부들과 함께 서울 시내의 각 여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광주학생운동 동조 시위를 주도하여 전국적으로 반일 학생운동으로 확산시키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 후 1930년 1월 부산방직(釜山紡織) 파업 사건을 주도하다가 동래에서 붙잡힌 박차정은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으나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출옥 후 1930년 2월에 중국 북경으로 망명한 박차정은 1931년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을 만나 결혼하고 의열단 단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2년 의열단이 한중 연합항일투쟁의 일환으로, 장개석의 도움을 받아 남경(난징)에 위치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中國中央陸軍軍官學校) 교외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를 설립하자 제1기 여자부 교관으로 선정되어 사관생도 양성을 담당하였다. 1935년 6월에는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부녀부(婦女部)를 담당하고, 1936년 7월에는 이청천의 처 이성실과 함께 민족혁명당원 가족들을 규합할 목적으로 남경조선부인회(南京朝鮮婦人會)를 조직하여 일선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 후 1937년 11월 의열단의 한중민족연합전선(韓中民族聯合戰線)의 일환으로 파견된 박차정은 대일본 라디오방송을 통해 선전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1938년 4∼5월경에는 기관지 『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線)』에 「경고, 일본의 혁명대중」, 「조선부녀와 부녀운동」이라는 글을 투고하여 총체적인 무장 궐기를 촉구하였다. 그 후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창설되자,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婦女服務團)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선임되어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다가 1939년 2월 강서성 곤륜산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하던 중 부상을 입었다. 그 후 부상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44년 5월 27일 중경에서 서거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재혁 추모비
박재혁(1895-1921)은 일제강점기 의열단에서 부산경찰서장 하시모도에게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이다.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무역상회의 고용인으로 일하다가, 1917년경부터 상해 등 중국 각지와 싱가포르 등지를 돌아다니며 무역에 종사하였으며, 중국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교유를 가졌다. 1920년 8월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과의 연락으로 상해로 가 의열단에 입단하고, 9월 상순 고서(古書) 짐 속에 폭탄을 숨겨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13일 부산에 돌아왔다. 이튿날 부산경찰서로 찾아가 평소 안면이 있던 서장 하시모도[橋本秀平]를 만나 진기한 고서를 보여준다며 봇짐을 풀고 짐 속에 있던 폭탄을 꺼내어 서장을 죽이려는 의도를 밝힌 다음, 폭탄을 던졌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두 사람 모두 중상을 입었다. 중상을 입고 붙잡혀, 1921년 3월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과 폭탄으로 인한 상처로 고통을 겪다가 단식을 하던 중 옥사하였다. 1962년에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박재혁 폭탄투척 의거지(구 부산경찰서 터)
박재혁(1895-1921)은 일제강점기 의열단에서 부산경찰서장 하시모도에게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이다.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무역상회의 고용인으로 일하다가, 1917년경부터 상해 등 중국 각지와 싱가포르 등지를 돌아다니며 무역에 종사하였으며, 중국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교유를 가졌다. 1920년 8월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과의 연락으로 상해로 가 의열단에 입단하고, 9월 상순 고서(古書) 짐 속에 폭탄을 숨겨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13일 부산에 돌아왔다. 이튿날 부산경찰서로 찾아가 평소 안면이 있던 서장 하시모도[橋本秀平]를 만나 진기한 고서를 보여준다며 봇짐을 풀고 짐 속에 있던 폭탄을 꺼내어 서장을 죽이려는 의도를 밝힌 다음, 폭탄을 던졌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두 사람 모두 중상을 입었다. 중상을 입고 붙잡혀, 1921년 3월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과 폭탄으로 인한 상처로 고통을 겪다가 단식을 하던 중 옥사하였다. 1962년에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강근호 기념비
강근호(1888-1960)는 일제강점기, 청산리 대첩에 참전한 독립운동가이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함흥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6년 ‘반일학생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자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지린성〔吉林省〕 룽징촌〔龍井村〕에서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후 그해 5월 신흥학교를 확대 개편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후에는 무장 독립운동 조직인 북로군정서의 사관양성소에서 제1학도대 제3구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 대첩에서 김좌진(金佐鎭, 1889~1930)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의 제1중대장으로 참전하여 승리를 거두고, 부대원들과 함께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러시아의 자유시로 이동하였다. 1921년 6월 러시아 적군이 사할린의용대를 공격하는 자유시사변이 일어난 이후 고려혁명군에 소속되어 이르쿠츠크(Irkutsk)로 이동한 후 러시아 적군에 예속(隷屬)되었다. 그해 10월 이르쿠츠크에서 고려혁명군이 장교와 사병을 양성하고자 세운 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하였다. 1922년에 반공 투쟁을 벌여 이르쿠츠크 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른 후 만주로 돌아왔다. 만주에서는 룽징촌 영신학교의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43년에는 허룽현 명월구에서 애국동지회 청년군사훈련 교관으로 근무하였다. 광복이 되자 귀국하여 수원의 대한민족청년단 중앙훈련소 교관으로 근무하였고, 1949년 2월에는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학해 소위로 임관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장교로 참전하였으며, 1956년 중령으로 전역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강근호 추모비
강근호(1888-1960)는 일제강점기, 청산리 대첩에 참전한 독립운동가이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함흥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6년 ‘반일학생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자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지린성〔吉林省〕 룽징촌〔龍井村〕에서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후 그해 5월 신흥학교를 확대 개편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후에는 무장 독립운동 조직인 북로군정서의 사관양성소에서 제1학도대 제3구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 대첩에서 김좌진(金佐鎭, 1889~1930)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의 제1중대장으로 참전하여 승리를 거두고, 부대원들과 함께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러시아의 자유시로 이동하였다. 1921년 6월 러시아 적군이 사할린의용대를 공격하는 자유시사변이 일어난 이후 고려혁명군에 소속되어 이르쿠츠크(Irkutsk)로 이동한 후 러시아 적군에 예속(隷屬)되었다. 그해 10월 이르쿠츠크에서 고려혁명군이 장교와 사병을 양성하고자 세운 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하였다. 1922년에 반공 투쟁을 벌여 이르쿠츠크 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른 후 만주로 돌아왔다. 만주에서는 룽징촌 영신학교의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43년에는 허룽현 명월구에서 애국동지회 청년군사훈련 교관으로 근무하였다. 광복이 되자 귀국하여 수원의 대한민족청년단 중앙훈련소 교관으로 근무하였고, 1949년 2월에는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학해 소위로 임관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장교로 참전하였으며, 1956년 중령으로 전역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2.8 공원
김도연(1894-1967)은 일제강점기 2·8독립운동, 조선어학회사건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본관은 영천(永川)이고 이칭은 상산(常山)이다.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 염창리(현 서울 강서구 염창동 증미마을)출신으로 어려서 등촌동 허씨댁 서당에서 유학을 공부하였으며 15세에 서울로 상경하여 아현동 태극학교, 보성중학교를 졸업하였다. 1913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세이소쿠 영어학교에서 공부했다. 1914년 긴죠 중학교 3학년에 입학하였고, 1919년 게이오[慶應]대학 이재학부를 수료했다. 도쿄 유학 시절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2·8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9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고 동경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출옥하였고, 1921년 일본에서 흥사단에 가입했다. 1922년 학업과 항일운동을 위해 미국으로 유학, 웨슬리안대학교 3학년에 입학하여 경제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뉴욕의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1927년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1931년 워싱턴의 아메리칸대학 대학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유학 초기부터 북미한인유학생총회 등의 단체에 가입하여 주도적으로 학생운동을 펼치는 한편, 한인사회의 발전과 해외동포 구제를 위해 노력했고, 특히 1927년부터 윤치영(尹致暎), 장덕수(張德秀) 등과 함께 대한인동지회 가입, 『삼일신보(三一申報)』 창간 등을 통해 이승만(李承晩) 지지 활동을 전개했다. 1932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강사를 지내다, 1934년 조선흥업주식회사를 창립했다. 1942년 일제가 조작한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 체포되어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의 선고를 받았고, 함흥형무소에서 석방될 때까지 약 2년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여운형(呂運亨)의 건국준비위원회 참여 권유를 거부한 장덕수와 함께 한국민주당 건설에 주력하며 미군정의 정책에 적극 참여했으며, 1946년 남조선 민주의원 의원과 남조선 과도정부 입법의원에 당선되었다. 1948년 5월 제헌국회 총선거 때 한국민주당 소속으로 서대문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국회 초대 재정경제분과 위원장에 선출되었고, 1948년 8월부터 1950년까지 초대 재무부 장관으로 활동했다. 1954년 제3대 민의원, 1958년 제4대 민의원, 1960년 5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8월 국무총리에 지명되었으나 국회의 인준투표에서 부결되었고, 민주당 구파동지회를 결성해 신민당(新民黨)을 창당하였으나,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의원자격이 상실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전국구 의원이 되었다. 6대 국회에서는 야당의 참패하였는데, 한일협정 문제가 사회 이슈로 등장하자 강력한 야당 출현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65년 5월 자유민주당과 민정당이 합당, 민중당이 탄생하게 되었다. 김도연은 같은 해 6월 민중당 대표 최고위원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8월 한일협정 비준에 반대해 의원직을 사퇴했다. 이후 제7대 국회에서 신민당 소속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생전에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고(1963년) 1967년 숙환으로 영면하여 사회장을 치렀고 북한산 순국선열 묘역에 안장되었다. 1991년에 애국장을 수훈하였다.
권기옥 동상
권기옥(1901-1988)은 일제강점기 때 남경 국민정부 항공서 부비항원, 대한애국부인회 사교부장 등을 역임한 비행사 · 독립운동가 여성이며 이칭은 임국영(林國英)이다. 3·1운동 참여 후 상해로 망명했다. 1925년 운남 육군항공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가 됐다. 장개석의 국민혁명군 소속 비행사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 단체와 교류하다가 일본 밀정 모함을 받고 체포·수감되었다. 이후 임시정부 산하 한국애국부인회 재건, 광복군 비행대 편성 구상 등의 활동을 했다. 해방 후 한때 정치활동을 했으며, 한중문화협회 부회장, 재향군인회부인회 고문 등을 역임했다. 1988년 4월 19일 87세로 별세하자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1968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2003년 국가보훈처가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유일한 묘
유일한(1895-1971)은 주식회사 유한양행(柳韓洋行) 창업자이다. 1939년 중국에서 한인독립운동단체인 광복진선(光復陣線)과 민족전선(民族戰線)이 하나로 통합되고 중·일(中日)간의 전쟁이 고조되던 즈음인 1940년 9월 북미 대한인국민회는,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 대표자들에게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시국대책을 강구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개최한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의 결의에 따라 동년 8월 미주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조직되다. 미주 로스앤젤레스에 설치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執行部) 위원으로 선임된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추진하였다. 또한 동년 12월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으로 미국 육군사령부의 허가를 얻어 로스앤젤레스에 캘리포니아주 민병대 소속으로 일명 맹호군(猛虎軍)인 한인국방경위대(韓人國防警衛隊)를 편성하는데 적극 후원하였다. 1942년 당시 미육군 전략처(OSS)의 한국담당 고문으로 활약하며 펄벅과 교유하기도 한 그는 동년 8월 로스엔젤레스 시청 앞에서 맹호군 창설과 함께 진행된 현기식(懸旗式)에 참여하여 이승만(李承晩)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趙素昻) 등의 축사를 낭독하는 등 맹호군 창설과 현기식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한편, 동년 10월 미국정부 전략청(戰略廳)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기획연구부(企劃硏究部) 위원장이었던 그에게 전략청의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는 연구서 작성을 권유하자, 1943년 11월 맹호군 사령관 김용성(金容成), 이사 송헌주(宋憲澍) 등과 함께 한국인이 태평양전쟁에 보다 유효하게 참가하기 위한 『한국과 태평양전쟁(Korea & Pacific War)』이란 비망록을 작성·간행하여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홍보하는 동시에 지속적으로 군자금을 출연하여 독립자금을 적극 후원하기도 하였다. 1944년 11월 『아시아와 아메리카(Asia and the America)』란 잡지에 「한국과의 교역을 권한다(Do Business with Korea)」라는 기고문을 게재하여 한국의 사정을 세계에 널리 홍보하였으며, 1945년 1월에는 미국 버지니아주 핫스프링에서 태평양연안 12개국 대표 160명이 참석한 IPR(Institute of Pacific Relation) 회의에 정한경·전경무(田耕武) 등과 함께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우리의 독립 당위성을 강조하는 모임을 개최하고 한국의 독립문제를 공론화하는 외교적 성과를 이룩하였다. 또한 곧 이어 동년 1월 미군의 한국침투작전의 일환인 냅코(Napko) 작전계획에 따라 캘리포니아주에 특수공작을 위한 한인훈련부대가 설치되자, 이에 입대하여 제1조 책임자로 선임되어 무기·비무장전투법·지도읽기·파괴·무전·촬영·낙하산훈련·비밀먹 사용법·선전·일본인의 특성 등에 대한 훈련을 받으며 임시정부의 OSS작전과 양면작전을 전개하여 국내에 침투하려고 하였으나, 일본군의 항복으로 인해 국내정진작전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 후 1946년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민족자본 사업으로 육성하는 한편, 육영사업에도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주요섭 문학비
주요섭(1902 - 1972)은 일제강점기 「추운 밤」, 「사랑손님과 어머니」, 「봉천역식당」 등을 저술한 소설가이다. 호는 여심(餘心) 또는 여심생(餘心生). 평양 출신. 목사 주공삼(朱孔三)의 8남매 중 둘째 아들이다. 시인 주요한(朱耀翰)의 아우이다. 평양에서 성장하였다. 1921년 4월『개벽(開闢)』 제10호에 단편소설 「추운 밤」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여대생과 밍크코우트」(1970)에 이르기까지 40편 가량의 단편소설을 비롯하여 「구름을 잡으려고」(1923)와 「길」(1938) 등 4편의 장편소설과 「첫사랑」(1925)과 「미완성(未完成)」(1936) 등 2편의 중편소설을 남겼다. 「김유신(Kim Yu Shin)」(1947과 「The Frost of the White Rock」(1963) 등의 영문 소설도 있다. 그의 작품 세계는 대략 4단계의 변모 과정을 거치고 있는데, 첫째는 「추운 밤」부터 「인력거군(人力車軍)」(1925)·「살인(殺人)」(1925)·「개밥」(1927) 등이 쓰여진 1921년부터 1927년까지의 시기로 주로 극빈한 사람들의 생활과 갈등을 동정하는 시선과 인도주의적 자세로 그려보였다. 이것은 이른바 신경향파로 지목되는 당대의 유행적 경향과도 일치한다. 둘째는 「할머니」(1930)에서 「사랑손님과 어머니」(1935)·「아네모네의 마담」(1936)·「추물(醜物)」(1936)·「봉천역식당(奉天驛食堂)」(1937)·「왜 왔던고」(1937)에 이르는 시기로,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된 것도 바로 이 때이다. 그의 대표작 및 성숙한 작품들이 발표되었으며 기성 윤리나 외모 또는 배신으로 인한 사랑의 좌절이나 향수 등을 그려 삶의 의미를 추구하였다. 셋째는 1946년부터 1958년까지의 시기로 「입을 열어 말하라」(1946)·「대학교수(大學敎授)와 모리배(謀利輩)」(1948)·「해방일주년(解放一周年)」(1948)·「이십오년」(1950) 등을 통하여 광복 후의 무질서와 혼란을 고발하고 비판하면서 사회의식을 각성하고 자아의 자각을 탐색하여나갔다. 넷째는 1960년부터 1970년까지의 시기로 「세 죽음」(1965)·「열 줌의 흙」(1967)·「죽고 싶어하는 여인」(1968)·「여대생과 밍크코우트」 등을 통하여 삶과 죽음의 문제, 인간다운 삶의 문제 등을 다루었다. 이러한 변모 과정은 근대적 리얼리즘의 일반적인 성격이 한국 문학 속에서 보편적인 태도와 기법으로 나타나게 되는 데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유일한 기념관
유일한(1895-1971)은 주식회사 유한양행(柳韓洋行) 창업자이다. 1939년 중국에서 한인독립운동단체인 광복진선(光復陣線)과 민족전선(民族戰線)이 하나로 통합되고 중·일(中日)간의 전쟁이 고조되던 즈음인 1940년 9월 북미 대한인국민회는,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 대표자들에게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시국대책을 강구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개최한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의 결의에 따라 동년 8월 미주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조직되다. 미주 로스앤젤레스에 설치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執行部) 위원으로 선임된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추진하였다. 또한 동년 12월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으로 미국 육군사령부의 허가를 얻어 로스앤젤레스에 캘리포니아주 민병대 소속으로 일명 맹호군(猛虎軍)인 한인국방경위대(韓人國防警衛隊)를 편성하는데 적극 후원하였다. 1942년 당시 미육군 전략처(OSS)의 한국담당 고문으로 활약하며 펄벅과 교유하기도 한 그는 동년 8월 로스엔젤레스 시청 앞에서 맹호군 창설과 함께 진행된 현기식(懸旗式)에 참여하여 이승만(李承晩)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趙素昻) 등의 축사를 낭독하는 등 맹호군 창설과 현기식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한편, 동년 10월 미국정부 전략청(戰略廳)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기획연구부(企劃硏究部) 위원장이었던 그에게 전략청의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는 연구서 작성을 권유하자, 1943년 11월 맹호군 사령관 김용성(金容成), 이사 송헌주(宋憲澍) 등과 함께 한국인이 태평양전쟁에 보다 유효하게 참가하기 위한 『한국과 태평양전쟁(Korea & Pacific War)』이란 비망록을 작성·간행하여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홍보하는 동시에 지속적으로 군자금을 출연하여 독립자금을 적극 후원하기도 하였다. 1944년 11월 『아시아와 아메리카(Asia and the America)』란 잡지에 「한국과의 교역을 권한다(Do Business with Korea)」라는 기고문을 게재하여 한국의 사정을 세계에 널리 홍보하였으며, 1945년 1월에는 미국 버지니아주 핫스프링에서 태평양연안 12개국 대표 160명이 참석한 IPR(Institute of Pacific Relation) 회의에 정한경·전경무(田耕武) 등과 함께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우리의 독립 당위성을 강조하는 모임을 개최하고 한국의 독립문제를 공론화하는 외교적 성과를 이룩하였다. 또한 곧 이어 동년 1월 미군의 한국침투작전의 일환인 냅코(Napko) 작전계획에 따라 캘리포니아주에 특수공작을 위한 한인훈련부대가 설치되자, 이에 입대하여 제1조 책임자로 선임되어 무기·비무장전투법·지도읽기·파괴·무전·촬영·낙하산훈련·비밀먹 사용법·선전·일본인의 특성 등에 대한 훈련을 받으며 임시정부의 OSS작전과 양면작전을 전개하여 국내에 침투하려고 하였으나, 일본군의 항복으로 인해 국내정진작전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 후 1946년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민족자본 사업으로 육성하는 한편, 육영사업에도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익상 본적지
김익상(1895-1942)는 일제강점기 총독부폭파, 다나카암살사건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한 뒤 기독교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광성연초공사(廣城煙草公司)의 기계 감독으로 근무하였다. 1920년 만주 봉천(奉天)으로 전근된 것을 기회로 비행사가 되기 위해 비행 학교가 있는 중국 광둥[廣東]으로 갔다. 그러나 중국 내전으로 인해 학교가 폐교되었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상해로 돌아왔다. 상해에서 전차 회사의 전차 감독이 되어 잠시 일을 보다가 항일 운동에 몸바칠 것을 결심하고 북경으로 가서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하였다. 1921년 단장 김원봉(金元鳳)으로부터 총독 암살 밀령을 받고 국내로 들어와 전기 수리공으로 변장하고 9월 12일 총독부에 잠입하여 2층 비서과(총독실로 오인)와 회계과장실에 폭탄을 던졌다. 비서과에 던진 폭탄은 불발이었으나 회계과장실에 던진 폭탄은 폭발하였다. 총독부가 폭발로 인해 혼란 상태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현장을 빠져 나와 평양을 거쳐 중국으로 무사히 탈출하였다. 1922년 일본의 전 육군대신이며 육군 대장인 다나카[田中義一]가 필리핀을 거쳐 상해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의열단으로부터 다나카 암살이라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를 위해 동지 오성륜(吳成崙, 본명 李正龍)과 같이 치밀한 계획을 세워 1차 저격은 오성륜이 담당하고, 만약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2차 저격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28일 선편으로 황푸탄[黃浦灘]에 도착한 다나카가 배에서 내려오자, 준비하고 있던 오성륜이 다나카를 향하여 권총을 발사하였으나, 발사 순간 신혼여행차 상해에 오던 영국 여인이 다나카의 앞을 막아섬으로써, 총탄은 영국 여인에게 명중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이 때 계획에 따라 달아나는 다나카를 향하여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폭탄마저 불발하여 거사가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재빨리 현장을 탈출하려고 할 때 중국 경찰이 추격해 오자 공포를 쏘며 주장로[九江路]를 지나 쓰촨로[四川路]로 달아났으나, 즉사한 영국 여인의 남편이 쏜 권총에 맞고 쓰러져 붙잡히고 말았다. 4월 1일 상해 일본 총영사관에서 예심을 마치고 5월 3일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압송되어 9월 25일 나가사키지방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나, 검사의 공소로 공소원(控訴院)에서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누차 감형되어 21년의 옥고를 치루었다. 귀향하였으나 일본 형사에게 연행된 뒤 소식이 없었고, 암살당하였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었다. 1962년에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윤세복 추모비
윤세복(1881-1960)의 자는 상원이며, 해방 이후 초대 총전교를 역임한 대종교인이다. 1910년 12월 서울에 올라와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다음 해 정월 시교사(施敎師)로 선임되자, 가산 수천 석을 정리하여 남만주로 옮긴 뒤 사재를 들여 환인현(桓仁縣)에 교당을 설립하여 시교에 힘쓰는 한편, 환인현에 동창학교(東昌學校), 무송현(撫松縣)에 백산학교(白山學校), 북만주 밀산당벽진(密山當壁鎭)에 대흥학교(大興學校), 영안현(寧安縣)동경성(東京城)에 대종학원(大倧學園)을 설립 또는 경영하며 5년 동안 교육에 진력하였다. 1916년 무송현 등 여러 곳에 교당을 설립하여 7,000여 명의 교인을 새로이 모으는 한편, 흥업단(興業團)·광정단(光正團)·독립단 등의 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24년 선종사(先宗師)인 무원종사(茂園宗師:金敎獻)의 유명을 받고 영안현 남관(南關)에서 교통(敎統)을 이어 제3대 도사교[敎主]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취임 후 4년 만인 1928년에 일본군부의 압력에 눌려 장쭤린(張作霖)이 체결한 이른바 삼시조약(三矢條約)의 부대조항에 의하여 대종교 금지령이 내려지자, 부득이 총본사를 밀산 당벽진으로 옮기는 수난을 겪었다. 이 금지령은 상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요인 박찬익(朴贊翊)의 외교활동으로 1930년 난징(南京)의 국민정부가 봉천·길림·흑룡강·열하 등의 동북4성에 대한 대종교 해금령을 내림으로써 한번 해제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931년부터 일본군의 만주침략이 격심해지면서 교단활동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동·서·북 3개의 도본사(道本司)가 해체되었고, 1930년에는 서울에 있는 남도본사(南道本司)마저 폐쇄되는 등 극히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무릅쓰고 교세확장을 위하여 분기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1934년 영안현 동경성으로 총본사를 옮겨 단군영정을 모신 천진전(天眞殿)을 세웠다. 또한 대종학원을 설립하고 하얼빈에 선도회(宣道會)를 설치하여 대대적인 교적간행사업(敎籍刊行事業)을 추진하면서 단군천진궁의 건축을 서둘렀다. 이런 활동을 벌이던 중 1942년 교단간부들과 함께 일본경찰에 붙잡혀 무기형을 선고받았는데, 이 사건을 교단내에서는 임오교변이라고 부른다. 광복과 더불어 출옥하여 이듬해인 1946년 귀국, 서울에 총본사를 설치하였다. 그뒤 교세확장을 위한 교당의 설치, 교단조직의 정비강화, 단군전의 봉안, 교적간행, 인재양성을 위한 홍익대학의 설립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교단체제를 민주화하여 전통적인 교통전수제(敎統傳授制)를 선거에 의한 총전교선임제(總典敎選任制)로 바꾸고, 현대사회에 맞는 조직체제로 정비, 강화하여 초대 총전교에 취임하였다. 1962년에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