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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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묘
신채호(1880-1936)는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호는 단재(丹齋)이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 사학자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이다.[1] 필명은 금협산인·무애생·열혈생·한놈·검심·적심·연시몽인 등이 있고, 유맹원·박철·옥조숭·윤인원 등을 가명으로 사용하였다. 구한 말부터 언론 계몽운동을 하다 망명,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백범 김구와 공산주의에 대한 견해 차이로 임정을 탈퇴, 국민대표자회의 소집과 무정부주의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했으며, 사서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1936년 2월 21일 만주국 뤼순 감옥소에서 뇌졸중과 동상, 영양실조 및 고문 후유증 등의 합병증으로 인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정사(낭성사)
김제환(1867-1916)은 충청북도 청원 사람으로, 호는 소당이고, 청주 지방의 유생이었다. 교육을 통한 배일사상(排日思想) 고취와 구국교육운동을 펼쳤던 김제환은 평소 배일의식이 강하며 일제의 호적에 기입을 거부하고 이른바 '경절'에 일장기를 달지 않으며 납세 및 부역 등을 거절하는 등 항일투쟁을 하였다. 1913년 2월 배일항거운동(排日抗拒運動)으로 일본 헌병에 붙잡혔으나 단식투쟁으로 같은 해 3월에 풀려났다. 그러나 곧이어 5월, 청원군(淸原郡) 오창면(梧倉面) 이산리(里山里)에서 '성산대강회(星山大講會)'를 개최하여 의거할 것을 주창(主唱)하다가 일경에 다시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출옥 후 조선 총독이던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항일 유서를 송부한 후 단식하여 순절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성환(1875~1958)은 충청북도 청주군 산내이상면 문박리에 서당을 설치하고 한학을 가르쳤다. 1910년 8월 한국과 일본 양국 합병식을 보고 분노하여 생도 등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3년 5월 1일 평소의 언동에 대해 청주경찰서에서 설유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이 과정에서도 일본 경찰에게 병합의 부당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경찰서를 나와서도 생도 수십 명에게 “현시의 관리는 모두 난신적자(亂臣賊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병을 일으켜 그들을 박멸하고자 밤낮으로 오랫동안 고심하여 왔으나 아직 그 시기를 얻지 못하였다. 너희는 항상 이 뜻을 가슴에 품고 우리 대한국 신민(臣民)의 의무를 잊으면 안 된다.”고 설파했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1913년 6월 12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반’으로 금고 1월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201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충북여성독립유공자 흉상
충청남도 청주에 위치한 충북여성독립유공자 흉상은 일제강점기 외세의 침략과 국권 강탈의 민족 위기 앞에서 조선 독립을 위해 힘쓴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기리기 위한 사적이다. 총 10명의 독립운동가 흉상이 있으며, 윤희순, 어윤희, 박자혜, 임수명, 이화숙, 연미당, 오건해, 신순호, 신정숙, 박재복이 그 주인공이다. 그들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금가락지를 내놓았고, 3.1만세운동에 앞장서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조선 독립이라는 목표 하나를 쟁취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모두 바친 인물들이다. 본 사적은 충북미래여성플라자 내, 충북여성독립운동가 전시실에 위치하고 있다.
충북 항일독립운동기념탑
충청북도 청주에 위치한 충북 항일독립운동기념탑은 충청북도에서 일어난 항일 독립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민족혼을 기리고자, 2013년에 항일독립운동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에 의해 건립되었다. 현재 청주시 상당구 수동 삼일공원 내의 애국지사 동상 앞쪽에 위치하고 있다.
애국지사 충혼비
충청북도 청주에 위치한 애국지사 충혼비는 일제에 의해 국권이 피탈됨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대한 충절을 지키고 독립을 위해 몸 바쳐 투쟁한 애국지사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58년에 건립되었다.
독립유공자추모비
서정기 선생은 충청북도 중원(中原) 사람이다. 1925년 1월에 충주에서 서우순(徐宇淳) 등 3명의 동지와 회합하고 서울에서 무정부주의 계통의 항일비밀결사인 흑기연맹(黑旗聯盟)을 조직하여 무정부주의의 연구와 선전활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25년 11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출옥 후 1929년 2월 18일 충청북도 충주(忠州)군 충주면 읍내리 금성여관(金星旅舘)에서 권오순(權五淳)·안동규(安東奎)·김학원(金學元)·정진복(鄭鎭福)·서상경(徐相庚)·김현국(金顯國) 등 동지들과 함께 문예운동사(文藝運動史)라는 항일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잡지 「문예운동(文藝運動)」을 간행하려고 활동하다가 다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1930년 3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1930년 5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유자명 선생은 1919년 3·1운동 당시 충주 간이농업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 중심의 시위를 준비하다가 일본 경찰에 사전 탐지되자 중국으로 망명했다. 의열단장 김원봉의 비밀참모로 국내외 일본인과 친일파 처단활동에 성과를 올렸다. 1927년 중국 난징에서 김규식(金奎植), 중국인 목광록(睦光錄), 인도인 간다싱 등과 함께 일본에 대한 아시아 피압박민족의 공동투쟁을 강화할 목적으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이념적으로 무정부주의를 견지하여 1927년 조선혁명자연맹 간부로 활동하며 무창(武昌)주1 입달학원(立達學院)에서 강의했고, 1930년 상해 강만(江灣)의 농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장도선(張道善) 등과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했다. 1931년 무정부주의자인 유기석(柳基石) 등과 불멸구락부(不滅俱樂部)를 조직해 활동했다. 1942년 약헌개정기초위원, 1943년 3월 대한민국임시정부 학무부 차장을 지냈고, 해방 이전까지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한편 중국 국민당(國民黨)의 거물급 인사와도 꾸준히 교류하며 항일독립운동 연합전선을 펴나갔다. 1945년 해방 이후 귀국하지 못하고 중국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에서 대학교수 생활을 했다. 윈난[雲南]고원지대에서 최초로 특수벼 재배에 성공하여 농학박사가 되었고, 특히 독립운동가 출신 원예학자로 중국인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만년에는 후난농업대학 원예학과 명예주임으로, 중국 원예학회 명예이사장에 추대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일신 선생은 충북 충주(忠州) 사람이다. 1929년 12월 서울 중동학교(中東學校) 재학시 광주학생운동의 전국확산에 계기가 되었던 서울지역 동맹휴교(同盟休校)에 동참하였다. 이일신은 강대성(姜大成) 등과 함께 조선학생전위동맹(朝鮮學生前衛同盟)을 조직하여 격문의 인쇄 배부 및 동맹휴학·만세시위 등을 주동하였다. 이일신은 이 조직의 주요 관계자로 주시영(朱時永)·김형석(金炯錫) 등과 함께 동년 12월 7일 동교 교실에서 "동지제군이여,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제국주의적 교육을 배척하는 싸움에 분기(奮起)하라"는 취지의 격문 내용을 학생들에게 연설하여 동맹휴학과 만세시위를 촉구하였다. 이 사건으로 1년 여의 옥고를 치른 끝에 1930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어윤희 홍승로 추모비
어윤희는 서울에서 송달된 독립선언서를 개성(開城) 일대에 배포함으로써 개성의 만세운동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수행했다. 기독교 남감리파의 전도사인 그는 1919년 2월 26일 개성읍내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好壽敦女子高等普通學校) 기숙사에서 개성 충교(忠橋) 예배당 유치원 교사인 권애라(權愛羅)로부터 독립선언서 80여 매를 받아 개성 지역 주요인사들에게 전달하였다. 아울러 그는 만세운동을 추진하면서 서울에서 배포한 것과 같은 독립선언서를 2천 부 정도 인쇄하여 읍내 각지에 배포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그는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신관빈(申寬彬)과 함께 읍내의 만월정(滿月町)·북본정(北本町)·동본정(東本町) 등 각 거리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이로써 개성에서는 3월 3일에 개성 호수돈여자보통학교 학생들에 의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으며, 여기에 1천 5백 명의 시민이 만세시위에 참가함으로써 대대적인 시위행진이 이루어졌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일경에 붙잡혀 1919년 4월 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홍승로는 일본 중앙대학에 재학중인 1920년에 동경조선고학생동우회(東京朝鮮苦學生同友會)의 총무로 활동하면서 동회를 재일고학생의 통합적 조직체로 발전시키는데 주동적 역할을 담당했다. 동년 4월에 영친왕(英親王) 이 은(李垠)과 일본의 이본궁녀(梨本宮女)와의 성혼이 있게되자 이들 회원들은 이를 조국독립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판단하고, 결혼식장에 폭탄을 투척하여 결혼식을 저지하는 한편 식장에 참석하기로 된 조선총독을 비롯하여 일인고관을 처단하고 또 일제기관을 폭파하여 한국독립의 기세를 올리고자 했다. 따라서 이들은 거사에 앞서 폭탄을 제조하여 2차례에 걸쳐 폭탄의 성능을 시험해보면서 준비를 추진하였으나 사전에 이러한 계획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무위로 그치고 말았다. 한편 동년 9월, 미의원단 일행이 동경에 체류할 때, 그는 동지 4명과 함께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미의원단 일행이 숙소인 제국호텔로 향하는 길목에서 기다리다가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전개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그후, 그는 동우회란 이름으로 30여명 규모의 순회연극단을 조직하고 1921년 6월에 귀국하여 전국각지를 돌면서 연극을 통한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독립유공자 공적비
해당 공적비는 충주 일원에서 태어나고 활동했던 독립 유공자들을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다.공적비 본체를 중심으로 주변에 총 30명이 넘는 유공자 분들의 이름과 활동 내역을 기재한 비가 세워져 있다. 이 공적비는 2012년 광복회가 건립을 추진하였으며, 충주시가 지원하였다. 건립문은 다음과 같다. 건립문일본에 빼앗긴 국권과 조국을 찾고자 국내외에서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지푸라기와 같이 여겨 조국의 수호신으로서 목숨을 바친 거룩한 애국선열들의 호국 정신을 천추만대에 길이 전하고자 충주시와 후손들의 뜻과 정성을 모아 이곳에 독립 유공 공적비를 세운다. 공적비는 독립된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태극과 유공자 분들의 혼을 상징하는 두 개의 기둥으로 설계되었고, 중앙의 공적비를 둘러싸고 있는 명각비는 대한민국 산천을 상징하는 형상으로 유공자 분들의 공적을 담고 있다.
충주 항일독립운동역사관
이 항일독립운동역사관은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으로 세운 대한민국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께서 빼앗긴 조국의 주권 회복과 민족자존을 위해 일제 억압에 맞서 싸우다 목숨과 피눈물로 독립된 숭고한 희생정신과 그 공훈을 기록 전시하여 국민과 학생들에게 항일독립운동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하여 독립정신을 국민정신으로 계승하고자 설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