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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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탑 (옥천읍 마암리)
옥천 독립유공자탑은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에 있는 충혼공원 내에 위치해 있다.옥천지역에서 태어나 독립운동에 참가했거나, 타지에서 태어나 옥천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선열과 호국영령 등 57명의 이름을 새긴 약 6m 높이의 독립유공자탑을 충혼공원내 충혼탑 옆에 세웠다. 명각대상자는 청산만세운동 김인수 외 6명, 이원만세운동 김용이 외 16명, 군서만세운동 김순구, 군자금모금 등 항일운동 곽중규 외 19명, 의병활동 송병선 외 11명 등 57명이다.탑의 형상은 애국정신이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들고 자주독립을 열망하며 자유와 평화를 선언하는 애국지사를 표현하고 있다.
정구영 집
정구영(1899 - 1978)은 일제강점기 시대에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고 해방 후에는 독재를 굳건하게 반대했던 변호사였다. 1910년 한성외국어학교 영어부, 1911년 황성기독교청년회 상과, 1919년 경성법률전수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재판소서기 겸 통역생으로 근무하다가 1920년 판검사특별임용시험에 합격하였다. 1921년 대구지방법원 검사, 1923년 경성지방법원 검사를 지낸 뒤 1925년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1930년 경성조선인변호사회장, 1943년 경성변호사회장, 1946년 조선법조회 이사장, 1947년 조선인권옹호연맹 이사장, 1955년 변호사징계위원, 1956년 초대한국법학원장, 1959년 서울변호사회장·대한변호사협회장, 1960년 국제변호사회 이사를 역임하였다. 1960년 3·15부정선거에 항거하는 마산 시민에 대한 경찰의 발포사건에 대해서 대통령 하야와 재선거촉구성명을 발표하였다. 1961년 5·16 후 5·16의 주체세력인 민주공화당에 입당, 1963년 총재에 취임하고, 같은 해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1964년 민주공화당 의장이 되었다. 다시 제7대 국회의원을 지내다가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3선개헌을 추진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3선개헌에 이어 유신헌법까지 등장하자 1974년 1월 민주공화당을 탈당하였다. 1974년 12월 민주회복국민회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독립유공자탑 (이원면 건진리)
독립유공자탑은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건진리에 위치해있다. 1998년 12월 이원면 개심리 사유지에 설치된 기존의 현충탑이 무상 임대 기간이 만료되면서 부지 이전과 충혼탑 정비의 필요성에 대한 여론이 형성되었고 이에 따라 군은 현충시설 조성사업을 추진했다. 현충탑을 재건립했으며 독립유공자탑을 함께 설치했다. 부조벽에는 6·25 및 베트남 참전 희생자 등 200명, 3·1 운동 관련 애국지사 등 22명으로 총 222명의 유공자를 명각했다. 또한 바닥에는 이원면 주민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나라를 위한 희생과 헌신을 추모하는 메시지를 담은 93개의 박석을 설치했다. 박석은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남, 이서의 2개면이 이원면으로 통합된 1929년과 현재 2022년과의 차이가 93년인 것을 고려하여 93개로 했다. 1919년 3월 27일 같은 마을사람 김용이(金龍伊)·육창주(陸昌柱)·허상기(許相基)·육창문(陸昌文) 등이 이원(伊院) 장날을 이용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미리 만든 태극기를 앞세워 들고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던 중 주동자 육창주와 허상기가 헌병주재소로 연행되자, 그는 허 양(許樑)·이면호(李冕鎬)·허상구(許相球) 등과 함께 300여명의 군중을 이끌고 헌병주재소로 몰려가서 주동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할 때 감금되어 있던 육창주와 허상기가 탈출하여 다시 시위대열에 합세함으로써 독립만세운동은 더욱 가열되었다. 부조벽에는 이원 만세운동에 참여한 김용이, 육창주, 이면호, 허상기, 공재익, 배용석, 이금봉, 이호영, 허간, 허상구,허상회, 허찬, 박만하 그리고 국내외 독립운동에 참가한 곽중규, 곽준희, 김응선, 곽중선, 김운용, 김성권, 송암우, 정명옥, 지팔문의 이름이 적혀있다.
백운리출신 독립운동가 안내판
권태석(1895~1948)은 1919년 4월 최익환의 권유로 대동단에 참여하여 자금조달과 각종 선전문건의 인쇄 및 배포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1924년 10월에는 고려공산동맹 결성에 가담했으며 1926년 7월 조선민흥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27년 신간회 서무부장 및 총무간사로 활동하였으며 1929년 4월 5일 조선공산당 활동으로 체포되어 징역 6년을 받고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4년 6월 10일 출감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고한주(1895~1927), 김홍(1879~미상), 박동희(1896~1924), 박재호(1876~1947), 신업이(1899~미상)은 충북 옥천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옥천군 청산면의 만세시위는 3차에 걸쳐 일어났다. 3월 16일에 하계리 류석구(柳錫九)의 집 담에 ‘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벽보가 붙으면서 ‘만세시위운동’이 시작되었다. 1차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26일 수백명 군중이 집결하여 만세시위를 벌인 뒤 해산하였다. 제2차 만세시위는 4월 2일 장날 하오 1시경부터 일어났다. 장꾼들은 읍민 학생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 행진을 하다가 새벽 1시경 해산하였다. 제3차 만세시위는 4월 4일 밤 8시경부터 수천명이 다시 독립만세를 외쳤고 다음날 새벽 해산하였다. 수천명의 군중이 굴하지 않고 시위를 전개하자, 일본 헌병들은 위협을 느끼고 헌병주재소로 피신한 일본인을 보호하면서 주재소를 지키다가 시위군중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5명이 순국하고 56명이 부상당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붙잡혔다. 잡힌 이들은 주재소 마당에서 잔인한 고문을 당하였는데, 비명이 며칠을 두고 계속되었다. 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힌 김홍은 태 90도를, 박동희와 신업이는 태 60도를, 고한주와 박재호는 징역 1년형을, 안병하는 징역 1년 3개월형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대통령표창을 1983년 박재호에게, 2010년에 김홍에게 2018년에 박동희에게, 2021년 신업이에게 추서하였다. 또한 건국훈장 애족장을 1990년 박재호에게, 1993년 고한주와 안병하에게 추서하였다. 조동호(1892~1954)는 1914년 여운형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한 후, 1918년 8월 상하이에서 여운형·장덕수(張德秀)·김철(金澈)·선우혁(鮮于爀)·한진교(韓鎭敎)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파리강화회의와 미국 윌슨대통령에게 제출하기 위한 ‘조선독립청원서’를 여운형 등과 함께 영문으로 작성하였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과 국무위원을 겸직하였고, 임시정부 임시사료조사편찬부 위원으로 재직하면서 이원익(李元益)·김병조(金秉祚) 등과『한일관계사료집』4권을 완성해 국제연맹에 제출하였다. 1919년 차리석(車利錫)등과 함께 상해판『독립신문』발간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921년 한·중 친선 및 한국독립과 중국혁명을 위한 상호협조를 목적으로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조직하고, 한국측 대표로 참석하였다. 1922년 김구(金九)·최석순(崔錫淳)·여운형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한국노병회를 창립하였다. 한국노병회는 ‘10년 동안 1만명의 노병 양성과 백만원 이상의 전비 확보’를 목표로 하여 조직한 단체였다. 1944년 8월 일본의 패망을 확신한 그는 여운형과 함께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였으며, 선전부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권태석 집
독립운동가 권태석 생가터 표지판은 권태석이 생전 살았던 집이 있었던 곳을 표시해주는 표지판이다. 권태석(1895-1948)은 이명은 이동산(李東山), 자는 경여(景汝), 호는 몽우(夢牛)이며, 1919년 서울에서 3 · 1운동을 겪고, 최익환(崔益煥)을 통해 조선민족대동단에 가담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격문 등을 작성해 배포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20년 12월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4년 10월 서울파 비밀결사 조직인 고려공산동맹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1926년 7월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 결성을 주도하여 상무위원 등을 지냈고, 같은 해 10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고, 12월 중앙위원회 조직부원에 선임되었다. 1927년 2월 신간회가 결성될 때 민흥회의 신간회 합류를 주도하였고, 서무부 총무간사에 선임되었다.조선공산당은 ‘영남친목회사건’을 계기로 분열하였는데, 이후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6년 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에는 공산주의운동과 거리를 두었다. 1945년 8 · 15광복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민족주의 세력 간의 협력에 앞장섰고, 1945년 12월 신한민족당 정치국 차장에 선임되었다. 1946년 1월 우익 비상정치회의주비회(非常政治會議籌備會)에서 활동하고 , 4월에는 한국독립당으로 합당에 찬성하였으며, 통합 한국독립당에서 조사부장이 되었다.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참여를 주장하다가 한국독립당 전당대회에서 제명당하였으며, 같은해 6월 모스크바 3상 결정을 지지하는 민주한독당을 창당하였다. 12월 민족자주연맹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상무집행위원, 총무국 차장에 선임되었지만, 1948년 남북협상에 참가하기 위해 북한으로 가는 길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조동호 집
조동호(1892-1954)는 1914년 여운형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1918년 8월 상하이[上海]에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고, 파리강화회의와 미국 윌슨대통령에게 제출하기 위한 ‘조선독립청원서’를 여운형 등과 함께 영문으로 작성하였다. 1919년 4월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충청도의원(忠淸道議員)과 국무위원을 겸직하였고, 임시정부 임시사료조사편찬부(臨時史料調査編纂部) 위원으로 재직하면서 이원익(李元益)·김병조(金秉祚) 등과『한일관계사료집(韓日關係史料集)』4권을 완성해 국제연맹에 제출하였다. 1919년 차리석(車利錫)등과 함께 상해판『독립신문』발간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921년 한·중 친선 및 한국독립과 중국혁명을 위한 상호협조를 목적으로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조직하고, 한국측 대표로 참석하였다. 1922년 김구(金九)·최석순(崔錫淳)·여운형 등과 함께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창립하였으며, 국내에서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23년 말 귀국한 후, 동아일보 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1925년 조선공산당이 창당할 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는데,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기 위한 대표로 모스크바에 파견되었다. 이후 경찰에 붙잡혀 4년의 옥고를 치렀다. 1932년 11월 출옥 후 조선중앙일보 논설부 기자로 활동하는 한편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벌이다가 다시 일경에 검거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44년 8월 여운형과 함께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을 조직하였으며, 선전부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한주 공적비
애국지사 김한주선생 공적비는 충북 옥천에 위치하였으며, 김한주의 묘는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고, 현재는 공적비만 존재한다. 김한주(1876-1962)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옥천군 청산면(靑山面)에서도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다.4월 2일 청산 장날을 이용하여 운동을 벌이기로 약속하고 4월 4일 장터에 모인 군중을 규합, 이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고 그는 일경에 붙잡혔다. 이후 징역 1년 3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원조 묘
김원조(1884~1922)는 경기도 이천(利川)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때 이천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 군정부(軍政府)의 연락기관을 서울에 설치하기 위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가 1920년 12월 28일(음)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장현근 신정숙 집
본 사적은 충북 음성에 위치해있으며, 1929년 안창호의 부름을 받고 함께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상해 교민단 서기, 의경대 간사, 한인청년단 이사 겸 서무부장, 김구의 비서로 근무한 장현근, 신정숙 부부가 생전에 살았던 집이다. 장현근(1909~1969)은 1926년 9월에 개성상업학교(開城商業學校)에 재학하던 중 일본인 위주로 하는 것에 저항하다가 퇴학 처분을 당한 뒤, 1927년 토리교회의 주일학교(主日學校) 교사를 하며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1931년 11월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상해 교민단의 서기, 의경대(義警隊) 간사, 한인청년당 이사 겸 서무부장 등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1932년 윤봉길의사의 의거 뒤, 상해(上海) 불조계(佛租界)에서 안창호(安昌浩) 김덕근(金德根) 등과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7년 이후에는 상해, 만주 등지를 전전하며 민족사상 고취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신정숙(1910~1997)은 평북 의주(義州) 사람이다. 광복군에 입대하여 1941년 3월 1일 임시정부 청사에서 제3분처 징모위원 임명식을 갖고 신정숙은 제3분처위원 겸 회계조장으로 파견되어 활약하였으며, 1942년 10월에는 광복군 제2지대 3구대 3분대에 편성되었다. 그후 제3분처는 본부를 연산현 하구진(鉛山縣河口鎭)으로 옮기게 되었으며, 신정숙은 김문호(金文鎬)와 함께 전선과 후방에서 중국 유격대와 합동 공작으로 정보, 선전공작을 활발하게 전개하며 또 포로심문을 통하여 적의 일선 및 후방에 관한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여 공작에 활용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백광운, 정호섭, 서상무, 안춘홍, 전재규 창의기념비
백광운, 정호섭, 서상무, 안춘홍, 전재규 창의기념비는 충북 제천에 위치해있으며, 충북 제천 출신의 항일독립운동가인 다섯 명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비이다. 백광운의 본명은 채찬이며, 1905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둔전제를 실시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3·1운동 후 서로군정서에 가입 후 동지들과 국내에 잠입하여 일본기관 파괴, 경찰주재소 습격 등을 전개하였으며,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에 소속되어 일본총독 사이또를 습격하는 등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쳤다. 정호섭은 1914년 7월 북간도 연길현에 참모부를 설치하고 활동하였고, 무기를 소지하고 함경도에 잠입하여 크게 활약하였다. 서상무는 고종 때에 칙유상관이 되었지만 부관 김연식과 만주에 가서 유인석을 초청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안준홍은 1907년 이강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후에 의병을 양성하는 교관으로 독립운동에 크게 활약하였다. 전재규는 참봉벼슬을 지내다가 1896년 충주, 단양전투에 참전하였다가 체포되어 일생을 마쳤다.
김석규 묘
김석규(1888-1929)는 마정삼(馬正三)의 아들 마만봉(馬萬奉)·마뇌병(馬雷炳)·마도현(馬道賢) 등과 박영관(朴泳寬)의 아들 박순구(朴順九) 등이 원수를 갚기 위해 경찰서를 습격하고 일경을 살해할 목적으로 장총단(長銃團)을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였다. 1921년 9월 어은리(於隱里)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이후 마남룡(馬南龍)·전봉학(全鳳學) 등과 군자금 모집과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다가 1927년 11월 붙잡혔다. 이후 사형이 선고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채수복 사적비
충청북도 진천에 위치한 채수복의 비이다. 채수복(1910-1945)는 충청북도 진천 사람이다. 서울 협성실업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독립운동이 확대되면서 서울까지 파급되자 1939년 1월에 같은 학교 학생들을 주도하여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일경의 감시를 피해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했다가 일본으로 잠입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1943년경에 채수복은 경도신문사의 기자로 근무하던 중, 알 수 없는 죄명으로 일경에 다시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3월 11일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