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TOTAL. 729 건
조병채 구 묘
조병채(1878-1950)는 1920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에게 군자금을 제공하기 위하여 김영진(金瑛鎭)과 함께 충남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고, 징역 8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항일7투사기적비
일본 제국의 강압으로 주권을 강탈당하자 이에 격분한 애국지사들은 조국을 되찾고자 독립운동의 깃발을 내세웠다. 이곳 청남면에서도 조병채, 임종구, 오준상, 윤기중, 그리고 지곡리 출신 윤병환, 이동명, 이영은 등 7명의 지사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러한 인물들의 열화같은 투지와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고자 본 비석이 건립되었다.
독립지사마을비
이곳 물안이 마을은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대표적으로 1895년 을미사변과 1905년 을사늑약에 항거한 1.2차 홍주의병이 봉기한 임승주 지사와 홍양기사를 저술하고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한 임한주지사 형제가 있다. 또한 물안이 마을 청년들은 신정리 출신의 안병찬 지사와 함께 국권을 지키고자 의병항전에 나섰으며, 물안이 주민들은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총독의 포고문이 전해졌음에도 4월 5일부터 전개된 화성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임상덕, 임한영, 임준호, 김용옥, 김만식, 안두종, 윤상진, 하래선 지사 등은 일제 헌병대에 체포되는 고초를 겪었다. 임경호 지사는 파리강화회의에서 파리장서를 제출하는 특사로 활동하고, 임긍호지사는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교민단의 의경대원과 한혈단의 단원으로 활약하였다. 이와 같은 물안이 마을을 널리 알리고 이곳 출신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자 본 비가 건립되었다.
임경호 기적비
임경호(1888-1945)는 임한주(林翰周)의 조카이며 한말 의병장 김복한(金福漢)의 문인이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목적으로 일제의 죄상을 폭로하고 조국독립의 열망을 담은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자. 임경호는 독립청원서의 발송책임을 맡아 황일성(黃佾性)·이영규(李永珪)·전용학(田溶學) 등과 함께 발송을 준비하였다. 영남지방의 유림들도 독립청원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는 유진태(兪鎭泰)의 소개로 김창숙과 만나 영남측의 준비에 합류하였다. 이후 1923년 1월에 결성된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의 선전부에 소속되어 활동을 주도하였고, 같은해 7월 기관지 발행위원으로 선임되어 ≪산업계(産業界)≫를 발간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민족시비공원, 애국지사 시비
민족시비공원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민족시인들의 시가 새겨진 비석을 따라 걸을 수 있는 산책길이 조성되어있다. 그 중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한용운, 심훈 등도 포함되어 있다.
김동하 추모비
김동하(1922-1982)는 충남 홍성(洪城) 사람이다. 1919년 4월 7일 홍성군 장곡면(長谷面)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화계리(花溪里) 앞산에서 주민들을 규합, 5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하여 도산리(道山里)에 있는 면사무소를 습격, 건물을 부수며 공문서 및 기물 등을 파손하였다. 이튿날에도 다시 집결하여 면사무소 앞에서 계속해서 시위를 전개하다가 저지하는 일경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생겨 시위가 중단되자 신의주(新義州)로 피신하였으나 1920년 1월 신의주에서 일군 헌병에게 붙잡혔다. 이해 2월 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3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고 4월 19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홍성역사인물 부조탑
김좌진(1889 - 1930)은 1908년 박상진과 광복단사건으로 3년을 복역 후 간도로 건너갔다. 후에 3.1운동 당시 동만주의 왕청현에서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총사령으로 활동하였으며 사관연성부를설치하여 독립군 간부양성에 전력하였고, 1920년 9월 동지 나중소, 이범석등과 더불어 청산리 작전에 참가 10배의 왜적을 대파하여 사상 3천3백여명의 전과를 거두었다. 1926년 김혁 등과 더불어 신민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1927년 중국 구국군 사령관 양우일과 회담하고 공동전선을 취하였다. 1929년 정신, 민무등과 중동선 일대에서 한족연합회를 조직하고 주석으로 활동중 동년 음12월25일 고려공산청년회원 주중한인청년동맹원 박상업(일명 김신준)의 권총 저격 피살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한용운(1879 - 1944)은 기미독립운동 때 불교계대표로 33인 중 1인이다. 3년 징역을 받았고 출옥 후에도 문학운동과 불교혁신운동에 진력하며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였다. 또한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를 인수하여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항일독립 투쟁사상 고취에 힘썼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부자 독립운동 공적비
김용응과 김태규는 부자지간으로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이를 기리기 위해 공적비를 세웠다. 김용응(1869 - 1959)은 병농이라는 이름으로 상해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활약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아들인 김태규(1896 - 1962)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어 1919년 3.1운동 때부터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다. 파리 강화회의에 송부할 의견서와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독립청원서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중국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고 국내의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와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에 보냈다. 1919년 5월에는 연병호, 안재홍 선생 등과 활약하였으며 외교시보를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국민들에게 불러일으키고자 하였다. 대한애국부인회와의 관계로 선생의 활동이 발각되어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운기 공적비
정운기(1875 - 1943)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국권회복을 도모하던 중 1913년에 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유장렬(柳璋烈)·한 훈(韓焄)·강순필(姜順必)·정진화(鄭鎭華) 등과 함께 풍기(豊基)에서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을 결성하였다. 풍기광복단은 독립군 양성을 위한 무기구입과 군자금 모집에 실천방략을 두고 독립운동을 폈다. 그리하여 1914년에 박창빈(朴昌彬)으로부터 권총 10정을 제공받아 박영효(朴泳孝) 등을 암살하려던 김재성(金在性)에게 교부했었는데, 사전 발각됨으로써 일경에 붙잡혀 징역 5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후 1915년에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의 박상진(朴尙鎭) 등과 통합하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하게 되자, 이에 참여·활동했다. 국내민족운동이 전반적으로 봉쇄되던 무렵인 1910년대 국내의 독립군 단체로 결성된 대한광복회는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滿洲)의 독립군 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는 한편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함으로써 독립을 쟁취한다는 구도를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우선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해 갔는데, 이때 정운기는 자산가 명단을 작성하는 외에 군자금 모집에 필요한 경고문을 발송하면서 군자금 수합에 힘을 쏟았다. 그러던 중 1918년초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이에 연루되어 붙잡혔으나 1919년 9월 경성복심법원에서 면소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승칠 공적비
이승칠(1850 - 1912)는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두경(斗卿). 충청북도 보은 출신으로 경주영장(慶州營將) 이지현(李之鉉)의 아들이다. 원래 공적비의 비명은 의사였지만 지금은 지사로 바뀌었다. 1910년 사헌부(司憲府) 감찰직(監察織)에 재직 중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 순국하려 하였으나 가족에게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1912년 일본왕이 사망하자 일제는 한국인들도 상복을 착용할 것을 강요함에 이를 거부하고 1912년 6월 26일 망국의 한을 품은 채 "몸이 원수의 복을 입는다면 만대의 수치이다. 이 머리가 떨어지더라도 오랑캐는 될 수 없다(身被讐服萬代羞恥 寧爲殞首 不作夷狄)"라는 유서를 남기고 보은군 내북면(內北面) 봉황대(鳳凰台)에서 투신 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영동군 독립유공자 기념탑
영동군 독립유공자 기념탑은 영동지역에서 태어나 독립운동에 참여하다 순국한 선열과 호국영령 등 59명 이름과 취지문을 새긴 탑이다. 영동군 독립유공자의 숭고한 얼을 기리고자 건립하였다. 영동군 독립유공자 기념탑은 자연스러운 원형 좌대에 양쪽 수직방향의 화강석 기둥이 음과 양이 서로 상승 변화, 화합하며 발전하는 모습을 상징한다.
성권호 공적비
성권호(1921 - 1976)은 대전(大田) 사람이다. 1941년에 신사(神社)·군수공장(軍需工場)·군용열차(軍用列車) 등을 폭파하려고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계획이 탄로되어 동년 2월 일경에 붙잡혔다고 한다.1941년 12월 25일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고 1943년 11월에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