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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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주 기적비
윤용주(1884 - 1949)의 아호는 현천(玄天),성첨(聖瞻)이며 이명은 이민하(李敏河)이다. 1919년 4월 2일 홍면희(洪冕熹)·이규갑(李奎甲) 등으로부터 임시정부(臨時政府)의 수립을 목적으로 하는 국민대회의 회원 되기를 권고 받았다. 1919년 9월 서울에서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이 조직한 조선독립대동단(朝鮮獨立大同團)에 가입하였다. 대동단의 지방단원 모집 담당이 된 후 임응철(林應喆)·김재구(金在九)·강경진(姜景鎭)을 가입시켰다. 지방동지의 규합과 군자금 모집 등을 위해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붙잡혔다.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처벌령·출판법·보안법·사기 등으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공주독립운동기념관
공주독립운동기념관은 공주영명중고등학교 정문 인근에 위치해있다. 독립운동기념관은 일제강점기 공주시의 독립운동 및 독립운동가를 선양하며 나라 사랑 정신을 후손들의 기억에 오롯이 새기기 위해 건립됐다. 교육과 체험, 관람을 하나의 동선에서 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1층에는 기념관에 대한 간략한 안내와 독립운동가의 명언이 전시됐다. 2층에는 공주 독립운동과 영명학교 변천사, 공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122명의 공훈이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3층은 독립운동가의 복식을 체험할 수 있는 시설과 포토존 등으로 꾸며졌다.
정인옥 추모비, 기적비
정인옥(1875 - 1950)은 경북 문경(聞慶) 사람이다. 1919년 7월 동지 신덕영(申德永)으로부터 권총 2정 및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독립신문(獨立新聞)을 교부받아 상주(尙州)·충주(忠州)·봉화(奉化) 등을 중심으로 1,500여 원의 군자금을 수합하는 활동을 하다가 붙잡혔다. 1922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제령 7호 위반으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양태용 기의비
양태용(1879 - 1937)은 충남 금산 사람이다. 1910년 9월 15일 경술국치(庚戌國恥)를 개탄하며 단검으로 할복자결을 기도하였으나 응급처치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듬해인 1911년 9월 1일 일본정부에 독립촉구선언문(獨立促求宣言文)을 보냈고, 9월 9일에는 만국공사관(萬國公使館)에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를 발송하였으며 이듬해 10월 또 다시 일본정부에 침략에 대한 항의각서를 발송하였다. 뿐만 아니라 1913년 1월 9일에는 조선총독부 총독에게 일제를 비난하는 문서를 발송하는 한편 납세거부·불입적 운동 등을 전개하여 동포들에게 항일사상을 고취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일헌병에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고 귀가하여 이후 고문의 여독으로 고통스러워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태영 위혼비
김태영(1924 - 1945)는 창씨명으로 금전태영(金田泰碤)을 사용하였다. 일제의 강제 징용으로 남태평양의 오리마이제도(諸島)에 끌려가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노동하던 1942년 귀국하였으며, 1943년 일제의 식량 공출에 격분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1944년 3∼6월 자신과 김수동(金水同)의 집에서 동지들과 13차례에 걸친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의 구체적인 방안을 협의하였다. 이들은 우선 일경과 식량 공출 담당직원을 처단하고 철로에 멍석을 깔아 일본군병력 수송열차를 전복시킬 계획을 세웠다. 또한 벽보를 써붙여 동포들의 항일독립의식을 고취시키기로 하였다. 이와 더불어 만주의 독립군과 연락, 독립전쟁을 펴기 위하여 자신들이 일본군에 입대한 후 전선(戰線)에서 일본군을 반격하는 방안을 세웠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계획을 실천에 옮기려다 그를 비롯한 동지들은 1944년 7월 일경에 붙잡혔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1945년 5월 23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육해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7월 20일 고문의 여독으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애국지사 추모비(남산)
애국지사 추모비는 충청남도 금산군 남산 주차장에 위치해있다. 금산군 출신으로 의병활동, 3.1독립만세운동 등 독립운동으로 서훈 및 표창을 받은 독립유공자 26분을 추모하고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7년 9월 건립하였다. 애국치사 추모비 옆에는 3.1독립의거기념비, 송철 추모비 등 많은 비석이 함께 세워져있다.
송종빈 기적비
송종빈(1865 - 1928)은 영가무용단(詠歌舞踊團)을 설립하여 활동하던 중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영가무용단(詠歌舞踊團)을 재정비하고 단원 이내수(李來修)·윤상욱(尹相旭)·김한복(金漢復) 및 임종만(林鍾萬) 등과 함께 전북 및 충남 일대에서 해외 독립운동 단체를 지원하기위한 군자금 모금활동을 펼쳤다. 1921년 11월 25일에는 동지 선영기(宣永基)와 함께 전북 익산군 망성면 어량리에 거주하는 김용보(金溶普)로부터 군자금 108원을 모금한 것을 비롯하여 각처에서 모금활동을 전개하다가 1921년 12월 30일 일경에 붙잡혔다. 1922년 3월 27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 강도협박 및 장물수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강경성결교회-최초 신사참배거부 선도기념비
조형물은 5m 높이로 사용된 화강암은 강경산 황등석이고 흰 바탕은 순결, 믿음, 평화, 승리를 상징한다. 위에서 본 모양은 그리스도인을 상징하는 물고기 모양이며 아래의 물은 생명수인 예수를 상징한다. 크기가 다른 두개의 돌은 두루마리 성경을 의미하며 오른쪽 조각은 강경교회 전도사였던 백신영 전도사와 여교사 김복희, 그리고 함께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강경초등학교 학생들이다. 왼쪽 조각은 신사참배를 하기 위해 줄지어 있는 사람들과 일본제국주의를 그렸다. 십자가는 고난을 따르는 신앙을 천사는 미가엘 천사로 하나님의 보호를 상징한다. 아래에 있는 64개의 돌기둥 중 큰 기둥 두개는 백신영 전도사와 김복희 교사이고 나머지 62개의 돌기둥은 학생들을 상징하는데 이 중 57개는 강경성결교회 주일학생들이고 나머지 5개는 일반 학생이다. 후면 상단부는 성결교회의 상징인 "가시밭의 백합화 "를 형상화 하였다. 옆면에는 기념비의 건립경과보고를 새겼고 후면에는 당시 이 사건을 처음으로 보도한 1924년 12월 기독교잡지인 ‘활천’의 내용이 새겨졌다. 강경보통학교의 신사참배거부 사건은 1924년 10월11일, 일제의 신사 참배를 거부한 강경공립보통학교의 교사 김복희를 면직시키고 함께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62명의 어린이들을 퇴학한 사건이다. 당시 김복희 선생과 57명의 학생들은 강경교회에 다니고 있었으며 강경교회에는 대한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잘 알려진 백신영 전도사가 있었다. 또한 57명의 어린이 중에는 일본역사교육 거부사건의 주동자인 윤판석이 포함되어있었다. 한편 당시 강립보통학교의 신사참배 거부사건은 큰 문제로 확대되어 당시 조선총독부에 보고되고,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며, 첨예한 사회적 이슈로 공론화되었으며, 1925년 조선신궁 건립 등 신사참배를 전면 확대하려던 일본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10여년 후퇴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논산시 독립유공자 공적비
높이 3.7m, 너비 2.4m의 기념비석은 논산출신의 독립유공자 61분의 존함과 그 유족 중 논산에 거주하는 분 8명 그리고 서재필 박사를 포함하여 총 70여 명의 성함을 새겼다. 하단에 새긴 건립비문은 독립유공자 후손인 윤여익님이 쓰고 독립유공자 추진위원회의 권선옥이 지었다고 언급되어있다. "우리 논산은 예로부터 충절과 예학의 고장이었다 불행하게도 나라의 주권과 국민의 행복을 일본 제국에게 빼앗겼을 때 이를 되찾고자 많은 애국지사들이 목숨과 재산을 바쳐 싸웠다. 특히, 우리 논산과 관련된 분들을 찾아서 그 고귀한 정신을 추모하고 본받고자 시민의 정성을 모아 이 비를 세운다."
윤홍중 묘
윤홍중(1875-1943)은 충남 논산(論山) 사람이다. 윤홍중은 1898년, 강제 단발령에 저항하여 항일 시위를 하였으며, 1907년에는 서울에서 동우회(同友會)를 조직하고 결사대(決死隊)를 구성하여 항일 시위를 하다 붙잡혀 1개월간 구금당하였다. 윤홍중은 1916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활동하였다. 대한광복회는 1915년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의 일부 인사들이 제휴하여 결성한 혁명단체로서 군자금 수합, 부일배(附日輩)처단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1918년 대한광복회는 조직이 노출되어 동지들이 붙잡히자 몸을 숨기고 있던 중 1920년 미국의원단의 내한을 계기로 한민족의 독립열망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총독과 정무총감 등 일제고관을 암살할 것을 계획하고 한 훈(韓焄)·김상옥(金相玉)·김동순(金東淳) 등과 함께 거사를 준비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그는 1927년 7월 조선소년연합회(朝鮮少年聯合會)의 결성에 참여하여 방정환(方定煥)·변세택(邊世澤)·조문환(曺文煥) 등 14명의 동지와 함께 창립준비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백남식 공적비
백남식(1880-1950)은 충남 논산(論山) 사람으로 1919년 조병채(趙炳彩)·김영진(金瑛鎭)·윤태병(尹太炳)·윤상기(尹相起) 등의 동지와 함께 당시 중국 길림(吉林)에서 활동 중이던 독립군단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도와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자는데 뜻을 같이 하고, 이를 위해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펼 것을 주목적으로 비밀결사 대한건국단(大韓建國團)을 조직하였다. 동단은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단원들이 함께 모여 다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취지와 표방 아래 서로 연락을 취하면서 국내 각지에서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북로군정서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 휘하의 천경수(千景洙)로부터 군자금 모집지령과 함께 임시정부경리국경고서(臨時政府經理局警告書)·임시정부총간부유고서(臨時政府總幹部諭告書)·특파원증·납금명령서(納金命令書) 등을 인수받아 군자금 모집에 힘을 쏟았다. 이때 그는 조병채·윤태병과 함께 1920년 3월 전북 금산(錦山)의 자산가 송석기(宋錫驥)·윤상응(尹相應)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충남의 공주(公州)·부여(扶餘), 서울 등지에서 수 차례에 걸쳐 군자금을 모연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활동을 펴던 중 그는 일경에 붙잡혀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7년 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윤태병 공적비
윤태병(1889-1940)은 충남 논산(論山) 사람으로 1919년 조병채(趙炳彩)·김영진(金瑛鎭)·윤상기(尹相起)·백남식(白南式) 등의 동지와 함께 당시 중국 길림(吉林)에서 활동 중이던 독립군단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도와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자는데 뜻을 같이하고, 이를 위해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펼 것을 주목적으로 비밀결사 대한건국단(大韓建國團)을 조직하였다. 동단은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단원들이 함께 모여 다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취지와 표방 아래 서로 연락을 취하면서 국내 각지에서 활동하였다. 이때 이들은 북로군정서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 휘하의 천경수(千景洙)로부터 군자금 모집지령과 함께 임시정부경리국경고서(臨時政府經理局警告書)·임시정부총간부유고서(臨時政府總幹部諭告書)·특파원중·납금명령서(納金命令書) 등을 인수받아 군자금 모집에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그는 조병채·백남식·이상설(李商雪) 등과 함께 1920년 3월 전북 금산(錦山)의 자산가 송석기(宋錫驥)·윤상응(尹相應) 등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1920년 4월 이상설이 조국독립과 항일사상을 고취하는 동단의 취지서를 소지하고 서울의 자산가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계획하던 중 붙잡히는 바람에 동단의 조직이 노출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일경에 붙잡혀 1920년 7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4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