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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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추모탑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전북 진안 지역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학생운동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이들 가운데 독립유공자는 강신홍, 김경선, 김규현, 김사범, 김암우, 김영필, 김옥현, 명경안, 박동근, 박재열, 박재춘, 서성일, 신치수, 심우상, 안성, 안왈오, 안일, 양인문, 오기열, 이옥동, 임종문, 전영상, 정진희, 조경화, 채도석, 최병무, 하준태, 한청여, 황준성 선생 등이 있다. 진안군은 조국의 국권회복과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이들을 기리기 위해서 1997년 8월 15일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에 높이 7.5m 규모로 이 탑을 세웠다. 국가보훈처는 2003년 5월 이를 현충시설로 지정한 후 선열들의 독립정신을 널리 알리고 그 숭고한 의식을 후대에 계승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신유의숙 터
신유의숙은 1921년 독립운동가인 회을 김성숙(金成淑)이 설립한 학교로 가파도의 유지였던 이응신, 이시화, 김옥천, 김한정, 이도일 등의 공으로 1922년 4월 가파 신유의숙이 개교하였다. 우리나라 최초로 6년 과정의 심상소학교(일제강점기 초등교육)과정을 개설 및 운영하였으며 한글교육과 나라사랑 정신을 강조하였는데 숙가(교가) 및 교표(모표)에 무궁화를 넣었다는 사유로 1년간 폐교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을 공동체는 배움을 멈추지 않고, 교실 창문을 모포로 막아 호롱불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숨어 학생과 어른 모두 주경야독하였다고 한다. 1932년 가파 신유 서당으로 교명을 바꾸어 신교사로 이전하였으며 1946년 11월 가파국민학교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김성숙의 신유의숙은 강문석의 한남의숙, 윤식명의 광선의숙과 함께 대정지역의 3대 사숙이라 통칭하는데, 후일 대정에서 항일인사가 많이 배출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신유의숙의 교사들 대부분이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지녔으며 항일민족교육의 중심지로 정평이 나 가파도는 문맹자가 없는 지역으로 널리 알려졌다. 김성숙(1896-1979)은 제주 출생이며 호는 회을(悔乙)이다. 경성고등보통학교 4학년 재학 중에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퇴학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21년 김성숙은 가파도 355번지에 터를 잡고 1921년 소규모의 의숙을 세워 최초로 6년 과정의 심상소학교 과정을 개설 및 운영하였다. 이후 마을 중심으로 이동하여 새 학교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당시 900엔(円)을 들여 가파리 275번지 421평 대지 위에 24평짜리 교사(校舍)를 건축하였다. 이후 1924년 신유의숙을 동지인 김한정에게 맡긴 뒤 김성숙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1926년 귀국하여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고 1927년 신간회(新幹會) 위원으로도 활동하였으며 1930년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하여 체포되는 등의 활동을 계속하였다. 1981년 가파도 주민과 문하생들이 김성숙 선생 동상과 신유의숙 설립공로비를 가파초등학교 교정에 세워 그 고마움을 후세에 전하였다. 정부는 2005년 고인을 건국포장에 추서하였다.
강창규 기념비
강창규(1872 - 1963)는 1918년 10월 제주도 중문면(中文面) 도순리(道順里, 현재 도순동) 법정사(法井寺)에서 주지 김연일(金蓮日)을 중심으로 신도 및 농민들과 함께 일본인관리 축출과 독립을 위해 무장봉기하였다. 이들은 일격에 서귀포를 습격하려고 하였으나, 진로를 바꾸어 중문경찰관주재소(中文警察官駐在所)를 습격하였다. 봉기한 세력은 400여 명의 대규모 집단으로 변모하였다. 그는 강정리(江汀里)·도순리 사이 대천(大川)의 서안 부근에서 전선 및 전주 2본을 절단하고 서귀포 중문리의 주재소를 습격하여 불태우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2월 궐석재판에서 소위 소요(騷擾) 및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8년을 받았고, 4년의 도피 끝에 1922년 12월 28일 체포되어 징역 8년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탑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는 1918년 10월 제주도에서 국권회복을 부르짖으며 대규모 무장항일투쟁을 전개했던 항일운동의 근거지였던 법정사가 있던 곳이다. 법정사는 1909년 관음사를 창건한 안봉려관(安逢廬觀)과 김석윤(金錫允)이 한라산 남쪽을 대표할 사찰의 필요성을 느끼고 관음사 다음으로 일으켜 세운 사찰로서, 1911년 9월 좌면 도순리 산 1번지에 창건되었다. 이 법정사에 1914년 경북지역에서 김인수·정구용과 함께 항일운동의 이력을 갖고 있던 김연일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제주 출신 승려 강창규·방동화 등과 함께 이곳을 대대적인 항일운동의 근거지로 만들었다. 법정사는 1918년 9월경 곤봉, 화승총, 깃발 등을 준비한 뒤 거사를 지휘할 조직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1918년 10월 5일과 6일, 법정사 정기 예불일에 모인 사람들과 7일 새벽, 출정식을 갖고 도순리로 향하였다. 선봉대가 각 마을에서 참여자를 모집하였고 영남리·서호리·강정리·호근리를 순회하며 전선과 전주를 절단하였으며, 하원리에 이르러서는 일본인에게 위해를 가하였다. 중문리에 이르렀을 때 인근 마을에서 700여명이 동조하여 참여하였다. 주민과 합세하여 힘을 얻은 이들은 중문리경찰관주재소의 기구와 문서 등을 불태웠으며 일제에 구금되어 있었던 농민 10여명을 석방한 뒤 주재소 건물을 불태웠다. 그러나 항쟁은 총으로 무장한 서귀포경찰관주재소 기마순사대의 저지로 제주 전역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일제에 피체되어 검거된 인원은 60여명이었으며, 재판에 회부되어 실형을 받은 대상자는 30여명이었다.
변성현 기념비
변성현(1916 - 1938) 선생은 제주 서귀포 사람이다. 그는 제주도 서귀포에서 독서회를 조직하여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야학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변성현은 1931년 3월 서귀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농업에 종사하다가 1933년경 사회주의 사상을 방략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4년 서귀면(西歸面) 법환리(法還里), 속칭 막원포(莫遠浦) 해안에서 독서회를 조직하여 마을 청년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변성현은 독서회 회원들과 수차례 모임을 갖고 민족의식의 고취, 일본 제국주의 비판, 무산자 계급 의식 고양 등을 주요 주제로 토론하고 일제의 일본인과 조선인들의 차별 정책을 비판하였다. 1935년에는 집안에 야학을 개설하여 문맹퇴치에 앞장섰으며, 농촌의 부족한 일손을 돕기 위해 품앗이 형태의 갈개[호미]회를 조직하여 마을 청년과 부녀자들을 상대로 선전활동을 하다가 6월경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변성현은 1935년 10월 1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검사국으로 송치되었고, 1937년 6월 4일 목포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미결구류 365일 통산)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강붕해 묘
강붕해 선생은 제주(濟州) 사람이다. 천주교 신자이던 그는 1938년 겨울 서귀포 천주교회의 아일랜드인 선교사 나 신부(羅神父:본명 토마스 다니엘 라이언)에게, "대정면(大靜面) 모슬포(慕瑟浦)의 해군비행장에서 비행기가 발진하여 중국의 상해(上海) 남경(南京) 방면을 도양폭격(渡洋爆擊)하고 있는데, 아마도 비행장 지하실에 폭탄을 저장해 두고 있는 모양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군사시설에 관한 정보에 제공하였다. 또한 1939년 9월경에도 나 신부에게 "중국군 비행기가 전라남도 목포(木浦)에 폭격하러 왔다가 일본 해군기에 의해 격추되었다"고 말하였고, 1941년 9월경에는 "중국에 출정하고 있는 일본군은 숫자가 적고, 오히려 다수의 군대는 소련 및 영미와 일전을 벌이려고 대기 중이다"라는 내용의 말을 하였다. 이 무렵 일제는 제주도를 중국에 대한 도양폭격의 발진기지로 만들면서 도내 반일세력을 색출 제거코자 하여, 우선 적성국(敵性國)인 영국 국적의 아일랜드인 선교사들과 그들이 소속된 천주교회 조직을 탄압 파괴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그 또한 위의 발언들을 통해 군사기밀을 유출하고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이유로 1941년 말에 나 신부 등과 함께 일경에 피체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그 후 1942년 10월 2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국방보안법 및 군기(軍機)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1년과 육·해군형법 위반으로 금고(禁錮) 10월이 병합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해녀공로비
당시에는 12세부터 늙은이까지 해녀뿐 아니라 남자들도 나서서 미역을 나르고 말리는 일을 협력했다고 한다. 이렇게 눈보라와 추위를 뚫고 채취한 미역으로 마련한 기금을 보태어 1951년 2월 23일 가교사 4개 교실을 신축하게 되고 그해에 제1회 졸업생이 배출하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육지로 물질하러 가는 사람들에게는 한글 해득 도장이 찍힌 양민증이 필요한 시대였다. 당시는 해녀들의 사상이 온건하면 양민증을 주었다. 양민증에는 한글 해득/미해득을 표기하는 난이 있어서 한글해득이 되면 육지에 나가서 물질할 수 있도록 출타 허가를 해주었다. 이 시기 1954년에 이 학교에 부임한 고창호(우도 출신) 교사는 30~50세 되는 부녀자 50여명을 모아 놓고 한글교육을 시켰다. 이는 일제 강점기 온평리에는 야학소가 운영돼 마을 청년들이 야학 교사로 나서 민족정신과 한글을 가르쳤던 전통의 맥을 이은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글해득 판정을 받았다. 고창호 교사는 교육을 받은 해녀들에게 바다에서 딴 미역의 일부를 학교 건립 자금으로 내놓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해녀들은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마을 전체 총회를 거쳐 마을의 허락도 얻어냈고 다른 마을과의 경계에 있는 바다를 학교바당으로 정하였다. 학교바당은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다. 이로부터 1958년까지 학교 신축 기금을 해녀들이 마련하였다. 1960년 온평초등학교 추진위원회의 이름으로 3개의 기념비를 세울 때에는 제외되어 해녀들의 이런 노력이 곧바로 인정되지는 않았다. 이 비석은 해녀들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은 뒤인 1961년이 되어서야 온평초등학교의 이름으로 세워졌다.
방동화 대종사비
방동화(1887 - 1970)는 제주(濟州) 사람이다. 제주도 남제주의 법정사(法井寺) 승려로 1918년 10월 5일 승려 김연일(金連日)·강창규(姜昌奎) 등과 함께 항일무력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망국의 한을 품고 종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다. 1913년 육지로 건너가 경상도 일대의 기림사(祈林寺)·대승사 등지의 사찰에서 득도한 뒤 1918년 봄 법정사에 돌아와 승려 김연일 등과 교류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길러 갔다. 방동화는 1918년 봄에 김연일·강창규 등과 함께 승려를 중심한 항일비밀결사를 결성하였으며, 점차 신도들을 포섭하여 조직을 확대해 갔다. 그리하여 1918년 10월에 이르러서 30여 명의 신도들이 법정사를 근거지로 동지적 유대를 이루는 가운데, 조직적 결집을 이룰 수 있었다. 이들은 동년 10월 5일 김연일을 불무황제(佛務皇帝)로 옹위하고 도대장(都大將) 이하 군직(軍職) 체제로 조직을 편성한 뒤, 제주도 내의 일본인 관리의 처단과 일인의 구축을 행동 방침으로 정하고 무력에 의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행동에 앞서 각 면(面)의 이장(里長)에게 격문을 배포하여 동참할 것을 권유하여 군민 4백여 명이 가세하는 가운데 행동을 개시하였다. 이에 방동화 등은 일경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전선(電線)을 절단하여 각 주재소(駐在所)를 고립시킨 다음 중문(中文) 주재소를 습격하여 주재소에 감금되었던 13명의 구금자들을 석방하였으며, 식민수탈의 전위 역할을 맡았던 일본 상인(商人)들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곧이어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이틀만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붙잡힌 후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소요(騷擾)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영석 공적비
윤영석 공덕비는 서귀포시 표선면 표선리 40-71에 위치한다. 윤영석(1916 - 2003)은 충남 예산(禮山) 사람으로, 이명은 윤남의이다. 1926년 10월부터 예산지역의 농촌계몽운동에 적극 활동하였다. 윤영석은 윤봉길의 동생으로 윤봉길이 1926년 10월 조직한 각곡독서회(角谷讀書會)에 가입하고, 1929년 3월 28일 일본침략정책을 풍자한 촌극인 토끼와 여우를 공연하였다. 그리고 4월 8일에는 윤봉길이 야학생 중심으로 조직한 월진회(月進會)에 가입하여 농촌개혁운동과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1930년 3월 15일 윤봉길이 중국으로 망명한 뒤로는 그가 월진회를 이끌며, 토론회와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4월 그는 윤봉길이 보낸 편지를 보고, 그의 거사를 깨닫고 윤봉길이 직접 쓴 농민독본(農民讀本)·기사년일기(己巳年日記)·월진회취지서(月進會趣旨書) 등을 천장에 극비 보관하였다. 1932년 5월 정종호(鄭鍾浩)가 만든 예산농고(禮山農高) 독서회 조직에 적극 찬동하였다. 그런데 1932년 12월 정종호가 예산농고 독서회 사건으로 붙잡히고 조사가 확대되자, 일경의 감시를 피하여 1933년 1월 중순 경 출가(出家)하여 해방될 때까지 선의(璇儀)라는 가명을 가지고 피신생활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오병윤 묘
오병윤(1901 - 1973) 선생은 제주 출신이다.그는 제주도 법정사(法井寺) 신도로 1918년 10월 6·7일 김연일(金蓮日) 등과 함께 서귀포의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해 방화·파괴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했다.1918년 9월 19일 제주도(濟州島) 좌면(左面) 도순리(道順里) 법정사 승려 김연일은 오병윤 등 신도 30명에게 “왜놈은 우리 조선을 병탄(倂呑)했을 뿐 아니라 병탄 후에는 관리는 물론 상인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 동포를 학대하고 있다. 제주도에 거주하는 일본인 관리를 죽이고 일본 상인을 섬 밖으로 몰아내자”는 내용의 연설로써 반일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이어 동년 10월 5일, 오병윤 등 신도 33명은 군사 대오를 편성하고 각 면(面) 면장들에게 격문을 보낸 후, 주민 400여 명을 규합하여 전선을 절단하고 일경 주재소를 습격·파괴하며 일인들을 포박·구타하는 등 이틀 동안 격렬한 항쟁을 벌였다. 그는 이 일로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방동화 기념비
방동화(1887 - 1970)는 1918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 지역에서 법정사 항일 운동에 참여한 항일 운동가이다.방동화는 한학을 배우다가 관음사의 승려였던 김석윤과 강창규가 자신들의 스승인 박만하가 있던 경주의 기림사로 보냄에 따라 거기에서 출가하였다. 방동화는 기림사 승려였던 김연일·정구용 등과 함께 제주도에 들어와 법정사에서 승려로 활동하였다. 1914년부터 김연일이 법정사 주지로 활동하며 법정사 신도들에게 항일 의식을 심어주는 역할을 하는 동안 방동화는 박주석을 초빙하는 등으로 김연일을 도와 법정사 항일 운동을 계획하는 활동을 하였다. 거사를 위한 조직에서 방동화는 좌대장을 맡아 총지휘자인 김연일을 보좌하였다. 1918년 10월 7일 법정사 예불일의 새벽 기도를 마치고 34명의 선봉대가 거사를 실행하였다. 방동화는 거사 현장에서는 피신하였다가 한 달여의 은신 후 체포되어 소요 및 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6년형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이후 제주도 하원리 원만암에서 불교활동을 재개하여 제주불교계에서 활동하였다. 1939년에는 제주불교연맹 활동, 1945년 조선불교혁신 제주도 승려대회에 참석하여 조선불교 제주교구 교무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대한불교 제주교무원 교무회의장도 역임하였다. 방동화는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참여에 대한 공훈으로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고,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도순동에 있는 무오 법정사 항일 운동 발상지(戊午法井寺抗日運動發祥址)에 건립된 의열사에 영정이 모셔져 독립운동의 뜻이 기려지고 있다.
조봉호 기념비
조봉호(1884~1920)는 제주 성내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던 1919년 5월 서울에서 온 독립희생회 연락원 김창규(金昌圭)와 모의하여 독립희생회 제주도지방조직을 하고 임정헌장과 해외 통신문 등을 유인하며 배포하면서 군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에 송금하려다가 1919년 7월 일경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대구복심법원에서 1919년 11월 12일 징역 1년을 선고를 받고 복역 중 1920년 4월 28일 대구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한국자유총연맹 제주도지회에서는 제주도민의 이름으로 그의 애국정신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1977년 1월 11일 이 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