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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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욱 건국유공비
노병욱(1887~1924)은 전북 임실(任實) 출신으로 이석용 의진(李錫鏞 義陣)에 참여하여 임실·진안(鎭安) 일원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8월 전북 진안에서 거의(擧義)하여 의병대장에 추대된 임실 출신의 유생 이석용은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문인이었다. 이석용은 1908년 9월 성재 기삼연(奇參衍)이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결성하자 종사(從事)로 참여하여 고창(高敞)에서 일본군 병참을 습격하였고, 용담(龍潭)에서는 김동신 의진(金東臣 義陣)과 합세하여 일본군과 접전하기도 하였다. 1908년 9월 임실전투(任實戰鬪)에서 패하여 의병진을 해산하고 유랑하다가 1913년 겨울 임실에서 체포되었다. 1914년 1월 1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공판을 받아 1914년 4월 4일 대구형무소에서 교수되어 순국하였다.이석용의 고향 친구인 노병욱은 임실 지역의 거부(巨富)로 자신은 물론 처가의 재산까지 의병진의 군자금으로 제공하였고, 각처의 부호들에게 군자금을 징발하기도 하였다. 1907년 8월 7일 진안 마이산(馬耳山)에서 이석용 의진에 합류하여 1908년 3월 20일 임실군 성수면(聖壽面) 태평리(太平里) 대운고개에서 일경과 전투를 전개하였다. 또 1908년 음력 4월 11일 전북 전주군 상관면(上關面) 서준보(徐俊甫)의 집에서 그 곳 동장에게 군수품을 갹출(醵出)하였으며, 같은 면의 노동(蘆洞)에서도 동장에게 군수품을 갹출하였다. 뿐만 아니라 4월 15일에는 임실군 상북면(上北面) 사일리(士日里) 김미지(金美旨)에게 ‘엽전 300냥을 기부하라’고 요구하였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1909년 2월 일경에 체포되어 미결상태로 7개월 동안 구금되어 있다가 동년 8월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2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노병욱 구 묘
노병욱(1887~1924)은 전북 임실(任實) 출신으로 이석용 의진(李錫鏞 義陣)에 참여하여 임실·진안(鎭安) 일원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8월 전북 진안에서 거의(擧義)하여 의병대장에 추대된 임실 출신의 유생 이석용은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문인이었다. 이석용은 1908년 9월 성재 기삼연(奇參衍)이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결성하자 종사(從事)로 참여하여 고창(高敞)에서 일본군 병참을 습격하였고, 용담(龍潭)에서는 김동신 의진(金東臣 義陣)과 합세하여 일본군과 접전하기도 하였다. 1908년 9월 임실전투(任實戰鬪)에서 패하여 의병진을 해산하고 유랑하다가 1913년 겨울 임실에서 체포되었다. 1914년 1월 1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공판을 받아 1914년 4월 4일 대구형무소에서 교수되어 순국하였다.이석용의 고향 친구인 노병욱은 임실 지역의 거부(巨富)로 자신은 물론 처가의 재산까지 의병진의 군자금으로 제공하였고, 각처의 부호들에게 군자금을 징발하기도 하였다. 1907년 8월 7일 진안 마이산(馬耳山)에서 이석용 의진에 합류하여 1908년 3월 20일 임실군 성수면(聖壽面) 태평리(太平里) 대운고개에서 일경과 전투를 전개하였다. 또 1908년 음력 4월 11일 전북 전주군 상관면(上關面) 서준보(徐俊甫)의 집에서 그 곳 동장에게 군수품을 갹출(醵出)하였으며, 같은 면의 노동(蘆洞)에서도 동장에게 군수품을 갹출하였다. 뿐만 아니라 4월 15일에는 임실군 상북면(上北面) 사일리(士日里) 김미지(金美旨)에게 ‘엽전 300냥을 기부하라’고 요구하였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1909년 2월 일경에 체포되어 미결상태로 7개월 동안 구금되어 있다가 동년 8월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2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승현 기적비
윤승현(1912 ~ 1950)은 전남 나주 사람이다. 그는 1928년 6월에 일제의 군국주의화 교육의 일환으로 실시된 교련교육과 교내학우회의 자치권 획득 등을 목표로 진행된 광주고보(光州高普) 맹휴(盟休)를 주도하였다. 광주고보의 맹휴는 맹휴본부를 설치하고 참모부(參謨部)·통신부(通信部)·외교부(外交部)·회계부(會計部) 등의 진행부서까지 둔 조직성과 독립운동적인 성격이 강화된 것이었다. 그는 이 맹휴사건으로 학교에서 퇴학처분을 받고 일경의 추적을 받자 은신하여 지하활동을 하였다. 그후 그는 1931년 12월 19일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전남 도내의 17개 단체를 통합하여 전남노농협의회(全南勞農協議會) 결성을 주도하였으며, 농민부서를 맡아 활동하였다. 1934년 11월 27일 일경에 노출되어 붙잡혀,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이듬해 1월에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송홍 묘
송홍(1871 ~ 1949)은 전남 나주 사람이다. 운인공은 한말에 일본인의 횡포를 제지코자 5차의 상소와 복합상소 일헌에게 체포되어 옥고 출사표와 귀거래사에 필적하는 명문의 복합상소문(한자 1334자) 을 올리고, 중국 망명 귀국 후 교육혁신방안의 제창 광주 농고 광주고보 등에서 교사생활 20여년 3.1운동때 격문을 지어 공포하다가 체포령이 내려 일시 미국 망명 제자들에게 애국애족정신 민족의 얼을 고취시켜 1929년 드디어 광주학생독립운동 의거 15년 간의 고분당생활 8.15 해방 후 광주서중과 광주의대에서 국사학 강의 1949년 6월 18일 광주 자택에서 향년 78세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2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동근 추모비
정동근(1867~1945)은 전남 나주(羅州) 사람이다. 경술국치 이후 국권회복을 위해 기회를 모색하던 중 1917년경 뜻을 같이하는 김교락(金敎洛), 양재홍(梁在鴻), 문재교(文在敎), 김영하(金榮夏), 고성후(高成厚) 등과 동지적 결합을 맺고 우선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 모집활동을 폈다.이후 이들은 나주·함평(咸平)·화순(和順)·순천(順天) 등 주로 전남지역에서 자산가들을 대상으로 1년여 동안 십여 차례에 걸쳐 천여원의 군자금을 수합하면서 조직을 확대해 갔다. 그러던 중 일경에 붙잡혀 1918년 12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했으나 1919년 3월 대구복심법원에서 15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나주 궁삼면 항일농민운동기념비
나주시 왕곡면 장산리 산 27-5에 위치한 나주궁삼면 항일 농민운동 기념비는 1991년 11월 5일에 나주궁삼면 항일농민운동기념사업회의 주체로 건립됐다. 나주 궁삼면은 19세기말 경선군의 궁터가 있었던 나주군 지죽면(현 세지면), 욱국면(현 왕곡면), 상곡면(현 가야동)을 이르는 말이다. 이 땅에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가뭄으로 세금을 내지 못하자 이를 대난해 주겠다고 속여 토지를 수탈해 감으로써 농민들의 항거가 시작되었다. 농민들은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하였지만, 땅은 결국 동양척식주식회사로 넘어가고 말았다. 농민들은 이 땅을 찾기위해 법정싸움을 계속하면서도 항일농민운동으로 발전시켜 투쟁을 계속하였다. 광복이 된 이후에도 땅을 돌려받지 못하고 다시 돈을 주고 사야했던 고통이 있는 뒤에야 이 농민운동은 마무리되었다. 건립취지는 1908년 식민지 치하 이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수탈 대항, 36년 동안 가열찬 끊임없는 투쟁을 벌여온 궁삼면(現영산포,세지,왕곡,다시,봉황면) 농민들의 구국정신의지를 기리기 위하여 궁삼면 항일농민운동 기념사업회가 지역 주민들의 1천만원에 달하는 성금을 토대로 전남도와 나주시의 예산을 지원받아 건립했다.기념비의 전면에는 비문이 새겨져 있고 측면과 후면에는 농민항일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인 궁삼면 농민들의 항일투쟁 역사가 담겨져 있다.
궁삼항일농민운동공적비
1888년부터 1889년까지 영산강 유역인 지죽, 욱곡, 상곡 등 3개 면에서 가뭄으로 인한 농작물 실패로 약 4만5000두락의 농토를 소유하던 1400여 명의 농민 중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게 된다. 그 중 한 농민인 경저리 전성창은 세금을 속여 대납했다 속이며 이 땅을 자신의 것으로 하고, 주인 없는 전답에 이르러 약 1100여 두락의 토지를 강탈한다. 1894년, 채규상이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면서 토지가 되찾기 시작되지만, 1897년 토지환부판결로 인해 다시 토지를 잃게 된다. 이후 전성창은 반대하는 면민들을 포박하고 구타하여 4만5000두락의 농토를 또다시 약탈한다. 1909년 동양척식회사가 토지를 매수하려고 하지만 면민들은 매매를 거부하고, 이때 일본 이민들을 앞세워 강력히 저항한 결과, 이회춘의 노모가 무참히 살해당하는 등 많은 희생과 항쟁이 이어진 곳이다
김제중 독립운동 공훈기념비
김제중(1893~1950)은 전남 담양 사람이다. 1920년에 김성현·문동길 등과 함께 신덕채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자금 조달의 밀지를 받아 음력 2월 14일 광주군 광주면 박운아의 집에서 모임을 갖고 군자금 수합활동을 펴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하여 이튿날부터 음력 4월 사이에 6회에 걸쳐서 곡성·담양 등지에서 자산가들을 대상으로 임시정부 요원임을 밝히고 현금 및 군자금증거출증서·물품 등을 수합하였으며 미수사건도 2회나 있다. 또한 동지규합에 힘쓰던 중 1921년 밀고로 인해 일경에 피체되어 동년 11월 12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강도상해·강도미수·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년형을 언도받고 8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항일독립유공인사 숭모비
항일독립유공인사 숭모비는 전라남도 무안군 무안읍 성남리 산 4-13에 건립되어 있는 비다. 일제 침략기에 국권회복을 위해 투쟁한 무안군 출신들의 의병활동, 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광복군 참여 등을 하신 독립지사 김종성 외 17명의 거룩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전남 항일독립운동 기념탑
전남 항일독립운동 기념탑은 한말, 일제강점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전라남도 출신의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고귀한 넋을 추모하고 그 얼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전라남도 무안군 삼향읍 남악3로 30(중앙동산 또는 대죽도근린공원), 전라남도도립도서관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다. ‘전라남도 항일독립운동기념탑’의 작품명은 ‘독립비상의 꿈’으로, 전남 출신 애국지사들의 진정한 광복을 염원하는 비상의 꿈을 담았다. 특히 날개를 펴고 비상한 새의 형상을 통해 불굴의 독립정신과 미래지향적인 전남 도민들의 희망을 표현하고 있다. 기념탑에는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각 분야별 독립운동가 7인의 독립열사상과 함께 전남 출신 독립유공자 1천 281명의 명단을 새긴 기억의 열주 벽이 있다.
보성군 독립유공자 추모탑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전남 보성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독립군전투, 대한민국임시정부, 노동운동, 농민운동, 학생운동, 광복군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사단법인 송재서재필기념사업회에서는 위 인물의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2003년 8월 15일 이 탑을 세웠다.
벌교 선근공원(안규홍 사적지)
선근공원은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벌교리 728-5에 위치하고 있다. 해당 장소에는 1919년 벌교에서 일어난 독립운동 등을 주제로 하는 의향 의자, 주먹의자 등 관련된 미술작품 12종 34점이 전시돼 있다. 특히 낙안군 출신으로 머슴살이하던 안규홍이 조선인 아낙을 희롱하던 일본 헌병을 진압하였던 사건을 기념하는 조형물, 동상 등이 있다. 안규홍(1879~1910)은 의병장이 되어 26차례나 일본군과 싸워 승리했으며 이후 심남일, 전해산과 연합하여 합동 작전을 전개했다. 일본은 의병에 대한 보복으로 낙안군을 폐지했고 남한 대토벌작전을 자행했다. 안규홍은 일본군에 체포되어 대구 감옥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안규홍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