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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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729 건
김윤식 좌상
김영랑(金永郞)은 1902년 음력 12월 18일,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면 남성리에서 태어났다. 김현상, 김성수와 함께 3.1운동을 준비했지만, 다음날 강진 경찰서에 체포되어 광주지방법원에서는 보안법 위반으로 1년간 징역을 선고받았지만, 대구복심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 후에도 검찰에서 상고를 제기하자, 고등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었다. 그 후 1930년대에는 「독을 차고」·「가야금」·「달마지」·「춘향」 등의 다수의 시를 발표하여 민족의식과 저항의식을 표출하였습니다. 2018년 정부는 김영랑을 건국포장으로 추모하기로 했다.
옛 항일 애국지사 추모탑
항일 애국지사 추모탑은 1984년 10월 20일 고흥읍 봉황산 기슭아래 항일 애국지사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의 풍상으로 탑문(塔文)이 마멸되어 알아볼 수 없게 된 것을, 2014년 순천 보훈지청 후원으로 다시 각인에 채색 및 복원하였다.
고흥군 현충공원
고흥군 현충공원은 2017년에 새로 조성된 공원이다. 1965년 봉황산에 건립된 구 충혼탑이 낡고 시설이 불편하다는 보훈가족의 요청사항에 따라 2015년부터 조성 공사를 벌여 2017년 개장하였다. 고흥종합문화회관 인근에 위치하고 있으며 부지 1만5162m²에 현충탑, 임진왜란충혼탑, 항일애국지사추모탑, 참전기념탑 등 4개 탑이 건립되어있다.
김재용 추모비
김재용(19077-1934)은 전남 고흥(高興) 분촌리에서 태어나 광주사범학교 재학중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1929년 7월,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재용은 송동식(宋東植)·강달모(姜模) 등 광주사범학생 15명과 함께 수피아 여학교 뒷산에 모여 비밀결사 조직에 대하여 협의하고, 동년 9월에 광주형무소 뒷산에서 광주사범독서회를 조직하였다. 동회는 광주지역의 중심적 항일학생 결사였던 성진회(醒進會)가 해체된 후 확대 개편된 '독서회중앙본부'의 하부조직으로 결성되었다. 그는 독서회 활동을 통하여 항일 민족정신을 고취하던 중,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 활동하다가 독서회 관련으로 일경에 붙잡혔다. 이로 인하여 그는 광주사범학교에서 퇴학당하였으며,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여,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고 1934년 27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재용 충훈비
김재용(19077-1934)은 전남 고흥(高興) 분촌리에서 태어나 광주사범학교 재학중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29년 7월,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재용은 송동식(宋東植)·강달모(姜模) 등 광주사범학생 15명과 함께 수피아 여학교 뒷산에 모여 비밀결사 조직에 대하여 협의하고, 동년 9월에 광주형무소 뒷산에서 광주사범독서회를 조직하였다. 동회는 광주지역의 중심적 항일학생 결사였던 성진회(醒進會)가 해체된 후 확대 개편된 '독서회중앙본부'의 하부조직으로 결성되었다. 그는 독서회 활동을 통하여 항일 민족정신을 고취하던 중,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 활동하다가 독서회 관련으로 일경에 붙잡혔다. 이로 인하여 그는 광주사범학교에서 퇴학당하였으며,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여,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고 1934년 27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서민호 집
서민호(1903 ~ 1974)는 본관은 이천(利川). 호는 월파(月坡). 전라남도 고흥 출신이다. 1919년 보성중학교 재학시절 3.1운동에 참여하였고 1921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23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1925년 미국 오하이오주 웰스리언대학, 1927년 컬럼비아대학에서 정치사회학부를 수료하였다. 귀국 후 전라남도 벌교읍에서 남선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1935년 송명학교(松明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을 지냈다. 1936년에는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사업을 촉진하기 위한 비밀 후원회를 조직하여 재정 지원을 하였으며,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여간 옥고를 치르다가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한편 서민호는 해방 정계에 진출하였으며 1946년 6월 광주시장, 같은 해 10월 전라남도지사를 지냈으며 제2대, 5대, 7대 민의원(오늘날의 국회의원)을 지냈다. 1973년 정계를 떠났으며, 이듬해 72세로 사망하여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서울 교외의 신세계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저서에 『나의 옥중수기』가 있다. 정부는 이러한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서민호 제실(고흥 죽산재)
고흥 죽산재(竹山齋)는 죽파 서덕봉(字화일, 1860~1933)이 서재로 쓰고자 지었으나 준공 후 얼마 사용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월파 서민호(1903~1974)선생이 부친의 제실과 서재로 사용한 공간이다. 죽산재는 정면 5칸, 측면 3칸, ‘ㄷ’자형 구조이며, 기단이나 초석을 잘 다듬어 품격을 높인 근대기(1933년) 의 목조 건축물이다. 건축적으로 부재의 기법이 정교하고, 화려하지만 민화풍의 해학적인 느낌과 단청은 불교적인 요소와 근대기의 풍물이나 경관을 표현하는 등 여러 문화가 혼합되어 나타난다. 건축적으로 정교하고 화려하며, 불교적 요소에 근대기의 풍물이나 경관이 녹아든 민화풍의 단청이 있어 문화재로서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2021.03.04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93호로 지정되었다. 죽파 서덕봉(화일)은 월파 서민호의 부친으로 생전에 사회사업과 교육 등에 심혈을 기울였고 아들인 서민호(1903-1974)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해방 이후 전라남도지사, 제 2, 5, 7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서민호(1903 ~ 1974)는 본관은 이천(利川). 호는 월파(月坡). 전라남도 고흥 출신이다. 1919년 보성중학교 재학시절 3.1운동에 참여하였고 1921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23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1925년 미국 오하이오주 웰스리언대학, 1927년 컬럼비아대학에서 정치사회학부를 수료하였다. 귀국 후 전라남도 벌교읍에서 남선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1935년 송명학교(松明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을 지냈다. 1936년에는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사업을 촉진하기 위한 비밀 후원회를 조직하여 재정 지원을 하였으며,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여간 옥고를 치르다가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한편 서민호는 해방 정계에 진출하였으며 1946년 6월 광주시장, 같은 해 10월 전라남도지사를 지냈으며 제2대, 5대, 7대 민의원(오늘날의 국회의원)을 지냈다. 1973년 정계를 떠났으며, 이듬해 72세로 사망하여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서울 교외의 신세계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저서에 『나의 옥중수기』가 있다. 정부는 이러한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독립 유공자 위령탑(곡성)
곡성 출신 독립유공자 20인의 위령탑이다. 2005년 11월 17일, 독립 유공자 유족회 곡성군지회에서 건립하였다. 국가 현충시설로서 관리번호는 55-1-43이다. 위령탑은 가로 8×세로 7.5×높이 9m 규모로 독립 운동으로 나라 사랑을 몸소 실천했던 20명의 곡성출신 독립 열사들의 뜻과 활약상을 선각화로 표현하였다. 본 사적에 추서된 분들의 성함은 다음과 같다. 김성언, 김영학, 김용표, 김재룡, 노인선, 노임수, 신문선, 신유선, 신정백, 양원모, 유건영, 유인수, 유해용, 윤정구, 이종협, 이초립, 장기문, 정재건, 조영선, 조옥희, 조우식, 한방섭 20인이다.
조용택 순교비
조용택(1902-1950)은 전라남도 담양 옥과에서 부 조동윤 모 박치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담양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25세에 탈메이지(J.V.Talmage) 선교사 조사인 고모 조덕화에 의해 예수를 인격적으로 영접하게 되었다. 그는 탈메이지 선교사가 설립한 순담청년성경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탈메이지 선교사의 조사로 순천 담양지방에서 순회 사역을 담당하였다. 또한 전남노회 유지재단 설립 사역에도 헌신하였다. 1937년 탈메이지 선교사의 추천으로 평양신학교 입학하였으나 제 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에 반대하여 1938년 평양신학교를 자퇴하였다. 당시 호남지역 신학생 박동환(박팽동), 김용하(김용수) 등과 함께 낙향하였다. 그리고 고향인 옥과 교회 전도사로 부임 시무하였지만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전개하다 6개월간 광주경찰서에 구금되었다. 4년간 미결수로 수시로 모진 고난을 겪으면서 살아갔다. 결국 황국신민화 반대와 일본 왕에 대한 불경 죄목으로 2년 징역을 마치고 1944년 8월 12일 출소하였다. 그는 출옥하여 자신이 시무하던 옥과교회를 재건하는데 힘썼다. 625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1950년 9월 29일, 조용택 전도사는 당시 수피아여고를 섬기고 있는 교장 유하례(Root, florence Elizabeth) 선교사를 피신시키고자 하였다. 당시 유하례 선교사는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고도 학교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철수하지 않고 교장실에서 기도하면서 나날을 보냈다. 1950년 7월 23일 광주에도 공산군이 침입하여 아비규환의 비극을 연출케 되었다. 이때 선교부에서 일하던 조용택 전도사는 장재태 전도사와 함께 유하례 선교사를 피신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유하례 선교사를 모시고 77일간 꼬박 바위 틈에 숨어서 기도와 성서읽기로 세월을 보내던 중 유엔군이 뿌린 전단을 보고 하산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때 하루 먼저 하산했던 조용택 전도사는 퇴각하는 공산군들에게 붙잡히며 순교하였다. 옥과교회에서는 조용택의 불굴의 신앙과 순교정신을 기리기 위해 60주년을 맞이하여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문재교 집
독립운동가 문재교(1879~1957)의 생가터로서 그는 경술국치를 당하자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던 끝에 정동근.양기중.양재홍.김영하 김교락.고성후와 함께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권총, 철봉(鐵棒), 도검 등을 휴대하고 나주.함평.화순.순천 등에 걸친 자산가들을 대상으로 1년여 동안 십여 차례에 걸쳐 군자금을 수합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복심법원에서 강도죄로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다.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 공훈을 널리 알리고자 표지를 세웠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유공자 추모탑(우산공원)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전남 광양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농민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특히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에 항의하여 박병하(朴炳夏, 1847~1910)는 단식으로, 황현(黃玹, 1855~1910)은 음독으로 자결 순국하였다. 광양시에서는 이들을 기리기 위하여 2009년 3월 1일 이 탑을 세웠다.
김윤식 시비
영랑 김윤식은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숨겨서 강진으로 내려왔다. 강진면(康津面) 남성리(南城里) 자택에서 김현상(金炫庠) 등과 정세를 논의하였다. 이후 3월 23일 밤 김현균의 집에서 김현상을 비롯해 김성수(金晟洙) 등과 함께 현재 각지에서 ‘조선독립운동’을 하여 사상자(死傷者)가 발생하고 있는데 방관만 하고 있을 수 없다며 강진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그 자리에서 각자 2원씩을 갹출하고 곧바로 태극기 500개를 제작하기로 하였다. 24일 이들은 따로 만세운동을 준비 중이라는 김안식(金安植)을 만나 함께 25일 강진 장날에 독립운동을 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태극기 제작과 「선언서」 등사 등을 준비했으나 25일 전까지 목표한 태극기 개수를 다 만들지 못하고 등사판 입수도 어려워져서 결국 다음 장날인 3월 30일로 거사 계획을 연기하였다. 하지만 다음날인 26일 이들의 준비와 계획이 강진경찰서(康津警察署)에 발각되어,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5일 광주지방법원(光州地方法院)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해 공소(控所)를 제기하였다. 5월 5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무죄(無罪)’를 선고받았다. 그러자 검사 측에서 다시 상고(上告)를 제기하였다. 6월 9일 서울 고등법원(高等法院)에서 기각되어 무죄가 확정되었다. 이후 1930년대에 「독(毒)을 차고」·「가야금」·「달마지」·「춘향」 등 다수의 민족적인 시(詩)를 발표하여 저항의식을 표출하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