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아카데미 역사기록 백과사전

독립유공자 추모탑(우산공원)

유형
기념탑·기념공원·기념관 | 동상·부조 | 안내판·표지석
주소
전라남도 광양시 광양읍 우산리 656

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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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전남 광양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농민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특히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에 항의하여 박병하(朴炳夏, 1847~1910)는 단식으로, 황현(黃玹, 1855~1910)은 음독으로 자결 순국하였다. 광양시에서는 이들을 기리기 위하여 2009년 3월 1일 이 탑을 세웠다.

탐방로그

독립유공자 추모탑과 황현 선생 동상을 찾기 위해 전라남도 광양의 우산공원에 왔다.

인물정보

성명
김갑곤
한자명
金甲坤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07 ~ 1992
본적
전라남도 광양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2005

공적개요

1931년 12월 전남(全南) 광양군(光陽郡) 광양면(光陽面) 도월리(道月里)에서 박경래(朴坰來)의 지도로 김희곤(金希坤), 강충실(姜忠實) 등과 함께 사회주의(社會主義) 사상(思想) 학습(學習)을 위한 비밀 결사(秘密結社)를 조직하였고, 1933년 5월 1일에는 동면(同面) 용인리(龍仁里)에서 김기문(金基文) 등과 함께 혁명가(革命歌) 등을 고창하며 시위 운동(示威運動)을 하였다가 동년(同年) 9·10월 경 체포(逮捕)되어 1935년 7월 19일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執行猶豫) 5년(미결구류(未決拘留) 365일 통산(通算))을 받을 때까지 1년 9개월(個月) 여(餘)의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상환
한자명
金相奐
운동계열
학생운동
생몰년도
1909 ~ 1977
본적
전라남도 광양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 1926년 11월 광주학생 중심으로 한국독립 및 사회과학연구를 위하여 성진회(醒進會)를 조직에 참가 하였다가 1927년 동회를 형식상 해산하고 2. 1929년 6월 「광주학생독서회(光州學生讀書會)」를 조직하여 주도하였음(동아일보 1930. 10. 10) 3.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사건이 발생되자 광주고보 선두에서 시위활약(항일운동사 p112) 하다가 체포되여 금고 4월형을 받음(판결등본제출) 4. 1930년 복역 중 「광주학생독서회(光州學生讀書會)」사건의 발각으로 동회를 주도하였다하여 최고형인 4년 형을 받았음(판결등본, 동아일보 1930. 10. 11, 10. 19)

인물정보

성명
김상후
한자명
金尙厚
운동계열
광복군
생몰년도
1922 ~ 1999
본적
평안북도 철산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45. 5.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제3지대(第三支隊)에 입대 1945. 6. 국내(國內) 정진교육훈련반(挺進敎育訓練班)에 편입

인물정보

성명
김석용
한자명
金碩用
운동계열
일본방면
생몰년도
1924 ~ 1990
본적
경상남도 통영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41.9월 일본(日本) 경도(京都)에서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압박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조국의 독립 밖에는 없으며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으로 병폐하여진 일본 내의 사정을 이용하여 민중봉기를 도모하여 활동하다 체포되어 1945.9.20 경도지방재판소(京都地方裁判所)에서 예심종결결정(豫審終結決定)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응백
한자명
金應伯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70 ~ 1911
본적
전라남도 광양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95

공적개요

1908년 황영문 의진(黃永文義陣)에 참여하여 동년(同年) 8월 5일 의병(義兵) 150여 명과 함께 전남(全南) 광양군(光陽郡) 진하면(津下面) 망덕리(望德里)에 거주하는 일인 석전경작(石田耕作)과 각야인평(角野仁平) 집에 들어가 각야인평(角野仁平)의 식구 4인을 처단하고 보관된 무기를 빼앗은 다음 두 채의 집을 소각시켰으며, 1908년에서 1910. 1월까지 강치선(姜致善)·고운서(高云西)·송용문(宋龍文) 등과 더불어 군내(郡內)의 부호가들에게 군자금을 거두는 등 항일(抗日) 활동(活動)을 하다가 피체(被逮)되어 교형(絞刑)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정기
한자명
金正炁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78 ~ 1949
본적
경상북도 영양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09

공적개요

1920년 음(陰) 4월경 경북(慶北) 영양(英陽)에서 흠치교(吽哆敎)에 가입하여 활동 하다 체포되어 면소(免訴)를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지태
한자명
金誌泰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11 ~ 1937
본적
전라남도 광양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2005

공적개요

1931년 말 박경래(朴坰來) 등으로부터 공산주의사상을 수용한 후 1931년 12월 노동계(勞動契)를 만들어 활동하였고, 1933년 전남(全南) 광양(光陽)에서 비밀 결사(秘密結社)를 조직하여 동지 규합 등의 활동을 하다 1933년 9·10월 경 체포되어 1935년 7월 징역 2년에 집행유예(執行猶豫) 5년(미결(未決) 365일 산입(算入))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채룡
한자명
金彩龍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21 ~ 2008
본적
전라남도 광양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41년 광양광업소(光陽鑛業所)에 근무(勤務)하면서 “백의회(白衣會)”를 조직(組織)하여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하기 위한 동지 확보(同志確保)등의 활동(活動)을 하였으며 동년(同年) 8월 경도(京都)에 유학(遊學)한 뒤에도 활동(活動)을 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3년을 받고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희곤
한자명
金希坤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15 ~ 1943
본적
전라남도 광양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2005

공적개요

1931년 12월 전남(全南) 광양군(光陽郡) 광양면(光陽面) 도월리(道月里)에서 박경래(朴坰來)의 지도로 김갑곤(金甲坤), 강충실(姜忠實) 등과 함께 사회주의(社會主義) 사상(思想) 학습(學習)을 위한 비밀 결사(秘密結社)를 조직하였고, 1933년 5월 1일에는 동면(同面) 용인리(龍仁里)에서 김기문(金基文) 등과 함께 혁명가(革命歌) 등을 고창하며 시위 운동(示威運動)을 하였다가 동년(同年) 9·10월 경 체포(逮捕)되어 1935년 7월 19일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執行猶豫) 5년(미결구류(未決拘留) 365일 통산(通算))을 받을 때까지 1년 9개월(個月) 여(餘)의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희로
한자명
金希魯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75 ~ 미상
본적
전라남도 광양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09

공적개요

1919년 3월 2일 천도교(天道敎) 신도로 전남(全南) 순천(順天)에서 「조선독립선언서(朝鮮獨立宣言書)」 등을 강형무(姜瑩武)로부터 받아, 그날 밤 광양군(光陽郡) 광양보통학교(光陽普通學校), 광양면사무소(光陽面事務所), 광양읍내(光陽邑內) 서문(西門) 밖에 각각 부쳐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게 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4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박병하
한자명
朴炳夏
운동계열
의열투쟁
생몰년도
1847 ~ 1910
본적
전라남도 광양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5

공적개요

1910년 8월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함에 통분을 못이기어 단식(斷食)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박용래
한자명
朴龍來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75 ~ 1959
본적
전라남도 광양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 4. 1 전남(全南) 광양군(光陽郡) 인덕면(仁德面)에서 서환식(徐環植) 정귀인(鄭貴仁)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조선독립만세기(朝鮮獨立萬歲旗)」를 제작한 후 광양군(光陽郡) 광양면(光陽面) 읍내리(邑內里)에서 1,000여명의 군중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펴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8월을 받은 공적(功績)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박정수
한자명
朴楨洙
운동계열
일본방면
생몰년도
1904 ~ 1959
본적
전라남도 광양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2008

공적개요

1937년 7월 전협全協 명고옥名古屋 합동노동조합合同勞動組合 치안유지법위반治安維持法違反 사건事件으로 체포되었다가 동년 10월 기소유예起訴猶豫로 석방釋放되고, 1941년 고지현高知縣 대정촌大正村 소재 하통토공下通土工에서 일하면서 노동자들에게 『문명은 어디로 가는가』, 『소련의 지식』등을 윤독시키고 전협노동조합가全協勞動組合歌인 『노동조합의 기치 아래』를 가르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1942년 5월 체포되어 동년 10월 송국, 1943년 4월 기소유예 처분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백학선
한자명
白鶴善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미상 ~ 1908
본적
미상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2001

공적개요

1908. 5. 4. 25명의 의병(義兵)을 이끌고 충북(忠北) 청풍(淸風)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방흥동(芳興洞)에서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전사 순국(戰死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서경식
한자명
徐璟植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6 ~ 1938
본적
전라남도 광양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 4. 1 전남(全南) 광양군(光陽郡) 인덕면(仁德面)에서 박용래(朴龍來) 정귀인(鄭貴人)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조선독립만세기(朝鮮獨立萬歲旗)」를 제작한 후 광양군(光陽郡) 광양면(光陽面) 읍내리(邑內里)에서 1,000여명의 시위군중들을 규합하여 만세시위를 주도(主導)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8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신명준
한자명
辛命俊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4 ~ 1933
본적
전라남도 광양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2005

공적개요

1925년 제2차 조선공산당의 전남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경남위원인 김명규(金明奎) 등과 함께 전남(全南), 경남(慶南) 양도위원회(兩道委員會)를 개최하여 교양(敎養), 비서(秘書), 책임(責任) 등 3부(部)를 설치하고 광주(光州), 순천(順天), 밀양(密陽) 등지에 각 군세포(郡細胞)를 두고 자신은 정진무(鄭晋武), 김완근(金完根)과 함께 밀양군(密陽郡) 세포(細胞)에 소속되어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確認)됨.

인물정보

성명
임태일
한자명
任泰馹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8 ~ 1959
본적
전라남도 광양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 4. 15 전남(全南) 광양군(光陽郡) 진월면(津月面) 무적도(無敵島)에서 독립만세시위를 하려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장세영
한자명
張世永
운동계열
일본방면
생몰년도
1922 ~ 1996
본적
전라남도 광양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43.2월경(月頃)부터 일본(日本) 동경(東京)에서 대학 재학중(大學在學中) 태평양 전쟁하(太平洋戰爭下)에서의 조선청년(朝鮮靑年)의 궐기(蹶起)와 독립 쟁취 방안(獨立爭取方案)등을 협의(協議)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1년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정귀석
한자명
鄭貴錫
운동계열
학생운동
생몰년도
1908 ~ 1952
본적
전라남도 광양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08

공적개요

1928년 2월 전남공립사범학교(全南公立師範學校) 재학 중 강해석(姜海錫) 등과 함께 전남(全南) 광주군(光州郡) 서방면(瑞坊面) 우암리(牛岩里) 지용수 집에 모여 사회주의사상의 보급과 한국의 독립을 논의하는 등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미결구류(未決拘留) 365일 산입(算入))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정귀인
한자명
鄭貴人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5 ~ 1946
본적
전라남도 광양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 4. 1 전남(全南) 광양군(光陽郡) 인덕면(仁德面)에서 서경식(徐璟植) 박용래(朴龍來)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조선독립만세(朝鮮獨立萬歲)」기(旗)를 제작한 후 광양군(光陽郡) 광양면(光陽面) 읍내리(邑內里)에서 1,000여명의 군중등과 함께 만세시위를 펴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8월을 받은 공적(功績)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정성련
한자명
鄭星鍊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79 ~ 1923
본적
전라남도 광양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 3. 27 전남(全南) 광양군(光陽郡) 광양읍(光陽邑) 장터에서 미리 제작(製作)하여 준비(準備)한 태극기(太極旗)를 흔들며 독립만세’(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8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정순제
한자명
鄭淳悌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03 ~ 1946
본적
전라남도 광양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06

공적개요

1925년 전남지역의 각종 강연회에서 연사로서 활동하고 1926년 6월 9일 순종황제의 국장(國葬)을 맞아 시국담을 유포하였다가 10일간 구류되었으며 1926년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의 전라남도(全羅南道) 도간부(道幹部) 및 순천(順天)야체이카의 책임을 맡아 활동하다가 체포(逮捕)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정진무
한자명
鄭晋武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83 ~ 1960
본적
전라남도 광양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2005

공적개요

1925. 5. 16 제1차(次)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경상남도(慶尙南道) 밀양세포(密陽細胞)에 김완근(金完根), 신명준(辛命俊)과 함께 소속되어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確認)됨.

인물정보

성명
진신애
한자명
陳信愛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900 ~ 1930
본적
전라남도 광양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3.10 수피아여학교(須彼亞女學校) 교사(敎師)로 재직중(在職中) 박애순(朴愛順)과 같이 기숙 중(寄宿中)인 여학생(女學生)들에게 독립 정신(獨立精神)을 고취(鼓吹)시켜 수피아여학생(須彼亞女學生)들을 이끌고 광주(光州)장터로 나아가서 독립만세’(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며 활동(活動)하다가 일경(日警)에게 피체(被逮)되어 징역10월을 받았으나 미결기간(未決期間)을 합산(合算)하여 11월20일간의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최태주
한자명
崔泰周
운동계열
학생운동
생몰년도
1907 ~ 1964
본적
전라남도 무안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26. 11 광주학생 사건(光州學生事件) 당시 광주농교(光州農校) 재학생(在學生)으로 가담하여 활동중 체포되어 징역 8월 집행유예 5년의 형을 선고받고 주동자로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황순모
한자명
黃珣模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미상 ~ 1908
본적
전라남도 광양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08년 의병장으로서 전남 광양군(光陽郡) 등지에서 30여 명의 군사를 규합하여 전남 구례군(求禮郡) 및 경남 하동군(河東郡)의 의병들과 연계하여 전남 광양군(光陽郡)에서 일본인 3명을 살해하고 옥곡면(玉谷面)에서 일본군 참모본부 측량반원의 숙사(宿舍)를 습격하여 금품을 모집하는 등 활동하였으며 동년 10월 체포되자 취조 중 탈출을 기도하다가 피살(被殺) 순국함.

인물정보

성명
황원
한자명
黃瑗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70 ~ 1944
본적
전라남도 구례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0.9월 국권(國權)을 일제(日帝)에게 침탈 당(侵奪當)하자 실형(實兄) 매천(梅泉) 황현(黃玹)이 음독(飮毒) 순국(殉國)한 것을 일경(日警)들이 병사(病死)로 검진(檢診)하니 절의 신위(節義神位)를 모독 기만(冒瀆欺瞞)하려한다고 일경(日警)들을 질책(叱責)하여 바로잡게하고 서울의 고관대작(高官大爵)들에게 일제 풍물(日帝風物)과 작위(爵位)를 받았음을 풍자시(諷刺詩)로 경구(警句)하며 3.1독립만세시(獨立萬歲時)에는 구례군(求禮君) 주동자(主動者)를 배후 조종(背後操縱)하고 또한 신간회 가입(新幹會加入)을 조지(阻止)하려는 일경(日警)의 책동(策動)을 중지(中止)케 하였으며 창씨개명(創氏改名)을 반대(反對)하자 일제(日帝)가 직권(職權)으로 「황씨(黃氏)」로 창씨(創氏)한 것으로 제적상(除籍上)에 등재(登載)하니 민족 말살 정책(民族抹殺政策)을 통박(痛駁)하고 유시가훈(遺詩家訓)을 남겨놓고 마을 「연못」에 투신기세(投身棄世)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황채현
한자명
黃彩玹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8 ~ 1985
본적
전라남도 보성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24. 4월 상해임시정부 재무총장(上海臨時政府財務總長) 이시영(李始塋) 발행 독립공채를 가지고 군자금모집에 활동하다 일경에게 피체되어 1925. 11. 7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징역 1년형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황현
한자명
黃玹
운동계열
계몽운동
생몰년도
1855 ~ 1910
본적
전라남도 구례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1883년에 문명(文名)이 국내(國內)에 떨치더니 친일 고관(親日高官)들의 접근(接近)을 거절하고 시사(時事)가 점점(漸漸) 망(亡)하여감을 비감(悲感)하여 고종(高宗) 갑자 이후(甲子以後)의 정치와 시국의 진상을 직필(直筆)로 기록한 매천야록(梅泉野錄)을 남김 2. 1910년 합병후(合倂後) 유서를 남기고 동년(同年) 9월 10일 음독 순사(飮毒殉死)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