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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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 집
박상진(1884 - 1921)은 울산(蔚山) 사람이다. 전통적 유가(儒家)에서 성장한 그는 일찍이 한학을 수학하고 1902년에는 허위(許蔿)로부터 학문적 수업을 쌓았다. 그후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양정의숙(養正義塾)에서 법률과 경제를 전공했다. 1910년 판사(判事)시험에 합격한 그는 평양법원에 발령을 받았으나 사퇴하고 1911년 만주로 건너가 허겸(許兼)·손일민(孫逸民)·김대락(金大洛)·이상용(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의 지사들과 교류하며 독립투쟁의 방략을 모색하였다. 1912년 귀국한 그는 대구(大邱)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독립운동의 정보연락 및 재정적 지원을 목적한 것이었다. 당시 상덕태상회는 국내의 연락뿐 아니라 이관구(李觀求)가 설립한 만주 안동(安東)의 삼달양행(三達洋行)이나 장춘(長春)의 상원양행(尙元洋行)등 곡물상과 연락망을 구축하며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1915년 음력 1월 15일 대구 안일암(安逸庵)에서 독립군 지원단체인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결성하였다. 이때 조선국권회복단에 참여한 인사들은 주로 대구를 중심한 경상우도(慶尙右道) 지방의 중산층 이상의 혁신유림(革新儒林)들로서, 동단은 곡물상의 상업조직을 통하여 독립군을 지원한 구국경제활동단체였다. 그러나 동단의 인사들은 보다 강력한 독립군 단체를 조직할 목적으로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제휴하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하였고 그는 총사령(總司令)을 맡았다. 채기중(蔡基中)이 주도한 풍기광복단은 1913년에 조직된 독립군 단체로서 의병적 성격이 짙었고, 이때 국권회복단에서는 박상진 외에 김재열(金在烈)·정운일(鄭雲馹) 등 의병적 인물이 참여했다. 대한광복회는 혁명적 독립운동단체로서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실천강령을 정하고, 일본이 국제적으로 고립될 때 일제히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혁명의 거점으로는 국내 각처에 곡물상을 개설하는 한편 만주의 신흥학교(新興學校) 등과 연결하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한편 이에 필요한 자금은 자산가들의 의연금으로써 충당할 계획이었는데 친일부호들의 비협조로 의연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았으므로 강제모금의 방법을 택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1916년 무기구입을 위해 만주를 다녀오는 길에 서울에서 붙잡혀 1917년 4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군자금 수합에 더욱 힘을 쏟아 당시 식민적 지주체제에 안주하는 반민족적 친일부호를 처단하는 의협투쟁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그는 대한광복회 명의로 포고문을 작성하는 한편 친일부호 처단의 명령을 내려 채기중·유창순(庾昌淳)·강순필(姜順必)·임봉주(林鳳柱) 등으로 하여금 1917년 11월 경북 칠곡군(漆谷郡)의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케 했으며 1918년 1월에는 김한종(金漢鍾)·장두환(張斗煥) 등이 주관케 하여 충남 아산군(牙山郡) 도고면(道高面) 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였다. 이때 동단의 처단 고시문(告示文)을 붙였으므로 만천하에 대한광복회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일로 인하여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1918년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일경에 붙잡혔고, 사형을 선고받아 4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광복회 소개비
광복회소개비는 대한광복회의 설립과 활동 및 회원 목록을 알리는 사적이다. 대한광복회는 1915년 7월 대구에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이다. 한말의병 계열과 계몽운동 계열이 연합 결성한 단체로,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조직된 광복단과 1915년 대구에서 조직된 조선국권회복단이 중심이 되었다.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치하고 독립군을 양성해 독립을 쟁취하려 했다. 초기에는 군자금 모집 활동에 주력했으며 친일세력들을 처단하는 의협투쟁도 전개했다. 1918년 총사령관 박상진을 비롯한 5명이 사형선고를 받고 다수의 회원이 체포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국내 독립운동조직이던 대한광복회는 1920년대 광복단결사대와 주비단으로 계승되었다.
이우락 묘
이우락(1875 - 1951)은 울산(蔚山) 사람이다.1919년 세칭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에 참가하였을 뿐 아니라, 1926년 1월 제2차 유림단(儒林團) 사건인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1차 유림단 사건인 세칭 파리장서사건은 김복한(金福漢) 등의 호서유림과 곽종석(郭鍾錫) 등의 영남유림 137명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청원서를 보낸 활동으로써 명실상부한 유림의 항일운동이었다. 파리장서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일은 경북 상주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붙잡히는 바람에 발각되었다. 이우락은 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다. 그후 그는 김창숙의 참모(參謀)인 손후익(孫厚翼)으로부터 독립운동자금 모집활동을 도와달라는 청탁을 받고 이를 허락하였다. 당시 김창숙은 파리장서 사건 당시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내몽고(內蒙古) 지방의 미간지와 황무지 20만 정보를 매입하여 이상촌(理想村) 건설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즉 만주지역 한인들을 집결시켜 개간사업을 일으키고, 그 수익금으로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둔병식(屯兵式)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10년 동안의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계획에 필요한 군자금 모집을 위해 1925년 8월 국내로 돌아와, 경남북지역의 유림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1926년 1월 5일 경, 이우락은 경남 동래(東萊)의 오태환(吳泰煥) 등으로부터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던 중, 경북 경찰부 고등과 형사들에 의해 같은 해 3월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1년 여의 옥고를 치른 끝에 1927년 3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형법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재락 집
이재락(1886 - 1960)은 경상남도 울산(蔚山) 사람이다.1919년 광무황제의 인산(因山)에 참여하기 위하여 서울에 상경하였다가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인 울산으로 돌아와서 울산의 독립운동을 조직화하여 1919년 4월 8일 남창리(南倉里)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는데 주동적 활동을 하였다. 1925년 8월 김창숙(金昌淑)이 중국으로부터 비밀리에 입국하여 내몽고(內蒙古)지방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할 자금으로 20만원 모금을 목표로 활동할 때 이에 찬동하여 1차로 2백원을 1926년 1월경에 제공하고 2차로 8백원, 합계 1천원을 자진하여 군자금으로 제공하였다. 그러나 20만원 군자금 모금계획이 목표에 미달하자 1926년 3월 17일 경상남도 범어사(梵魚寺)에서 손후익(孫厚翼)·정수기(鄭守基) 등과 함께 밀의를 거듭하여 제2차 계획으로서 소액 응모한 부호들에게 거액 응모를 요구키로 결정하고 활동하다가 1926년 3월에 일경에 발각되어 붙잡혔다. 1927년 3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및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사 추모비
박상진(1884 - 1921)은 울산(蔚山) 사람이다. 전통적 유가(儒家)에서 성장한 그는 일찍이 한학을 수학하고 1902년에는 허위(許蔿)로부터 학문적 수업을 쌓았다. 그후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양정의숙(養正義塾)에서 법률과 경제를 전공했다. 1910년 판사(判事)시험에 합격한 그는 평양법원에 발령을 받았으나 사퇴하고 1911년 만주로 건너가 허겸(許兼)·손일민(孫逸民)·김대락(金大洛)·이상용(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의 지사들과 교류하며 독립투쟁의 방략을 모색하였다. 1912년 귀국한 그는 대구(大邱)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독립운동의 정보연락 및 재정적 지원을 목적한 것이었다. 당시 상덕태상회는 국내의 연락뿐 아니라 이관구(李觀求)가 설립한 만주 안동(安東)의 삼달양행(三達洋行)이나 장춘(長春)의 상원양행(尙元洋行)등 곡물상과 연락망을 구축하며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1915년 음력 1월 15일 대구 안일암(安逸庵)에서 독립군 지원단체인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결성하였다. 이때 조선국권회복단에 참여한 인사들은 주로 대구를 중심한 경상우도(慶尙右道) 지방의 중산층 이상의 혁신유림(革新儒林)들로서, 동단은 곡물상의 상업조직을 통하여 독립군을 지원한 구국경제활동단체였다. 그러나 동단의 인사들은 보다 강력한 독립군 단체를 조직할 목적으로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제휴하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하였고 그는 총사령(總司令)을 맡았다. 채기중(蔡基中)이 주도한 풍기광복단은 1913년에 조직된 독립군 단체로서 의병적 성격이 짙었고, 이때 국권회복단에서는 박상진 외에 김재열(金在烈)·정운일(鄭雲馹) 등 의병적 인물이 참여했다. 대한광복회는 혁명적 독립운동단체로서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실천강령을 정하고, 일본이 국제적으로 고립될 때 일제히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혁명의 거점으로는 국내 각처에 곡물상을 개설하는 한편 만주의 신흥학교(新興學校) 등과 연결하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한편 이에 필요한 자금은 자산가들의 의연금으로써 충당할 계획이었는데 친일부호들의 비협조로 의연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았으므로 강제모금의 방법을 택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1916년 무기구입을 위해 만주를 다녀오는 길에 서울에서 붙잡혀 1917년 4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군자금 수합에 더욱 힘을 쏟아 당시 식민적 지주체제에 안주하는 반민족적 친일부호를 처단하는 의협투쟁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그는 대한광복회 명의로 포고문을 작성하는 한편 친일부호 처단의 명령을 내려 채기중·유창순(庾昌淳)·강순필(姜順必)·임봉주(林鳳柱) 등으로 하여금 1917년 11월 경북 칠곡군(漆谷郡)의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케 했으며 1918년 1월에는 김한종(金漢鍾)·장두환(張斗煥) 등이 주관케 하여 충남 아산군(牙山郡) 도고면(道高面) 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였다. 이때 동단의 처단 고시문(告示文)을 붙였으므로 만천하에 대한광복회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일로 인하여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1918년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일경에 붙잡혔고, 사형을 선고받아 4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상진 추모비
박상진(1884 - 1921)은 울산(蔚山) 사람이다. 전통적 유가(儒家)에서 성장한 그는 일찍이 한학을 수학하고 1902년에는 허위(許蔿)로부터 학문적 수업을 쌓았다. 그후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양정의숙(養正義塾)에서 법률과 경제를 전공했다. 1910년 판사(判事)시험에 합격한 그는 평양법원에 발령을 받았으나 사퇴하고 1911년 만주로 건너가 허겸(許兼)·손일민(孫逸民)·김대락(金大洛)·이상용(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의 지사들과 교류하며 독립투쟁의 방략을 모색하였다. 1912년 귀국한 그는 대구(大邱)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독립운동의 정보연락 및 재정적 지원을 목적한 것이었다. 당시 상덕태상회는 국내의 연락뿐 아니라 이관구(李觀求)가 설립한 만주 안동(安東)의 삼달양행(三達洋行)이나 장춘(長春)의 상원양행(尙元洋行)등 곡물상과 연락망을 구축하며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1915년 음력 1월 15일 대구 안일암(安逸庵)에서 독립군 지원단체인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결성하였다. 이때 조선국권회복단에 참여한 인사들은 주로 대구를 중심한 경상우도(慶尙右道) 지방의 중산층 이상의 혁신유림(革新儒林)들로서, 동단은 곡물상의 상업조직을 통하여 독립군을 지원한 구국경제활동단체였다. 그러나 동단의 인사들은 보다 강력한 독립군 단체를 조직할 목적으로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제휴하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하였고 그는 총사령(總司令)을 맡았다. 채기중(蔡基中)이 주도한 풍기광복단은 1913년에 조직된 독립군 단체로서 의병적 성격이 짙었고, 이때 국권회복단에서는 박상진 외에 김재열(金在烈)·정운일(鄭雲馹) 등 의병적 인물이 참여했다. 대한광복회는 혁명적 독립운동단체로서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실천강령을 정하고, 일본이 국제적으로 고립될 때 일제히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혁명의 거점으로는 국내 각처에 곡물상을 개설하는 한편 만주의 신흥학교(新興學校) 등과 연결하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한편 이에 필요한 자금은 자산가들의 의연금으로써 충당할 계획이었는데 친일부호들의 비협조로 의연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았으므로 강제모금의 방법을 택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1916년 무기구입을 위해 만주를 다녀오는 길에 서울에서 붙잡혀 1917년 4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군자금 수합에 더욱 힘을 쏟아 당시 식민적 지주체제에 안주하는 반민족적 친일부호를 처단하는 의협투쟁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그는 대한광복회 명의로 포고문을 작성하는 한편 친일부호 처단의 명령을 내려 채기중·유창순(庾昌淳)·강순필(姜順必)·임봉주(林鳳柱) 등으로 하여금 1917년 11월 경북 칠곡군(漆谷郡)의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케 했으며 1918년 1월에는 김한종(金漢鍾)·장두환(張斗煥) 등이 주관케 하여 충남 아산군(牙山郡) 도고면(道高面) 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였다. 이때 동단의 처단 고시문(告示文)을 붙였으므로 만천하에 대한광복회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일로 인하여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1918년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일경에 붙잡혔고, 사형을 선고받아 4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유경근 묘
유경근(1877 - 1956)은 경기 강화(江華) 사람이다. 1919년 3월 18일 경기도 강화군(江華郡) 부내면(府內面)에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때 주모자 색출시 서울로 피신하였다가 붙잡혔으나 일신상의 문제로 보석되었다. 그후 노령(露領) 해삼위 신한촌(海蔘威新韓村)에서 이동휘(李東輝)로부터 독립군양성을 위해 국내지원자를 모집하라는 지령을 받아 김현구(金鉉九)와 함께 여러명의 청년을 모집하여 입대시켰다. 또한 임정의 연통제(聯通制) 조직 및 대동단(大同團) 조직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20년 8월 만주광복군총영(滿洲光復軍總營)으로부터 미국의원단의 내한을 계기로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알려주기 위하여 일제기관 등의 파괴용 폭탄과 육혈포 등을 결사대장 김영철(金榮喆)이 가지고 와서 유경근의 집에 보관케한 사실이 일경에게 탐지되어 붙잡혔다. 그리하여 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 강화군(江華郡)에서 광명학교(光明學校)를 설립하고 청소년교육에 힘썼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백범 광장
김구(1876~1949)는 황해도 해주목 출신이다.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1세대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안창호, 이승만 등과 함께 지도자 출신 중 최순위권에 손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동학 농민 혁명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직접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령,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겸 내무장, 재무장, 군무장을 거쳐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5년까지 주석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 이후에는 본인은 반공주의자였지만 남북 분단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는 반대하면서 통일론을 포기하지 않다가 1949년에 서울 경교장에서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최고 명예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곽낙원(1859 - 1939)은 김구의 어머니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후원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 독립운동가이다. 곽낙원은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살면서 지역과 신분에 대한 차별의식을 갖게 되었다. 김구를 낳기 전까지 남편에 대한 애정도 삶의 희망도 별로 없이 김구를 공부시켜 출세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꿈이었다. 그러나 김구가 동학에 입도하면서 곽낙원도 반일감정이 싹텄으며, 치하포사건으로 반일의식이 성장하였다. 치하포사건이란 김구가 명성황후의 시해를 복수하고자 1896년 3월 황해도 안악의 치하포에서 일본인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죽인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김구가 감옥에 있을 때 곽낙원은 남편 김순영(金淳永)과 함께 옥바라지를 하였다. 그 뒤 1911년에 김구가 신민회(新民會)에 연루되어 다시 15년형을 받자 구명운동을 했으나 여의치 않자 항일의식도 더욱 커졌다. 한편 곽낙원은 며느리 최준례의 영향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 김구를 따라 기독교에 귀의하였다. 이에 평안도, 황해도 지역 기독교인들의 반일민족 사상에도 적잖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곽낙원은 1922년 김구가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함께 지냈다. 그러나 며느리가 일찍 병사하자 곽낙원은 1925년 12월에 다시 안악으로 돌아와 손자들을 돌보며, 생활비를 절약하여 김구에게 송금하는 등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일경의 감시를 피해 1934년 3월 다시 손자 둘을 데리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 도착한 후 장손 김인을 군관학교에 입교시키는 한편,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에서 군사훈련중인 청년 20여명을 돌보는 등 고락을 함께하였다. 제때 식사를 잇지 못할 정도의 곤핍한 생활 속에서도 생활비를 아끼고 생신축하금으로 단총 2정을 구입, 독립운동에 쓰도록 하는 등 별세하기까지 김구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또한 청년들에게 “오늘 신문 읽었나? 왜놈이 또 어데까지 밀고 들어 왔나? 비행기 공습이 심하다지” 등 전황에 깊은 관심을 표했다. 때문에 청년들은 중일전쟁의 전세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팔순 잔치 대신 총보다는 붓으로 일본과 싸우라는 의미에서 50자루의 만년필을 사서 청년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언제나 독립 의지가 꺾이지 않도록 사기를 북돋아 주었던 것이다. 곽낙원은 언제나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사고를 가지고, 임시정부내에서 어른으로서,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해냈다. 손자를 고아원에 맡겨야 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울 때는 변절한 독립운동가의 가정을 부러워한 적도 있었으나, 독립에 대한 희망은 버리지 않았으며, 김구와 임정의 독립운동을 한결 같이 지지, 격려하였다. 노년에는 항상 구국기도와 찬송가를 부르면서 어려운 일상을 이겨나갔다. 1939년 4월 26일 평생소원이던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중국 쓰촨성[四川省] 충칭[重慶]에서 병사하였다.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항일독립운동기념비(서구)
이 기념비는 순국선열과 독립지사들의 넋을 위로하고 숭고한 나라사랑을 계승하기 위해 건립했다. 가로 2m 45cm, 높이 2m로 2개의 형태로 좌측의 조형물은 광복에 대한 염원으로 이루어진 산을 표현했으며, 우측은 국권 회복과 항일투쟁을 위해 희생하여 되찾은 산하를 의미한다. 기념비 뒤에는 서구 독립운동가 2명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바로 ‘심영택’과 ‘유완무’ 선생이다. 심영택 선생은 당하동 광명마을 출신으로 1920년 주비단을 조직하고, 초대 사령관을 맡았다. 유완무 선생은 시천동에서 태어나 치하포 사건으로 인천감리서에 수감된 김구 선생을 구출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으며, 간도의 지리서 〈북여요선〉 간행을 주도했다. 그 밖에도 서구에서 태어난 많은 독립운동가를 확인할 수 있다.
이호승 공적기념비
이호승(1878 - 1939)은 1920년대 초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호승은 상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1922년 4월, 국내로 들어와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원 윤응념(尹應念)을 만나 이듬해 초부터 함께 행동하였다. 그는 윤응념·윤도중(尹度重) 등과 함께 1923년 1월 26일 오후 9시경 부천군 계남면 대응절리에 사는 박주순(朴周淳) 집에 가서 군자금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주인이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박종현(朴鍾賢)·김하열(金夏烈) 등을 찾아가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이들 또한 가난하여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3월 28일, 이호승은 동지 7명과 함께 부천군 대부면 북일리에 가서 김규환(金圭煥)에게 360원, 면장 김종원(金鍾元)으로부터 120원을 모금하고, 김달원(金達元)으로부터 3,000원의 출금계약서를 받았다. 모금한 돈으로 윤응념은 상해와의 교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350원으로 배 한 척을 구입하였다. 1923년 5월경 이를 탐지한 경기도 경찰부에 이호승을 포함 동지 9명이 체포당하였다. 이호승은 1923년 9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강도죄로 징역 5년을 받았으나 1924년 1월 26일 징역 3년 9월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윤식 시비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 65-25 군립도서관 앞에 위치한 영랑 김윤식 시인의 시비이다. 영랑 김윤식(1902-1950)은 1902년 12월 18일 강진읍 남성리 김종호의 장남으로 태어나 향리에서 보통교육을 마치고 취문의숙을 거쳐 1919년 강진독립만세운동으로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뤘다. 그후 일본 청산학원 재학 중 동경재지진으로 귀향하여 박용철, 정지용과 시문학지를 간행하여 한국순수 서정시의 개척자로써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시와 같은 불후의 업적을 남겼으며 영랑시집과 영랑시선은 사계의 지표가 되었다. 1948년 한국문총 사무국장과 공보처 출판국장을 역임했고 1950년 9월 29일 당년 49세로 서거하였다. 2018년 정부에서는 김윤식을 건국포장에 추서하였다.
김윤식 집(영랑생가)
영랑 김윤식(1902-1950)은 1902년 12월 18일 강진읍 남성리 김종호의 장남으로 태어나 향리에서 보통교육을 마치고 취문의숙을 거쳐 1919년 강진독립만세운동으로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뤘다. 그후 일본 청산학원 재학 중 동경재지진으로 귀향하여 박용철, 정지용과 시문학지를 간행하여 한국순수 서정시의 개척자로써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시와 같은 불후의 업적을 남겼으며 영랑시집과 영랑시선은 사계의 지표가 되었다. 김윤식은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숨겨서 강진으로 내려왔다. 김현상(金炫庠) 등과 정세를 논의하였다. 이후 3월 23일 밤 김현균의 집에서 김현상을 비롯해 김성수(金晟洙) 등과 함께 강진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하지만 3월 26일 이들의 준비와 계획이 강진경찰서(康津警察署)에 발각되어,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5일 광주지방법원(光州地方法院)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해 공소(控所)를 제기하였다. 5월 5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무죄(無罪)’를 선고받았다. 그러자 검사 측에서 다시 상고(上告)를 제기하였다. 6월 9일 서울 고등법원(高等法院)에서 기각되어 무죄가 확정되었다. 이후 1930년대에 「독(毒)을 차고」·「가야금」·「달마지」·「춘향」 등 다수의 민족적인 시(詩)를 발표하여 저항의식을 표출하였다. 2018년 정부에서는 김윤식을 건국포장에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