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국내항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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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운정 표지석
취운정은 1870년대 중반 민태호閔台鎬(1834~1884)가 지은 정자이다. 유길준兪吉濬(1856~1914)이 이곳에 유폐되어 「서유견문」을 집필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의 회합장소로도 이용되었다.1919년 4월 강택진은 외교·언론·선전을 통한 독립 방안을 모색하였고, 그 과정에서 현정근(玄貞根)을 만나 운동자금 200원을 제공해 주었다. 1920년 10월 서울 가회동 취운정(翠雲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연통제 기관으로 조선13도총간부를 조직하고, 교섭부를 맡아 경상북도에서 애국금 3,000원을 모금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냈다.
형평사 동판
형평사는 1923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백정(白丁)들의 신분 해방을 위해 설립된 사회운동단체이며, 1930년대까지 활동하였고, 이들 중 일부는 사회주의사상을 수용하기도 했다. 형평사의 설립목적은 계급을 타파하고 백정에 대한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여 백정도 참다운 인간으로 인정받도록 하고자 함이었다. 개항 이후 자유평등사상이 유입되고, 부분적이나마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한 백정들이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백정들은 여전히 사회적으로 신분 차별의 대상이었는데, 1922년 일본의 특수부락민인 에다[穢多: 屠者]가 신분해방단체인 수평사(水平社)를 조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백정들은 자녀들의 입학거부문제를 계기로 1923년 4월 25일 경남 진주에서 신분 해방을 목표로 한 형평사를 창립했다. 창립총회에서 형평사취지서 · 사칙 · 세칙을 채택하고 위원을 선출하였다. 사칙(社則)에 따르면, 진주에 본사(本社)를, 각 도에 지사(支社)를, 군에 분사(分社)를 두며, 형평사의 창립을 주도한 진주 백정 이학찬(李學贊)과 신현수(申鉉壽) · 강상호(姜相鎬) · 천석구(千錫九) · 장지필(張志弼)이 위원에 선임되었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 여기에 호응해 지사와 분사가 활발히 설치되었다. 창립 1년 만에 전국적으로 지사 12개, 분사 64개가 조직되었다. 1924년 2월 부산에서 전국의 지사 · 분사 대표 330여 명이 참가한 형평사 전조선임시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본사의 서울 이전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결론을 짓지 못하고 다음 총회로 넘겨졌다. 그런데 이전을 주장한 장지필 · 오성환(吳成煥) 등이 중심이 되어 같은 해 4월 대전에서 형평사 혁신동맹을 결성하고 본부를 서울에 설치하였다. 같은 날 진주에서도 진주 본사가 주최하는 전국형평사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렇게 분열되는 과정에서 본사 이전 문제를 두고 갈등이 표면화되었지만, 실제 원인은 운동방법을 둘러싼 노선상의 대립이었다. 혁신동맹측이 사회주의적 노선을 지향하려 한 반면, 진주 본사측은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양파는 통합을 위한 교섭을 시작해 같은 해 8월 대전에서 형평사통일대회를 개최했다. 여기서 양파는 각자의 조직을 해체하는 동시에 조선형평사중앙총본부를 결성하고 서울에 본부를 두기로 하였다. 이 무렵부터 지방에서 형평청년회 · 형평학우동맹 등이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대회 후 진주 본사측은 대전대회의 불승인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양파간에 다시 교섭이 진행되어 다음 해인 1925년 4월 양파가 합동으로 서울에서 전조선형평대회를 개최하여 통합이 이루어졌다. 그 뒤 조직은 더욱 확대되어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한편, 이 대회에서 다른 사회운동과의 연계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당분간은 내부 결속에만 주력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지방의 형평 청년들은 개인자격으로 또는 형평청년회 단위로 청년운동단체에 가입해 다른 사회운동에 접근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1926년에 접어들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1927년 4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5차 형평사대회에서는 단체의 명칭을 조선형평사총본부로 바꾸었다. 1928년 4월 제6차 정기총회에서는 각지의 청년회를 해체하고 사내에 청년부를 두기로 결의하였다. 이 때 일반 사회단체와 제휴하여 합리적 사회건설을 기한다는 등의 청년부 강령을 채택하였다. 이 무렵부터 다른 사회운동과의 제휴문제를 둘러싸고 제휴를 주장하는 임평산(林平山) · 심상욱(沈相昱) · 이종률(李鍾律)을 중심으로 한 신파와 전통적인 균등운동을 계속하자는 장지필 · 김종택(金鍾澤) · 길순오(吉淳吾) 등을 중심으로 한 구파간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이는 1929년 제7차 정기대회에서 표면화되었다. 1929년 말부터 1932년에 이르기까지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학생·노동자·농민들이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대중투쟁에 진출하면서 형평사 내에서도 기존의 조직을 해소하고 혁명을 준비하기 위한 조직을 재결성해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형평사는 1931년의 해소 논쟁과 1933년의 일명 ‘형평청년전위동맹사건’을 겪으면서 그 세력이 급격히 퇴조하였다. 이후 형평사는 경제적인 친목이익단체로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35년 4월에 일제의 식민통치에 영합하는 단체인 대동사(大同社)로 전락하였다.
신흥대학 표지석
1909년 신민회(新民會)는 만주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로 하고 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장유순(張裕淳) 등을 기지 건설지 답사를 위해 만주에 파견하였다. 1910년 7월 이들은 남만주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柳河縣三源堡鄒家街)에 우선 정착하였다. 그 뒤 토착민의 배척이 심해 일상생활에 지장을 많이 받았으나, 1911년 봄 한인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국내에서 모여드는 청년들에게 구국이념과 항일정신을 고취시켜 조국광복의 중견간부로 양성시킬 목적으로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었다. 소장 이동녕, 교관 김창환(金昌煥)·남상복(南相復)·이장녕(李章寧)·이세영(李世永) 등에 의해 운영되어, 1911년 4월 제1기 졸업생 변영태(卞榮泰)·성준용(成駿用)·김련(金鍊) 등 유수한 애국 청년 40여 명을 배출하였다.삼원보는 교통이 번잡하고 국제적 이목을 받기 쉬운 곳이라 판단하고, 인적이 드문 벽지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모아짐에 따라 통화현(通化縣) 제6구 합니하(哈泥河)로 옮기게 되었다.강습소의 본관 건물을 세우기 위해서는 광활한 토지를 매수해야 하는 등 막대한 경비와 인력이 필요했다. 이에 이석영(李石榮) 소유의 전답(6,000석)을 매각한 돈으로 경비를 충당했고, 아울러 선생과 학생들의 노동력이 합쳐져 마침내 신흥강습소를 준공할 수 있었다. 본관이 낙성된 뒤, 1913년 신흥중학교로 개칭하고 중학반과 군사반을 두었다가 중학반은 폐지하여 지방중학에 인계하고 군사반만 전력하였다. 그런데 각지 애국 청장년들이 모여들면서 전부 수용할 수 없게 되자, 1919년 유하현 제3구 고산자가(孤山子街)로 이전함과 동시에 신흥중학교를 점진적으로 폐교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신흥무관학교의 설립 이후의 행보가 순탄치만은 않았다. 학교가 설립된 다음해부터 2년간 지속된 대흉작, 지방색에 의한 윤치국(尹致國) 학생 피살 사건, 마적에 의한 중견간부 윤기섭 등 납치 사건 등이 연이어 발생하였다. 이에 실망한 이시영은 봉천으로, 이동녕은 러시아령으로 가는 바람에 권위 있는 독립투사 양성기관이자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던 신흥무관학교는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절망 속에서도 윤기섭·김창환·여준(呂準) 등의 굴하지 않는 기백과 인종(忍從)으로 각 촌락을 전전하면서 구걸을 하여 학생들의 굶주림을 달래며 학교의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3·1운동 이후 수많은 우국지사들이 해외로 망명하였는데, 이들은 특히 만주에서 무력항일투쟁을 벌려나갔다. 이때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육군 중위 지청천(池靑天), 윈난(雲南)사관학교 출신 이범석(李範奭) 등 유수한 무관들이 들어오면서 입학을 지원하는 학생들이 날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일제의 가중되는 탄압과 잇단 사고 등으로 1920년 가을 폐교되고 말았다. 폐교된 그 날 지청천은 사관생도 300명을 인솔하고 백두산지역 안도현(安圖縣) 삼림지대로 들어가 홍범도(洪範圖)의 부대와 연합하였다. 김좌진부대의 뒤를 따라 밀산(密山)에 도착하여 대한독립군단 결성에 참가하였다.
스코필드 기념관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는 1889년 영국 워릭셔(Warwickshire) 럭비(Rugby)에서 태어났다. 런던 할리(Harley)칼리지와 쿠퍼스(Coopers)스쿨에서 공부하였다. 고등학교 과정까지 영국에서 마치고 농장 노동자로 일하였다. 1907년 홀로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하여 농장에서 일하면서 토론토대학교 온타리오 수의과대학에 들어가 세균학을 전공하였고, 1911년 세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13년 피아노를 전공한 앨리스와 결혼하였다. 1914년부터 모교인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온타리오 수의과대학에서 세균학 강사로 재직하였다.1916년 11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올리버 알 애비슨(Oliver R. Avison)의 초청과 권고로 아내와 함께 한국에 오게 되었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교수가 되어 세균학, 위생학을 강의하였다. 1917년 선교사 자격 획득을 위한 한국어 시험에 합격하였고, 영어성경반을 조직해 한국인 남녀 학생들에게 영어와 인품 교육을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 준비 때 민족 대표의 한 사람인 이갑성(李甲成)과 비밀리에 만나 민족 거사를 위한 해외 정세 파악과 홍보 임무를 맡고 3.1운동 발발 때 서울 일대의 만세 시위 현장을 사진 촬영하고 이를 전 세계로 확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1919년 4월 5일 경기도 수원군 장안면 수천리[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수촌리], 4월 15일 수원군 향남면[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서 일본 경찰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한국인들이 학살되고 한국인 마을이 소실되는 참상을 듣고 4월 18일 직접 현장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현장을 답사한 기록을 「제암리 학살 만행 보고서」라는 제목으로 캐나다 선교본부에 보내 일본의 학살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다. 1919년 5월 서대문형무소의 여자 감방을 심방하고 일본의 비인도적인 만행을 중지할 것을 호소했고 『서울프레스(The Seoul Press)』에 일본의 행위를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이후 ‘수촌리 학살 만행’, ‘한국에서 일본의 개혁’, ‘한국에서 행해지는 일본의 고문’ 등의 글을 『The Japan Advertiser(재팬 애드버타이저)』, 『The Presbyterian Witness(프레스비테리안 위트니스)』, 『The Globe(글로브)』, 『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 등지에 기고하며 일본의 식민 통치를 규탄하였다. 1920년 4월 일본의 추방 압력으로 한국을 떠나 5월 캐나다에 정착한 후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선전 홍보를 계속하였다. 1958년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뒤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에서 수의병리학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이후 한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후학을 양성하며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조언과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1970년 4월 12일 81세로 별세하였다. 그의 장례는 4월 16일 광복회 주최의 사회장으로 엄숙히 거행되었다. 유해는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박자혜 산파 터 표석
박자혜(1895-1943)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신채호와 결혼하여 항일투쟁활동을 지원한 독립운동가이자 간호사이다. 1895년 12월 11일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중인 출신의 박원순이다. 어린 나이에 궁궐의 견습 나인으로 입궁하였으나 일제 강점으로 조선왕조가 망하면서 궁에서 나오게 되었다. 1911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기예과에 입학하여 1914년 졸업하였다. 1915년에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 간호부과에 입학하여 1916년 졸업하였다. 1917년부터 조선총독부의원 간호부로 근무하였다. 1919년 3 · 1만세운동 당시 많은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박자혜는 일제의 기관에서 일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이에 간우회(看友會)를 조직, 동료 간호부들과 만세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더 이상 국내에서 활동하기 어렵게 되자 중국으로 떠났다. 베이징에서 박자혜는 연경대학 의예과에 입학하였다. 1920년에 15세 연상인 독립운동가 신채호와 결혼하였다. 이듬해 아들을 낳고, 다시 1922년 임신을 하였으나 경제적 궁핍으로 아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이후 박자혜는 서울 인사동에 ‘박자혜 산파’를 개원하여 생계를 유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이 출산을 산파에게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활이 매우 궁핍하였다. 이에 풀장사, 참외장사 등 노점상도 하였다. 그러면서 자녀를 기르고, 중국에 있는 신채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국내 지사들과의 연락이나, 해외에서 밀입국하여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 1926년에는 나석주(羅錫疇)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을 지원하였다. 1927년 신채호와 베이징에서 재회하여 둘째 아들을 임신, 출산하였다. 1928년 신채호가 일경에게 체포되니 책, 옷 등을 구입해 보내주며 옥바라지를 하였다. 1936년 신채호가 옥사한 뒤 첫째 아들 신수범은 한성상업학교〔현 한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외로 떠났으며, 둘째 아들 신두범은 1942년 영양실조로 사망하였다. 박자혜는 홀로 셋방에 살다가 1943년 10월 16일 병고로 세상을 떠났다. 1990년에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신간회본부 표지석
1920년대∼30년대 민족해방운동은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두 흐름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런데 두 흐름은 민족운동의 이념, 방법, 주도세력 등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의 민족협동전선으로 창립된 것이 신간회였다. 1927년 2월부터 1931년 5월까지 존속한 신간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적으로 120∼150여 개의 지회를 가지고 있었으며 2만∼4만 명에 이른 일제하 가장 규모가 컸던 반일사회운동단체였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을 계기로 일어난 6·10만세운동에 자극받아 국내에 있는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공산주의자 간의 타협에 의해 민족유일당운동으로 조직되었다. 1927년 3월 회장 이상재가 죽자 부회장 권동진이 그 뒤를 이어 통수 체계에는 변함이 없었다. 신간회에서는 민족, 자주, 독립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국내외에 지회를 설치하기로 하고, 먼저 일본 동경에 지회를 설치하여 지회장에 조헌영(趙憲泳)을 임명하였다. 7월 10일에는 서울 지회를 설치, 지회장에 한용운(韓龍雲)을 임명하였다. 이와 같이 활발히 지회를 두어 1928년 말에는 국내외에 143개의 지회와 3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 이렇게 기하 급수적으로 조직이 커지자 위협을 느낀 일제는 서서히 신간회를 탄압하기 시작해, 한번도 대규모의 전체 대회를 승인하지 않았다. 이에 본부에서는 궁여지책으로 전국복대표자대회(全國複代表者大會)를 소집하여 전체 대회를 대행하였다. 1929년 7월 1일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열린 이 대회에는 그 동안 기선을 제압당했던 사회·공산주의 진영에서 회칙 개정을 요구하며 대거 참여하였다. 그 골자는 간사제를 폐지하고, 대신 집행위원제로 중앙의 권한을 학대시키자는 것이었다. 그 결과 허헌(許憲)이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고, 좌익계의 중앙집행위원 45명과 중앙검사위원 10여 명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서울지회장에 선출된 조병옥(趙炳玉)이 허헌 위원장의 취임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광주·목포 등의 지회가 여기에 참여하였다. 좌우익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도 투쟁 목표는 뚜렷했는데, 이는 구호와 실천 강령 등에서도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파벌·족보주의의 배격과 동양척식주식회사, 기타 이민을 강력히 반대하며 재만 동포의 구제도 역설하였다. 근검 절약과 민족혼을 되찾아 우리의 얼이 건재하다는 걸 국내외에 과시하는 것만이 우리 민족의 살길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또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함과 동시에 학생운동의 탄압을 엄중 항의하였으나 일제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이에 이 운동을 전국적인 항쟁으로 확대, 파급시키기 위해, 광주에 다녀온 김병로(金炳魯)의 건의에 따라 서울에서 광주실정보고민중대회를 열고 그 부당성을 규탄하기로 하였다. 1929년 12월 13일을 개최일로 잡고, 권동진·한용운·조병옥·송진우(宋鎭禹)·홍명희(洪命熹)·이관용(李灌鎔)·김항규(金恒奎)·주요한(朱耀翰)·이원혁(李源赫) 등 관계자가 이관용의 집에 모여 민중선언서를 발표하고 대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일본 경찰은 민중대회 중지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조병옥·김무삼(金茂森, 일명 金東駿)·권동진 등 44명과 근우회(槿友會) 간부 등 40명을 연행·구속하였다. 그 가운데 조병옥 등 6명은 실형 선고를 받고 복역 중 1930년 2월 석방되었다. 김병로는 즉시 석방되어 신간회 재건운동에 힘써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창립 당시부터 좌우익 간의 갈등·대립으로 분란이 계속되던 신간회는, 1931년 5월 16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 대의원 77명이 참석한 가운데 해소대회를 열고 해산을 결의, 창립된 지 만 4년 만에 막을 내렸다.
베델 집
베델(1872~1909) 1904년부터 1909년까지 대한제국에서 활동한 영국 언론인이다. 코리아 데일리 뉴스와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일제의 부당한 행위를 비판하는 글과 사진을 보도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언론을 통한 그의 반일적 행동은 일제의 미움을 샀고 통감부는 주한 영국영사관에 강력한 항의를 하게 된다. 그 결과 베델은 두 차례에 걸쳐 영사관 재판을 받고 상하이에 있던 영국영사관 형무소에 이송되어 옥고를 치렀다. 서울에 돌아온 이후에도 일제는 베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견제했다. 이를 견디다 못한 그의 건강은 악화되고 말았고 결국 1909년 5월 1일 3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게 되었다. 그의 시신은 양화진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1950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대한제국군 서울시가전투지
대한제국군 서울시가전투지는 1907년 대한제국 군인들이 일제의 강제적인 군대 해산에 항거했던 곳이다. 일제는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킨 데 이어 1907년 8월 1일 군대마저도 강제 해산시켰다. 군인들의 무장봉기는 군대해산식 당일 시위 보병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이 군대 해산에 반대하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으로 자결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8월 1일 오전 8시경 장병들이 무장해제된 상태로 군대 해산식이 거행되는 훈련원으로 출발하려 할 즈음 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하자, 격분한 장병들은 탄약과 무기를 탈취해 무장을 하고 병영 주위에 초병을 배치한 뒤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였다. 서소문 일대에서 총성이 울려 퍼지자 숭례문 안에 있던 시위 보병 제2연대 제1대대의 병사들도 호응하여 무장을 하고 일본군을 향해 사격을 개시하였다. 한국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힌 일본군은 9시 30분 보병 제51연대 제3대대 전 병력과 제1·2대대의 응원병력을 투입하는 한편, 숭례문 성벽 위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막강한 화력과 숫자의 열세를 이기지 못한 한국군은 결국 10시 50분경 남대문 병영을 점령당한 데 이어 11시 40분경 서소문 병영마저 점령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두 병영에서 퇴각한 한국군의 일부는 서소문밖 고지 일대를 배경으로 저항을 계속 했고, 각지로 흩어져 의병진에 합류함으로써 의병전쟁으로 발전한 정미의병의 기초를 놓고 의병의 전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길용 흉상
이길용(1899-미상)의 호는 파하, 월강이며,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체육기자, 조선일보 기자 등을 역임한 언론인이다. 어릴 때 아버지가 인천으로 생활 근거지를 옮김에 따라 인천에서 영화학교(永和學校)를 마쳤다. 1916년배재학당(培材學堂)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지샤대학(同志社大學)에서 공부하였으나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 1918년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철도국에서 근무하던 중 1919년 3·1독립선언서와 임시정부의 기밀문서를 철도편으로 운송하는 책임을 맡아 활동하다 발각되어 3년간 복역하였다. 그 뒤 출감하여 동아일보 사장이던 송진우(宋鎭禹)의 권고로 동아일보 체육기자로 활약하였다. 1923년부터 매년 개최되는 전조선여자정구대회를 전담, 주관하였다. 한때는 심판을 보기도 하였으며, 1932년에는 『신동아』에 「여자정구 10년사」를 연재하였다. 1924년 11월 조선체육회 실무위원이 되었으며, 1925년 제1회 전조선축구선수권대회 임원, 전조선중학교 농구선수권대회 위원 등을 지냈다. 1924년 조선일보로 이적했다가 1927년송진우의 간곡한 부름을 받고 동아일보로 다시 돌아와 체육 발전에 헌신하였으며, 다른 신문사 기자들과 뜻을 모아 1927년 8월서울영금정(令今亭)에서 조선운동기자단(朝鮮運動記者團)을 조직하여 운동경기의 전문화에 기여하였다. 1932년 8월 로스엔젤레스올림픽에 출전한 김은배(金恩培)와 권태하(權泰夏) 선수가 골인하는 사진에서 가슴의 일장기를 없애 버렸고, 1936년 8월『동아일보』에 「名譽의 우리 孫君 世界制覇의 凱歌」라는 제목 아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시상식 사진에서도 일장기를 없앴으며, 『신동아』에 실린 사진에도 일장기가 지워졌다. 이 사건으로 사직당하고 『동아일보』는 정간되었으며, 『신동아』는 폐간되었다. 그 뒤 네 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르고 광복이 되자 조선체육동지회 결성에 적극 참여하였고, 그 결과 조선체육회(현재 대한체육회)를 부활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1945년 조선체육회 상무이사로 선임되었고, 이듬해『동아일보』가 복간되자 사업부 차장으로 복직하였다. 1948년 정부수립 후 서울특별시 고문, 이화여자대학교 이사, 국민당 중앙당 상임위원 등의 사회활동을 하였다. 1949년 10월 대한체육회 공로상을 받았으며, 체육사를 정리하여 『체육연감』과 『대한체육사』가 발간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며, 1989년 한국체육기자연맹에서는 이길용체육기자상을 제정, 매년 수여하고 있다. 1990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이회영, 이시영 6형제 집
이회영(1867-1932)의 호는 우당이며, 일제강점기 신민회 중앙위원, 항일구국연맹 의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07년 2월 귀국한 안창호(安昌浩)를 중심으로 4월경 이갑(李甲)·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이동녕(李東寧)·신채호(申采浩) 등과 같이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정치·경제·교육·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활약하였다. 한편,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할 것을 협의하여 간도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이상설(李相卨)을 책임자로 하여금 교포 교육에 주력하도록 하였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릴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이 특사로 파견되자 서전서숙의 경영을 위해 여준(呂準)을 만주로 파견하였다. 그 뒤 1908년 헤이그에서 돌아온 이상설을 만나기 위해 만주로 찾아가서 앞으로의 진로를 협의한 끝에 국외활동은 이상설이, 국내활동은 자신이 담당하기로 협의하고 귀국하였다. 우선 교육진흥운동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판단, 동지들을 각 학교에 파견하여 교육에 진력하도록 하고, 자신도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학감으로 취임, 교육사업에 진력하였다. 1909년 봄 양기탁의 집에서 김구(金九)·이동녕·주진수(朱鎭洙)·안태국(安泰國)·이승훈(李昇薰) 등과 비밀리에 신민회간부회의를 소집하고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것을 결의,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를 후보지로 결정하였다.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의해 강탈당하자 전가족이 만주로 건너가 황무지를 개간하며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매진하였다. 1911년 교민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1912년 독립군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뒤의 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였다. 1918년 미국대통령 윌슨(Wilson, W.)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에 자극되어 국내외에서 독립기운이 활발해지자 오세창(吳世昌)·한용운(韓龍雲)·이상재(李商在) 등과 밀의한 뒤, 고종의 국외망명을 계획하고, 시종 이교영(李喬永)을 통해 고종에게 상주하여 쾌락을 얻었으나,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上海)에 수립되었으나 의견 차이로 분란이 끊이지 않자 상해보다는 북경(北京)에 체류하며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4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중국에 있던 동지들이 상해로 집결하여 조직한 항일구국연맹의 의장에 추대되었다. 1932년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행동강령으로 일본군기관 및 수송기관 파괴, 일본요인 및 친일파 숙청, 일본외교기관 폭파 등을 결정하고, 중국국민당과 교섭하여 자금과 무기지원을 확약받았다. 그 해 11월 만주에 연락근거지를 확보하고 지하공작망을 조직하여, 주만일본군사령관 암살을 목적으로 상해에서 대련(大連)으로 향하던 도중, 대련의 일본수상경찰에 잡혀 악독한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1962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시영(1869-1953)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885년(고종 22) 관직에 나아가 10여 년간 형조좌랑 · 홍문관교리 · 승정원부승지 · 궁내부수석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895년 관직을 물러난 뒤로는 중형 이회영(李會榮) · 이상설(李相卨) 등과 근대학문탐구에 몰두하였다. 1905년 외부 교섭국장에 임명되었으나 을사조약의 강제체결을 계기로 사직하였다. 그러나 1906년 재차 평안남도 관찰사에 등용되었고, 근대학교설립 및 애국계몽운동에 종사하였다. 그 뒤 1907년 중추원칙임의관, 1908년 한성재판소장 · 법부 민사국장 · 고등법원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안창호(安昌浩) · 전덕기(全德基) · 이동녕(李東寧) · 이회영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국권피탈 후 신민회의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 계획에 의거하여 6형제의 가재(家財)를 재원으로 삼아, 1910년말 서간도(西間島)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추가가(鄒家街)로 가족을 거느리고 망명하였다. 1911년 4월 유하현 삼원보 대고산(大孤山)에서 노천군중대회를 개최하여, 교육진흥 및 독립군양성을 표방한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설립을 주도하였다. 경학사 초대사장에는 이상룡(李相龍)이, 신흥강습소 초대교장에는 이동녕이 추대되었다. 1912년 통화현 합니하(通化縣 哈泥河)에 토지를 매입하여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확대 발전시켰다. 그 뒤 신흥무관학교는 유하현 고산자로 이전하였고, 합니하의 교사는 분교역할을 하는 등 1910년대 서간도지역 독립군양성의 총본산이 되었다. 특히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폐교 때까지 재만항일독립군의 핵심 간부로 양성된 독립군들은, 청산리대첩의 주역으로 활동하는 등 1920년대 국외독립전쟁의 골간으로 성장하였다. 1935년 10월 김구 등과 함께 임시정부 지원정당인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창당하여 감사를 맡았다. 1938년 중일전쟁 발발로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이동한 이후 임시정부 국무위원 · 재무부장 · 의정원의원 등을 역임하며, 광복 직전 임정활동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과 함께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자격으로 환국한 이래 1946년 봄 성균관총재와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위원장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종교(大倧敎) 활동에 진력하여 사교교질(司敎敎秩) · 원로원장 · 사교(司敎) · 도형(道兄) 등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다. 또한, 환국 직후부터 신흥무관학교부활위원회를 조직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건학이념 계승과 인재양성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1947년 2월 재단법인 성재학원(省齋學園)을 설립하고, 이후 신흥전문학관(新興專門學館)으로 발전시켜 1 · 2회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 뒤 한국전쟁으로 일시 침체국면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현재의 경희대학교로 계승되었다. 한편, 1947년 9월 공직사퇴 성명을 발표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직을 사퇴하였다. 그러나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 실시된 정 · 부통령선거에서 대한민국 초대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전횡에 반대하여 1951년 5월 9일 국회에 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국정혼란과 사회부패상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는 요지의 대국민성명서를 발표하고 이승만정부를 떠났다. 1949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울산 항일독립운동기념탑
울산 항일독립운동기념탑은 항일 독립운동의 위대한 여정에서 혹독한 고초를 겪은 울산 선열들의 넋을 기리고, 그 숭고한 발자취를 기억하며, 미래 세대에 계승할 역사를 기록하고자 건립한 것이다. 울산에서는 일제의 강제 병합 직전에 일어난 의병 항쟁을 시작으로 국권 수호를 위한 항일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19년 4월에는 전국에서 일어난 3.1운동에 발맞춰 울산 곳곳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울산 사람들은 1910년대 국내 항일 투쟁의 상징인 대한광복회를 비롯하여,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울산과 국내 각지에서 다양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주, 중국 관내, 미주, 일본 등 국외에서도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고 항일 의식을 복돋았으며, 항일 무장 투쟁에도 참여하였다. 기념탑은 남구 달동문화공원 내 부지 800㎡에 총사업비 5억8천400만원이 투입돼 조성됐다. 기념탑 둘레에는 고헌 박상진 의사, 외솔 최현배 선생 등 서훈을 받은 울산 출신 항일 독립유공자 102명 이름이 새겨져 있다. 기념탑 후면에는 울산항일 독립운동 역사를 기록해 숭고한 나라 사랑 정신의 의미를 깨우칠 수 있는 역사교육장으로 조성하였다.
박상진 호수공원
박상진(1884 - 1921)은 울산(蔚山) 사람이다. 전통적 유가(儒家)에서 성장한 그는 일찍이 한학을 수학하고 1902년에는 허위(許蔿)로부터 학문적 수업을 쌓았다. 그후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양정의숙(養正義塾)에서 법률과 경제를 전공했다. 1910년 판사(判事)시험에 합격한 그는 평양법원에 발령을 받았으나 사퇴하고 1911년 만주로 건너가 허겸(許兼)·손일민(孫逸民)·김대락(金大洛)·이상용(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의 지사들과 교류하며 독립투쟁의 방략을 모색하였다. 1912년 귀국한 그는 대구(大邱)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독립운동의 정보연락 및 재정적 지원을 목적한 것이었다. 당시 상덕태상회는 국내의 연락뿐 아니라 이관구(李觀求)가 설립한 만주 안동(安東)의 삼달양행(三達洋行)이나 장춘(長春)의 상원양행(尙元洋行)등 곡물상과 연락망을 구축하며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1915년 음력 1월 15일 대구 안일암(安逸庵)에서 독립군 지원단체인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결성하였다. 이때 조선국권회복단에 참여한 인사들은 주로 대구를 중심한 경상우도(慶尙右道) 지방의 중산층 이상의 혁신유림(革新儒林)들로서, 동단은 곡물상의 상업조직을 통하여 독립군을 지원한 구국경제활동단체였다. 그러나 동단의 인사들은 보다 강력한 독립군 단체를 조직할 목적으로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제휴하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하였고 그는 총사령(總司令)을 맡았다. 채기중(蔡基中)이 주도한 풍기광복단은 1913년에 조직된 독립군 단체로서 의병적 성격이 짙었고, 이때 국권회복단에서는 박상진 외에 김재열(金在烈)·정운일(鄭雲馹) 등 의병적 인물이 참여했다. 대한광복회는 혁명적 독립운동단체로서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실천강령을 정하고, 일본이 국제적으로 고립될 때 일제히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혁명의 거점으로는 국내 각처에 곡물상을 개설하는 한편 만주의 신흥학교(新興學校) 등과 연결하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한편 이에 필요한 자금은 자산가들의 의연금으로써 충당할 계획이었는데 친일부호들의 비협조로 의연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았으므로 강제모금의 방법을 택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1916년 무기구입을 위해 만주를 다녀오는 길에 서울에서 붙잡혀 1917년 4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군자금 수합에 더욱 힘을 쏟아 당시 식민적 지주체제에 안주하는 반민족적 친일부호를 처단하는 의협투쟁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그는 대한광복회 명의로 포고문을 작성하는 한편 친일부호 처단의 명령을 내려 채기중·유창순(庾昌淳)·강순필(姜順必)·임봉주(林鳳柱) 등으로 하여금 1917년 11월 경북 칠곡군(漆谷郡)의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케 했으며 1918년 1월에는 김한종(金漢鍾)·장두환(張斗煥) 등이 주관케 하여 충남 아산군(牙山郡) 도고면(道高面) 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였다. 이때 동단의 처단 고시문(告示文)을 붙였으므로 만천하에 대한광복회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일로 인하여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1918년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일경에 붙잡혔고, 사형을 선고받아 4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