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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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마리아 흉상
김마리아(1892 - 1944)는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 상해애국부인회 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다.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황해도 장연(長淵) 출신이다. 1919년 2·8독립운동에 가담, 활약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났다. 조국광복을 위해 일신을 바치겠다는 굳은 의지를 세운 뒤 스스로 졸업을 포기하고, 「독립선언서」 10여 장을 베껴 변장한 일본 옷띠인 오비 속에 숨기고 차경신(車敬信) 등과 2월 15일 부산으로 들어왔다. 귀국 후 대구·광주·서울·황해도 일대에서 독립의 때를 놓치지 않도록 여성계에서도 조직적 궐기를 서둘러야 한다며 3·1운동 사전준비운동에 진력하였다. 황해도 봉산에서의 활약을 마치고 3월 5일 서울 모교를 찾아갔다가 일본 형사에게 붙잡혔다. 이 때 모진 고문으로 상악골축농증에 걸려 평생을 고생하였다. 「보안법」 위반 죄목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5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그 해 8월 5일 석방되었다. 석방 후 모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여성항일운동을 북돋우고자 기존의 애국부인회를 바탕으로 하여, 그 해 9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다시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절대 독립을 위한 독립투쟁에 있어 중요한 임무를 맡기 위한 준비와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하는 일에 힘을 쏟던 중 그 해 11월 말 애국부인회 관계자들과 다시 붙잡혔다. 김마리아는 심문을 받으면서 “한국인이 한국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 연호는 모른다.”는 등 확고한 자주독립정신을 보였다. 3년형의 판결을 받고 복역 중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이후 서울 성북동 보문암(普門庵)에서 요양하다 변장으로 인천을 탈출,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도 상해애국부인회(上海愛國婦人會) 간부와 의정원 의원 등으로 활약하였으며, 수학을 계속하기 위해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였다. 1923년 6월 미국으로 가 1924년 9월 파크대학 문학부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1928년에는 시카고대학 사회학과에서 수학, 석사학위를 받고, 1930년 뉴욕 비블리컬 세미너리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한편, 이곳에서 황에스터·박인덕(朴仁德) 등 8명의 옛 동지들을 만나 근화회(槿花會: 재미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 회장으로 추대된 뒤 재미 한국인의 애국정신을 북돋우고 일제의 악랄한 식민정책을 서방 국가에 널리 알렸다. 그 뒤 원산에 있는 마르타 윌슨신학교에서 신학강의만을 한다는 조건으로 1935년 귀국, 이후 여생을 기독교전도사업과 신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순국하였는데, 김마리아의 유언에 따라 시체는 화장하여 대동강에 뿌렸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숭실중출신 독립유공자 명비
숭실중학교 출신의 인물들은 을사조약 반대투쟁, 신민회, 105인 사건, 조선국민회, 광복회 등에 참여하며 독립을 위한 희생정신과 애국심, 기독교정신을 실현하였다. 위의 숭실중 출신 인물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어 기미년 3.1운동 상해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고자 본 비를 건립하였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위치하고 있다. 일본제국주의 침탈의 역사와 그에 부역한 친일파의 죄상, 빛나는 항일투쟁의 역사를 기록하고 전시하는 최초의 일제강점기 전문 역사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해외동포를 포함한 수많은 시민들의 성금과 기증자료에 힘입어 건립되었다.
광복 70주년 기념광장
서울 효창공원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모신 곳이다. 조선 후기 정조의 맏아들로 세자 책봉까지 받았으나 1786년 다섯 살의 나이로 서거한 문효세자를 비롯하여 왕족들의 무덤인 효창원이 있던 자리이다.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불법으로 주둔하면서 훼손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골프장이 들어서는 등 공원화되었다. 1940년에 조선총독부가 공원으로 고시한 이후, 1944년에는 일제의 침략전쟁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위해 충령탑 설립을 명목으로 조선조 왕실 무덤을 고양 서삼릉으로 이장하면서 효창공원으로 변경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인 백범 김구 선생의 깊은 뜻으로 독립선열의 숭고한 정신이 깃든 공간으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어 오늘날의 효창공원에 이르고 있다. 효창공원은 김구 선생의 묘소를 포함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인 이동녕, 조성환, 차이석 선생의 묘소와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묘소,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있는 유서깊은 공원이다. 광복70주년 기념광장은 광복70주년을 맞이하여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의미있는 10개의 태극기를 포함한 태극조형물을 설치하고, 우리 겨례의 민족성을 나타내는 무궁화 70주를 식지하여 광복 70주년을 기념하고 순국선열의 애국정신을 이어받아 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염원하며 광복 70주년 기념광장을 조성한 것이다.
의열사
의열사는 효창공원 내에 묘역이 있는 독립운동가 7인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1988년 효창공원 정비 공사 때 건립을 추진하여 1990년에 준공하였고, 그 이듬해에 이동녕·김구·조성환·차리석·이봉창·윤봉길·백정기 등 7인의 영정과 위패를 이곳에 모셨다. 7위 선열을 기리는 추모 행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60주년인 1979년 4월 13일 합동 추모 제전을 지낸 이래 계속 있었으며, 2011년부터는 전통 제례 방식을 따라 임시 정부 수립일(4월 11일)이나 환국일(11월 23일) 즈음에 '효창원 7위 선열 의열사 제전'을 거행하고 있다. 그동안 의열사를 제한적으로 개방했으나 후손들이 이곳에서 살아 숨 쉬는 역사를 생생하게 느끼고 애국 애족의 정신을 기르도록 2016년 5월부터 상시로 개방하기 시작했다.
백초월 태극기비
백초월(1878 - 1944)의 이명은 백의수(白義洙)이다. 1919년 4월 승려의 신분으로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라는 비밀단체를 경성중앙학림(京城中央學林) 내에 조직하고 그 단체의 단장이 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및 독립군(獨立軍)을 지원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혁신공보(革新公報)를 간행하였다. 1919년 11월 25일 단군(檀君)의 건국기념일에 종로 삼청동(三淸洞)에 태극기와 단군기념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성립에 관한 축하문과 선언서 및 포고문 등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1919년 12월 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 모집활동을 했으며, 1920년 2월 25일 일본 유학생들이 일본 의회에 독립청원을 하기 위하여 활동할 때 동경으로 건너가 활동하던 중 붙잡혔다. 이후 1920년 4월 6일 승려 신상완(申尙玩)과 같이 승려들을 규합하여 의용승군(義勇僧軍)을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벌이다가 종로(鐘路)경찰서에 붙잡혔다. 1938년 봉천행(奉天行) 화물차에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라고 낙서한 사건으로 연좌되어 붙잡혀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태극기 발견지 칠성각
칠성각은 1907년에 지어진 것으로 불교에 흡수된 민간신앙인 칠성신을 모신 건물이다. 2009년 5월 진관사 칠성각 보수작업 도중, 오래된 태극기와 더불어 3.1만세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 6월에서 12월까지 발행된 '독립신문', '신대한신문', '조선독립신문', '자유신종보' 등 십 수점의 항일신문들이 발견되었다. 이 태극기는 3.1운동 당시 독립단체에서 사용한 태극기로 보이며,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기 양식과 동일하다. 일장기 위에 태극의 음방과 4괘를 먹으로 그려넣은 유일한 태극기로 항일정신이 담겼다. 때문에 이 태극기는 당시 진관사에 주석하며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백초월 스님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후세에 그 뜻을 전하고자 숨겨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건국동맹터 표지석
조선건국동맹은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에 여운형(呂運亨) 등이 조국 광복에 대비하기 위해 1940년대에 비밀리에 조직한 단체이다. 1944년 8월 10일에 국내의 사회주의자들이 일제의 패망과 조선의 해방을 대비하기 위해 여운형을 위원장으로 내세우고 현우현의 집인 서울 경운동 삼광의원(三光醫院)에서 조직한 비밀결사이다. 이여성(李如星)·이만규(李萬珪) 등의 건국동맹 가담으로 조직이 더욱 확대되자 전국적인 조직망을 펴 많은 사람들을 모았다. 건국동맹은 문서로 남기지 않는다는 ‘불문(不文)’, 말하지 않는다는 ‘불언(不言)’,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는 ‘불명(不名)’ 등 3대 원칙을 세웠다. 아울러 각인각파(各人各派)를 대동단결하여 거국일치로 일제의 모든 세력을 구축(驅逐)하고 조선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것, 반추축(反樞軸) 제국과 협력하여 대일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저해하는 일체 반동세력을 박멸할 것, 건설부면(建設部面)에 있어 일체 시위를 민주주의적 원칙에 의거하고 특히 노농대중의 해방에 치중할 것 등의 3대 강령에 따라 활동하였다. 연맹은 보조단체로 농민동맹, 부인동맹, 청년노동자운동, 학교 학생운동, 철도종업원운동, 교원세포조직운동 등을 직능별 조직으로 두어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다.또한 식량대책준비위원회와 함께 일본군 후방을 교란하고 군대를 만들 목적에서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특히 결정적 시기에 해외 한인 반일무장역량과 힘을 합쳐 해방을 주체적이고 자주적으로 쟁취하기 위해서 좌우의 이념과 상관없이 해외의 한인 항일단체와 적극적으로 결합을 추진하여, 중국 옌안[延安] 독립동맹과 연계하면서 조선의용군과의 협동 작전을 펴나가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4일에 일본 경찰에 발각된 뒤 조동호·이걸소 등 간부들이 붙잡혀 투옥되었다. 하지만 8월 11일에 일제의 항복을 미리 알고서 이만규가 독립선언문을 작성하였고,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여운형 등 몇몇 간부는 출옥 후 치안을 염려하여 건국청년치안대를 결성하였다. 해방 후에는 비밀 조직이었던 탓으로 조직 활동의 혼란과 분열이 일어났다. 8월 15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발족과 더불어 구성원 사이의 공로 다툼으로 조직의 정통성은 깨졌고, 구성원들은 각각 여러 정당과 정파에 흡수되거나 분산되고 말았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된 뒤에는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 별도의 사무실을 설치하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파견 구성원과 조선건국동맹본부 고수파가 함께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 뒤 건국동맹을 발전적으로 해체한다는 결의에 의하여, 1945년 11월 12일에 조선인민당이 결성되면서 사실상 해체되었다.
대동단본부 표지석
대동단은 1919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이다. 흔히 대동단으로 알려진 이 조직은 1919년 3월 말경에 서울 전협(全協)의 집에 모여, 첫째 한국을 일본제국의 통치에서 이탈하게 해 독립국을 형성하게 할 것, 둘째 세계의 영원한 평화를 확보할 것, 셋째 사회주의를 철저히 실행할 것 등의 3대 강령을 제창하고, ‘조선민족대동단’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하였다. 단원은 귀족·관리·유학자·종교인·상공인·청년·학생·부녀자 등 각계각층 11개 사회단체 대표자들로 구성되었으며, 비밀 유지를 위해 점조직으로 조직되었다.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군자금 등 재정은 전협이, 선전활동 및 대외활동은 최익환(崔益煥)이 맡았다. 그 밖에 김찬규(金燦奎)·박영효(朴泳孝)·민영달(閔泳達) 등이 참가하였다. 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평안도·함경도·만주 등에 지부를 설치해 조직을 확대하였다. 1919년 4월부터 1년간 지하문서를 배포하고, 특히 『대동신보(大同新報)』를 제작하였다. 임시정부수립 이후에는 본부를 상해로 옮기려 했고, 의친왕 이강(李堈) 을 상해로 탈출시키려는 거사를 기도했으나 관련자가 붙잡혀 실패하였다. 의친왕 탈출 기도는 실패했지만 그 일을 통해 대동단이 국내외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이들은 1920년 6월 예심을 거쳐 12월 1심판결에서 전협과 최익환 등 31명이 징역 6개월에서 8년까지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 뒤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가진과 나창헌(羅昌憲) 등이 대동단의 활동을 계승해 정남용(鄭南容)이 붙잡히기 전까지 각종 선언서·기관방략(機關方略)·포고문 등을 등사해 전국에 배포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을 선전, 유도하였다.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이종욱(李鍾郁) 등을 파견해 대동단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1919년 12월에 독립대동단규칙서에는 모두 8장 45개조에 달하는 규칙과 세칙 44개조가 첨가되어 대기관의 조직 구성을 볼 수 있다. 단원 중 의병장 임병찬(林炳瓚)의 큰아들 응철(應喆), 넷째아들 수명(守明), 동생 병대(炳大) 등 일가가 대를 물려 조국의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하였다. 또, 주동자 전협 등은 한때 일진회원으로 친일파였으나 이를 계기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어 더욱 그 의미가 있다.
한양의원 표지석
한양의원은 한성의사회 회장, 조선의사협회 초대 간사장을 역임한 근대 초창기의 양의 박계양이 운영하던 병원으로, 홍명희·정인보·최남선 등 당대 문사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동계 박계양(1882~1970)은 경기도 양주군 누암리에서 태어났다. 원래 그의 집안은 유학자 집안으로 신학문을 공부하겠다는 그의 선택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서양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산수와 일본어 등을 준비하여 의학교 입학시험을 쳐서 1904년에 입학한 그는 1907년 대한의원 교육부 1회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는 이비인후과를 더욱 깊이 공부하기 위해 1912년 교토제국대학 의학부 이비인후과학 교실에 유학하였다. 귀국 후 총독부의원에서 잠시 근무하였으나 일본인 병원에 근무하기 싫어 사직하고 개업했다. 그는 직접 독립운동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독립운동가들이나 그 가족들을 도와주는 일에 앞장섰다. 한번은 중국에서 활동하는 여운형의 가족에게 생활비를 대주었다가 상해에 독립군 자금을 보내었다는 혐의를 받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또 천도교 교주 손병희와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등을 도와주어 당국으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당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수재가 났을 때는 이재민들을 무료 진료하는 봉사활동을 폈다.
독립유공자 공훈 흥사단 단우 175명 명단 안내
흥사단은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安昌浩)의 주도로 경기도홍언(洪焉), 강원도염만석(廉萬石), 충청도조병옥(趙炳玉), 황해도민찬호(閔燦鎬), 경상도송종익(宋鍾翊), 평안도강영소(姜永韶), 함경도김종림(金宗林), 전라도정원도(鄭源道) 등 8도 대표에 의하여 창립되었다. 초창기에는 이민교포 및 유학생을 중심으로 학업과 인격수양, 생활개선, 경제력 증진에 주력하다가 1919년 3·1운동으로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상해에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조직하였다.또한 서울에 수양동맹회(1922), 평양에 동우구락부(1923)를 결성하여 국내에서 일제치하의 합법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국내의 두 단체는 수양동우회(1925)로 통합되었고, 그 뒤 동우회로 개칭하였다가 이른바 동우회사건(1937)으로 안창호를 비롯한 200여 명의 회원이 검거, 투옥된 가운데 강제 해산 당하였다. 광복 이후 1946년에 국내위원부를 조직하였고, 1948년 8월 15일 본부를 국내로 이전하였다. 1969년 8월 19일에 문교부의 승인을 받아 사단법인으로 설립되었다. 1981년 6월 민족대학을 개설하였으며, 1985년 3월 도산사상연구회, 1989년 6월 도산아카데미연구원을 창립하였다. 1991년 2월에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를 결성하여 부정 선거 감시활동을 벌였다. 1992년 5월에 청소년연구원을 설립하였고, 1997년 3월에 민족통일운동본부를 설립하였다. 1998년 11월에 도산안창호 기념관 건립 및 개관(사단법인 도산기념사업회)하였으며, 2007년부터 독립유공자후손돕기운동본부를 창립하였다.2007년 5월에 미주위원부 산하 시카고지부를 창립하였고, 2008년 3월에는 평택지부에 도산안창호교육관을 개소하였다. 2008년 10월부터 대학생을 대상으로 올바른 가치관과 역사의식,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청년인재를 양성하고자 미래사회리더스쿨을 운영하여 2010년 현재 6개 지부에서 운영하고 있다. 2009년 3월 대전에 만인산 푸른학습원을 개원하였고, 광주시에 청소년문화의 집을 개관하였다. 2009년 4월 흥사단 미주위원부 산하 토론토지부를 창립하였고, 6월에는 서울시 중부교육청으로부터 평생교육시설 신고증을 교부받아 평생교육 분야 활동을 추진하고 있다. 흥사단은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4대 정신을 지도이념으로 하여 건전한 민주시민이 갖추어야 할 덕(德)·체(體)·지(智) 삼육(三育)을 기본덕목으로 하는 인격·단결·공민의 3대 훈련을 실시한다. 단우(團友)는 자아혁신·신성단결(神聖團結)·단무봉사·책임완수·대공복무(大公服務)를 5대 생활지표로 삼아 실천하고 있다.
현진건 집
현진건(1900-1943)의 호는 빙허이며, 일제강점기 「빈처」, 「운수 좋은 날」, 「고향」 등을 저술한 소설가이자 언론인이다. 현진건은 1920년≪개벽 開闢≫에 <희생화 犧牲花>를 발표함으로써 문필 활동을 시작하여 <빈처 貧妻>(1921)로 문명을 얻었다. 1921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함으로써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홍사용(洪思容)·이상화(李相和)·나도향(羅稻香)·박종화(朴鍾和) 등과 함께 ≪백조(白潮≫ 창간동인으로 참여하여 1920년대 신문학운동에 본격적으로 가담하였다. 1922년에는 동명사(東明社)에 입사, 1925년 그 후신인 ≪시대일보≫가 폐간되자 동아일보사로 옮겼다. 1932년 상해에서 활약하던 공산주의자인 셋째 형 정건(鼎健)의 체포와 죽음으로 깊은 충격을 받았는데, 그 자신도 1936년 동아일보사 사회부장 당시 일장기말살사건으로 인하여 구속되었다. 1937년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소설 창작에 전념하였으며, 빈궁 속에서도 친일문학에 가담하지 않은 채 지내다가 1943년 장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