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국내항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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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729 건
이상만 묘
이상만(1919-1944)의 이명은 파산지웅(巴山智雄)이다. 그는 1938년 일본 구주(九洲) 장기현(長崎縣) 농업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상만은 비밀결사 삼인단(三人團)을 조직하여 항일활동을 하였다. 1941년 부산의 곡물검사소와 경북 예천출장소에 근무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으며,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가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어상선 묘
어상선(1889-1967)은 1920년 음력 8월 중국 안동현(安東縣)에서 상해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특파원의 권유로 독립운동자금 5백원을 제공하였고, 1921년 평남 영원(寧遠)에서 항일비밀결사 대한계흥단(大韓繼興團)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및 동지 포섭 활동을 펴다가 조직이 발각되면서 체포되어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백초월 집
백초월(1878 - 1944)의 이명은 백의수(白義洙)이다. 1919년 4월 승려의 신분으로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라는 비밀단체를 경성중앙학림(京城中央學林) 내에 조직하고 그 단체의 단장이 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및 독립군(獨立軍)을 지원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혁신공보(革新公報)를 간행하였다. 1919년 11월 25일 단군(檀君)의 건국기념일에 종로 삼청동(三淸洞)에 태극기와 단군기념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성립에 관한 축하문과 선언서 및 포고문 등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1919년 12월 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 모집활동을 했으며, 1920년 2월 25일 일본 유학생들이 일본 의회에 독립청원을 하기 위하여 활동할 때 동경으로 건너가 활동하던 중 붙잡혔다. 이후 1920년 4월 6일 승려 신상완(申尙玩)과 같이 승려들을 규합하여 의용승군(義勇僧軍)을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벌이다가 종로(鐘路)경찰서에 붙잡혔다. 1938년 봉천행(奉天行) 화물차에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라고 낙서한 사건으로 연좌되어 붙잡혀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금복 묘
이금복의 남편은 1932년 6월경 ‘삼천포독서회사건’으로 도피 중이었고, 이금복(1912-2010)은 남편의 동생 박대홍(朴大鴻)의 권유로 「별의 나라」 · 「집단(集團)」 등 사상 서적을 읽고, 신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1934년 8월, 목도조선법랑철기주식회사(牧島朝鮮琺瑯鐵器株式會社)에 여공으로 취직하였고, 이때 정충조(鄭忠朝)의 권유로 동지 박보홍(朴寶洪)·이춘근(李春根)과 함께 정호영(鄭鎬永)의 검거 이후 분산된 적색노동조합을 재조직하기 위한 실천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로 인해 체포되었으나,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고, 이후 삼천포를 중심으로 적색농민조합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또 다시 체포되어, 징역 8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2008년에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파리장서비(연지공원)
파리장서는 3.1독립투쟁에 참여하지 못한 유림측에서 파리 평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려는 독립투쟁의 하나인데, 독립정신을 기리는 파리장서비는 서울 장충단공원 외에 충남 홍성, 대구 달서구, 봉화군, 거창군, 밀양시, 합천군, 고창군, 정읍시 등 총 9기가 건립되어 있다. 파리장서는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던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대부분 의병에 참여하였던 김덕진(金德鎭)·안병찬(安炳瓚)·김봉제(金鳳濟)·임한주(林翰周)·전양진(田穰鎭)·최중식(崔中軾) 등에 의해 이뤄졌다. 서한의 요지는 일본의 배신행위와 명성황후(明成皇后)와 고종의 시해, 그리고 한국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고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영남유림에서도 곽종석(郭鍾錫)·김창숙(金昌淑) 등이 필두로 같은 목적의 일이 추진되고 있었다.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선정된 김창숙이 상해(上海)로 출발하였으며, 장서에는 134명 유림대표가 서명하였다. 장서는 김창숙이 파리로 가져가지 못하고, 당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대표로 선정되어 파리에 가 있던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되었으며, 또한 국내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러나 송회근(宋晦根)에 의해 사건이 발각됨으로써 관계자들이 피체되어 옥고를 겪었다.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비 주변에는 부산김해선 연지공원역이 있으며, 실제로 김해연지공원 내에 위치해있다.
이용백 묘
이용백(1902-1985)은 1923년 지도공립보통학교(智島公立普通學校) 동급생 황하일(黃河一)과 함께 5월 1일에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한 후 태극기 400여 매를 제작하여 동교생 270여 명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읍내 일경주재소까지 시위행진을 하다 일경에 붙잡혔고,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안창대 묘
안창대(1908-1943)의 이명은 안철부(安哲夫), 김능선(金能善)이다. 1933·1934년 서울에서 협동조합(協同組合)을 결성하고 노동자를 대상으로 항일의식 및 계급의식을 고취하다가 체포되었다. 1935년 6월부터 최성호(崔成浩) 등과 사회주의 서적을 탐독하고 일제 식민지지배를 반대하는 활동을 펴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최상림 순교비
최상림(1888-1945)은 경상남도 동래 사람으로, 당시 부산 해운대교회의 목사였다. 1938년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일경에 붙잡혀 동래경찰서에 구금당했고, 1938년 9월 10일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여 끝까지 이를 거부하였다. 1940년 6월, 일경에 붙잡혀 사천경찰서에 구금되었고 1941년 3월에는 부산으로 압송되었다가 같은 해 7월 다시 평양으로 이송되어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하여 예심이 진행되던 중, 일경에게 받은 가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1945년 4월 30일 병보석되었으나 7일 만인 5월 6일에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해관암(이상태 선생 독립운동 장소)
1943년 1월 27일 독립 운동가 하전 이상태가 독립운동 장소로 해관암을 창건하였다. 1948년 4월경 설석우 스님을 모시고 법당, 요사체를 작은 규로모 중창건하여 남해지역 불교불사에 큰 서원을 세웠다. 또한 인재양성 교육 육성사업 경남해양과학고(남해수고)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그 후 47년이 지난 1989년 7월 현 주지 지성스님의 원력으로 현 도량의 가탑으로 재 중창건되어 창건조부님의 뜻을 이어 불교불사에 전념하고 있다.
이상태 기공비
이상태(1891-1955)는 경상남도 남해 사람이다. 1920년 2월 16일, 서울에서 김광제, 문탁, 김영만, 이종만 등과 더불어 조선노동대회(朝鮮勞動大會)를 조직하였다. 조선노동대회는 노동자의 상부상조와 인격 및 지적향상을 도모할 것을 목적으로 한 계몽적 노동단체였다. 초대 회장은 김광제였으나 그가 사망하자 동년 8월 임원진을 개편하였는데 회장에 문탁, 부회장에 정태용, 총무에 윤철중, 서무에 송우익, 영업에 김호연 등이었고 이상태는 재무를 담당하였다. 동회는 전국적으로 지부를 설치하고 지방의 기존 노동단체의 규합에 힘써, 한때 회원이 8천여 명에 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내부 갈등과 재정난으로 활동이 위축되던 중, 이상태는 1924년 4월에 통일적이고 전국적인 노동단체인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에 합류하였다. 한편 그는 김종명, 김인섭과 함께 1919년 8월에 조직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들은 일제의 탄압이 심하여 국내 각지의 독립운동이 점차 약화되어감을 개탄하고 이를 다시 중흥할 목적으로 1921년 11월 15일 경기도 인천의 인해여관(仁海旅館)에서 한흥회(韓興會)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이후 국내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날 때 폭탄, 권총 등의 무기가 필요할 것을 예상하고 이의 사용 방법을 미리 습득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으로 가서 무기 사용법을 익히기로 하고 1921년 12월 16일 인천에서 출발하여 중국 상해(上海) 방면으로 향하던 중 경의선(京義線) 차련관(車輦館)에서 일경에 붙잡혔다. 이상태는 1922년 6월 17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제령 7호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23년 7월 25일 가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전홍표 묘
전홍표(1869-1929)는 경상남도 밀양 사람이다. 한말(대한제국의 마지막 시기)부터 밀양의 동화학교(東化學校), 개창학교(開昌學校), 밀흥야학교(密興夜學校) 등 다수의 사립학교 설립에 기부금을 내고 교육 계몽운동에 종사하였다. 일제 강제 병합 이후인 1910년대에도 동화중학교 교장으로서 1914년 3월 강제 폐교될 때까지 학생들에게 국권 회복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육을 펼쳤다. 그 덕분에 동화중학교에서는 의열단(義烈團) 단장 김원봉을 비롯하여 윤세주, 김상윤, 한봉근, 최수봉 등 다수의 항일 독립운동가가 배출될 수 있었다.1921년 7월 13일 밤, 밀양군 밀양면(密陽面) 청년회관에서 한인수, 하경용 등 수십 명과 모여, 같은 날 사형집행을 당한 동화학교 제자 최수봉을 위한 부의금 모집을 발의하였다. 이후 한인수 외 3명이 모집위원이 되어 부의금을 모집하여 유족들에게 전달하였다. 또한 밀양청년회(密陽靑年會) 회원 30여 명과 함께 최수봉의 유해를 인수받아 밀양청년회 주최로 ‘사체환영회(死體歡迎會)’를 개최하고 최수봉의 고향인 상남면(上南面) 마산리(馬山里)에 안치하고 장사를 지낼 수 있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1년 10월 13일 부산지방법원(釜山地方法院)에서 벌금 100원에 처해졌다. 이에 불복하여 공소를 제기했는데, 1922년 1월 21일 대구복심법원(大丘覆審法院)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이른바 ‘1920년 부령(府令) 제160호 및 기부금모집단속규칙(寄附金募集取締規則) 위반’으로 징역 10개월(미결구류 90일 형기산입)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다시 상고를 제기하였으나, 같은 해 3월 9일 고등법원(高等法院)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의열사숭모비
경상남도 밀양에 위치한 독립의열사숭모비이다.본 비는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독립운동의 공로를 기념하고 기리고자 설립되었다. 이전에는 영남루에 있던 것을 이전하여 현재 밀양독립운동기념관 근처 도보 1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