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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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활동지 굴암사(용덕사)
이곳은 구한말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항쟁과 일제강점기 3.1만세독립운동이 일어난 곳이다. 굴암사로도 불리운다. 옥여 임경재(任璟宰, 미상~1907) 의병장은 1907년 고종황제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의 정국을 개탄하고 동년 7월, 당시 이천군 신면(新面,) 남정동(南井洞)의 이근풍의 집에서 주창용, 신규희, 조상현 등과 봉기할 것을 결의하여 포군 32명을 모집하고 의병대를 편제했다. 광주군 되고개에 이르러 김봉기를 대장으로 하여 장두지(獐頭地:또는 노루목)에서 일본 기병대를 격퇴하였다. 이어 이천, 광주, 용인, 죽산 등지를 전전하면서 크게 위세를 떨쳤다. 이천읍 우편소와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였고, 용인의 굴암사(현 용덕사)에서 일본 토벌대와 교전하였다. 1919년 3월 21일 용인 최초의 3.1운동은 원삼면 좌전고개에서 시작되었다. 좌항일, 가좌리, 사암리, 맹리, 문촌리 등지의 면사무소에 집결한 주민 수백 명은 백암으로 이동하다가 일제 헌병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해산되었으며 수십 명이 체포되었다. 특히 3월 23일 용덕사 승려들은 독립선언서를 마을에 배포, 거국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천 애국지사 공훈비
이천시 설봉공원에 있는 충효동산에는 고려부터 대한제국까지 이천이 낳은 충신과 애국지사, 그리고 효자와 열녀 72명을 기리고 있는데, 거란의 소손녕이 침입해 왔을 때 외교의 힘으로 물리친 장위공 서희(章威公 徐熙) 장군을 중심으로 오른쪽 벽면에 이천을 빛낸 22분의 애국지사의 공적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소개되어 있는 애국지사는 다음과 같다. 구연영(국내항일, 독립장, 1963년), 김봉기(의병, 애국장, 1991년), 임형순(의병, 애국장, 1995년), 전덕기(계몽운동, 독립장, 1962년), 박정심(의병,애족장, 1995년), 윤순채(의병, 애국장, 1995년), 박경채(의병, 애족장, 1995년), 구정서(의병, 애국장, 1991년), 김원조(국내항일, 독립장, 1963년), 유성근(만주방면, 애국장, 1990년), 이기룡(임시정부, 애국장, 1991년), 박종설(3.1운동, 대통령표창, 1995년), 이상혁(3.1운동, 애족장, 1990년), 한석동(3.1운동, 애족장, 1990년), 권중효(3.1운동, 애족장, 1990년), 이수흥(만주방면, 독립장, 1962년), 유택수(만주방면, 독립장, 1968년), 유남수(국내항일, 애족장, 1990년), 김현국(문화운동, 애족장, 1990년), 나기창(국내항일, 애족장, 1990년), 김기주(광복군, 애족장, 1990년), 박영순(국내항일, 애족장, 1990년)
김원조 집 터
김원조(1884~1922)는 경기도 이천 출신으로, 대한군정부 부원으로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한 인물이다. 이천 지역 3.1운동에 참여한 뒤,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군정부에 가입하였다. 이후 대한군정부 연락기관 설치에 필요한 군자금 모집을 위해 서울로 돌아왔다. 1920년 1월 2일에 낙원동 부호 신완식에게 지원을 약속받았으며, 같은 달 25일에는 조정윤의 집을 습격하는 등 모금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12월 28일에 고향인 이천군 율면 총곡리에서 은신하던 중 독립단 사건의 주모자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었다.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1922년 4월 15일에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독수리소년단 독립운동기념비
일제강점기 1939년 장호원제일심상소학교(현 장호원초)에 다니는 14명의 학생들은 항일 독립운동단체 「독수리소년단」을 결성하였고, 단장 박영순을 위시해 김순철·이상진·조태옥·박기순·박기하·백운호·오기환·박승연·곽태현·이상한·이범상·박정순·김만식 등 어린 학생들은 장차 독립군이 되고자 하는 목표를 세우고 단체를 조직화하였다. 단체 결성 3년째인 1942년 2월 하순 읍내 전봇대와 시내버스 창틀에 “일본은 패망하니 조선 민족은 그들에게 협조하지 말 것”과 “조선 민족 단결로 자주독립을 이루자”는 내용의 벽보를 붙이고 이 유인물을 전국 각지의 현직 군수들에게 우송하였다. 이 일로 단원 14명은 3월 전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하고 어린 단원들은 사흘 만에 풀려났으나 주범으로 간주된 단원들은 형사처분을 받았다. 단장인 박영순은 형을 선고받고 긴 세월 옥살이를 했고 박승연·박기순·이상진·곽태현 등은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일찍 마감했다. 어린 나이에 항일 벽보를 붙이는 등 독립운동을 펼친 이천 장호원 초등학생 독립운동 단체 「독수리소년단(荒鷲少年團)」을 기념하기 위해 해방 후 76년만인 2021년 12월 18일에 이천독립운동기념사업회에서 독수리소년단 독립운동기념비를 설립하였다.
구연영 순국기념비
구연영(1864~1907)은 경기 광주(廣州) 사람이다. 어려서 한학(漢學)을 수학하고 한때 정부관리로 재직하였으나 기울어가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관직을 사임하였다. 그 후 일제의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와 단발령 공포에 격분, 일제를 이땅에서 구축하기 위해 1895년 12월 31일 김하락(金河洛)·조성학(趙性學)·김태원(金泰元) 등과 함께 거의(擧義)하여 경기도 이천(利川)에서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를 결성하였다. 구연영이 양근(陽根)·지평(砥平)에서 300여명, 조성학이 광주산성에서 300여명의 군사를 모집하였으며 인근 지역의 민중들이 이에 자발적으로 호응하여 농민과 관포수(官砲手)를 중심으로 900여명의 군사를 규합하였다. 따라서 이천수창의소는 경기도 연합의진의 성격을 띠었으며, 전투적이고 대규모적인 조직편제를 갖추었는데 창의대장에 민승천(閔承天), 각군도지휘(各軍都指揮)에 김하락이 선임되었고 그는 중군장(中軍將)을 맡았다. 동 의진은 1896년 1월 백현(魄峴)에서 일본군을 섬멸하였는데, 백현전투는 을미의병사상 최초의 대규모 승리였을 뿐 아니라 의병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한 쾌거였다. 이어 2월 이현(梨峴)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폈으며 전열을 재정비하여 2천여 명으로 군세(軍勢)를 증강한 후 심진원(沈鎭元)의 광주의진(廣州義陣), 이석용(李錫容)의 양근의진(陽根義陣)과 함께 남한산성의진(南漢山城義陣)을 형성하여 남한산성을 공략, 입성하였다. 이들은 산성을 방어하는 한편 서울진공을 통해 일제를 구축키로 하고 이를 위해 우선 수원(水原)을 점령하고 주변의 의진과 연합하여 서울진공계획을 추진하던 중 일제의 사주를 받은 관군의 공격으로 1896년 3월 남한산성이 함락됨으로 인해 계획이 좌절되었다. 이에 따라 동 의진은 경북 의성(義城)으로 이동하여 재기를 도모하였으나 그는 동년 4월 의진과 결별하고 이천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1897년 기독교에 입문하여 1898년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웹엣청년회를 조직,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1902년에는 전도사로서 이천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에 전념하였다. 1907년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그는 장춘명(張春明)·한창섭(韓昌燮)·차화춘(車化春) 등 수십명의 동지와 함께 구국회(救國會)를 조직하고 신도대회를 통해 매국단체 일진회(一進會)를 성토하며 항일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등 구국계몽활동을 폈다. 또한 이천·여주(驪州)·광주(廣州) 일대를 순회하며 상인들의 철시투쟁을 유도하는 등의 활동을 계속하던 중 1907년 7월 16일 일본군 수비대에 의해 구국회 지도자들이 붙잡힐 때 피살·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파주시 항일독립운동기념비
1919년 3월 광탄면 발랑리에 본부를 두고 마을주민 조무쇠, 이인옥, 남동민, 정천화, 정갑석, 이기하, 정봉화, 강흥문, 정시화 등 9명이 사전에 대규모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마침내 1919년 3월 27일, 인근 동네주민 수백 명과 광탄면사무소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했으며, 다음날 28일에도 광탄면 주민 1천여 명과 봉일천 공릉장으로 행진하여 그곳의 군중과 함께 3천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파주시 항일독립운동기념비는 3.1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6년 8월 15일에 건립한 것으로, 파주 출신 독립운동가 107명의 이름이 명각되어 있으며, 파주독립광탄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안재홍 집
안재홍(1891~1965)은 해방 이후 민정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사학자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 중 대한민국청년외교단(大韓民國靑年外交團)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체포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귀국 후 조선일보 주필‧사장을 역임,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신간회사건, 조선어학회사건, 임시정부 활동 등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 미군정청 군정장관, 민의원 의원 등으로 건국 사업에 이바지하다가 6·25 당시 북한에 납치되었다. 1989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박내원 묘
박내원(1902~1982)은 1917년 보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종로기독교청년회에서 공부한 뒤 대동(大東)인쇄주식회사 인쇄직공 견습생이 된 이래 사상운동에 심취하여 노동단체와 청년단체 활동을 통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그는 1924년 10월 청년운동단체인 용진당(勇進黨)을 조직한 바 있으며,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이나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깊이 관여하면서 조선공산당과 천도교(天道敎)의 양세력을 연결하는 매개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5년 3월 권오설(權五卨)의 지시에 의해 경성노동연맹(京城勞動聯盟)을 조직하였으며, 인쇄직공조합연맹(印刷職工組合聯盟)·경성인쇄직공청년동맹(京城印刷職工靑年同盟) 등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그 밖에도 천도교청년동맹(天道敎靑年同盟)·돈화청년회(敦化靑年會)·한양청년연맹(漢陽靑年聯盟)·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신흥청년사(新興靑年社) 동인·화요회(火曜會)·정우회(正友會)·불꽃사(火焰社) 동인·연우사(鉛友社) 동인·혁청 단원·조선기근구제회(朝鮮饑饉救濟會)·무산자동맹(無産者同盟)·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 등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다. 1925년 4월 고려공산청년회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제2차 조선공산당에서는 경성야체이카의 언론기관 프랙션에서 활동했다. 그는 천도교 교주 박인호(朴寅浩)의 재종질(再從姪)로서, 천도교 계통의 민족운동에 앞장 섰다. 그는 천도교가 신·구파로 분화될 때 1926년 4월 천도교청년동맹(天道敎靑年同盟)의 창립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조선공산당이 6·10만세운동을 계획하기에 앞서 추진한 메이데이 기념시위에도 깊이 관계하였다. 당시 조선공산당에서는 조선노농총동맹을 앞세워 기념시위를 전개하려고 했다. 이때 그는 조선노농총동맹의 핵심 간부로서 기념시위의 제반 준비를 담당했다. 그런 가운데 융희황제가 승하하면서 기념시위 계획이 6·10만세운동으로 전환되자, 그는 권오설로부터 격문 인쇄 및 지방 조직과의 연락 임무를 부여받고, 이같은 사실을 권동진(權東鎭)과 천도교 교주 박인호와 이종린(李鍾麟)·박내홍(朴來弘) 등에게 알려 6·10만세운동에 대한 적극적 승낙을 받아내었다. 그는 격문 인쇄를 위해 손재기(孫在基)·백명천(白明天)·양재식(梁在植) 등 천도교 인물과 민창식(閔昌植)·이용재(李用宰) 등 인쇄직공조합원을 동지로 규합하였다. 그리하여 ‘격고문(檄告文)’, ‘대한독립만세’, ‘조선인 교육은 조선인 본위로’, ‘산업은 조선인 본위로’, ‘대한독립운동자여 단결하라’ 등의 격문 인쇄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거사일이 임박하는데 자금이 없어 격문을 배포가 어려워지자 권동진에게 1만원의 자금을 요청하여 쾌락을 받아내었다. 그러나 6·10만세운동의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일경에 체포되어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천도교 구파청년단 상무위원, 천도교 중앙교회감사위원 겸 청년동맹대표로 활동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최면식 공적비
최면식(1891~1941)은 경기 포천(抱川) 사람이다. 1941년 9월 만주(滿洲)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이에 필요한 자금을 수합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징역 6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17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활동하였다.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 등이 주도한 대한광복회는 1915년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이 통합하여 결성된 혁명단체였다. 그는 이병호(李秉昊)와 함께 전라도 지역의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 수합에 힘을 쏟았고, 또 친일부호 처단에 필요한 무기를 채기중에게 제공하였다. 그러던 중 1918년초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일경에 붙잡혀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광복회의 재건에 힘쓰다가 1921년 9월 다시 붙잡혔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최면식 묘
최면식(1891 - 1941)은 경기 포천(抱川) 사람으로, 1941년 9월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자금을 수합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그 이후 1917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활동하며 군자금 수합 및 무기 조달에 협력하였다. 그러던 중 1918년 초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일경에 붙잡혀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광복회의 재건에 힘쓰다가 1921년 9월 다시 붙잡혔으나 병보석으로 출옥한 뒤 순국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김용기, 안응건 유적비
김용기(1901~1983)는 평북 선천(宣川) 사람이다. 1917년 만주 흥경현(興京縣)으로 이주하였으며 1920년에는 독립군에 입대하여 전덕원(全德元)의 부하로서 일본영사관 습격 등의 활약을 하였다. 그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김좌진(金佐鎭) 휘하로 전속되어 청산리독립전쟁(靑山里獨立戰爭)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1923년 8월 6일에는 의군부(義軍府) 특파원으로 제1소대 이경일(李京日) 인솔하에 34명이 의주군(義州郡) 청성진(淸成鎭)에 들어와 3개대로 나누어 8월 7일 밤에 청성진 경찰주재소를 비롯하여 우편소·면사무소 등을 습격하여 방화(放火)하는 등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25년 3월 2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7호 위반·살인·방화·강도죄로 징역 6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안응건(1886~1921)은 1919년 자택에서 태극기 14본을 제작하고 독립선언문을 전 주민에게 배부하여 대한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는 등 독립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황창오 기념비
황창오(1896 - 1982)는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 참가하여 고향인 황해도 해주 동운면 삼정리에서 대중을 규합, 조직하여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계속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투쟁조직을 만들다가 일본 경찰의 감시와 탄압을 받게 되자, 1920년 5월 상해로 망명하였다. 같은 해 7월 상해에서 대동단(大同團) 가입 후 일제와의 무력독립투쟁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군자금을 모집할 목적으로 국내에 들어와 활약하다 1921년 이 사실이 발각되어 일본 경찰에 붙잡혀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불복, 항소하여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27년에 가석방되었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