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아카데미 역사기록 백과사전

이천 애국지사 공훈비

유형
비석
주소
경기도 이천시 관고동 418-2

사적지 지도 안내

길찾기   |   로드뷰

사적지 개요

이천시 설봉공원에 있는 충효동산에는 고려부터 대한제국까지 이천이 낳은 충신과 애국지사, 그리고 효자와 열녀 72명을 기리고 있는데, 거란의 소손녕이 침입해 왔을 때 외교의 힘으로 물리친 장위공 서희(章威公 徐熙) 장군을 중심으로 오른쪽 벽면에 이천을 빛낸 22분의 애국지사의 공적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소개되어 있는 애국지사는 다음과 같다.
구연영(국내항일, 독립장, 1963년), 김봉기(의병, 애국장, 1991년), 임형순(의병, 애국장, 1995년), 전덕기(계몽운동, 독립장, 1962년), 박정심(의병,애족장, 1995년), 윤순채(의병, 애국장, 1995년), 박경채(의병, 애족장, 1995년), 구정서(의병, 애국장, 1991년), 김원조(국내항일, 독립장, 1963년), 유성근(만주방면, 애국장, 1990년), 이기룡(임시정부, 애국장, 1991년), 박종설(3.1운동, 대통령표창, 1995년), 이상혁(3.1운동, 애족장, 1990년), 한석동(3.1운동, 애족장, 1990년), 권중효(3.1운동, 애족장, 1990년), 이수흥(만주방면, 독립장, 1962년), 유택수(만주방면, 독립장, 1968년), 유남수(국내항일, 애족장, 1990년), 김현국(문화운동, 애족장, 1990년), 나기창(국내항일, 애족장, 1990년), 김기주(광복군, 애족장, 1990년), 박영순(국내항일, 애족장, 1990년)

인물정보

성명
구연영
한자명
具然英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64 ~ 1907
본적
경기도 광주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3

공적개요

1. 1898년 남대문 상동교회(南大門尙洞敎會)에서 엠원청년회(靑年會)를 조직(組織)(동교회목사(同敎會牧師) 전덕기(全德基)를 중심(中心)으로) 하여 배일사상 고취(排日思想鼓吹)하다. 2. 그 후(後) 이필주(李弼柱), 최성모(崔聖模), 주시경(周時經), 김창환(金昌煥) 등 과 상동교회(尙洞敎會) 청년회원(靑年會員)으로 활동(活動)하다. (친일파(親日派)를 공해(攻害)하다) 3. 1900년 구국회(救國會)를 조직(組織)하다. 4. 1905년 이후(以後) 구국(救國)을 통(通)하여 일진회 타도(一進會打倒)에 전력(全力)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P. 424 배일순열전(排日殉列傳) P. 266) 5. 1907년 7월 16일 경기 이천(京畿利川)에서 그의 아들 구정서(具禎書)와 함께 일경에게 피체 총살되다. (이회소(李會所)?의 동국혈사 권(東國血史券)2 P.19 항일순국의열사전(抗日殉國義烈士傳) P.266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P.424 등의 사료에도 소록(所錄)되다)

인물정보

성명
구정서
한자명
具禎書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82 ~ 1907
본적
경기도 광주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1

공적개요

1904년 보안회와 1907년 대한자강회에 가입하여 배일운동에 활동하다가 1907년 경기도 광주에서 부친(구연영)이 조직한 구국회에 참여하여 일진회의 친일행위를 성토하며 항일운동을 하던 중 일진회원의 밀고로 일군에게 피체되어 순국함.

인물정보

성명
권중효
한자명
權重孝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5 ~ 1935
본적
경기도 이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4. 2 이천군(利川郡) 모가면(暮加面) 응봉산(鷹峰山)에서 면민(面民) 다수를 동원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기주
한자명
金基周
운동계열
광복군
생몰년도
1924 ~ 2013
본적
경기도 이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44. 12.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총사령부(總司令部) 경위대(警衛隊) (중경(重慶) 토교(土橋))

김기주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원조
한자명
金遠祚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84 ~ 1922
본적
경기도 이천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3

공적개요

3.1운동때 이천(利川)에서 만세시위 참가. 만주군정부(滿洲軍政府)의 연락기관을 서울에 설치하기 위한 군자금모집을 모의 실행타가 1920년 음(陰) 12월 28일에 피체기소 되어 미결2년(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 옥중엽서(獄中葉書)) 10년 복역하고 옥중사(獄中死)(피살되었다고 전함). (매일신보(每日新報) 1921.3.9, 독립신문 단기 4278년 11월 11일, 공적서 633)

인물정보

성명
나기창
한자명
羅基昌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22 ~ 2012
본적
경기도 이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38. 4월 경기공과학교(京畿工科學校) 재학중(在學中)에 방학(放學)을 이용(利用)하여 농촌 청년(農村靑年)들에게 독립 정신(獨立精神)을 계몽(啓蒙)하였고 일본어 사용(日本語使用), 신사참배(神社參拜)등을 반대(反對)하고 동지(同志)를 규합(糾合)하여 중국상해(中國上海)로 망명(亡命)할 계획(計劃)을 세우고 추진(推進)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단기(短期) 1년, 장기(長期) 3년형(年刑)을 받아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나기창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박경채
한자명
朴慶彩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86 ~ 미상
본적
경기도 기타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5

공적개요

1907년 음력(陰曆) 7월 경(頃) 김만길(金萬吉),임성칠(林聖七) 등과 함께 방인관 의진(方仁觀[寬]義陣)에 가담하여 경기도(京畿道) 여주(驪州),안성(安城),죽산(竹山) 등지에서 일병과 접전한 후 은신하였다가 피체(被逮)되어 유형(流刑) 10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박경채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박영순
한자명
朴英淳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25 ~ 2001
본적
경기도 이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39년 8월 29일 황취소년단(荒鷲少年團)을 조직(組織) 단장(團長)에 선임(選任)되어 단원(團員)을 지휘(指揮) 항일(抗日) 격문(檄文) 우송(郵送) 및 첩부(貼付) 충무공(忠武公) 사당 참배(祠堂參拜) 등등(等等) 항일(抗日) 활동중(活動中) 피체(被逮) 1943년 2월 경성지법(京城地法)에서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죄(違反罪)로 징역 단기(懲役短期) 2년 장기(長期) 3년형(年刑)을 받고 인천형무소(仁川刑務所)에 2년간(年間) 복역(服役)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박정심
한자명
朴正心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78 ~ 미상
본적
경기도 기타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5

공적개요

1907년 8월경(月頃) 방인관 의진(方仁寬義陣)에 가담하여 충북(忠北) 죽산(竹山)과 강원(江原) 원주(原州) 등지에서 일본수비대와 교전하는 등 활동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유형(流刑) 5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박정심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박종설
한자명
朴鍾卨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8 ~ 1947
본적
경기도 이천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5

공적개요

1919.3.30 경기도(京畿道) 이천군(利川郡) 마장면(麻長面)에서 오천(午川)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고 피체(被逮)되어 징역 5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유남수
한자명
柳湳秀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05 ~ 1950
본적
경기도 이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26년 11월 동소문 사건(東小門事件), 안성 사건(安城事件), 이천(利川)사건, 수은동(授恩洞)사건의 공범으로 주범 이수흥(李壽興)과 유택수(柳澤秀)를 자기집에 은닉(隱匿)하고 거총(擧銃)을 보관(保管)하는 등 적극적인 이(李), 유(柳)의 활동을 방조(幇助)하다가 피체(被逮)되어 1928.7.10 경성지법(京城地法)에서 징역 2년형을 받음.

유남수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유성근
한자명
柳聖根
운동계열
만주방면
생몰년도
1878 ~ 1942
본적
경기도 이천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20. 7월 중국 동삼성(中國東三省)에서 대한독립야단(大韓獨立野團)에 가입(加入)하여 모험국장(冒險局長)이 되여 단천 은율 등지(端川殷栗等地)에서 군자금(軍資金) 12,650원(圓)을, 성진(珹津)에서 군자금(軍資金) 2천원(千圓)을 모금(募金)하고 또한 추가(追加)로 6,650원(圓)을 모집(募集)하고 여주(驪州)에서 일경(日警)에게 체포(逮捕)되여 1921. 8. 16 평양지방법원(平壤地方法院)에서 강도죄(强盗罪)로 징역 12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유성근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유택수
한자명
柳澤秀
운동계열
만주방면
생몰년도
1901 ~ 1929
본적
경기도 이천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8

공적개요

1. 1926년 9월 참의부원(參議府員) 이수흥(李壽興)과 같이 안성(安城) 부호(富豪) 박승대 가(朴承大家)에 침입하여 군자금을 요구 불응하자 이수흥(李壽興)이 사살함 2. 1926년 동대문파출소 습격 (이수흥(李壽興)과 같이) 3. 1926년 10월 25일 수은동(授恩洞) 전당포(典當鋪)를 단독침입하여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반항하므로 사살함 4. 1926년 11월 피체되어 1929년 12월 20일에 사형언도를 받고 1930년 2월 27일 사형 집행 당하였음 (이상 1.2.3.4항 동아일보(東亞日報) 1926.11.12, 1928.6.29, 1926.2.28 본회(本會) 소장 사형관계서류(所藏死刑關係書類) Reel No.355)

인물정보

성명
윤순채
한자명
尹順采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80 ~ 미상
본적
경기도 기타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5

공적개요

1909년 음력(陰曆) 1월 - 2월 충북(忠北) 청주군(淸州郡)과 진천군(鎭川郡) 일대에서 한봉서(韓鳳瑞) 의병진(義兵陣)에 가담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군자금(軍資金)을 모금(募金)하는등 활동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유형(流刑) 10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윤순채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이기룡
한자명
李起龍
운동계열
임시정부
생몰년도
1885 ~ 1951
본적
경기도 이천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1

공적개요

1919.4월 중국(中國) 상해(上海)에서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경기도(京畿道) 의원(議員)으로 선출되어 청원위원회 이사(請願委員會理事)로 활동하고 대한적십자사(大韓赤十字社) 상의원(常議員)이 되었으며 1921.10월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에서는 임시정부(臨時政府) 옹호를 위한 활동을 하였고 1922년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에 가입하여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이기룡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이상혁
한자명
李商赫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3 ~ 1921
본적
경기도 이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4.1 경기(京畿) 이천군(利川郡) 신둔면사무소(新屯面事務所) 앞에서 동민(洞民) 500여명(餘名)과 같이 독립만세’(獨立萬歲)를 부르며 시위(示威)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1년형(年刑)을 받고 옥고(獄苦)를 치룬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수흥
한자명
李壽興
운동계열
만주방면
생몰년도
1905 ~ 1929
본적
경기도 이천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1923년 상해사관학교(上海士官學校) 졸업(卒業)하고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들어가서 1926년 5월 귀국(歸國) 2. 동 6월 10일 서울 동소문파출소(東小門派出所)에 들려 권총(拳銃)7발(發)을 난사(亂射)하고 그 길로 안성(安城)에 가서 부호 박필병(富豪朴弼秉)을 찾아 군자금(軍資金)을 청구(請求)하였으나 듣지않으므로 즉시(卽時) 사살(射殺)하고 3. 동 10월 21일에 이천 백사면(利川栢沙面)에 가서 일경(日警) 주재소(駐在所)를 습격(襲擊) 4. 서울수은동(授恩洞) 대성 전당포(典當鋪)를 찾아가서 군자금(軍資金)을 청구(請求)하였으나 포주(鋪主) 김기영(金基榮)의 태도(態度)가 불순(不純)하므로 즉석(卽席)에서 사살(射殺) 왜경(倭警)은 무장 경관(武裝警官) 2000여명(余名)을 동원(動員)하여 동11월6일 밤에 피체(被逮)되어 사형(死刑)에 처(處)하였다.

인물정보

성명
임형순
한자명
任馨順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미상 ~ 1908
본적
미상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5

공적개요

1908년 강원도(水原道) 일대(一帶)에서 의병장(義兵將)으로 활동하던 중 전사(戰死)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전덕기
한자명
全德基
운동계열
계몽운동
생몰년도
1875 ~ 1914
본적
경기도 이천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서울 상동(尙洞) 감리교회(監理敎會) 목사(牧使), 신민회(新民會) 회원(會員)으로 서기 1919년 12월 소위 사내총독(寺內總督) 암살음모가 있다고 날조하여 윤치호(尹致昊), 양기탁(梁起鐸) 등 소위 500인 사건으로 투옥되고 기타 애국지사가 해외에 망명하자 신민회의 영수(領首)가 되어 일경(日警)의 감시를 피하면서 국권회복에 진력하다가 서울에서 병사(病死)하였음.

전덕기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한석동
한자명
韓石東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3 ~ 1933
본적
경기도 이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4. 2밤 경기(京畿) 이천군(利川郡) 모가면(暮加面) 서동리(西垌里) 응봉산(應峰山)에 주민(住民) 150여명(餘名)과 같이 올라가서 독립만세’(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며 시위(示威)를 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1년형(年刑)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