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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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주 집 터
윤세주(1901-1942)는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밀양에서 대규모 시위를 주동하였으며, 독립신문 밀양지국을 운영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하여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서 신흥(新興)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1919년 11월 9일에 길림성(吉林省) 파호문(巴虎門) 밖의 화성여관(華盛旅館)에서 김원봉, 황상규, 곽재기 등과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고 무장항일투쟁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그 제1차 목표로 일제 핵심 인물 암살과,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등 주요 기관을 폭파할 계획을 세우고 같은 해 연말 경 국내에 특파되었다. 그러나 부산과 밀양에 반입된 폭탄과 무기 등이 일경에게 발각되어, 선언문 등과 함께 압수되었으며, 이에 윤세주는 동지들과 같이 체포되었다. 1921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 형을 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민족문화사업에 참가하여 표면적으로는 중외(中外)일보 기자와 경남 주식회사 사장으로 일하다가 1932년 다시 남경(南京)으로 망명하였다. 이곳에서 조선민족혁명당 간부학교를 제1기생으로 수료하고, 정치철학 교관으로 근무하였으며, 1934년 3월에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을 위한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독립운동 전선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한 1935년 4월에는 낙양(洛陽)군관학교를 졸업한 군사 간부들에게 사회과학을 교육하는 교관으로도 활약하였다.1936년 8월 민족혁명당이 창립되자 그는 중앙집행위원과 중앙상무위원 등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38년 10월 중국 한구(漢口)에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조직되자, 그는 한문반 주편위원(韓文班主編委員)에 임명되어 기관지 「전고(戰鼓)」를 편찬 발행하였다. 1942년 5월 태항산(太行山)에서 마전반격전(麻田反擊戰)에 참전하였다가 동년 6월에 전사하여 중국 태항산에 안장되었다. 이후 1950년에 중국 한단시 진기로예 국가열사능원으로 묘가 이장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선열의 불꽃(밀양독립기념관 외곽 조형물)
선열의 불꽃 및 흉상은 밀양독립운동기념관 외곽에 설치된 조형물이다. 밀양독립운동기념관은 2008년 6월 20일 개관한 시설이며 전국에서 세번째로 건립된 독립운동기념관이다. 조형물은 중앙에 놓인 선열의 불꽃탑을 중심으로 밀양출신 독립지사 36분의 흉상이 둥글게 둘러싼 모습인데 선열들의 '조국해방에 대한 염원'을 담아 조성한 것이다. 흉상에 새겨진 애국지사들은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중 애족장 이상의 서훈자 서른여덟 분 중 서른네분(손경헌,손봉현,오학성,백운하 제외)과 밀양 독립운동의 선구자 을강 전홍표, 그리고 약산 김원봉을 포함한 서른 여섯 분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36분의 존함은 가나다 순으로 강인수선생, 고인덕선생, 김대지선생, 김명규선생, 김병환선생, 김상윤선생, 김성두선생, 김성수선생, 김영복선생, 김원봉선생, 김홍규선생, 권잠술선생, 박지원선생, 손일민선생, 손호선생, 손봉현선생, 신석원선생, 윤창선선생, 이상관선생 ,윤세복선생, 윤세용선생, 윤세주선생, 윤치형선생, 이병철선생, 이언권선생, 이찰수선생, 임굉(임병찬)선생, 전홍표선생, 조우식선생, 최수봉선생, 한봉근선생, 한봉삼선생, 한봉인선생, 홍재문선생, 황문익선생, 황상규선생이시다.
백정기 묘
백정기(1896 - 1934)는 전북 정읍(井邑) 사람이다. 1919년 8월 그는 동지 4명과 함께 서울·인천에 잠복하여 일군(日軍)의 기관 파괴를 계획하다가 사전에 탄로되자 만주 봉천(奉天)으로 망명하였다. 1920년 겨울 재차 서울에 잠입하여 군자금 조달을 위해 활약하던 중 1921년 봄 중부경찰서에 구금되었으나 광부로 변성명하고 본적과 행적을 속여 방면되었으며 경향 각지와 북경 등지를 왕래하며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4년 여름 그는 중대사명을 띠고 동경에 잠입하여 조천수력공사장(早川水力工事場)에 은신하여 대파괴를 계획하였으나 발각되어 북경에 귀환하였다. 1925년 상해에서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하였으며, 7월에는 상해에 총파업운동이 일어나자 남화청년(南華靑年) 아나키스트연맹과 연락하고 노동운동을 전개하여 10여만의 대노동조직을 만들고 노동운동으로서 혁명운동이 되도록 지도할 목적으로 한때 철공장의 직공생활까지 하였다. 1927년 가을 남경(南京)·상해 등지의 한중(韓中) 양국의 동지를 규합하여 복건성(福建省) 천주(泉州)에서 민남25현( 南二五縣) 민단편련처(民團編練處)라는 농민자위군을 조직하여 3,500의 대오를 편성하고 공산군과 지방 토비(군벌)에 대한 수호 및 농민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9월 남경에서 개최된 한국·중국·일본·필리핀·베트남·인도 등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인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대회(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大會)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30년에 북만(北滿)으로 가서 재북만한국무정부주의연맹(在北滿韓國無政府主義聯盟)의 동지들과 자유혁명자연맹(自由革命者聯盟)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혁명의식의 고취와 민중훈련에 전력하였다. 1932년 2월 상해사변 직후에 'BTP'라는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고 일제에 대한 파괴공작을 추진하였다. 이듬해 3월 17일 주중일공사(駐中日公使) 유길명(有吉明)이 일본정객, 참모부원 및 중국의 친일정객, 군인 등 백여명을 상해 홍구(虹口) 육삼정(六三亭)이란 일본인 요정에 초대한다는 기밀을 탐지하여 습격할 준비를 완료하고 대기하던 중 일제의 역습을 받아 동일 이강훈(李康勳) 등과 함께 붙잡혔다. 그는 일본장기법원(日本長崎法院)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지병이던 페병이 재발·악화되어 1934년 6월 5일 오후 11시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조용한 묘
조용한(1894 - 1935)은 1920년 음력 12월 20일경 김홍제(金鴻濟)·오인영(吳麟泳)과 함께 독립군자금을 모집한 후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 참여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완구용 권총 한자루를 구입한 다음 중국 동삼성(東三省) 소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명의의 인장을 조각하여 군자금 영수증서를 작성하고 수원(水原)·안성(安城)·진위(振威) 등지의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오인영을 방문하러 가던 중 일경에게 붙잡혔다. 1921년 5월 5일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에서 소위 정치범죄처벌령 위반 및 강도예비 등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동년 6월 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1928년 5월 중국 상해로 도항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총장인 친형 조용은(趙鏞殷)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제주항일기념관
제주항일기념관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에 있는 제주 지역 항일 독립 운동의 역사 자료를 전시한 박물관이다. 제주 지역 항일 독립 운동에 관한 역사적 자료를 수집·보존·전시함으로써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자주 독립 정신을 계승·발전시키고 나아가 후대에 올바른 역사관과 애국 애향 정신 함양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제주항일기념관은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미밋동산인 조천만세동산 성역화 공원 내에 위치한다.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로 제1전시실·제2전시실·영상관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제1전시실에는 3·1운동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1876~1945년의 항일 운동 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며 항일운동연표, 일제 침탈과 기구의 개편, 송죽매의 결의, 지식층의 성장과 민족교육, 제주도 항일운동 발생지역도, 법정사 항일운동의 패널과 디오라마, 의병운동, 제주인의 항일운동 부조(浮彫), 일제의 강제 침략과 항일 운동 관련 사진 그래픽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제2전시실에는 3·1운동 전국상황도, 전국 3·1운동의 실체, 조천만세운동의 패널과 디오라마, 백응선 비석, 독립희생회 군자금 모금운동, 옥중생활사, 항일학생운동, 항일청년운동, 해녀항일운동의 매직비전과 패널, 종합그래픽, 제주인의 국외 항일 운동, 항복문서 조인식 모형, 백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영상관에서는 「제주의 빛」과 「세계 속의 낙원 북제주군」이라는 영상물이 30분가량 상영된다. 3·1운동 당시 제주 지역에서 맨 처음 만세운동이 시작된 제주항일기념관 앞 만세동산에는 3·1운동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소장 자료로는 항일 운동 관련 기록문서 110여 점, 독립 운동가 사진 170여 점, 국제한국연구원 기탁 자료 10여 점, 「일본군의 최후」 영상 필름 1점, 백범김구기념사업협회가 제공한 사진 자료 10여 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제공한 사진 자료 70여 점, 훈장 4점, 기타 기증 자료 97점 등 총 600여 점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조설대비
조설대(朝雪臺)는 한일 강제합방의 수치를 설욕하겠다는 의미의 마애명(磨崖銘: 암각문)을 새긴 곳이다. 제주 애국지사 12인은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이 곳에 모여서 조선의 수치를 설욕하겠다는 구국 맹세를 하고, 이 바위에 그 맹약을 새겼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동년 12월 제주 유림 이응호, 김좌겸, 김병로, 김병구, 김이중, 서병수, 고석구, 김석익, 강철호, 강석종, 임성숙, 김기수 등 12인은 문연서숙에 모여 집의계(集義契)라는 비밀결사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오라동 연미마을 바위산인 망곡단에 모여 집의계 선언문을 낭독하고 의병투쟁을 다짐하였다. 본래 망곡단은 국상을 당했을 때 선비들이 향을 피우고 북향사배하던 유서 깊은 곳이었다. 이후 이곳은 집의계 회원들에 의해 ‘조선의 치욕을 설역한다’라는 뜻의 조설대(朝雪臺)로 부르게 되었다. 조설대를 새긴 마애명은 현무암 자연석에 새겨져 있어, 현재는 보호석으로 가려져 있다. 동산에 세워진 대한광복의사(大韓光復義士), 조설대(朝雪臺) 비석, 집의계 광복의사경모비(集義契光復義士敬慕碑) 등은 후대에 따로 세운 것이다. 대한광복의사비는 일명 12인비라고도 하는데, 집의계를 구성한 12명의 유의 이름을 새겼다.
이중건 행적비
이중건(李重乾. 생몰년도 미상)의 호는 백헌(白軒)이며, 1910년 11월 오봉 이연건과 함께 강마 서당 터에 동명 학교(東明學校)를 설립하였다. 본래 학교 이름은 고구려 시조 동명왕(東明王)에서 비롯되었다고 추측되는데, 교실 6동을 건립한 후 1913년에 개교하였다. 담당 교사들은 이연건과 이중건의 지인으로 구성되었고, 학교 설립 취지에 부합하여 모두가 민족의식이 투철하였다. 동명 학교는 1919년 3월 19일에 열린 함안읍 만세 운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함안읍 만세 운동 당시 사용된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는 동명 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손수 제작하였다.
이수흥 의거지
백사면사무소는 만세 운동이 일어난 곳이자 이수흥이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습격한 곳으로,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의미있는 공간이다. ◇ 백사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 백사면 만세 시위는 송말에 사는 임덕재·임예재·임경순·임재순 등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1919년 4월 2일 마을 사람들을 인솔하고 송말리 앞산에 올라가 만세를 부른 후 면 소재지가 있는 현방리로 행진하였다. 도중에 시위 참가자의 수가 점점 불어나 많은 수의 군중들이 현방리에 모여들었는데, 당시 백사면장인 이연의를 끌어내어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 애국지사 이수흥 경기도 이천(利川) 사람이다. 19세가 되던 해에 만주로 망명하여 김좌진(金佐鎭)이 사관양성을 목적으로 길림성(吉林省)에 세운 신명(新明)학교를 졸업하였다.1923년 7월경에는 대한통의부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대한통의부가 의군부로 확대 개편되자 의군부 총재 채상덕(蔡相德)의 부하로서 무장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그후 임시정부 직할의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에 가담한 그는 1925년 새총독이 시찰여행을 하고 있을 때 압록강 상의 증기 란치(steam launch : 船載大型端艇)에서 총독에게 수류탄을 던지기도 하였으나 성사되지는 못했다.한편 그는 주만참의부 제2중대 특무정사(特務正士)에 임명되어 1926년 5월에 모젤권총 1정과 동 실탄 147발, 부로닝 구식 권총 1정과 동 실탄 29발을 휴대하고 총독 및 일제 고관을 주살하기 위하여 국내로 들어왔다.그는 먼저 군자금이 필요했으므로, 동년 7월 6일 황해도 평산군 안성면 발참리(平山郡安城面發站里)에 사는 김상렬(金相烈)을 찾아가 요청하였으나 뜻일 이루지 못하였다.다시 경기도 이천군 읍내면 중리(邑內面中里)에 사는 유택수(柳澤秀)의 집으로 가던 도중 동월 10일 서울 동소문(東小門)파출소를 습격하여 보초근무중인 일경 덕영승차(德永勝次)를 저격하여 중상을 입혔다. 동년 9월 9일에는 안성(安城)에서 유택수와 함께 군자금 요청을 거절하는 부호 박승육(朴承六)의 아들 박태병(朴泰秉)을 사살하였다.그리고 10월 20일에는 경기도 이천군 현방(玄方) 경찰주재소를 습격한 후 다시 백사(柏沙)면사무소를 습격하여 면서기 송천의(宋天義)를 사살하였다.그는 그후 새로운 계획을 위하여 변장하고 서울로 피신하였다. 동년 10월 25일에는 동지 유택수(柳澤秀)로 하여금 서울 수은동(授恩洞)에 있는 대성호(大成號) 전당포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부친의 부음(訃音)을 듣게된 그는 부득이 수원(水原)으로 내려가 발상하였다. 이때 이천경찰서장 하기(河岐)는 범인의 신장이 불과 5척이라는 말을 듣고 관내에 거주하는 신장이 5척되는 사람을 모조리 조사하게 하였다.이에 따라 일경 3천여명이 동원된 삼엄한 계엄상태의 3개월 동안, 4대사건을 신출귀몰한 수법으로 흔적도 없이 수행하던 그는 유택수와 함께 11월 6일 체포되어 3년의 예심 끝에 1928년 7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29년 2월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무극대교 도주 상니 대성 유적비
강승태(姜昇泰. 1895.05.02.∼1960.02.29.) 지사는 무극대도교(無極大道敎) 도주(道主)로서 독립운동을 하신 분이다. 다른 이름으로 承河, 升玉, 昇華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창씨개명할 때에는 岡本承河로 했다. 호는 龍江, 도호(道號)는 尙尼이다. 全羅南道 濟州島 中文面 下猊里 231번지가 본적으로 되어 있으나, 안덕면 上川里에서 姜彛鎬의 서자로 태어나 上猊里 2276번지에서 살았다. 1903년부터 약 2년 동안 한문을 수학했다. 1908년에는 목포에 가서 한의학을 공부했으며 농사도 지으면서 살다가 1917년에는 태을도(보천교)를 믿었으나 특별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다. 1924년부터 全北 金堤로 가서 修道 생활을 했는데 1930년 꿈에 증산천사(강일순)를 만나 ‘너는 이후 10년간 크게 성공할 때까지 맹목적으로 오로지 수도를 하라’는 신명(神命)을 받아 繼統(법통을 이어받음)하였으며, 1931∼1935년에는 하예리에서 後天大道起運禮를 致誠으로 奉行하며 修道에 정진하였다. 이 시기에 시력을 잃었다. 1936년 1월 27일(음력 1월 4일) 오후 9시경 제주도 안덕면 동광리 강위경(姜渭慶) 집에서 무극대도교(無極大道敎)를 창설하였다.
노루목교회(구연영 창립교회)
노루목교회는 구연영이 1899년 3월 17일에 건립한 것으로, 구연영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의병을 조직하여 국권회복 운동을 펼치던 중, 민족의 희망은 복음 전도에 있음을 깨닫고 여러 교회를 세워 구국운동을 펼쳤다. 구연영(1864~1907)은 1897년 기독교에 입문하여 1898년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웹엣청년회를 조직,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1902년에는 전도사로서 이천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는 구국계몽활동 등의 항일운동을 계속하던 중, 1907년 7월 16일 일본군 수비대에 의해 구국회 지도자들이 붙잡힐 때 피살·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양산 시립독립기념관
양산 지역에서는 1919년 3·1운동 이후 본격적인 항일 독립 운동이 전개되었다. 양산 지역에서는 인근의 밀양이나 울산 지역에서처럼 3·1운동을 주동적으로 이끈 비밀단체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조선국권회복단에서 활동한 윤현태의 영향을 받은 지인과 후배들의 조직체 결성과 이 조직을 주축으로 항일운동이 전개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19년 3·1운동 이후 양산 지역에서의 항일 독립 운동은 청년운동·소년운동·여성운동·농민운동·학생운동 등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양산 시립독립기념관은 양산의 독립운동사를 알리고 자주독립의 정신을 미래세대에 전승하는 목적으로 세워진 역사기억공간이다.
명도석 흉상, 시비
명도석(1885~1954)은 경남 마산(馬山) 사람이다. 1919년 3월 12일 경남 마산의 만세시위를 추진하기 위해 최용규(崔龍奎) 등과 사전협의하여 3월 21일 마산 장날을 기하여 거사키로 작정하고 당일의 시위를 위한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며 행진 시위하게 하였다. 1920년 가을 미국에서 항일활동을 펴던 박용만(朴容萬)의 밀사와 중국 봉천성(奉天省) 안동(安東)에서 만나던 중 일경에게 붙잡혀 6개월간 구류되었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1921년 7월 20일 마산 노동야학의 교사가 되어 청소년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주며 항일교육에 힘썼다. 또한 1927년 7월 20일 신간회(新幹會) 마산지회창립대회(馬山支會創立大會)에서 간사(幹事)로 선출되고 1929년 1월 28일 신간회 마산지회 정기총회에서 지회장(支會長)으로 선임되었으며, 1930년 3월 31일 제3회 정기총회에서 집행위원이 되어 신간회(新幹會) 해소시까지 활동하였다. 1940년 2월 일제는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걸고 민족말살을 강행하기 위한 방편으로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였으나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민족정신을 고수하였다. 1944년 8월 그는 여운형(呂運亨)의 주도로 전국에 걸쳐 결성된 건국동맹(建國同盟) 경상남도 조직책으로 위촉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