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TOTAL. 315 건
진단학회 창립지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위치한 진단학회 창립 터 표지석이다. 본 터는 한국 역사 및 문화를 연구하기 위해 1934년 5월에 창립된 진단학회 사무소가 1936년 초에 성북동으로 옮겨갈 때까지 자리했던 곳이다.
민영환 집
민영환(1861 - 1905)은 당대 최고의 권문세가 집안 출신으로 예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낸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순국지사로,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 후 국가의 제반 제도의 개혁을 시도하였고, 친일적인 각료들과 대립하여 일본의 내정간섭을 비판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한일협약을 적극 반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1905년 11월 종로 이완식(李完植)의 집에서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서북학회 표지석
서북학회는 1908년 서북 · 관서 · 해서지방 출신자들이 서울에서 조직한 애국계몽단체이다. 애국계몽운동은 1907년 중엽에 이르러 관서와 관북지방에서 뿌리를 내려 일정한 성과를 거두게 되자 전 민족적 전 국가적 차원으로의 확산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강압책으로 국권회복운동이 더욱 어렵게 되자, 이러한 제약을 보다 적극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를 통합하여 1908년 1월 조직하였다. 구성원은 주로 평안도·함경도·황해도민이다. 주요 임원은 이동휘(李東輝)·안창호(安昌浩)·박은식(朴殷植)·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최재학(崔在學) 등이었다. 임시회장 이동휘의 지도 하에 서우회관(西友會館)에서 조직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회장으로 정운복(鄭雲復), 부회장 강윤희(姜玧熙), 총무 김달하(金達河)를 선출하였다. 1909년에는 회장으로 오상규(吳相奎), 부회장 정운복, 총무 김명준(金明濬)을 선출하였다. 조직은 서우학회·한북흥학회를 토대로 하였다. 서울에 총사무소를 두었으며, 회장 1명, 부회장 1명, 총무·부총무 각 1명, 평의원 30명, 사찰원(司察員), 회계 각 1명, 서기 2명이었다. 월보(月報) 간행을 위해 주필 1명, 편집 1명, 협찬원(協贊員) 19명을 두었다. 개별 사무를 처리할 때는 위원이나 총대(總代)를 정하여 담당하게 하였다. 31개 지역에 지회를 설치하고 69개 지역에 지교(支校)를 두었다. 「사립학교령(私立學校令)」·「학회령(學會令)」 등 애국계몽운동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자, 1909년 2월 이후에는 37개 지역에 학사시찰위원(學事視察委員)을 선정, 지회·지교 활동을 보완하였다. 서북지방민으로 국권 회복을 원하는 사람이면 관(官)·민(民)을 막론하고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회원은 2,300명 정도에 이른 것으로 추산되며, 신지식층·신흥시민층을 중심으로 한 광범한 시민층이었다. 항일교육구국운동은 국민들에게 신교육의 절실한 필요를 계몽하는 것이었다. 교사 양성에 주력하는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 노동자 교육을 위한 수상야학(水商夜學)·측량과(測量科)·심학강습소(心學講習所)·농림강습소(農林講習所) 등을 설치,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각 지역 사립학교 교무의 지도와 후원을 통하여 전개되었다. 계몽강연활동은 학회의 여러 모임, 특히 운동회를 통해 광범위하게 파급되었다. 당시 상황을 알리고 애국심을 고취시켰으며 실력양성운동에의 참여를 촉구하였다. 1908년 2월부터 『서북학회월보』라는 학보를 발간, 1910년 1월까지 계속하였다. 학보를 통해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과 민권론(民權論)에 기반을 둔 실력양성론·단체론·애국론·교육구국론·실업진흥론·사회관습개혁론 등을 전달하여 민중의식을 계발하고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민족산업진흥운동이 중요시된 것은 서북학회의 사회적 기반이 신흥시민층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업교육을 장려하고, 특히 일제의 경제적 침략과 관련해 농림(農林)의 진흥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좀더 광범한 지역과 대중에게까지 애국계몽운동을 확산시키고자 하였다. 「사립학교령」·「학회령」·「기부금품모집취체규칙(寄附金品募集取締規則)」·「지방비법(地方費法)」 등 일제의 탄압에 대한 구체적 대응책을 제시하여 민중들이 적극 대처하도록 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 뒤 일제의 탄압이 더욱 강화되고 서북학회 분쇄책이 시도되자, 1909년 독립전쟁 전략을 채택하여 국외에서는 독립군기지 건설과 무관학교 설립운동에 주력하였다. 국내에서는 사립학교 유지방법 강구 등의 교육운동과 농회·농림강습소 설립, 민족산업 진흥운동 등을 계속 추진하였다. 이 학회는 애국계몽운동을 광범위하게 확산시켰을 뿐 아니라 애국계몽운동을 진정한 국권회복운동으로 전개되게 하였다. 1909년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만주 등지로 근거지를 옮겨 독립군 기지를 조성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애국계몽운동을 국외 독립군운동으로 전환시키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기관지로는 『서우(西友)』를 계승한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가 있다. 1910년 9월 강제 해산되었다. 서북학회는 1909년 초 신민회와 같이 독립전쟁전략을 최고전략으로 채택하여 독립군기지건설에 주력하여 국외독립운동의 초석이 되었으며, 국내활동 특히 교육운동은 일제하 민족운동의 원동력이었다.
이상화 시비
이상화(1901 - 1943)는 대구(大邱) 사람이다.일제에 대한 저항시인이며, 대구고보 재학시인 1919년 3월 8일의 대구서문외(西門外) 장날을 이용하여 이만집(李萬集)·김태련(金兌鍊)·김영서(金永瑞) 등과 함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학생 시절인 1918년, 일제에 대한 민족 저항시 「신라제(新羅祭)의 노래」를 발표하여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으며, 3월 8일의 서문외 장날의 독립만세 운동 때는 계성중학교(啓聖中學校) 학생들과의 연락책으로 활약하면서 연합시위를 전개하여, 여기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군중에게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그 뒤에도 저항시를 통하여 민족혼을 일깨웠는데 1922년에는 『백조(白潮)』지 창간호에 「나의 침실로」를, 1926년에는 『개벽(開闢)』지 6월호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을 발표하였다. 1923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잡지 향영(響影)을 발간하였으며, 이듬해 귀국하여 1924년부터 1934년까지 문단을 제패했던 카프(KAPF : Korea Proletarian Artist Federation)를 발기하여 활동하였다.1935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친형인 이상정(李相定) 중국군 장군과 조국의 독립을 위한 국내조직을 협의하고 1937년 귀국하였다. 그러나 곧 대구경찰서에 붙잡혀 2개월간 구금되어 고문을 받고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국스카우트발상지비(조선소년군)
조철호(1890 - 1941)는 일제 치하의 청소년들에게 독립사상과 민족적 단결을 고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조선소년군을 창설했다. 1922년 10월 5일 중앙고등보통학교(현 중앙고등학교)의 솔밭 후원에서 8명의 학생을 단원으로 조선소년군 경성제1호대(京城第一虎隊)를 발대하여 조선소년군이 창설됐다. 이것이 연원이 되어 현재의 한국스카우트운동이 시작됐다. 중앙고등학교는 한국스카우트운동의 본산이자 발상지다. 조선소년군의 창설을 기리고자 중앙중·고등학교는 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2008년 3월 22일 교정에 '한국스카우트발상지비'를 건립하였다.
근우회 동판
근우회는 1927년에 조직되었던 독립운동 및 여성운동 단체이다. 1919년 3·1운동은 조선총독부의 통치 방침에 영향을 주어 이른바 ‘문화통치’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문화통치’는 경찰력의 증강을 바탕으로 한 기만적 통치방침이었으나 역설적으로 그간 조선인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언론·출판·집회·결사의 공간이 일부나마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공간 위에서 각 분야로부터 사회운동이 활발해졌고, 여성운동도 그중 하나였다. 먼저 여성교육과 계몽을 중심에 두었던 여성단체들이 1920년대 전반 주된 여성운동의 명맥을 형성하였다. 조선여자교육협회(朝鮮女子敎育協會)와 조선여자고학생상조회(朝鮮女子苦學生相助會) 등 여성의 교육 및 계몽을 통한 생활개선을 도모하는 단체들이 여럿 생겨나 활동하였다. 특히 종교 단체, 그중에서도 기독교에 기반을 둔 여성들은 활발하게 여성단체를 조직하여 1920년대 초반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대표적으로는 유각경(兪珏卿), 김활란(金活蘭) 등이 주축이 되었던 조선여자기독청년회연합회(YWCA)가 있었다. YWCA는 근우회 창립 전까지 조선에서 가장 규모가 큰 여성단체였다. 이들은 강연회, 강습 등을 통해 여성에게 신지식을 보급하고 여성의 지위 향상 및 해방을 주창하는 한편, 축첩 폐지, 공창제 폐지 등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여성단체들의 활동은 1920년대 민족주의 여성운동의 흐름을 형성했다. 한편 1920년대 초 조선에 사회주의 사조가 소개되고 사회주의 이론에 입각한 사회운동 단체들이 결성되기 시작하면서 여성운동에서도 사회주의적 여성해방 이론이 점차 등장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여성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기보다는 무산계급 여성, 여성노동자들이 여성운동 및 여성해방의 주체라고 보았으며 궁극적으로는 무산계급운동에 합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단순한 여성의 지위 향상에 운동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여성운동이 사회변혁운동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적 기반 위에서 1924년 5월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가 창립되었으며, 사회주의 여성단체들이 각 분파마다 조직되었다. 북풍파(北風派)·화요파(火曜派) 계열의 경성여자청년동맹(京城女子靑年同盟) 및 서울파의 경성여자청년회(京城女子靑年會)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위의 민족주의 계열 여성운동과 사회주의 계열 여성운동은 각기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민족주의 계열에서는 종교적 기반으로 인하여 여성의 권리에 대해 보수적인 인식을 보이고 있었다. 따라서 여성 대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무산계급 여성들의 현실을 타개해 줄 구체적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1923년 이후부터는 비교적 침체 상태에 접어든 상태였다.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운동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성에 대한 첨예한 이론적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지만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에 의한 도시 중심의 운동이었기 때문에 역시 여성의 대다수인 지방과 농촌 여성들에까지 대중적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1926년 초 조선 사회운동계에 민족협동전선을 결성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 결과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었다. 자연스럽게 여성운동 진영에서도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을 아우르는 전국적 규모의 여성단체를 결성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민족주의 계열에서는 이념 및 지도력 부재를 협동전선을 통해 돌파하고자 하였고, 사회주의 계열에서는 봉건유습 타파라는 실질적인 여성해방 과제를 포용하고 기존의 대중성 부족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근우회는 여성해방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서로 다른 가치와 방법론을 가지고 있었던 운동 진영들이 모여 만들어낸 것이었다.
조병세 순국지(충훈부)
조병세(1827 - 1905)는 개항기 한성부판윤,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순국지사이다.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치현(穉顯), 호는 산재(山齋). 현감 조유순(趙有淳)의 아들이다. 음관(蔭官)으로 참봉에 임명되었다가 1859년(철종 1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고 1864년(고종 1) 실록청도청낭청으로서 『철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874년 함경도암행어사, 1877년 대사헌에 승진되었고 이어 의주부윤, 다시 대사헌, 1887년 공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예조·이조의 판서, 1889년 한성부판윤을 지내고 곧이어 우의정에 올랐다. 1893년 좌의정이 되었으나, 이듬해 동학농민운동·청일전쟁·갑오개혁 등 큰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고, 일제의 침략이 가중되면서 세상이 어수선하게 되자 정계를 떠나 가평으로 은퇴하였다. 뒤에 다시 중추원의장(中樞院議長)과 의정부의정(議政府議政)을 역임하고 국왕의 고문인 특진관(特進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주로 가평에 은퇴하고 있으면서, 1896년 폐정개혁을 요구하는 시무(時務) 19조를 상소하였다. 그 뒤 1898년 재상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으며, 1900년 다시 입궐하여 국정 개혁을 건의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5조약이 체결되자 국권회복을 위해 79세의 노구를 이끌고 상경, ‘을사5적’의 처형을 주청하려 하였으나 일본군의 방해로 고종과의 면담이 거절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당시 장지연(張志淵)이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써서 민족의 울분을 터뜨리고, 13도유생들이 5적의 처형과 조약폐기를 상소하였다. 그리고 19일에는 특진관 이근명(李根命),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이상설(李相卨) 등을 비롯한 조관(朝官) 30여 명이 개별 상소하여 5적의 처형과 조약폐기를 요청하였으나, 국왕의 확고한 대답은 내려지지 않았다. 이에 26일 참정(參政) 심상훈(沈相薰),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閔泳煥), 이근명 등과 함께 백관을 인솔하고, 입궐하여 정청(庭請)의 소두(疏頭)로서 을사조약의 무효, 5적신의 처형, 새로 충량(忠良)한 인재를 뽑아서 외부대신에 임명하고, 각국 공사와 협의하여 5조약을 파기할 것 등을 연명으로 상소하다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고 표훈원(表勳院)에 연금되었다. 곧 방면되었으나 다시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석고대죄하며 을사조약의 파기를 주장하다가 또다시 일본 헌병에 강제 연행되었다. 연행당한 뒤 민영환이 대신 소두가 되었다. 그러나 민영환도 곧이어 평리원(平理院)에 연금되었다가 특명으로 풀려났다. 그 뒤 비분을 참지 못하여 29일 자결하였다. 강제연행된 뒤 곧 가평 시골집에 추방되었으나 30일 다시 상경하였다. 표훈원에 되돌아와 유소(遺疏)와 일본공사 및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상소하였다. 그런데 또다시 일본군이 가마에 태워서 강제추방하자 가마 안에서 음독하여, 조카 조민희(趙民熙)의 집에 당도하여 죽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민영환 자결 터
한말의 충신 민영환은 을사늑약의 폐기를 궁궐 앞에서 주장하다가 일본 헌병의 강제해산으로 실패하자 1905년 11월 30일 새벽 6시에 청지기의 집에서 국민, 외교사절, 황제에게 보내는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순국후 피묻은 옷과 칼을 상청(喪廳)마루방에 걸어두었는데 이듬해 5월 상청의 문을 열어보니 대나무 네 줄기가 마루바닥과 피묻은 옷을 뚫고 올라왔으므로 사람들은 그의 충정이 혈죽(血竹)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이 나무를 절죽(節竹)이라 하였다. 선생의 집은 견지동 27-2 현 조계사 경내에 있었다. 종로구 인사동 공평빌딩 부근 민영환의 자결터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민영환(1861 - 1905)은 당대 최고의 권문세가 집안 출신으로 예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낸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순국지사로,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 후 국가의 제반 제도의 개혁을 시도하였고, 친일적인 각료들과 대립하여 일본의 내정간섭을 비판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한일협약을 적극 반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1905년 11월 종로 이완식(李完植)의 집에서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주시경 조형물
주시경(1876 - 1914)은 일제강점기 『국어문법』, 『말의 소리』 등을 저술한 학자. 국어학자이다. 본관은 상주(尙州). 초명은 상호(相鎬), 일명 한힌샘 · 백천(白泉). 황해도 봉산 출생. 아버지는 주학원(周鶴苑)이며, 어머니는 연안이씨이다. 둘째아들로 둘째아버지 주학만(周鶴萬)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다가 양아버지를 따라 1887년 6월에 상경하였다. 국어운동은 특히 한어개인교사, 상동사립학숙 국어문법과 병설, 상동청년학원 교사 및 국어야학과 설치, 국어강습소 및 조선어강습원 개설 등에서 심혈을 기울였다. 경술국치 후에는 숙명여자고등학교를 비롯하여 무릇 9개교에서 가르치는 한편, 일요일에는 조선어강습원에서 수많은 후진을 깨우치기에 ‘주보따리’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동분서주하며 정열을 불태웠다. 그가 가장 정성을 다한 국어연구는 국문동식회를 비롯한 의학교내 국어연구회 연구원 및 제술원, 학부 국문연구소 주임위원(奏任委員), 국어강습소 졸업생과 설립한 국어연구학회, 조선광문회 사전편찬 등의 활동을 통하여 깊어졌다. 그의 연구는 새받침을 처음으로 주장한 1897년 『독립신문』에 발표한 논설 「국문론」에서 그 방향이 시사된 바와 같이 우리말을 핵심으로 한 국어문법의 체계화였다. 주된 업적은 필사본 『국문문법』(1905), 유인본 『대한국어문법』 (國文講義, 1906), 국문연구소 유인본 「국문연구안」(1907∼1908), 『국어문전음학』(1908), 필사본 『말』(1908년 경), 국문연구소 필사본 『국문연구』(1909), 유인본 『고등국어문전』(1909년 경) 등이며, 학문적 축적을 거쳐 대표적 저술인 『국어문법』(1910)을 이룩하였다. 이 책은 독자적으로 개척한 초기국어문법의 하나로서 국어의 특성에 입각한 음운 · 품사 · 구문 · 어휘의 4부를 갖추고 있다. 특히, 그 구문론은 직소분석(IC분석)의 원리가 엿보이는 구문도해를 최초로 이룩한 것으로 크게 평가되고 있다. 그의 연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거듭된 그 수정판(1911 · 1913), 유인본 『소리갈』(1913년 경)을 거치는 동안에 순우리말로 서술하기에 그 나름대로 성공한 『말의 소리』(1914)를 저술하였다. 마지막 저술인 이 책은 구조언어학적 이론을 구체적으로 창안한 세계 최초의 업적으로 높이 평가된다. 즉, 음운론에서 음소(音素, phoneme)주1에 해당하는 ‘고나’의 발견, 형태론으로 어소(語素, morpheme)주2에 해당하는 ‘늣씨’의 발견은 서구언어학에 수십 년 앞선 큰 업적이었기 때문이다. 수리학을 바탕으로 한 논리적 구성으로 심화시켜 이러한 학문을 이룩하였는데, 그것은 황무지에서 국어학을 개척한 공로로 인정된다. 그는 또한 이러한 논리에 입각해서 새받침에 의한 표의주의적 철자법, 한자폐지와 한자어의 순화, 한글의 풀어쓰기 등 급진적인 어문혁명을 부르짖었다. 그의 이러한 학문과 주장은 학교와 강습소에서 길러낸 많은 후진이 형성된 후 주시경학파를 통해서 이어졌으며, 후대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의 후진양성에 관해서는 새로 나타난 「한글모죽보기」(1917년 경)에서 최현배(崔鉉培) · 신명균(申明均) · 김두봉(金枓奉) · 권덕규(權悳奎) · 정열모(鄭烈模) · 이규영(李奎榮) · 장지영(張志暎) · 정국채(鄭國采) · 김원우(金元祐) · 안동수(安東洙) 등 550여 명의 강습생 명단으로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국어국문의 과학적 연구와 교육이 민족의 독립과 발전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황성신문사 표지석
1898년 9월 5일 사장 남궁 억(南宮檍), 총무원 나수연(羅壽淵) 등이 국민지식의 계발과 외세침입에 대한 항쟁의 기치 아래 지금의 서울 광화문에서 창간하였다. 남궁 억은 ≪대한황성신문≫의 판권을 물려받아 오늘날의 합자회사와 같은 고금제(股金制)를 신문사상 최초로 채택해서 운영하였다. 500고(股:공동으로 하는 사업에 각각 내는 밑천)의 고표를 발행하여 자본금 5,000원을 목표로 하였으나 반수의 모금으로 발족되었다. 체재는 소형판(23×31㎝) 3단제로 본문은 4호 활자를 사용하였다. 문자는 국한문 혼용이라고 하나 거의 한자에 한글로 토를 단 정도의 한문위주의 문장으로 제작되어 ≪독립신문≫ 이후 여러 신문들이 순한글로 제작되던 전통을 깨뜨려 한학 식자층 독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지면의 기사배치는 대한제국시대의 다른 신문들과 거의 마찬가지로 논설·별보(別報)·관보·잡보(雜報)·외보·광고 등으로 구성하였으며, 1899년 11월 13일자부터는 지면 크기를 확대하여 34.5×25.2㎝의 4면 4단제를 채용하고 기서(寄書)·고사사조(故事詞藻)·습유란(拾遺欄:빠진 글을 뒤에 보충함) 등을 신설하였다. 1900년 1월 5일자 신문부터는 외신을 게재하는 ‘전보’기사란에 “한성 루터 전특체(電特遞)”라고 부기하고 외국 뉴스를 게재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날짜 사고(社告)의 “외국 사항에 전보를 직접(直接)치 못하여 보도에 만시(晩時)됨을 한하옵더니 현(現)에 영경(英京) 루터 전보를 정약통접(訂約通接)하였다.”는 내용으로 보아 영국 로이터통신사와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하고 외신을 공급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신문의 초기 주필로는 유근(柳瑾)·박은식(朴殷植) 등이 활약하였으며 얼마 뒤 장지연(張志淵)도 합류하였다. 창간 때부터 1902년 8월까지 만 4년간 사장직을 맡은 남궁 억은 재임중 두번이나 구속되었다. 1902년 8월 31일에는 2대 사장으로 장지연이 선출되었다. 1904년 6월 17일 일본인이 한국에서의 황무지개척권을 주한 일본공사를 통하여 한국정부에 요구해오자, 이 신문은 그 부당성을 여러 차례 사설로써 보도하여 그에 대한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구국민중대회의 모임인 ‘보안회(保安會)’의 활동을 지지하면서 상세히 보도하여 배일(排日) 애국사상을 고취하였고, 대한제국정부가 일본측 요구를 철회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904년 2월 24일 이 신문은 한일의정서의 조인 내용을 게재했다가 외부의 게재금지 명령으로 기사를 삭제당하여 문제된 기사의 활자를 뒤집어 인쇄함으로써 이른바 ‘벽돌신문’이 처음 나오게 되었다. 1905년 11월 20일자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 기사로 정간을 당하고, 사장 장지연을 비롯하여 10여 명의 직원이 체포되었다. 이듬해 1월 24일 장지연이 석방되고 발행정지도 동시에 해제되었으나 장기정간으로 재정난이 악화되어 2월 12일에야 겨우 속간할 수가 있었다. 2월 17일자에는 사장 장지연, 부사장 김상연(金祥演), 회계 김시영(金始榮) 등이 사임하고 새로운 운영진이 사원총회에서 선임되었는데, 이 때 남궁 훈(南宮薰)이 3대 사장으로 취임하였고 총무에 성낙영(成樂英), 회계에 김재완(金在完)을 선임하였다. 그 뒤 1907년 5월 18일 총회에서 사장에 김상천(金相天), 총무에 김재완이 선출되었고, 그해 9월 17일 총회에서 사장에 유근이 선출되었다. 1910년 6월 12일부터는 편집 겸 발행인이 성선경(成善慶)으로 바뀌었다. 이 신문은 합자회사 형식으로 경영되었으나 충분한 자본을 확보하지 못하고 독자들이 구독료를 잘 내지 않아 ‘사고(社告)’를 통하여 수차에 걸쳐 재정의 궁핍함을 밝혔다. 특히 1903년 2월 5일자 신문에 논설로써 신문발간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음을 선언하였다. 이 날짜 ‘사고(社告)’에 발행부수 3,000여 장에 구독료 및 광고료 수입이 매월 1,500여 원이고, 지출은 용지대·잉크값 등이 830여 원으로 흑자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구독료 미수금이 7,000여 원에 이르고 있고 용지 및 잉크값 등이 2,000여 원이나 밀려 폐간지경에 있음을 밝히자, 각계의 뜻있는 사람들이 10원 이상 200원까지 성금을 보내 곧 속간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신문값은 제대로 걷히지 않아 경영은 매우 어려웠다. 이러한 경영난을 광고를 통해 많이 해소시키기도 했는데 1900년 이후부터는 전체 지면의 절반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상품광고로는 약품과 서적이 가장 많았으며, 비상품광고로는 사회의 어지러움을 반영하는 분실·개명·사기·경고 등의 광고건수가 많았다. 이렇듯 심한 경영난을 겪다가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이 강행되자 신문제호가 강제로 ≪한성신문 漢城新聞≫으로 바뀌어 8월 30일자부터 9월 14일(제3470호)까지 발행되다가 결국 문을 닫았다. 이 신문은 경술국치 전까지 ≪뎨국신문≫과 함께 민족의식의 고취와 문명개화의 선구자로서 지대한 공헌을 한 민족지로서 평가받을 수 있다.
대한매일신보 창간사옥 표지석
대한매일신보 창간사옥은 대한제국 말기 대표적인 항일민족언론이었던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될 당시의 사옥이 있던 곳이다.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7월 18일 박동(현 수송동)에서 영국인 신문기자 베델(1872∼1909)을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양기탁(1871∼1938)을 총무로 하여 창간되었다. 처음에 국문 2면, 영문 4면으로 발행하던 것을 1905년 8월부터 국한문혼용판과 영문판으로 나누어 발행했는데, 이때 박은식·신채호 등이 논설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사업이 확장되면서 1907년 1월 원구단 신작로 입구 북편의 석정동(현재 프레지던트호텔 부근)으로 사옥을 이전하였다. 그리고 1907년 5월 30일부터 국한문판·영문판·순한글판 세 종류의 신문을 발행했는데, 발행부수가 1만 부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무렵 『대한매일신보』는 비밀결사 신민회의 기관지 역할까지 담당하면서, 의병을 비롯한 항일투쟁에 대한 사실 보도와 일제 침략을 비판하고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논설을 통해 민족언론으로서 확고히 자리매김을 하였다. 베델(1872~1909) 1904년부터 1909년까지 대한제국에서 활동한 영국 언론인이다. 코리아 데일리 뉴스와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일제의 부당한 행위를 비판하는 글과 사진을 보도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언론을 통한 그의 반일적 행동은 일제의 미움을 샀고 통감부는 주한 영국영사관에 강력한 항의를 하게 된다. 그 결과 베델은 두 차례에 걸쳐 영사관 재판을 받고 상하이에 있던 영국영사관 형무소에 이송되어 옥고를 치렀다. 서울에 돌아온 이후에도 일제는 베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견제했다. 이를 견디다 못한 그의 건강은 악화되고 말았고 결국 1909년 5월 1일 3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게 되었다. 그의 시신은 양화진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1950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양기탁(1871~1938)은 1904년 7월에 영국인 베델과 합작하여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다. 당시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사장은 영국인 베델이 맡고, 총무를 양기탁이 맡았으나 실제로는 양기탁이 신문사를 총지휘하였다. 특히 양기탁은 의병운동을 상세히 보도하여 애국운동으로 높이 평가하고 의병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이 때문에 양기탁이 제작하는 『대한매일신보』는 애국계몽운동 뿐만 아니라 의병운동의 대변지까지 되어 이 시기의 모든 국권회복운동의 중심적 언론기관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4월에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를 창립하여 총감독을 맡았다. 신민회는 전국의 주도적 애국계몽운동가 800여명을 입회시키어 한말 애국계몽운동을 실질적으로 배후에서 모두 지도하고 발전시켰다. 1909년 봄에는 국권회복을 위해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기지를 창건하고 독립군을 양성할 계획을 세웠다. 1910년 12월에는 이동녕 이회영 등을 출발시키어 결국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데 성공하였다. 양기탁은 임시정부의 국무령 또는 주석으로 몇 차례 추대되었으나 거절해 오다가 1933년 10월에 국무령(국무위원)에 취임하여 1935년 10월까지 2년간 임시정부의 대표로 있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조선혁명당의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1937년에는 조선혁명당의 대표로서 한국국민당 및 한국독립당과 연합하여 한국광복진선을 결성하였다. 이렇게 조국광복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던 중 1938년 중국 강소성에서 병으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독립운동에 끼친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주시경 흉상
주시경(1876-1914)의 이칭은 백천, 호는 한흰샘이며, 일제강점기 『국어문법』, 『말의 소리』 등을 저술한 국어학자이다. 서당에서 한문을 계속 배우면서 신학문에 눈뜨자 1894년 9월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 도중에 인천부 관립이운학교(官立利運學校) 속성과 관비생으로 선발되어 졸업하였으나, 정계의 격변으로 해운계로의 진출이 무산되고, 1896년 4월 다시 배재학당 보통과에 입학하였다. 마침 1896년 4월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徐載弼)에게 발탁되어 독립신문사 회계사무 겸 교보원(校補員)이 되었다. 순한글 신문제작에 종사하게 되자, 그 표기통일을 해결하기 위한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조직하여 그 연구에 진력하였다. 동시에 서재필이 주도하는 배재학당협성회 · 독립협회에 참여하였다가 그의 추방과 함께 물러나서 『제국신문』 기재(記載), 영국 선교사 스크랜턴(Scranton, W. B.)의 한어교사,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 강사를 지내면서 1900년 6월에 배재학당 보통과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신학문에 대한 지식욕은 대단하여 야간에 흥화학교(興化學校) 양지과(量地科)를 마치고, 정리사(精理舍)에서는 수물학을 3년 간 34세가 되도록 공부하는 열성을 가졌다. 경력으로는 간호원양성학교 · 공옥학교(攻玉學校) · 명신학교(明信學校) · 숙명여자고등학교(淑明女子高等學校) · 서우학교(西友學校) 교원 등을 역임하였고, 협성학교(協成學校) · 오성학교(五星學校) · 이화학당(梨花學堂) · 흥화학교(興化學校) · 기호학교(畿湖學校) · 융희학교(隆熙學校) · 중앙학교(中央學校) · 휘문의숙(徽文義塾) · 보성중학교(普成中學校) · 사범강습소 · 배재학당 등의 강사를 맡아 바쁜 생활을 보냈다. 그 담당과목은 1913년 3월 중앙학교의 예로 보아서 지리 · 주산 · 조선어 등으로 광범하나, 그의 연구업적으로 보아 국어교육이 중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활동은 계몽운동 · 국어운동 · 국어연구로 나누어지는데, 계몽운동은 배재학당협성회 전적과(典籍課) 찬술원, 독립협회 위원, 『가정잡지』 교보원, 서우학회 협찬원, 대한협회 교육부원, 보중친목회 제술원(製述員) 등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이었다. 이에 관한 논저는 『가정잡지』와 『월남망국사』(1907), 『보중친목회보』 등에 나타나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국어국문의 과학적 연구와 교육이 민족의 독립과 발전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