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애국계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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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서루
우현서루(友弦書樓)는 1904년 대구 지역의 부자인 금남(錦南) 이동진(李東珍)이 개인 재산을 투자하여 설립한 근대 교육기관이자 도서관이다. 우현서루는 대구와 경상북도 지역의 지식인들에게 신문화(新文化), 신교육(新敎育) 보급을 할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며, 한말 대구 애국 계몽 운동의 산실이자 독립운동가를 길러 내는 대표적 교육기관이었다. 우현서루는 “뜻있는 선비들이 모여 나라를 걱정하고 의기(義氣)를 기르는 곳”이라는 뜻이다. 교육 기관으로 세워진 우현서루 도서관에는 국내에서 간행된 각종 서적과 청나라에서 수입한 신학문 관련 서책 수백 종 등 약 10,000권 정도의 도서가 구비되어 있었다. 1904년 이동진이 창설하였으며, 매년 20~30명의 젊은 학생을 선발하여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고 교육시켜 약 150여 명의 애국지사를 길러 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제2대 대통령 박은식(朴殷植)[1859~1925],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 이동휘(李東輝)[1873~1935], ‘일본 궁성 이중교 폭탄 사건’의 주인공 김지섭(金祉燮)[1884~1928], 이동진의 손자이자 이일우의 조카인 독립운동가 이상정(李相定)[1896~1947]·이상백(李相佰)[1904~1966]·이상화 등을 비롯하여 권일제, 여운향, 김성수 등이 우현서루 출신이다. 또한 1906년 8월경 이일우, 최대림(崔大林), 윤영섭(尹瑛燮), 김선구(金善久), 윤필오(尹弼五), 이종면(李宗勉), 이쾌영(李快榮), 김봉업(金鳳業)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든 계몽운동 단체인 대구광학회(大邱廣學會)의 사무실이 우현서루에 있었다.
국채보상운동기념비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국채를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기 위하여 전개된 국권회복운동이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당시부터 우리나라에 대해 적극적으로 차관공여(借款供與)를 제기하여 차관을 성립시켰다. 이러한 일본의 차관 공세는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이후 더욱 노골화되었다. 이러한 목적에 의하여 제1차 한일협약 이후 우리나라에 재정 고문으로 부임한 메카타는 1906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1,150만 원의 차관을 도입하였다. 이러한 일본측의 차관 공세는 우리 정부와 민간의 경제적 독립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당시 우리나라의 토착 자본은 일본 차관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운동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907년 2월 김광제(金光濟)와 서상돈(徐相敦)은 단연을 통하여 국채를 갚아 나가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하였다. 김광제ㆍ서상돈은 1907년 2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에 “국채 1천 3백만 원은 바로 우리 대한제국의 존망에 직결되는 것으로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인데, 국고로는 해결할 도리가 없으므로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국고를 갚아 국가의 위기를 구하자”고 발기 취지를 밝혔다. 취지문을 발표한 뒤 대동광문회는 즉 단연회(斷煙會)를 설립하여 직접 모금 운동에 나섰다. 대동광문회의 국채보상운동 발기가 『대한매일신보』ㆍ『제국신문』ㆍ『만세보』ㆍ『황성신문』 등에 보도되자 각계각층의 광범한 호응이 일어났다. 서울에서는 2월 22일 김성희(金成喜) 등이 국채보상기성회를 설립하고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기성회는 회칙까지 제정하여 본격적인 운동의 채비를 갖추었다. 그 뒤 전국에서 ‘국채보상’의 이름을 붙인 20여 개에 달하는 국채보상운동단체가 창립되었다. 이들 단체의 운동은 국채 보상을 위한 계몽적 활동과 직접 모금 운동을 하는 실천적 활동으로 크게 두 가지 양상으로 나눌 수 있다. 운동에는 문자 그대로 각계각층이 참여하였다. 고종도 단연의 뜻을 밝혔고, 이에 따라 고급 관료들도 한때 소극적이나마 모금 운동에 참여하였다.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민족 자본가와 지식인층이었다.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1907년 4월부터 12월까지였다. 특히, 6월∼8월에는 가장 많은 의연금이 모아졌다. 그러나 운동은 일제의 탄압과 운동주체역량의 부족으로 인하여 1908년에 들어서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운동을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꾸준히 추진해 간 중심체는 양기탁(梁起鐸)과 베델(Bethell, E.T.裵說)이 이끄는 대한매일신보사였다. 따라서, 이 운동은 사실 국권회복운동의 하나로서 전개되고 있는 셈이었고, 이에 일제는 갖은 방법을 다하여 방해, 탄압하려 들었다. 일제는 1907년 이후 베델을 국외로 추방하는 공작을 펴, 1908년 5월 3주(週)의 금고와 벌금형을 선고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7월통감부 당국은 “대한매일신보가 보관한 국채보상금을 베델ㆍ양기탁 두 사람이 마음대로 하여 3만원을 소비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양기탁을 구속해 버렸다. 이른바 일제는 ‘국채보상금소비사건’을 조작한 것이다. 통감부의 공작에 따라 전 국채보상지원금 총합 소장이었던 윤웅렬(尹雄烈)은 “보상금 중 삼만 원을 영국인 베델이 사취하였으므로 그 반환을 요청한다.”는 반환청구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이를 근거로 운동의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감을 민중들에게 심어 주고자 하였다. 양기탁은 공판 결과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통감부의 공작으로 운동의 주체는 분열되어, 운동 자체가 암초에 부딪쳐 끝내는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송병선 집
송병선(1836-1905)은 충청남도 회덕 사람이다. 학행으로 천거 받아 서연관(書延官)과 경연관(經延官)을 지내었다. 1882년에 공조참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충청북도 옥천(沃川)에 내려가 정자를 짓고 유학을 가르치면서 세상일을 잊고 지냈다. 그러나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 소식을 들은 송병선은 나라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고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오적의 처단과 을사늑약의 파기를 건의하였으며, 을사늑약 반대 투쟁을 계속하다가 경무사 윤철규(尹喆奎)에게 인치(引致)되어 강제로 향리에 호송되었다. 이에 국권을 빼앗김에 통분하여 세 차례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드리는 유서를 남겨 놓고 자결 순국하였다. 유서에서는 을사오적의 처형과 을사늑약의 파기 및 의(義)로서 궐기하여 국권을 찾을 것 등을 호소하였다. 고종은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06년 2월에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충남 대전에는 고종의 건사지명(建祠之命)으로 건립된 문충사(文忠祠)가 있어 유품이 소장되어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송병선, 송병순 사당(문충사)
송병선(1836-1905)은 충청남도 회덕 사람이다. 학행으로 천거 받아 서연관(書延官)과 경연관(經延官)을 지내었다. 1882년에 공조참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충청북도 옥천(沃川)에 내려가 정자를 짓고 유학을 가르치면서 세상일을 잊고 지냈다. 그러나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 소식을 들은 송병선은 나라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고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오적의 처단과 을사늑약의 파기를 건의하였으며, 을사늑약 반대 투쟁을 계속하다가 경무사 윤철규(尹喆奎)에게 인치(引致)되어 강제로 향리에 호송되었다. 이에 국권을 빼앗김에 통분하여 세 차례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드리는 유서를 남겨 놓고 자결 순국하였다. 유서에서는 을사오적의 처형과 을사늑약의 파기 및 의(義)로서 궐기하여 국권을 찾을 것 등을 호소하였다. 고종은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06년 2월에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송병순(1839-1912)은 충청북도 영동 사람으로, 을사늑약을 반대하여 순절한 송병선의 아우이다. 일제가 1905년 11월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이에 대한 반대 투쟁을 전개하였다. 송병순은 일제침략과 을사오적을 규탄하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전국 유림에게 배포하고 국권 회복에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1906년에는 충청북도 영동(永同)군 학산(鶴山)면에 강당을 건립하여 수백 명에게 민족 독립사상을 교육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하여 여러 번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두문불출하며 망국의 슬픔을 시로써 달래었다. 1912년 일제 헌병이 소위 은사금(恩賜金, 은혜롭게 베풀어 준 돈)을 가져왔으나 거절했으며, 같은 해 일제가 회유책으로 경학원(經學院) 강사로 천거하자 이를 거절한 다음 유서를 남기고 독약을 마시고 순국하였다. 정부는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송병선 순국기념비
송병선(1836-1905)은 충청남도 회덕 사람이다. 학행으로 천거 받아 서연관(書延官)과 경연관(經延官)을 지내었다. 1882년에 공조참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충청북도 옥천(沃川)에 내려가 정자를 짓고 유학을 가르치면서 세상일을 잊고 지냈다. 그러나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 소식을 들은 송병선은 나라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고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오적의 처단과 을사늑약의 파기를 건의하였으며, 을사늑약 반대 투쟁을 계속하다가 경무사 윤철규(尹喆奎)에게 인치(引致)되어 강제로 향리에 호송되었다. 이에 국권을 빼앗김에 통분하여 세 차례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드리는 유서를 남겨 놓고 자결 순국하였다. 유서에서는 을사오적의 처형과 을사늑약의 파기 및 의(義)로서 궐기하여 국권을 찾을 것 등을 호소하였다. 고종은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06년 2월에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단재헌(신채호 생가 홍보관)
2015년 12월 8일 선생의 탄신일 135주년에 맞춰 개관한 신채호 생가 홍보관이다. 본래 생가 관리사로 건축되었던 단재헌을 리모델링하여 조성한 건물로 신채호 선생의 출생과 성장, 가족사와 그의 독립운동 일대기를 콘텐츠로 제공한다. 홍보관 출구 쪽 벽면엔 조선혁명선언, 대한협회회보, 조선사 총론 등에 담긴 내용들이 전시돼 있다. 단재의 흔적이 깃든 옛 성균관 명륜당, 오산고 제1회 졸업식, 해조신문 발행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사진도 걸려있다. 영상관에선 단재의 역사관을 담은 10분 분량의 영상이 재생된다. 단재의 민족 독립 운동 역시 일대기 형식에 맞춰 각 주제마다 단재가 저술한 책이나 기고한 논설 등의 이미지를 전시하고, 중심사건을 미니어처 인물모형으로 묘사해 관객의 이해를 도왔다. 독립협회 내무부 문서부에 활약하던 단재가 투옥되는 순간,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무력투쟁을 주장하는 모습, 무정부주의동방연맹에 가입하는 모습, 여순감옥에서의 마지막 모습 등이 재현됐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아버지 신광식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 차남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생가는 진외가(할아버지의 처가)인 안동 권씨 문중이었다. 그러다가 1887년, 선생 나이 8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도리미 마을을 떠나 충북 청주로 옮겨간다. 생가터인 도리미 마을(대전시 중구 단재로 229번지)은 `88년 생가터임이 확인되고 `91년 시지정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2000년까지 토지매입 및 동상건립, 생가복원 등이 완료되었다. 홍보관 뒤편으로 이어지는 선생의 생가 터에는 안채와 곳간채 등 복원한 초가 건물이 조성되어있으며 단재 선생의 시와 동상이 함께 건립되어 있다. 신채호(1880-1936)는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호는 단재(丹齋)이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 사학자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이다.[1] 필명은 금협산인·무애생·열혈생·한놈·검심·적심·연시몽인 등이 있고, 유맹원·박철·옥조숭·윤인원 등을 가명으로 사용하였다. 구한 말부터 언론 계몽운동을 하다 망명,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백범 김구와 공산주의에 대한 견해 차이로 임정을 탈퇴, 국민대표자회의 소집과 무정부주의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했으며, 사서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1936년 2월 21일 만주국 뤼순 감옥소에서 뇌졸중과 동상, 영양실조 및 고문 후유증 등의 합병증으로 인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신간회 근우회 동래지부 표지석
동래 일성관 건물은 1923년 동래청년회(東萊靑年會)의 회관으로 건립되었다. 당시 동래기영회[한말 동래부의 퇴임관리들이 조직한 일종의 계(契)로서 동래 지역 애국 계몽운동 주도]는 회관 설립을 위하여 동래청년회에 건물 1채와 밭 462.81㎡[140평]를 기부하였다. 동래 청년 회관은 일제 강점기에 동래 지역의 대표적인 항일 운동 단체들이 모여 있던 곳이었다. 동래청년회뿐 아니라 신간회 동래지회(新幹會東萊支會)·근우회 동래지회(槿友會東萊支會)·청년동맹·동래노동조합·소년동맹 등 여러 단체들의 사무실이 들어오면서 동래 청년 회관은 동래 지역 항일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동래 일성관 건물은 동래 지역 사회 운동 단체가 입주하여 활동하던 항일 운동의 거점이자 현장이었다. 따라서 일제 시기 항일 의식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신성모 흉상
신성모(1891-1960)의 호는 소창이며, 부산 한국해양대학[현 한국해양대학교] 학장을 지낸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신성모는 1910년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러시아 연해주 지방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신채호(申采浩), 안희제(安熙濟) 등과 함께 독립 운동을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일하였던 신성모는 이승만(李承晩)이 미국 정부에 위임 통치 청원서를 제출한 데 분개하여 이승만을 탄핵하는 입장에 섰다. 1923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비밀 연락처였던 백산상회 독립 자금 전달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석방 후 영국 런던항해대학에서 수학하고 1927년 1등 항해사 자격을 취득하였다. 이후 영국 상선 항해사 및 영국 런던과 인도를 왕래하는 정기 화객선의 선장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인도 상선 회사의 고문으로 봄베이에 체류하였다. 1948년 11월에 귀국한 신성모는 그 해 12월에 결성된 우익 청년 단체인 대한청년단의 초대 단장을 지냈다. 제2대 내무부 장관을 지냈고, 1949년 3월 국방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국방부 장관 재임 시에 6·25 전쟁이 발발하였는데, 그해 4~11월 국무총리 서리를 지내기도 하였다. 1951년 거창 양민 학살 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국방부 장관직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신성모는 대통령 자문 기구인 해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평화선 선포, 해양경찰대 창설, 해무청 설치 등에 깊이 간여하였다. 이후 1956년 11월 28일부터 1960년 5월 29일까지 제8대 한국해양대학 학장으로 재임하였다. 그는 당시 한국해양대학이 해군사관학교와 통합되는 것을 막아 한국해양대학을 존속하게 하였다. 또한 해군 예비원령 제정 시행, 실습선 반도호 확보, 대학원 개설, 교과서 발간 등 후학 양성과 해양 한국 건설의 초석을 닦았다. 1960년 5월 29일에 사망하였다. 1990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석진 집
김석진(1843-1910)은 조선 후기에 홍문관장령, 삼도육군통어사,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자는 경소(景召) 호는 오천(梧泉)이다.1860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종친부(宗親府) 벼슬을 거쳐 홍문관의 관직을 지냈다. 그 뒤 삼도육군통어사 등을 지냈다. 1896년 궁내부 특진관에 이어 1901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다음 해 1월 23일 오적신(五賊臣)을 처형할 것을 상소했다. 상소문에서 김석진은 협박에 의한 조약은 공법상 폐기가 가능하니 외부대신을 불러 여러 외국 공사에게 성명을 내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왕의 승낙이 떨어지지 않았고, 조병세(趙秉世)가 조약에 반대하다 순사하자 김석진은 조문길에 남대문 근처 한 점포에서 아편을 산다. 다시는 대궐에 들어가지 않고 나라를 위해 죽기로 결심하고 기회를 보고 있었다. 1910년 우리나라를 병탄한 뒤 조선의 전직 고위 관료들에게 작위 또는 은사금을 주던 일제가 남작의 작위로써 김석진을 회유하려 하자, 이를 치욕으로 여겨 1910년 9월 8일 아편을 먹고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신낙균 안내판(한천로 애국지사 거리)
신낙균(1899-1955)은 일제강점기 경성사진협회 회장, 동아일보 사진과장 등을 역임한 사진기자이다. 1915년 인천공립상업학교 염직과를 졸업한 후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영어학교에서 1년, 동양대학 문화학과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1924년에는 동경사진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27년에 졸업하였다. 같은 해 서울로 돌아와 중앙청년기독교청년회(YMCA)학교 사진과 교사가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 관계 저서인 『사진학개설』을 출간하였다. 1929년 2월부터 경성사진사협회 제3대와 4대 회장을 맡았고, 1934년 7월 동아일보 사진과장으로 입사하였다. 1936년 8월 손기정(孫基禎)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우승하자 8월 24일자 『동아일보』는 일본 아사히신문사로부터 입수한 손기정 선수의 수상 장면을 게재하면서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신낙균을 포함한 관련자 여러 명이 경찰에 연행되어 만 33일간의 취조와 고문을 당한 끝에 풀려났으나 장차 언론기관에는 일체 참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써야 했다. 그는 이로 인해 신문사를 떠났고, 1953년에는 수원 북중학교의 물리학 강사로 재직하였다. 1990년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주기철 순교기념비
주기철(1897-1944)은 일제강점기 마산 문창교회, 평양 산정현교회 등에서 목회한 목사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하였다. 주기철은 경상남도 웅천 출신으로 1921년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 입학, 1926년 졸업하였다. 1926년 부산 초량교회의 목사로 부임하였고, 경남성경학원을 세워 후진교육에 힘썼다. 1931년 9월 마산 문창교회의 위임목사로 부임하였고, 저명한 목사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1936년 여름,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하였고 그 교회에는 민족주의자 조만식(曺晩植)·유계준(劉啓俊)·오윤선(吳胤善) 등이 출석하고 있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강한 반대 입장을 표명한 그는 1939년 7월 경상북도 의성의 농우회사건(農友會事件)에 연루되어 검속되었다가 1940년 2월에 석방되어 평양으로 돌아온 뒤, 산정현교회에서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를 최후로 교인들에게 전하였다. 이 설교 사건으로 경찰이 이틀 후에 그를 검거하였고, 그때 산정현교회 목사직을 파면 당하였다. 파면은 평양노회의 결의형식이었다. 그리고 산정현교회도 동시에 폐쇄되었다. 감옥에서 5년간 고생하다가 1944년 4월 13일 병감(病監)으로 옮겨지고 4월 20일 부인 오정모와 마지막 면회를 한 뒤 4월 21일 감옥에서 병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서북학회회관
서북학회는 1908년 서북 · 관서 · 해서지방 출신자들이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애국계몽단체이다. 서북학회는 1909년 초 신민회와 같이 독립전쟁전략을 최고전략으로 채택하여 독립군기지건설에 주력하여 국외독립운동의 초석이 되었으며, 국내활동 특히 교육운동은 일제하 민족운동의 원동력이었다. 서북학회 구성원들은 지금은 제국주의 시대로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나 민족이 힘이 약한 나라나 민족을 침탈하는 우승열패(優勝劣敗)나 약육강식 논리만이 적용되는 시대로 열패자인 약자는 실력양성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인식하였다. 이러한 기본 인식 위에 궁극목표는 국권회복·인권신장을 통하여 근대문명국가의 달성에 있었다. 민력양성을 위해 민력 결집은 시급한데, 방법은 단체설립과 단체 상호간의 단합으로 서북학회 설립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애국계몽운동은 1907년 중엽에 이르러 관서와 관북지방에서 뿌리를 내려 일정한 성과를 거두게 되자 전 민족적 전 국가적 차원으로의 확산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강압책으로 국권회복운동이 더욱 어렵게 되자, 이러한 제약을 보다 적극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를 통합하여 1908년 1월 조직하였다. 구성원은 주로 평안도·함경도·황해도민이다. 주요 임원은 이동휘(李東輝)·안창호(安昌浩)·박은식(朴殷植)·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최재학(崔在學) 등이었다. 임시회장 이동휘의 지도 하에 서우회관(西友會館)에서 조직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회장으로 정운복(鄭雲復), 부회장 강윤희(姜玧熙), 총무 김달하(金達河)를 선출하였다. 1909년에는 회장으로 오상규(吳相奎), 부회장 정운복, 총무 김명준(金明濬)을 선출하였다. 조직은 서우학회·한북흥학회를 토대로 하였다. 서울에 총사무소를 두었으며, 회장 1명, 부회장 1명, 총무·부총무 각 1명, 평의원 30명, 사찰원(司察員), 회계 각 1명, 서기 2명이었다. 월보(月報) 간행을 위해 주필 1명, 편집 1명, 협찬원(協贊員) 19명을 두었다. 개별 사무를 처리할 때는 위원이나 총대(總代)를 정하여 담당하게 하였다. 31개 지역에 지회를 설치하고 69개 지역에 지교(支校)를 두었다.「사립학교령(私立學校令)」·「학회령(學會令)」 등 애국계몽운동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자, 1909년 2월 이후에는 37개 지역에 학사시찰위원(學事視察委員)을 선정, 지회·지교 활동을 보완하였다. 서북지방민으로 국권 회복을 원하는 사람이면 관(官)·민(民)을 막론하고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회원은 2,300명 정도에 이른 것으로 추산되며, 신지식층·신흥시민층을 중심으로 한 광범한 시민층이었다. 항일교육구국운동은 국민들에게 신교육의 절실한 필요를 계몽하는 것이었다. 교사 양성에 주력하는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 노동자 교육을 위한 수상야학(水商夜學)·측량과(測量科)·심학강습소(心學講習所)·농림강습소(農林講習所) 등을 설치,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각 지역 사립학교 교무의 지도와 후원을 통하여 전개되었다. 계몽강연활동은 학회의 여러 모임, 특히 운동회를 통해 광범위하게 파급되었다. 당시 상황을 알리고 애국심을 고취시켰으며 실력양성운동에의 참여를 촉구하였다. 1908년 2월부터 『서북학회월보』라는 학보를 발간, 1910년 1월까지 계속하였다. 학보를 통해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과 민권론(民權論)에 기반을 둔 실력양성론·단체론·애국론·교육구국론·실업진흥론·사회관습개혁론 등을 전달하여 민중의식을 계발하고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민족산업진흥운동이 중요시된 것은 서북학회의 사회적 기반이 신흥시민층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업교육을 장려하고, 특히 일제의 경제적 침략과 관련해 농림(農林)의 진흥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좀더 광범한 지역과 대중에게까지 애국계몽운동을 확산시키고자 하였다.「사립학교령」·「학회령」·「기부금품모집취체규칙(寄附金品募集取締規則)」·「지방비법(地方費法)」 등 일제의 탄압에 대한 구체적 대응책을 제시하여 민중들이 적극 대처하도록 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 뒤 일제의 탄압이 더욱 강화되고 서북학회 분쇄책이 시도되자, 1909년 독립전쟁 전략을 채택하여 국외에서는 독립군기지 건설과 무관학교 설립운동에 주력하였다. 국내에서는 사립학교 유지방법 강구 등의 교육운동과 농회·농림강습소 설립, 민족산업 진흥운동 등을 계속 추진하였다. 이 학회는 애국계몽운동을 광범위하게 확산시켰을 뿐 아니라 애국계몽운동을 진정한 국권회복운동으로 전개되게 하였다. 1909년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만주 등지로 근거지를 옮겨 독립군 기지를 조성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애국계몽운동을 국외 독립군운동으로 전환시키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기관지로는 『서우(西友)』를 계승한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가 있다. 1910년 9월 강제 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