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애국계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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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학관
흥학관(興學館)은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 지역 청년의 사랑방이자 지역민의 문화, 체육, 교육, 집회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광주광역시는 2019년 12월 17일 3.1운동 100주년과 광주학생독립운동 90주년을 맞아 광주 지역 내의 독립운동 사적지 중 대표적인 곳 중 하나인 '흥학관 터'에 사적지 표석을 설치하였다. 1921년 광주의 부호 최명구(崔命龜)가 희사한 돈으로 최명구의 동생인 최종윤이 지역 청년들의 문화, 체육 활동 진흥을 위해 세운 건물이다. 최종윤은 1920년 광주청년회 설립을 주도하였고, 1921년부터는 『동아일보』 광주지국의 총무와 기자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당시의 흥학관은 실내 체육과 강연 등 문화 행사가 가능한 흥학관 건물과 건물 앞의 너른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흥학관 내부는 유도나 권투 교습의 체육 활동을 비롯 광주청년회, 신간회 광주지회, 조노동공제회 광주지회, 광주청년학원 등의 사무실과 집회 장소 등으로 활용되었다. 그 외에도 광주여자청년회 주도의 여자 야학 및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가 진행하는 야학도 흥학관에서 진행되었다.
김기권 문방구점, 장재성 빵집
독립운동가 김기권이 운영하던 문방구 점과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이던 장재성의 빵집이 있던 옛 터이다. 김기권(金基權)은 1926년 전라남도 광주 지역의 항일 학생운동 조직인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인물로 1928년 광주고등보통학교에서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퇴학당했다. 김기권은 성진회가 해산된 이후 전라남도 광주 지역 내에 독립운동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1929년 학생소비조합 형태의 문방구점을 지금의 금남로공원 자리에서 운영하였다. 한편, 김기권과 함께 활동하던 장재성(張載性)도 일본에서 귀국한 이후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인근에 빵집을 열었다. 김기권 문방구점과 장재성 빵집은 성진회 해산 이후 광주학생운동의 핵심 기구가 된 독서회중앙본부(讀書會中央本部)의 연락 및 비밀 모임 장소로 활용되었으며, 운영에서 나오는 소득은 독립운동의 자금으로 활용되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김기권은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1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게 되었고 문방구점도 폐업하게 된다. 1969년 김기권이 운영하던 문방구점 자리에는 한국은행 광주지점 건물이 세워졌다. 이후 2003년 한국은행 광주지점이 상무지구로 이전하게 되자, 광주광역시가 부지를 매입하여 금남로공원을 조성하여 2006년 시민들에게 개방하였다. 현재 금남로공원 출구 방향에 있으며 금남로공원 조성 이후 이에 대한 정보를 알리는 별다른 시설이 없었으나, 2019년 광주광역시에서 김기권 문방구점과 장재성 빵집의 위치를 알리는 표지석을 설치하여 그 뜻과 의미를 전하고 있다.
상화기념관, 이장가문화관
상화기념관은 이장가 문화관과 공간을 공유하고 있으며 ‘이장가’는 이상화의 할아버지인 금남 이동진 선생이 재산을 가족 및 친지에게 나누어준 일을 ‘이장’이라 일컬어 붙여진 이상화 집안의 가문이름이다. 이동진 선생에게 두 아들인 이일우, 이시우 형제가 있었고, 이시우 선생의 차남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이상화 시인이다. 이상화 기념관·이장가 문화관에서는 이상화 시인을 비롯하여 이장가 집안에서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랜 기간 쌓은 민족 계몽운동 및 항일 독립운동의 업적을 살펴볼 수 있다. 이상화(1901 - 1943)는 일제강점기 「나의 침실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중의 사망」 등을 저술한 시인이다. 1901년에 태어나 1943년에 사망했다. 한때 일본에 유학했고 1922년 『백조』 창간호에 동인으로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활동했고 의열단 관련 사건으로 구금되기도 했다. 초기의 시에서는 생명의 강렬한 욕망과 호흡, 인습에 대한 공공연한 반역과 도전이 드러난다. 사회참여적 색조를 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개벽』지 폐간의 계기가 된 작품으로, 치열한 반골기질이 표현되어 있다.
홍필주 영세불망비
홍필주(1857 - 1917)는 대한제국기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에 반대하는 규탄선언서를 발표한 항일운동가. 관료, 애국계몽운동가이다. 군수를 역임하였으며, 1904년 6월 일본이 조선에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는 공문과 10개조로 되어 있는 황무지개척권위임계약안을 제시하고, 일본인 나가모리[長森藤吉郎]에게 50년간 조선 전국토의 3할이나 되는 황무지의 개척 및 일체의 경영권을 넘기도록 강요하였다. 이에 이건하(李乾夏)·박기양(朴箕陽) 등과 함께 신사소청(紳士疏廳)을 설치하여 상소를 올리고, 규탄선언서를 발표하여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에는 을사조약 이후 깊어지는 민족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계몽운동단체인 대한협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이윤재 구 묘
이윤재(1888~1942)는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국권회복을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김해서 합성학교의 교사가 되어 구국교육운동을 전개했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마산의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에서 국사와 국어를 교육하고 마산의 예수교 청년면려회 회장과 유년주일학교 교장으로 활동했다. 1919년 평안북도 영변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이 지방의 3·1운동에 앞장서서 주동적 역할을 하다가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게 붙잡혀 1919년 7월 3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에 출옥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채호(申采浩) 등 독립운동가들을 만나보고 1924년 9월에 귀국하여 이승훈(李昇薰)이 설립한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교육에 종사했다. 1925년에 안창호(安昌浩)가 조직한 민족운동단체인 흥사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해 4월부터 협성학교에서 국어와 국사를 담당하여 교육하면서 허무당 선언서 발표에 관여하였다. 1927년 8월에 조선어연구회의 동지들과 함께 국어사전 편찬의 준비활동을 시작하였다. 또한 이해에 민족정신과 민족문화의 발굴·보존·계승을 위한 잡지인 『한빛』을 창간하여 편집 겸 발행인으로서 활동하였다. 이 잡지는 역사, 사회, 전기, 한글 연구논문과 기행문, 수필문 등을 수록하여 민족문화 보급운동을 통해서 독립사상을 고취한 잡지였다. 1929년 10월 31일에 한글 기념식을 거행하게 되는 날을 택하여, 조선교육협회간에 모인 각계 유지 108인의 발기로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고 국어사전 편찬을 위한 편찬위원회 집행위원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 해에 사전편찬의 일로 중국 상해에 망명중인 김두봉을 만나러 다녀왔다. 1930년에는 혼란에 빠진 국문법의 확립과 맞춤법의 통일의 위해 권덕규(權悳奎)·최현배(崔鉉培)·김윤경(金允經) 등과 함께 한글맞춤법 통일안 작성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1년에는 종래의 조선어연구회를 조선어학회로 개칭했으며, 조선어학회에서 베푼 하기(夏期) 한글강습회 일로 전국을 순회하였다. 1932년에 조선어학회의 기관지로서 『한글』을 간행하고 그 편집 겸 발행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33년 10월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완성하여 발표하고 그 보급운동에 힘썼다. 1934년에는 국학 및 사학자 동지들과 함께 역사 연구단체인 진단학회를 창립하는데 참가하고, 11월에 기관지 『진단학보』를 발간하는 일에도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1935년 1월에 조선어 표준어사정위원회를 개최하여 그 책임자로 활동했으며, 1936년에는 그동안 주관해서 정리해 오던 조선어 표준말 사정을 완성하여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발표하였다. 또한 1936년에는 조선어학회 전담으로 사전편찬의 신규사업을 시작하여 상임편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7년 6월에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일경에 붙잡혀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받고 상고하여 1941년 11월 17일 고등법원에서 무죄 방면되었다.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운동으로 최현배·김윤경 등 동지들과 함께 다시 일경에 붙잡혀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다. 1943년 12월 8일 일경의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감방에서 옥사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상화 묘
이상화(1901 - 1943)는 대구(大邱) 사람이다.일제에 대한 저항시인이며, 대구고보 재학시인 1919년 3월 8일의 대구서문외(西門外) 장날을 이용하여 이만집(李萬集)·김태련(金兌鍊)·김영서(金永瑞) 등과 함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학생 시절인 1918년, 일제에 대한 민족 저항시 「신라제(新羅祭)의 노래」를 발표하여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으며, 3월 8일의 서문외 장날의 독립만세 운동 때는 계성중학교(啓聖中學校) 학생들과의 연락책으로 활약하면서 연합시위를 전개하여, 여기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군중에게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그 뒤에도 저항시를 통하여 민족혼을 일깨웠는데 1922년에는 『백조(白潮)』지 창간호에 「나의 침실로」를, 1926년에는 『개벽(開闢)』지 6월호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을 발표하였다. 1923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잡지 향영(響影)을 발간하였으며, 이듬해 귀국하여 1924년부터 1934년까지 문단을 제패했던 카프(KAPF : Korea Proletarian Artist Federation)를 발기하여 활동하였다.1935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친형인 이상정(李相定) 중국군 장군과 조국의 독립을 위한 국내조직을 협의하고 1937년 귀국하였다. 그러나 곧 대구경찰서에 붙잡혀 2개월간 구금되어 고문을 받고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안윤재 묘
안윤재(1877-1944)는 일제강점기 양기탁 등 16인 보안법 위반사건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1907년 4월 양기탁(梁起鐸)·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 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황해도지회에서 활동하였다. 신민회가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 창건사업을 하면서 1910년 9월과 10월 김도희(金道熙)를 내려보내어 그 준비를 위임하자 이에 찬동하여, 김구(金九)·이승길(李承吉) 등과 황해도 회원의 집단이주계획을 수립하고 송화군의 이주민모집 책임자로 선정되어 권태선(權泰善)·감익룡(甘翊龍)·이종록(李鍾祿)·전용서(全溶瑞)·강유(康有爲) 등과 이주계획과 군자금모집을 추진하였다. 일제가 안명근사건(安明根事件)을 기화로 신민회의 독립군기지 창건운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애국지사들을 구속한 이른바 ‘양기탁 등 16인 보안법 위반사건’으로 1911년 1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하였다.
박재헌 묘
박재헌(1900-1986)의 이명은 박재곤, 박영재이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에서도 만세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계성학교 교사이던 백남채(白南採)·최상원(崔相元)·최경학(崔敬學)·권의윤 등은 학생들에게 만세 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에 박재헌도 시위에 동참하기로 결정하였다. 1919년 3월 8일 박재헌은 계성학교 학생 100여 명과 함께 귀가를 가장하고 서문시장 근처에 집결하였다. 오후 3시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목사 이만집(李萬執)의 연설과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金兌鍊)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대구 성경학교·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합세하면서 시위 군중은 7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서문시장을 나선 시위대는 대구경찰서와 종로를 거쳐 동성로를 향하여 행진하였다. 1,0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가 동성로에 있던 달성군청에 이르자 기관총과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일제 군경은 시위 군중을 폭압적으로 진압하여 157명을 검거하고 그중 67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때 박재헌도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박재헌은 출소 후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에 입학하였고, 1920년 미국의원단이 입국하였을 때는 외국인 선교사를 통하여 독립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이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이어 나갔다. 1922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특파원 자격으로 귀국하여 경상북도에서 군자금 모집, 납세 거부 운동, 일본 상점의 물품 판매 반대 삐라 살포 등의 활동을 하였다.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공채(公債) 모집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22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시로 이정호(李貞浩)를 중국에 도항시켰다. 이후 박재헌은 경상남도 밀양에 있던 집성학교(集成學校)의 교사로 근무하면서 밀양교회를 중심으로 농촌 사업을 가장한 독립운동을 시도하다가 1925년 일제에 발각되어 다시 투옥되었다. 1926년에는 대구 미국선교회(美國宣敎會)의 사무원으로 일하면서 미국 선교사들에게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941년 12월 18일 다시 투옥되었으나, 1942년 6월 병보석으로 출감하였다. 박재헌은 1986년 2월 28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박재헌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봉로 묘
이봉로(1902-1940)는 1924년 4월 중국 북경(北京)의 서성 공업 대학에 유학하였다. 1925년 김창숙(金昌淑)이 이회영(李會榮)을 만나 독립운동 방략에 대해 논의한 뒤 장기적인 관점에서 영남 유림을 대상으로 독립운동 기지 마련 자금을 모금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영주 출신 송영호(宋永祜), 봉화 해저리 출신 김화식(金華植) 등과 함께 김창숙의 뜻에 찬성하며 유림의 독립운동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장기적 독립 투쟁을 기본 방향으로 설정하고 먼저 중국에서 활동중인 동지와 조선인 경제 문제를 해결할 것, 순차적으로 무장 실력을 양성하고 군인을 길러낼 것, 조선으로 진입하여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할 것 등을 결의했다. 이에 따라 구체적으로 파리 강화 회의에 장서를 제출한 영호남의 유림 130명을 대상으로 20만원의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이봉로는 해외 연락책을 맡아 중국 상해로 가서 정원(鄭遠)[정세호(鄭世鎬)]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여 김창숙에게 전달하거나 김창숙, 송영호, 김화식 등 세 사람이 입국한 뒤 북경에서 북경 주변 정세를 탐문하여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유림의 독립운동 전개 중 중국 북경에서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되었다. 1927년 3월 대구 지방 법원의 재판에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봉로는 이 재판에서 재판장의 "조선 ○○(독립)에 대하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에 "물론, 찬성"이라고 대답하여 재판장을 놀라게 하였다. 1927년 7월 이봉로는 이에 불복하여 공소하였으나 증거가 충분하다며 공소를 기각하였다. 같은 달 10일에 대구 복심 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민족 협동 전선으로 결성된 신간회 대구 지회에 가입하여, 1930년에 동회 교육 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대구에서 이화(李華) 여관을 운영하였다. 여기에 대구의 독립운동가 이상훈을 비롯한 신재운, 김찬기 등이 자주 찾았다. 1940년 2월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애족장이 각각 추서하였다.
현영만 묘
현영만(1921-1981)은 1940년 4월 대구사범학교 특설강습과에 입학하였다. 6월 동급생 조형길(趙亨吉)·김병욱(金炳旭)과 함께 비밀결사를 결성하기로 밀약한 후 다른 동급생 이형수(李亨洙) 등 여러 명을 포섭해갔다. 12월 1일 현영만 등은 학교 근처 대봉정(大鳳町)에 있는 이형수의 하숙방에서 무우원(無憂園)을 결성하고 약칭 ‘M’이라 했다. ‘무우원’이란 말 그대로 근심·걱정 없는 낙원이란 뜻인데, 승려 출신으로 결사를 주도한 조형길[본명 조소영(趙宵影)]의 제안으로 지어진 불교 색채의 이름이다. 『백유경(百喩經)』 속 우화들의 가르침대로 대승불교 정신에 입각하여 폭력투쟁을 지양하고, 조선어문학 연구를 통한 문화향상과 경제 부문의 실력양성으로 민족의식 고양과 독립 달성, 궁극적으로 민족의 낙원을 건설함에 목표를 두었다. 또한 일제가 내세우는 내선일체론(內鮮一體論)의 기만성과 동조동근설(同祖同根說)의 허구성을 하나하나 짚어내 폭로함과 아울러 지원병 모집, 공출·징용 등의 강박적 요구는 일절 거부하기로 당면 행동방침을 정하였다. 규약도 정하여 집행장 휘하에 총무·선전·경제·과학·종교·문예·후생의 7개부를 두기로 하였다. 집행장은 조형길이고 현영만이 총무부장을 맡았다. 현영만은 1941년 3월 말 대구사범학교를 수료하고 경산의 진량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함께 교사가 된 김병욱·이형수와 양산(梁山) 통도사의 스님 등 여러 명을 끌어들여 조직을 키워나갔다. 그러던 중 1943년 6월 어느 조직원의 밀고로 회원 18명이 경찰에 붙잡혀갔고, 그 중 13명은 예심에서 풀려났으나 도쿄 지부장 최수원(崔壽源)이 대구경찰서 유치장에서 사망하고 현영만 외 조형길·김병욱·강증룡 등 4명은 기소되었다. 1944년 6월 1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겪던 중 광복을 맞이하여 석방되었다. 현영만은 1977년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사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서상일 상
서상일(1887 -1962)은 경상북도 대구(大邱)에서 태어났다. 1909년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비밀결사의 청년단체로서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안희제(安熙濟) 김동삼(金東三) 윤병호(尹炳浩) 남형우(南亨祐) 박중화(朴重華) 배천택(裵天澤) 등 8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조직하여 지하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한 후에는 1913년에 대구에서 박상진(朴尙鎭) 등 동지들과 함께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의 일을 했으며, 1915년에는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 중앙총부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한 후, 1920년 3월에 만주로부터 무기를 반입하여 일제기관을 습격할 계획을 하다가 한때 일제 관헌에게 체포되었다. 1921년 8월 미국에서 열린 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그 서명대표로 활약하였다. 1924년에는 『농림(農林)』과 『민중운동(民衆運動)』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여 흑우회(黑友會) 계통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45년 8 15광복 후에는 송진우(宋鎭禹) 장덕수(張德秀)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창립하여 총무로 선임되었으며 1948년에는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헌법기초위원으로 활약하였고 제헌국회 말기에는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발기하여 최초의 개헌안을 제기했다. 1950년대에는 사회민주주의 정당활동을 벌여, 1956년 진보당(進步黨) 창당에 참가하여 간부가 되었으며, 1960년에는 사회대중당(社會大衆黨)을 창당하였다. 1960년에 제5대 민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신병으로 활동을 못하다가 1962년에 병사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독립운동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강원형 묘
강원형(1862 - 1914)은 경상북도 칠곡(漆谷)군 지천(枝川)면 신동(新洞)리에서 태어났다. 1895년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만행이 자행되자 이를 규탄하는 구국상소를 올렸다. 1904년 2월 일본이 러 일전쟁을 도발하고 일본군을 한국에 상륙시켜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해서 내정을 간섭하며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1905년 1월 대한십삼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를 설치하고 그 수좌(首座)가 되어 일본공사관에 항의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침략정책과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반성을 촉구했으며, 일본이 계속 내정간섭을 자행할 때에는 결사적으로 이에 맞서 싸울 결의를 전달하였다. 1905년 3월 일본 헌병대가 전참판 최익현(崔益鉉), 전판서 김학진(金鶴鎭), 비서승 허 위(許蔿) 등 3인을 일제 침략정책을 규탄하는 격문을 돌렸다 하여 구속하자, 강원형은 일본군 사령부에 항의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불법을 힐문하고 3인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또한 대한13도유약소의 대표로서 각국 공사관에 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교활한 침략정책을 규탄하고 3인의 구속에 대한 공개담판을 요구하였다. 강원형 등의 이러한 운동으로 3인은 석방되었으나 강원형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45일간 구속되었다. 1905년 5월에 석방된 후에도 일본의 배신과 침략정책을 규탄하는 항의공함을 일본 공사관에 여러 차례 발송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곧 13도 유생 연명소(聯名疏)에 소수(疏首)가 되어 상소를 올리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단을 요구하고, 일본 공사의 횡포무례를 엄징할 것을 요구했으며, 같은 뜻을 시민들과 세계에 성명하여 시민들의 국권회복에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이로 인하여 1905년 11월 28일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4개월간 투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