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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재 구 묘

유형
묘소 | 안내판·표지석 | 비석
주소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 산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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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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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이윤재(1888~1942)는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국권회복을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김해서 합성학교의 교사가 되어 구국교육운동을 전개했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마산의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에서 국사와 국어를 교육하고 마산의 예수교 청년면려회 회장과 유년주일학교 교장으로 활동했다. 1919년 평안북도 영변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이 지방의 3·1운동에 앞장서서 주동적 역할을 하다가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게 붙잡혀 1919년 7월 3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에 출옥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채호(申采浩) 등 독립운동가들을 만나보고 1924년 9월에 귀국하여 이승훈(李昇薰)이 설립한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교육에 종사했다. 1925년에 안창호(安昌浩)가 조직한 민족운동단체인 흥사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해 4월부터 협성학교에서 국어와 국사를 담당하여 교육하면서 허무당 선언서 발표에 관여하였다. 1927년 8월에 조선어연구회의 동지들과 함께 국어사전 편찬의 준비활동을 시작하였다. 또한 이해에 민족정신과 민족문화의 발굴·보존·계승을 위한 잡지인 『한빛』을 창간하여 편집 겸 발행인으로서 활동하였다. 이 잡지는 역사, 사회, 전기, 한글 연구논문과 기행문, 수필문 등을 수록하여 민족문화 보급운동을 통해서 독립사상을 고취한 잡지였다. 1929년 10월 31일에 한글 기념식을 거행하게 되는 날을 택하여, 조선교육협회간에 모인 각계 유지 108인의 발기로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고 국어사전 편찬을 위한 편찬위원회 집행위원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 해에 사전편찬의 일로 중국 상해에 망명중인 김두봉을 만나러 다녀왔다. 1930년에는 혼란에 빠진 국문법의 확립과 맞춤법의 통일의 위해 권덕규(權悳奎)·최현배(崔鉉培)·김윤경(金允經) 등과 함께 한글맞춤법 통일안 작성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1년에는 종래의 조선어연구회를 조선어학회로 개칭했으며, 조선어학회에서 베푼 하기(夏期) 한글강습회 일로 전국을 순회하였다. 1932년에 조선어학회의 기관지로서 『한글』을 간행하고 그 편집 겸 발행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33년 10월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완성하여 발표하고 그 보급운동에 힘썼다. 1934년에는 국학 및 사학자 동지들과 함께 역사 연구단체인 진단학회를 창립하는데 참가하고, 11월에 기관지 『진단학보』를 발간하는 일에도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1935년 1월에 조선어 표준어사정위원회를 개최하여 그 책임자로 활동했으며, 1936년에는 그동안 주관해서 정리해 오던 조선어 표준말 사정을 완성하여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발표하였다. 또한 1936년에는 조선어학회 전담으로 사전편찬의 신규사업을 시작하여 상임편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7년 6월에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일경에 붙잡혀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받고 상고하여 1941년 11월 17일 고등법원에서 무죄 방면되었다.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운동으로 최현배·김윤경 등 동지들과 함께 다시 일경에 붙잡혀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다. 1943년 12월 8일 일경의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감방에서 옥사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탐방로그

이윤재 선생 묘소를 찾기 위해 대구 달성군에 왔다. 하지만 탐방 이후에 선생의 묘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1-1묘역(묘비번호 499)로 이장되었다. 또한 묘비 역시 김해한글박물관 근처에 세워져있는 이윤재 선생의 조형물 근처로 옮겨졌다.

인물정보

성명
이윤재
한자명
李允宰
운동계열
문화운동
생몰년도
1888 ~ 1943
본적
경상남도 김해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1919년 3월 3.1운동에 관계하여 평양감옥(平壤監獄)에서 3년간 복역하였음 2. 1937년 6월 7일 수양동우회 사건(修養同友會事件)으로 서대문감옥(西大門監獄)에 투옥(投獄)되어 1938년 10월에 출옥하였음 3.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으로 함남(咸南) 홍원경찰서(洪原警察署)에 구검(拘檢)되어 1943년 9월 12일 함흥형무소(咸興刑務所)에 이감(移監)되었는데 심한 고문(拷問)의 원인으로 1943년 9월 12일 옥중(獄中)에서 작고(作故)하였음 동아일보(東亞日報)를 발기(發起)하여 편집 감독(編輯監督)으로 있었다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