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곶면민 만세운동 유적비
1919년 3월 22일은 오후 2시경 임용우, 윤영규, 조남윤, 최우석, 이병린 등의 주도로 장터에 있던 약 200여 명의 군중들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시위군중은 옛 통진읍인 군하리로 행진하여 향교, 보통학교, 면사무소 앞을 차례로 돌며 만세시위를 했다. 이날 군하리 출신 박용희의 주도로 성태영, 백일환, 이살눔은 4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통진향교, 면사무소, 주재소 등지로 시위행렬을 이끌었다. 성태영은 단 위에 올라가 독립연설을 하고 백일환은 이를 저지하던 일본 순사를 폭행하였다. 또한 이들은 한국인 순사보들에게 만세를 부르라며 민족의식을 고양하였다. 일주일 후인 29일에 다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29일 오전 11시경 마을주민 400여 명이 읍내에 모이자, 조남윤은 당인표 등과 함께 이들을 지휘하여 향교와 면사무소 앞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한편 월곶면의 임용우·최복석은 29일 정오경 갈산리에 모였다가 군하리 공자묘와 공립보통학교, 면사무소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에 앞서 28일 밤 정인교·윤종근·민창식은 마을 주민 수십 명과 함께 마을 인근 함반산 꼭대기에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덕적도의 명덕학교 교사였던 임용우는 4월 9일 학교 운동회에서 이재관·차경창 등과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고 옥고를 시르던 중 일제의 가혹한 고문으로 인해 같은 해 5월 10일 옥사하였다. 조남윤, 최우석, 정인교, 윤종근, 최복석, 이병린은 각각 징역 1년, 윤영규는 징역 8월, 이살눔, 정인교, 민창식은 징역 6월을 선고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