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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주리 애국지사 6인 순국지
고주리는 3.1운동 당시 향남면, 팔탄면 지역의 주요한 근거지였으며, 독립운동가 김흥열을 비롯한 애국선열 6인은 화성지역 곳곳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화성지역 만세운동에 두려움을 느낀 일제는 제79연대 소속 아리타 도시오 중위와 군인들을 보내 김흥열, 김성열, 김세열 형제와 김성열의 아들 김흥복, 김세열의 아들 김주남, 김주업을 이곳에서 무참히 학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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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주리 애국선열 6인의 묘
이곳은 화성지역에서 격렬하게 전개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본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한 김흥열, 김성열, 김세열 형제와 김성열의 아들 김흥복, 김세열의 아들 김주남, 김주업의 묘역이다. 독립운동가 김흥열을 비롯한 애국선열 6인은 화성지역 곳곳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이 시위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돌아왔다. 들불과 같은 화성지역 만세운동에 두려움을 느낀 일제는 제79연대 소속 아리타 도시오 중위와 군인들을 보내 김흥열 일가를 몰살하였다. 고주리 애국선열 6인의 독립정신과 그 공훈을 기리고자 화성시에서 세운 묘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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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안장터 3.1운동 만세 시위지
발안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는 발안 및 인근 주민들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발안장터에서는 1919년 3월 31일과 4월 5일 두 차례에 걸쳐 만세 시위대 1,000여 명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가행진을 하며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때 일본 헌병이 마구 휘두르는 총칼에 시위를 주도하던 이정근이 순국하였다. 4월 5일에는 김흥렬·안상용·안진순·안정옥·안봉순·김덕용·강태성 등의 주도로 팔탄면·장안면·향남면 주민들이 발안장에 모여 격렬하게 만세 시위를 벌였는데, 시위대와 일본 경찰의 충돌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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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안3.1독립운동기념탑
1919년 4월 5일 향남면 발안 장날에는 1,0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터를 행진하였고, 면사무소와 발안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일제 식민기관에 직접 타격을 가하였다. 일본 수비대는 총칼로 시위대를 진압하였으며, 수비대가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도착한 증원군 1개 소대는 곧바로 시위 군중에게 무차별로 사격하였다. 시위 군중을 이끌던 이정근은 현장에서 즉사하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 후유증으로 불구되거나 사망하였다. 이후 제암리교회 집단학살 만행과 고주리 천도교인 참살사건으로 확산되었다. 발안 3.1독립운동에 참여한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국제라이온스협회에서 1988년에 세운 기념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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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근 창의탑
이정근(1856 - 1919)은 1919년 4월 5일 발안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는데, 1천여 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부상자가 발생하자, 격노한 시위군중과 함께 일경들에게 투석으로 대항하여 일본인 순사부장이 돌에 맞아 죽었으며, 그는 무력 충돌 때 일본 경찰이 휘두르는 칼에 맞아 순국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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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 기념비
1919년 3.1운동 시 화성시 제암리에서도 격렬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특히 3월 15일. 4월 5일의 발안장날 격렬한 시위가 있었다. 일본군 중위 아리타 도시오는 4월 15일 오후, 부하 11명을 인솔하고 일본인 순사 1명과 한국인 순사보인 조희창, 발안에 사는 일본인 사사카를 앞세워 제암리로 가서 주민 가운데 15세 이상 남자를 제암리교회에 모이게 하고 출입문을 잠근 후 집중사격을 했다. 일제는 학살만행 현장을 은폐하기 위해 사격을 마치고 예배당에 짚 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그로인해 2명의 부인을 포함하여 23명이 그곳에서 순국했다. 제암리 학살사건을 기리고 일제의 총칼에 죽은 영령을 위로하기 위하여 1946년 4월 15일에 제암리 입구에 세운 기념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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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순국기념탑
기념탑이 세워진 이곳은 제암리 주민들이 항상 나라 찾을 것을 기도드렸던 예배당이 있었던 자리이다.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이곳을 노려왔던 일경은 4월 15일 갑자기 마을을 습격하여 23명의 주민을 강제로 예배당 안에 감금한 뒤 불을 지르고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마을은 온통 불바다가 되었고 예배당은 한줌의 잿더미로 화하고 말았다. 1959년 이곳 예배당 자리에 제암리와 고주리에서 순국한 29명의 명복을 빌고 후세에 이 사실을 길이 전하기 위하여 기념비를 건립했었다. 그러나 비가 작고 모양이 초라하여 문화공보부는 이곳을 사적 제299호로 지정, 정화하면서 원래 기념비가 있던 자리에 규모를 크게 하여 다시 3·1운동 순국 기념탑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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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필드 동상
스코필드(1889 - 1970) 박사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며 1970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된 유일한 외국인이다. 1916년 세브란스의전 세균학 교수로 한국에 와 1919년 3월 1일 역사적인 독립만세 현장을 사진으로 남겼으며, 3·1운동 이후에 일본의 조선인 학살과 고문을 국제 사회에 고발했고, 위험을 무릅쓰고 제암리 학살 사건과 3.1운동 등 일제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던 스코필드 박사와 제암리 사건을 재조명하기 위해 화성시에서 동상을 건립했다. 1959년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해 보육원 후원과 흥국 직업학교를 돕는 등 사회봉사 활동에 헌신해 대한민국 문화훈장·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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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안만세거리(발안주재소터)
1919년 3월 31일 발안장터에서 펼쳐진 만세운동은 1천여 명의 군중들이 참여했는데 당시 만세운동이 격화되어 일본인들의 가옥에 돌을 던지고, 소학교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이후 만세운동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4월 3일 우정·장안지역에서 군중에 의해 일본 순사가 처단되고, 화수리주재소가 불에 타 사라졌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이정근은 제자들과 의논해 4월 5일 발안장을 이용해 3.1만세운동의 주요 지점인 「발안주재소」 습격을 계획하였다. 인근의 제암리, 고주리, 수촌리 등의 주민 800여 명이 모여 발안주재소를 향해 투석전을 전개했으며, 일경의 무력 진압과정에서 이정근은 무장한 수비대의 칼에 찔려 순국하였다. 이날의 만세운동 이후 일제는 만세운동 참여자에 대해 검거활동에 나서면서 4월 15일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이 발생하게 되었으며, 제암리에서 23명, 고주리에서 6명 등 총 29명의 무고한 생명이 학살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발안 만세운동의 주요 지점이었던 발안주재소가 있던 자리에는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정근 의사의 얼굴을 새긴 동판과 만세운동의 선두에 선 벽화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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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남면사무소
이곳은 일제강점기 향남면사무소가 자리했던 터이다. 향남 지역은 1914년 4월 1일부로 수원군 향남면으로 개편되었고 향남면사무소는 1993년 6월에 사무소를 행정리로 옮기기까지 현 위치에서 기능하였다. 당시 면사무소는 단층 기와집 건물로 창고, 숙직실 등이 딸려 있었으며 면장과 직원은 모두 조선인이었다. 현재는 발안만세시장 평리공영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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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영준 묘
옥영준(1892-1957)은 1906년 부친을 따라 만주로 건너갔으며, 1919년 전덕원(全德元)이 대한독립단원 수십명을 거느리고 국내에 들어와 활동할 때 함께하였다. 평북 용천군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후에는 다시 만주로 건너가 활동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 (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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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종찬 추념비
주종찬(1893-1933)은 1919년 4월 3일 거제군(巨濟郡) 이운면(二運面, 지금의 장승포) 옥포리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대한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적기(赤旗) 7개를 옥포리 시장에 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많은 군중이 이에 호응하여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일경의 탄압으로 군중은 해산되고 그는 검거되었으며,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