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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시위지 우정면사무소
우정면사무소는 1919년 4월 3일 우정면과 장안면의 3.1만세운동이 일어났던 대표적인 항쟁지이나 현재는 없어져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시위군중들은 쌍봉산에서 독립하려는 결의를 다진 후 조암리를 거쳐 우정면사무소에 도착하여 46㎡(14평) 정도 규모의 초가집인 면사무소를 부수고, 집기와 서류를 불태움으로써 일제의 식민지배에 저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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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병한 집 터
차병한(1885 - 1933)은 장안면 석포리 출신의 구장으로서, 1919년 4월 3일 장안면, 우정면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 시위를 차희식, 차병혁, 장제덕, 장소진, 이영쇠 등과 계획하고 그 진행을 주도하였다. 3월 1일 이후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여러 사람들과 연락하며 고향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날 차병혁 등과 조암 장터에 모인 2천 여명의 시위군중을 지휘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앞세워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안면 사무소로 행진하였다. 이 때 그는 차병혁과 함께 면장 김현묵을 만나 동참할 것을 권유하고, 그 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면사무소 건물을 파괴하고, 김현묵을 선두에 세워 인근의 쌍봉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다시 시위군중과 함께 우정면 사무소로 가서 서류를 끄집어내어 불태우고 투석으로 면사무소를 파괴하였다. 오후 5시경 시위군중과 화수리 경찰 주재소를 습격했다. 공포를 발사하며 대항하는 일본 경찰과 투석전을 벌여 일본인 순사 천단풍태랑(川端豊太郞)을 죽이고, 주재소를 파괴하고 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며, 1920년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소요·살인·방화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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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병혁 집
차병혁은 경기도 화성(華城) 사람이다. 1919년 4월 3일 차희식(車喜植)·차병한(車炳漢)·차인범(車仁範) 등의 동지와 함께 화성군 장안(長安)·우정(雨汀)면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지휘하였다. 그는 3월 1일 이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는 사실을 전해듣고 4월 3일 아침 일찍 석포리(石浦里) 이장인 차병한·차희식과 함께 이영쇠(李永釗) 등에게 장안면 사무소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되어 있으니 인근 주민들에게 몽둥이를 가지고 모이도록 연락을 취하게 하였다. 한편 자신은 오전 10시 30분 경 차병한과 함께 어은리(漁隱里)에 있는 장안면 사무소로 가서 면장 김현묵에게 면장 김현묵(金賢默)에게 동참할 것을 강권하였다. 200여 명의 만세시위 군중이 면사무소에 모이자 김현묵이 독립만세 운동에 대한 취지를 연설하였고 그는 곧 선두에 서서 투석과 몽둥이로 면사무소 건물을 부수고 공문서를 파기하였다. 점차 군중이 1천여 명으로 늘어나자 차병한·이영쇠 등과 함께 이들을 인근의 쌍봉산(雙峯山)으로 인솔하여 그 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게 했다. 이어서 차인범 등과 함께 2천여 명으로 늘어난 만세시위군중을 인솔하여 우정면 사무소로 가서 그 곳의 건물·집기류·공문서를 파기하고 계속적으로 화수리(花.樹里)에 있는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격렬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살인·방화와 보안법 위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고 다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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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정
화성시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을 맞아 격렬했던 화성지역의 독립운동사를 널리 알리고 독립정신을 기리고자 100여 년 전의 그 길을 60% 이상 복원하여 화성 3·1운동 만세길을 조성했다. 우정·장안지역의 3·1만세운동을 주도한 장안면 석포리 출신의 차병혁 생가는 화성지역 독립운동가의 생가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곳인데, 화성 3·1운동 만세길을 조성하며 차병혁의 집 바로 앞으로 「만세뜰」이라는 조형물이 설치됐으며, 집 근처에는 「3·1만세정」이 세워졌다. 총 31km로 이어진 만세길에는 독립운동가의 집터, 생가, 관공서, 횃불 시위운동 장소 등이 남아있어, 그날의 역사를 되새겨 볼 수 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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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죽산 횃불 시위터
이곳은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화성 지역민들이 밤마다 산에 올라가 횃불을 피우고 만세를 불렀던 곳이다. 1919년 4월 1일 개죽산을 시작으로 쌍봉산, 남산, 천덕산, 무봉산 등 화성 지역의 각 산봉우리에서는 일제히 횃불이 치솟았다. 총 10개의 산봉우리에서 횃불시위가 진행되었는데, 이는 야간 산상횃불시위(구릉이나 산 위에서 횃불을 들고 벌이는 만세시위의 한 형태)라는 새로운 형태의 시위로 발전했다. 비교적 적은 수의 인원이 거주하고 있던 마을의 주민들은 평지에서 만세시위를 벌일 경우 일제 경찰에게 쉽게 제압당할 수 있기에 이를 극복할 대안으로 일제 경찰의 활동이 어려운 야간에, 산 위에서 만세시위를 진행했으며, 개죽산에서의 횃불시위는 수촌리 인근 마을주민들의 독립 의지를 드높이고, 우정·장안지역의 사람들이 3·1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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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열 집
이곳은 백낙열(1865 - 1937)이 살았던 곳으로, 장안면 수촌리의 구장으로 활동하면서 우정·장안지역의 3·1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구장으로서 마을 주민들의 만세시위 동참을 이끌어 냈을 뿐만 아니라 삼괴지역의 천도교 지도자로서 천도교도 다수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1919년 3월 1일에 김성렬, 안종후 등과 함께 서울에서 열린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4월 3일에 장안면 석포리에서 차희식 등이 주도한 시위가 본격화되었다. 당시 수촌리 이장을 지내던 백낙열은 마을 주민들에게 시위를 알리면서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다. 이때 우정면사무소와 화수주재소를 습격하여 집기류와 공문서를 파기하였고 일본인 순사 1명을 처단하기도 하였다. 시위 후 체포를 피해 계룡산 등지를 전전하며 3년간 숨어 지내다 1937년 1월에 사망하였다. 2002년에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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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기념비(장안면)
1919년 4월 3일 화성군 수촌리와 화수리에서 대대적인 독립시위가 일어났다. 차희식 등 수촌리 지사들은 다른 지역 주민들과 함께 장안면 사무소와 우정면 사무소를 불태우고 쌍봉산에 올라가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무차별 진압한 일본 순사부장 가와바타(川瑞農太郞)에게 시위 군민들이 피살되자 화수리 주재소를 불태우고 그를 잡아 처단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4월 15일 이른 새벽에 이 마을을 급습하여 불을 질러 온 마을이 잿더미가 되었고 왜병들의 총칼을 맞아 많이 죽거나 다쳤다. 이 소식을 듣고 캐나다인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한국명 석호필)가 방문하여 부상자를 위문하고 치료해주었다. 3·1운동 당시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장안면 수촌마을 지사들과 이를 도운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74년 삼일절 때 건립한 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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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촌교회
수촌리 마을은 우정·장안지역에서 가장 격렬하게 저항운동을 펼친 장소로, 그중 1905년 창건된 수촌교회는 수촌리 지역에서의 3·1운동을 주도한 교회로, 10여 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하기도 한 곳이기도 하다. 교인들은 3·1운동 당시, 적극적으로 마을주민들에게 만세운동의 참여를 독려하며 최전선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 수촌교회는 물론, 마을의 가옥 42채 중 38채, 즉 마을 전체가 완전히 파괴되며 화성지역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지역이기도 하다. 수촌교회에는 당시 초가 형태의 예배당을 복원한 건물이 남아있으며, 바로 옆에는 현재까지도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과 마을 사람들이 예배를 보는 신식 예배당이 마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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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모 집
이순모(1893 - 1975)는 1919년 4월 3일 화성군 장안·우정면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지휘하였는데, 장안면사무소로 달려가 200여 명의 군중의 선두에 서서 투석과 몽둥이로 면사무소를 부수고, 공문서를 파기한 후, 군중이 점차 1천여 명으로 증가하자 쌍봉산으로 인솔하여 독립만세를 외친 후, 2천여 명으로 늘어난 군중을 인솔하여 우정면사무소를 습격하고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어서 화수리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였는데, 순사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가 권총을 발사하며 도망하자, 동지들과 함께 추격하여 붙잡아 격살시켜 버리는 등 격렬하게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살인·방화와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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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학 묘
김종학(1885 - 1925)은 경기도 화성(華城) 사람으로, 1919년 4월 3일 장안면·우정면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만세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장안면사무소를 거쳐 쌍봉산으로 가던 중 우정면사무소로 가기 위하여 내려오던 시위군중과 합류하여 면사무소에 도착 후 선두에 나서서 서류를 끄집어내어 불태우고, 투석으로 면사무소 건물을 파괴하였다. 오후 5시경 시위군중과 함께 몽둥이를 가지고 화수리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여, 공포를 쏘며 대항하는 일본 경찰과 투석전을 벌여 일본인 순사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을 죽이고, 주재소를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며, 1920년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소요·살인·방화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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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면사무소
이곳은 장안면사무소가 있던 곳이다. 1919년 4월 3일 장안과 우정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하던 시위군중은 주곡리를 출발하여 석포리, 수촌리를 지나 어은리에 있는 장안면사무소에 도착하였다. 장안면사무소에 모인 사람들은 장안면장에게 만세운동에 함께 동참할 것을 요구하고는 면사무소에 불을 질러 모두 태웠다. 시위군중들이 면사무소를 모두 불태운 것은 일제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의 표시였다. 이후 시위군중은 장안면사무소에서 쌍봉산으로 이동하였다. 장안면사무소 터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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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순서 묘
양순서(미상 - 1919)는 1919년 4월 3일 장안면·우정면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2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석포리 조암장터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앞세워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안면사무소로 행진 후 선두에 서서 면사무소를 파괴한 뒤 시위군중과 함께 인근의 쌍봉산으로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다시 시위군중과 함께 우정면사무소로 가서 서류를 끄집어내어 불태우고, 투석으로 면사무소 건물을 파괴한 뒤 오후 5시경 시위군중과 함께 몽둥이를 가지고 화수리경찰주재소를 습격하였다. 공포를 발사하며 대항하는 일본 경찰과 투석전을 벌여 일본인 순사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을 죽이고, 주재소를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4월 10일 체포되었다. 경찰 주재소에서 심한 고문을 받고 이튿날 순국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