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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창오 기념비
황창오(1896 - 1982)는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 참가하여 고향인 황해도 해주 동운면 삼정리에서 대중을 규합, 조직하여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계속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투쟁조직을 만들다가 일본 경찰의 감시와 탄압을 받게 되자, 1920년 5월 상해로 망명하였다. 같은 해 7월 상해에서 대동단(大同團) 가입 후 일제와의 무력독립투쟁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군자금을 모집할 목적으로 국내에 들어와 활약하다 1921년 이 사실이 발각되어 일본 경찰에 붙잡혀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불복, 항소하여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27년에 가석방되었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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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 묘
이인(1896 - 1979)은 경북 대구(大邱) 출신이며, 일제강점기 의열단 사건, 광주학생사건, 안창호 사건 등을 맡은 법조인이자 변호사이며 정치인이다. 일본 명치대학 법학부 졸업 후 1923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 변호사를 개업하고 이후 일제강점기 당시 김병로, 허헌과 함께 독립운동가 및 애국자, 사회저명인사들을 상대로 무료변호를 하여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서 명망을 날렸다. 1927년 2월 신간회 중앙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29년 10월 조선어연구회의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위원이 되어 사전편찬사업을 적극 지원했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붙잡혀 이듬해 1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의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 2년 3개월의 옥고를 겪었다. 1945년 8·15광복 후에는 대법관, 검찰총장, 법무장관을 역임했으며, 제헌의회와 제3대 민의원으로 당선되어 건국에 기여하였다. 만년에 재산을 한글학회에 기증하여 재정지원을 하였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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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기념비(서신면 상안리)
기미년 3월 26일부터 당시 상안리에 거주하던 이원행이 주도하고, 서신면민이 합세하여 사강장날에 모인 수많은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는데, 전곡리의 홍성휴·이재항·홍대우와 송교리의 홍대규는 더욱 울분에 싸여 일제 만행에 소리쳐 항거했다. 그 후 일제 왜경과 헌병은 마을을 습격히여 불을 내어 전곡리의 홍대우를 학살하는 등 만행을 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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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군필 집 터
정군필(1883 - 1973)은 경기도 화성(華城) 사람으로, 1919년 3월 26일부터 3월 28일까지 홍 면(洪면) 등이 계획하여 전개한 화성군 송산면(松山面)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사강리 장날인 28일에 홍 면 등과 함께 1천여 명의 군중이 사강리 뒷산에 모여 전개한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는데, 이 때 일본인 순사부장 야구광삼(野口廣三)이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려 했으나 군중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자, 일경은 주동자 홍 면 외 2명을 체포하여 꿇어 앉혀 놓았다. 그런데 홍 면이 갑자기 일어서서 독립만세를 외치자 야구광삼이 권총을 발사하여 총알이 홍면의 어깨를 관통하였다. 홍 면이 비명을 지르고 쓰러지면서 자기에게 발포한 일경을 죽이라고 외치는 광경을 본 독립만세 시위군중이 일시에 분노하여 야구광삼에게 달려들자, 그는 자전거를 타고 사강리 주재소 방향으로 도주했다. 이 때 격분한 그는 홍 면의 동생 홍준옥·장인 김명제(金命濟) 및 왕광연(王光演)·문상익(文相翊)·김교창(金敎昌) 등과 추격하여 미처 주재소에 도착하지 못한 일경을 도로에서 포위하여 투석으로 격살시키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소요·살인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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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효선, 홍승한 집 터
홍효선(1879 - 1919)은 1919년 3월 26일부터 28일까지 송산면 사강리(松山面 沙江里) 일대에서, 홍 면·왕광연(王光演)·문상익(文相翊)·홍명선(洪明善)·김교창(金敎昌) 등이 주동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그는 3월 26일 오후 5시경 송산면 사무소에 모인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내걸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다시 3월 28일 오후에 송산면 뒷산에 모인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벌였다. 일본인 순사부장 노구치(野口廣三)가 출동하였으나 시위군중은 더욱 기세를 올리며 홍면옥 등 수십명이 면사무소로 달려가, 면장과 면서기에게 독립만세 부를 것을 강요하였다. 오후 3시경 뒤따라 온 노구치가 홍면옥 등을 강제로 주재소로 연행하려 하여 시위군중과 충돌하게 되었다.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순사부장이 권총으로 홍면옥을 쏘아 홍면옥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자, 시위군중은 일시에 격노하여 일경에게 달려들었다. 순사부장은 사태가 불리해지자 자전거를 타고 주재소 방향으로 도주하였다. 이 때 그는 왕광연·홍명선·김교창·문상익·홍남후(洪南厚)·김명제(金命濟)·민용운(閔龍雲)·정군필(鄭君弼) 등 20여 명과 순사부장을 추격하여, 미처 주재소에 도착하지 못한 일경을 노상에서 포위하고 돌과 몽둥이로 때려 격살하였다. 그 후 결국 일경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던 중 잔인한 고문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승한(1894 - 1928)은 사강리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마을 주민들은 3월 26일 오후 5시 경 송산면 사강리(沙江里, 현 華城市)의 면사무소 부근에서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27일에는 사강리 서쪽 육일리 방면에서 만세운동을 펼쳤으며, 사강리의 장날인 3월 28일 송산면의 주민들은 오전 10시 경부터 사강장터에서 부친 홍효선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여 오후 2시 경에는 면사무소와 사강리 주재소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홍승한은 3월 28일 송산면 사강리 면사무소 앞에서 1,000여명의 시위대와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 후 체포된 홍승한은 1920년 4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은 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0년 4월 28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1년에 홍효선에게 건국훈장 애국장, 2006년에 홍승한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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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제 집 터
김명제(1863 - 1926)는 경기도 화성(華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26일부터 3월 28일까지 홍 면(洪면) 등이 계획하여 전개한 화성군 송산면(松山面)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3월 26일부터 송산면 사강리(沙江里)의 면사무소에서 100여 명의 주민과 함께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장날인 이달 28일에도 사위 홍 면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이날 오후에 송산면 뒷산에 1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고 있을 때, 일본인 순사부장 야구광삼(野口廣三)이 이를 제지하려 하였으나 군중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자, 야구광삼은 주동자 홍 면 외 2명을 체포하여 꿇어 앉혀 놓았다. 그러나 홍 면이 갑자기 일어나서 독립만세를 외치자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야구광삼이 권총을 발사하여 총알이 홍 면의 어깨를 관통하였다. 홍 면이 비명을 지르고 쓰러지면서 일본인 순사를 죽이라고 외치는 모습을 본 만세시위군중의 분노는 일시에 폭발하였다. 그는 잠깐 집에 들른 사이에 이 소식을 딸로부터 전해듣고 곧 현장으로 달려가 야구광삼에게 달려들며 자기도 죽여 보라고 대들었는데, 이 때 홍 면의 동생 홍준옥(洪준玉) 등도 함께 달려들었다. 그러자 야구광삼은 자전거를 타고 사강리 주재소 방향으로 도주하였는데, 그는 홍준옥·왕광연(王光演)·문상익(文相翊) 등과 함께 추적하여 도로에서 포위하였다. 이 때 이태순(李泰順)이 발로 자전거를 차서 넘어뜨리자 다른 사람들과 함께 투석으로 사위를 죽인 원수를 살해하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소요·살인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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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집 집 터
이경집(1883 - 1943)은 경기도 수원군(水原郡) 송산면(松山面)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옥고를 치렀다. 송산면에서는 1919년 3월 26일~28일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마을 주민들은 3월 26일 오후 5시 경 송산면 사강리(沙江里, 현 華城市)의 면사무소 부근에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27일에는 사강리 서쪽 육일리 방면에서 만세운동을 펼쳤으며, 사강리의 장날인 3월 28일, 송산면의 주민들은 오전 10시 경부터 사강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여 오후 2시 경에는 면사무소와 사강리 주재소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경집은 3월 28일 송산면 사강리의 면사무소 앞에서 1,000여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 후 체포된 이경집은 1920년 4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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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옥 집 터
홍준옥(1888 - 1945)은 경기도 화성(華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26일부터 3월 28일까지 그의 형 홍 면 등이 계획하여 전개한 화성군 송산면(松山面) 사강리(沙江里)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3월 26일 송산면 사무소에서 200여 명의 독립만세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사강 장날인 28일에도 형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 오후 송산면 뒷산에서 1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 대대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 때 일본인 순사부장 야구광삼(野口廣三)이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려 했으나, 군중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야구광삼은 주동자 홍 면 외 2명을 체포하여 꿇어 앉혀 놓았는데, 갑자기 홍 면이 일어서서 독립만세를 외치자, 야구광삼이 권총을 발사하여 총알이 홍 면의 어깨를 관통하였다. 이 때 그는 형을 업고서 면사무소로 가서 응급조치를 하며 형에게 발포한 일본인 수사를 죽이라고 부르짖었다. 당시 면사무소 서기였던 문상익(文相翊)이 뛰쳐나가서 그 순사를 죽이라고 외치자, 사태의 위급함을 느껴 자전거를 타고 사강리 주재소 방향으로 도주하는 일경을 추격했다. 그도 즉시 뛰어나와 형의 장인김명제(金命濟)와 왕광연(王光演)·김교창(金敎昌) 등과 일경을 추격하여 미처 주재소에 도착하지 못한 야구광삼을 도로에서 포위하여 투석으로 격살시키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소요·살인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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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순원 집 터
안순원(1886 - 1950)은 1919년 3월 26일부터 28일까지 송산면 사강리(松山面 沙江里) 일대에서, 홍 면·왕광연(王光演)·문상익(文相翊)·홍명선(洪明善)·김교창(金敎昌) 등이 주동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그는 3월 26일 오후 5시경 송산면 사무소에 모인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내걸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다시 3월 28일 오후에 송산면 뒷산에 모인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벌였다. 일본인 순사부장 야구광삼(野口廣三)이 제지하려 했으나, 시위군중은 더욱 기세를 올리며 홍 면 등 수십 명이 면사무소로 달려가, 면장과 면서기에게 독립만세 부를 것을 강요하였다. 오후 3시경 뒤따라 온 야구광삼이 홍 면 등을 강제로 주재소로 연행하려 하여 시위군중과 충돌하게 되었다.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순사부장이 권총으로 홍 면을 쏘아, 홍 면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자, 시위군중은 일시에 격노하여 일경에게 달려들었다. 순사부장은 사태가 불리해지자 자전거를 타고 주재소 방향으로 도주하였다. 이 때 그는 왕광연·홍명선·김교창·문상익·홍남후(洪南厚)·김명제(金命濟)·민용운(閔龍雲)·정군필(鄭君弼) 등 20여 명과 함께 순사부장을 추격하여, 미처 주재소에 도착하지 못한 일경을 노상에서 포위하여 돌과 몽둥이로 구타하여 살해하는 등, 격렬히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1920년 5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소요·살인 혐의로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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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복용 집 터
홍복용(1903 - 1965)은 1919년 3월 경기도 수원군(水原郡) 송산면(松山面)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송산면 사강리(沙江里)의 만세운동은 홍면(洪冕) 등이 주도하였는데, 3월 26일 송산면 사무소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200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면장 이하 직원들을 면사무소 앞마당에 끌어내고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다음날 27일에도 송산면 시위는 계속되었고, 3월 28일 오후 2시경 홍복용은 사강리에서 700명의 군중과 함께 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날 시위에서 일본인 순사 노구치(野口)가 사망하고 경찰 1명이 부상당했다. 이에 맞선 일제는 경찰관 6명과 보병 4명을 급파하여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고 73명을 체포하였다. 홍복용은 이날의 만세시위로 체포되어 1920년 4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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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익 집 터
문상익(1893 - 1960)은 경기도 화성(華城) 사람으로, 1919년 3월 26일부터 3월 28일까지 홍 면 등이 계획하여 전개한 화성군 송산면(松山面)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송산면의 서기로 3월 26일부터 동면 사강리(沙江里)의 면사무소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사강 장날인 28일에도 홍 면 등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 오후 1천여 명의 군중이 송산면 뒷산에 모여 전개한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에도 참여하였는데, 이 때 일본인 순사부장 야구광삼(野口廣三)이 출동하여 이를 해산시키려 했으나, 군중들은 듣지 않고 계속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일경은 주동자 홍 면 외에 2명을 체포하여 꿇어 앉혀 놓았다. 그러나 홍 면이 갑자기 일어서며 독립만세를 외치자,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야구광삼은 권총을 발사하여 총알이 홍 면의 어깨를 관통하였다. 홍 면이 비명을 지르고 쓰러지면서 자기에게 발포한 순사를 죽이라고 외치는 광경을 본 시위군중들의 분노가 일시에 폭발하였다. 이에 야구광삼은 자전거를 타고 사강리 주재소 방향으로 도주하였다. 이 때 그는 일경을 죽이라고 외치며 홍 면의 동생 홍준옥·장인 김명제(金命濟)·김교창(金敎昌)·왕광연(王光演)·김용준(金容俊) 등과 추격하여 격살시키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소요·살인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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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광연 집 터
왕광연(1872 - 1951)은 1919년 3월 26일부터 3월 28일까지 홍 면(洪 면) 등이 계획하여 전개한 화성군 송산면(松山面)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3월 26일부터 송산면 사강리(沙江里)의 면사무소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1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사강 장날인 28일에도 홍 면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날 잠깐 외출하였다가 정오 경에 돌아와 홍종업(洪鍾業)의 집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1천여 명의 독립만세 시위군중이 모여 있던 뒷산으로부터 총성이 들렸다. 이 때 그는 남양(南陽) 사람으로부터 이 총성이 일본인 순사부장 야구광삼(野口廣三)이 해산명령에 굴하지 않고 계속 독립만세운동을 지휘하던 홍 면에게 가한 발포소리이며, 이 발포로 홍 면이 어깨에 관통상을 입었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그는 즉시 현장으로 달려갔는데, 이미 야구광삼은 분노한 군중을 두려워하여 사강리 주재소 방향으로 도망하고 난 뒤였다. 이에 그는 홍 면의 동생 홍준옥(洪준玉)·장인 김명제(金命濟)·문상익(文相翊)·김교창(金敎昌)·김용준(金容俊) 등과 함께 추적하여 주재소에 미처 도착하지 못한 야구광삼을 도로에서 포위하였다. 이 때 이태순(李泰順)이 발로 자전거를 차서 넘어뜨리자, 왕광연은 그를 죽이라고 외치고 뛰어서 도망치는 그의 머리를 몽둥이로 쳐서 넘어뜨리고 투석으로 살해하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소요·살인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1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