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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윤 묘
이재윤(1849~1911)은 경기도 양주(楊州) 출신으로 대과급제(大科及第)하여 벼슬이 우승지(右承旨)에 이르렀으나, 일제의 침략적 야욕에 대처하기 위하여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을 전개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1905년 을사늑약(乙巳條約) 이후 스승 면암의 뒤를 따라 의병장이 되었다. 이후 중국에 원세개(袁世凱)에게 구원병을 요청하고, 비밀리에 중국 관헌들과 일제를 한반도에서 몰아낼 일을 협의하였으나, 한반도가 일제식민지가 되자, 1911년 7월 13일 목을 매고 자결 순국하였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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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식 묘
유중식(1895~1971)은 포천 출신으로 경기도 포천군(抱川郡) 신북면(新北面)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시위 하루 전인 1919년 3월 29일 독립만세운동 통문을 같은 마을 사람들에게 회람하여 동참을 결정하였다. 1919년 3월 30일 신북면사무소에서 1,000여 명의 군중과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시위 후 주동자로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의 옥고를 치렀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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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공립보통학교 동맹 휴학지
포천공립보통학교 동맹 휴학지는 일본인 교장의 비교육적인 처사에 맞서 학생들이 동맹 휴학을 벌인 곳이다. 1927년 11월 26일에 포천공립보통학교의 마쓰하라 교장이 수업료를 못 낸 학생들을 구타하자 이에 분개한 4학년생 50여 명이 진정서를 제출하고 동맹 휴학에 들어갔다. 이들은 교장이 학생을 구타한 일 외에도 수업료를 거두지 못했다며 한국인 교사에게 월급을 지급하지 않은 일, 학생을 학교장 가사에 동원한 일 등을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자 교장은 오히려 포천경찰서에 학생들의 동맹 휴학을 진압해 달라고 요청하고, 주동학생들에게 무기정학 또는 5일간의 유기정학 처분을 내렸다. 현재 경기도 포천시 신읍동 133에 위와 같은 항거 운동 및 독립정신을 기리는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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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평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영평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영평면 주민 1,0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24일에 영평면 주민들이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창문을 깨고 면장을 구타하였다. 이들은 한때 물러갔다가 다시 영평헌병분견소를 습격한 뒤 해산하였다. 한편, 이보다 이른 시기인 3월 13일에는 면사무소와 이웃한 영평공립보통학교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려는 시도가 있었다. 3학년생 정수환은 학생들에게 “철원과 포천에 있는 보통학교는 이미 학업을 중단하고 만세를 부르고 있는데, 우리만 만세 시위를 하지 않는 것은 면목이 없으니 속히 휴교하고 만세를 고창하자”며 시위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을 파악한 학교 교원의 저지로 시위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현재 포천시 영중면 영평리 240에 위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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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기, 안응건 유적비
김용기(1901~1983)는 평북 선천(宣川) 사람이다. 1917년 만주 흥경현(興京縣)으로 이주하였으며 1920년에는 독립군에 입대하여 전덕원(全德元)의 부하로서 일본영사관 습격 등의 활약을 하였다. 그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김좌진(金佐鎭) 휘하로 전속되어 청산리독립전쟁(靑山里獨立戰爭)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1923년 8월 6일에는 의군부(義軍府) 특파원으로 제1소대 이경일(李京日) 인솔하에 34명이 의주군(義州郡) 청성진(淸成鎭)에 들어와 3개대로 나누어 8월 7일 밤에 청성진 경찰주재소를 비롯하여 우편소·면사무소 등을 습격하여 방화(放火)하는 등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25년 3월 2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7호 위반·살인·방화·강도죄로 징역 6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안응건(1886~1921)은 1919년 자택에서 태극기 14본을 제작하고 독립선언문을 전 주민에게 배부하여 대한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는 등 독립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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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추모비
장준하(1915~1975)는 평북 삭주(朔州) 사람이다. 서주(徐州)지구에서 일본군 진영을 탈출하여 김준엽(金俊燁)·홍기화(洪基華) 등과 함께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같은 해 5월부터 10월말까지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0분교 간부훈련단에 병설로 설치된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에서 훈련을 받고 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되어 활동하였다. 한광반 훈련 당시 여가를 이용한 과외 활동으로 김준엽(金俊燁)과 함께 교양과 선전을 위한 잡지인 "등불"을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켰으며, 광복군의 존재를 중국인들에게 알리기도 하였다. 1945년에는 한미합작특수훈련인 OSS훈련 정보·파괴반에 배속되어 훈련을 받고 국내 침투공작을 벌이기 위해 대기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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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현수 사당(운담영당)
경현수(1861~1928)는 화서학파 김평묵의 문하생으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 성균관 교수를 역임한 바 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대한 13도 유약소에 가담하여 전국의 유생들과 함께 궁궐 앞에서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13도 유생 연명소(十三道儒生聯名疏)」를 올렸으며, 고종이 일제의 강요에 의해 순종에게 양위를 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1908년 13도 의병 연합부대의 총대장인 허위의 부대에 종군하였다. 그 해 2월 허위의 지시에 따라 청국(淸國) 혁명당(革命黨)에 군사 원조를 청하는 밀사로서 파견되기도 하였다. 1919년 고종의 국상을 당하여 장남 경우현과 함께 유림역사대를 조직하고 청량리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장남이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었고, 1920년 3‧1운동 1주년에는 의거를 꾀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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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비호 묘
이비호(1895 - 1961)는 경상북도 안동(安東) 사람으로 3.1운동에 참여한 독립 운동가이다. 1919년 3월 17일 예안면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발생하였다. 일경이 출동하여 25명의 시위군중을 체포하자 이에 격분한 이비호는 오후 7시경,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주재소로 달려가 그곳을 포위하고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일본 경찰이 무력을 행사하며 제지하자, 투석으로 맞서 주재소 건물을 파괴하고 일본 경찰 3명을 포로로 잡아 이들의 무장을 해제시킨 후, 시위대열의 앞에 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곧 안동 주둔 일본군 수비대가 출동하여 공포를 쏘아대며 시위군중을 해산시키고, 대대적인 검거를 시작하면서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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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원 공적비
조영원(1891 - 1974)은 유신학교 졸업 후 1920년 상해로 망명하여 상해 임시 정부 의정원 의원, 임정 국무원 비서장 서리 등을 지냈고, 1926년 촉성회 대표로 만주에 파견되어 김좌진 장군이 영도하던 신민부의 군사 위원으로 활약하면서 해림 신창학교를 창설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다. 1931년 한국 독립군 총사령부 총참모 등으로 활약 중 1933년 만주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사형수로 복역하다가 5년 간 집행유예로 본국에 압송되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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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 기념비
하남시(당시 광주군) 3·1독립운동은 3월 21일부터 31일 사이 11회에 걸쳐 천현·교산·망월리 등지에서 7,600여 명이 참가했으며, 4월 1일부터 15일 사이 한 차례 400여 명이 참가한 만세운동 시위를 벌였다. 하남시 지역 독립유공자 4인(이대헌, 김교영, 김홍렬, 구희서)은 1,000여 명에 달하는 시민과 함께 면사무소, 일본군 헌병주재소에 집결, 격렬한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와 같은 1919년 3·1독립운동을 기념하고 일제강점기 광복을 위해 투쟁하다 순국한 하남시 애국지사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3.1독립운동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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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주 기념비
이필주(1869 - 1932)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경기도 고양(高陽) 출신이며, 기독교(基督敎)인이다. 선천적인 무인 기질로서 20세에 한말(韓末) 군대에 입대, 단시일에 승진하여 장교로서 8년간 복무하였다. 1907년(융희 1)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군대생활을 청산하고, 남대문에 있는 상동(尙洞) 예배당의 전덕기(全德基) 목사를 중심으로 한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에 가입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주권이 완전 상실되자, 통분하여 일주일간 단식하고 두문불출하였다. 그 후 종로 청년회관(y.m.c.a.)의 초대 체육교사로 재직하다가 상동 공옥소학교(尙洞攻玉小學校) 체육교사로 취임하여, 애국정신과 광복의 큰 뜻을 청소년에게 가르쳤다. 또 모범적인 기독교 신자로서 미신타파와 신분차별의 배격 등 신생활 운동도 전개하였다. 그 후 신학교(神學校)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정동교회(貞洞敎會)에서 목자생활을 하며 조국독립에 대한 이상을 품고 이상재(李商在)·최병헌(崔炳憲)·최성모(崔聖模)·오화영(吳華英)·신홍식(申洪植)·박동완(朴東完)·오정도(吳貞道)·현 순(玄楯) 등과 자주 만나 친분을 두터이 하였다. 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이 거의 구체화되던 1919년 2월 27일 자기의 집에서 이인환(李寅煥)·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함태영(咸泰永)·김창준(金昌俊)·신석구(申錫九)·오화영·최성모·박동완 등의 기독교측 대표들과 만나 함태영이 최 린(崔麟)으로부터 가져온, 최남선(崔南善)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서류의 초안을 회람하고, 기독교측의 민족대표로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기로 하였다. 28일 밤에는 재동(齋洞)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최종적으로 독립운동 전개에 따른 계획을 검토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孫秉熙) 등과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서울의 여러 교회에서 종교활동과 육영사업에 힘쓰다가, 말년에는 수원 남양교회(南陽敎會)를 맡아보면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하는 등 일제에 항거하다가 병사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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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기 동상
조문기(1927 - 2008)는 1943년 5월 일본 천기시에 있는 일본강관주식회사에 취업 중인 한국인 노무자들의 민족차별 반대시위를 주도하였으며, 이후 국내로 들어와 1945년 5월 대한애국청년당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1945년 7월 24일 경성 부민관에서 일본제국주의를 찬양하고 조선인들의 전쟁 협력을 고양시킬 목적으로 아세아민족분격대회(亞細亞民族憤激大會)가 개최되었는데, 이때 폭탄 두 개를 투척하여 일제 고위간부와 친일 민족반역자들의 제거를 기도한 〈부민관 폭파 의거〉의 주역이었다.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