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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기념비, 3.1만세운동 시비
관인면은 100년 전 1919년 4월 10일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기독교 감리교회 청년신도였던 조아당과 조국독립에 뜻을 두었던 박용길의 주도로 신포동을 시작으로 하여 삼율리-다랑고개-사정리-초과2리 남창동으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과 함께 당찬 행렬을 이어가며 600여 명이 운집하여 항쟁했던 곳이다. 일본제국주의의 폭압과 잔혹한 식민지 정책에 항거하며 우리 역사에 가장 큰 긍지와 건국의 바탕을 심어 주었던 3·1만세항쟁 100주년을 맞이하여, 관인면의 독립운동과 만세항쟁의 중심지였던 초과2리의 긍지를 널리 알리고자 초과2리 서예마을 주민들이 2019년 4월에 3·1운동 100주년기념비를, 2020년 11월 26일에는 최정자 시인의 「고남산 정기 받아」 3.1만세운동 시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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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선언서비
기미독립선언서비는 일제강점기에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면서 3·1독립운동에 적극 참가하여 큰 공훈을 남긴 독립유공자를 추앙하고, 독립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포천 출신의 독립유공자는 3·1독립운동 당시 선언서에 서명한 조선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박동완이 대표적이다. 또한 애국장을 추서받은 신영희·이영여·최석휴, 애족장을 추서받은 유중식·조계식·조훈식, 건국포장을 추서받은 함병현, 대통령 표창장을 추서받은 최학돌이 있다. 2016년 3·1절 97주년 기념일을 맞아 세운 기미독립선언서비는 청성역사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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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방산 김연성 의병 전투지
왕방산 김연성 의병 전투지는 1907년에 김연성이 이끄는 의병이 기습작전을 벌인 곳이다. 포천 지역에서는 1907년 9월 20일부터 의병 활동이 산발적으로 진행되다가 10월 이후부터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해 12월에 김연성이 이끄는 의병 40여 명이 포천군 서면 왕방산에 출동하여 기습작전을 벌였다. 김연성(1870~1909)은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 1907년 9월 창의하여 경기도 양주·적성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1월부터 이강년의진(李康秊義陣)의 의병소모관(義兵召募官)을 역임하였고, 1909년 1월부터는 관동창의원수부(關東倡義元帥府)의 중군장 이은찬의진(李殷贊義陣)에 속하여 경기·황해도 일원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강년은 1896년 1월 11일 문경에서 창의하여 유인석의진(柳麟錫義陣)에 참가하여 유격장(遊擊將)으로 활동하였으며, 1907년 3월에는 재봉기하여 강원도와 충청도, 그리고 경북 북부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이강년은 1908년 8월 한국 군대의 해산 이후 40여 의병진의 추대로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이 되어 충청도와 강원도, 그리고 경상도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1월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으로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였다. 이은찬은 1908년 3월에서 4월 사이에 결성된 관동창의원수부(關東倡義元帥府)의 중군장(中軍將)이었다. 관동창의원수부는 임진강 유역과 양주를 중심으로 하는 경기도 동북부지역에 결성된 연합의병부대였다. 이 연합의병부대는 1908년 1월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서울진공작전이 무산된 뒤,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했던 군사장 허위(許蔿)를 비롯한 일부의 의병부대로 결성되어 임진강 유역과 양주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08년 6월 총대장 허위가 체포된 뒤, 이은찬은 중국으로 망명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동년 10월부터 포천·영평·마전·적성 일대에서 각처 의병 부대와 연합하여 활동하였다. 이은찬이 1909년 3월 말 체포된 뒤 그 휘하 부대장들은 경기도 일원에서 독자적인 의병 부대를 편성하고 항쟁하였다. 김연성은 1907년 9월 창의하여 동년 12월까지 경기도 양주·적성 등지에서 부하 30~40명을 이끌고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1월 13도창의대진소가 결성될 때, 김연성은 진동창의대장(鎭東倡義大將) 권중희(權重熙)의 휘하에서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서울진공작전이 무산된 뒤 1908년 1월 이강년의진에 합류하여 의병 소모관을 역임하였으며, 1909년 1월부터 김연성은 관동창의원수부의 중군장 이은찬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이리하여 김연성은 1909년 1월부터 동년 4월 이은찬이 체포될 때까지 경기·강원도·황해도 일대에서 일본군 헌병분견소 습격 및 군자금 모집 등의 의병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09년 11월 29일 평양공소원에서 교형(絞刑)을 받아 순국(殉國)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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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형 묘
강지형(1881~1931)은 경기도 포천 가산(加山) 사람으로, 1919년 3·1운동 이후 임시정부 및 국민대회에 관한 구체적 방안 토의 및 「국민대회(國民大會) 취지서(趣旨書)」 작성 시 13도 대표 25인 가운데 1인으로 참가하였다. 그 후 만주로 망명하여 1919년 중국 길림에서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1920년 국내로 들어와 대한독립단 지단(支團) 조직 및 유인물 제작, 자금확보 등을 위한 활동, 독립군의 국내 진입 시 일제히 호응할 수 있도록 사전 준비를 하던 중 일경에게 탐지되어 체포되었다. 1921년 9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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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봉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무봉리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무봉리 주민 1,0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 소식은 곧바로 포천에도 알려졌다. 그리하여 3월 13일 포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 시위를 시작으로 영중면 영평리와 소흘면 송우리에서 만세 시위가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1919년 3월 29일에는 소흘면 무봉리에서 1,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 시위를 벌이며 무봉리 일대를 행진하였다. 이때 시위를 주도한 5명이 송우리헌병주재소에 체포되었고,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무봉리 만세 시위는 신북면사무소 만세 시위, 송우리 만세 시위와 함께 포천지역에서 일어난 시위 중 대규모 시위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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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내원 묘
박내원(1902~1982)은 1917년 보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종로기독교청년회에서 공부한 뒤 대동(大東)인쇄주식회사 인쇄직공 견습생이 된 이래 사상운동에 심취하여 노동단체와 청년단체 활동을 통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그는 1924년 10월 청년운동단체인 용진당(勇進黨)을 조직한 바 있으며,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이나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깊이 관여하면서 조선공산당과 천도교(天道敎)의 양세력을 연결하는 매개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5년 3월 권오설(權五卨)의 지시에 의해 경성노동연맹(京城勞動聯盟)을 조직하였으며, 인쇄직공조합연맹(印刷職工組合聯盟)·경성인쇄직공청년동맹(京城印刷職工靑年同盟) 등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그 밖에도 천도교청년동맹(天道敎靑年同盟)·돈화청년회(敦化靑年會)·한양청년연맹(漢陽靑年聯盟)·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신흥청년사(新興靑年社) 동인·화요회(火曜會)·정우회(正友會)·불꽃사(火焰社) 동인·연우사(鉛友社) 동인·혁청 단원·조선기근구제회(朝鮮饑饉救濟會)·무산자동맹(無産者同盟)·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 등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다. 1925년 4월 고려공산청년회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제2차 조선공산당에서는 경성야체이카의 언론기관 프랙션에서 활동했다. 그는 천도교 교주 박인호(朴寅浩)의 재종질(再從姪)로서, 천도교 계통의 민족운동에 앞장 섰다. 그는 천도교가 신·구파로 분화될 때 1926년 4월 천도교청년동맹(天道敎靑年同盟)의 창립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조선공산당이 6·10만세운동을 계획하기에 앞서 추진한 메이데이 기념시위에도 깊이 관계하였다. 당시 조선공산당에서는 조선노농총동맹을 앞세워 기념시위를 전개하려고 했다. 이때 그는 조선노농총동맹의 핵심 간부로서 기념시위의 제반 준비를 담당했다. 그런 가운데 융희황제가 승하하면서 기념시위 계획이 6·10만세운동으로 전환되자, 그는 권오설로부터 격문 인쇄 및 지방 조직과의 연락 임무를 부여받고, 이같은 사실을 권동진(權東鎭)과 천도교 교주 박인호와 이종린(李鍾麟)·박내홍(朴來弘) 등에게 알려 6·10만세운동에 대한 적극적 승낙을 받아내었다. 그는 격문 인쇄를 위해 손재기(孫在基)·백명천(白明天)·양재식(梁在植) 등 천도교 인물과 민창식(閔昌植)·이용재(李用宰) 등 인쇄직공조합원을 동지로 규합하였다. 그리하여 ‘격고문(檄告文)’, ‘대한독립만세’, ‘조선인 교육은 조선인 본위로’, ‘산업은 조선인 본위로’, ‘대한독립운동자여 단결하라’ 등의 격문 인쇄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거사일이 임박하는데 자금이 없어 격문을 배포가 어려워지자 권동진에게 1만원의 자금을 요청하여 쾌락을 받아내었다. 그러나 6·10만세운동의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일경에 체포되어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천도교 구파청년단 상무위원, 천도교 중앙교회감사위원 겸 청년동맹대표로 활동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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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호 묘
박인호(미상~1924)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제2차 봉기에 참가하여 충남 일대에서 정부군·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1904년 진보회의 갑진개화운동 주도하면서 동학교도의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1908년 1월 18일 천도교 대도주(大道主)가 되어 천도교 조직을 활용하여 개화문명의 보급과 독립사상 고취를 위해 활동하였다. 1919년 2월 21일 3·1독립운동의 민족대표 손병희의 명으로 3·1독립운동 경비 지원 및 2월 28일에 천도교 이종일·이종린·윤익선 등과 함께 협의하여 〈조선독립신문〉을 천도교 경영 인쇄소 보성사(普成社)에서 몇만 매를 인쇄하여 3·1독립운동 때에 전국으로 배포케 하는 등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였으며, 3월 1일 천도교 대도주로서 3·1독립운동의 중앙지도체 49인 중 한 사람으로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를 받고 다음날 1년 8개월 만에 풀려났다. 이후 융희황제의 국장을 기회로 6·10만세운동을 준비할 때 이들과 연계하여 격문 10만여 매를 인쇄한 후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한독립단」이란 도장을 조각 날인하여 58개 지방도시에 배부하는 등 거사를 도왔다. 1936년 멸왜기도(滅倭祈禱)를 지시한 것이 발각되어 병석에서 심문을 받는 등 다년간 조국의 독립운동에 진력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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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우리 헌병분견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송우리 헌병 분견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3월 24과 30일에 소흘면 송우리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1919년 3월 24일 소흘면 송우리에서 600여 명의 주민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 날 시위 주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송우헌병주재소 헌병경찰들은 총검으로 야만적인 탄압을 자행하여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시위 도중에 부상자가 발생하고 주동자들이 붙잡혔음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시위는 계속되었다. 3월 30일에는 2,0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송우헌병주재소에 몰려와 만세시위를 재차 전개하였다. 이날의 만세시위는 소흘면 주민들과 가산면 주민들이 연합하여 벌인 것으로 특히 시위대는 송우헌병주재소를 공격하여 파괴하려 하였다. 3월 24일 시위 때 체포된 만세시위 주동자들과 3월 29일 체포된 무봉리 만세시위 주동자들을 구출하려는 시도로 보여진다. 이때 일본헌병대는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러한 일본헌병대의 무차별 발포로 인해 최석휴 등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최석휴(1888~1919)는 경기도 포천 사람이다. 1919년 3월 30일 포천군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시위 행진에 참여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30일 포천군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시위행진 당시 가산면의 3·1독립만세운동 거사의 총책임자로서 청년들을 규합하여 거사 준비를 하면서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시위행진을 벌였다. 그리고 이들은 곧이어 이웃에 있는 소흘면 주재소로 가서 그곳을 습격하다가, 그는 출동한 일본 경찰이 발사한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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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집
최익현 집 터는 조선 후기 애국지사이며 최고령 의병장이었던 최익현이 태어난 곳이다. 최익현(1833~1907)은 조선 후기의 지사이다.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 화서 이항로의 제자이며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사헌부 지평(持平)·사간원 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며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체포되었다. 그러나 순창에서 패하여 대마도에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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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식 공적비
최면식(1891~1941)은 경기 포천(抱川) 사람이다. 1941년 9월 만주(滿洲)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이에 필요한 자금을 수합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징역 6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17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활동하였다.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 등이 주도한 대한광복회는 1915년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이 통합하여 결성된 혁명단체였다. 그는 이병호(李秉昊)와 함께 전라도 지역의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 수합에 힘을 쏟았고, 또 친일부호 처단에 필요한 무기를 채기중에게 제공하였다. 그러던 중 1918년초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일경에 붙잡혀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광복회의 재건에 힘쓰다가 1921년 9월 다시 붙잡혔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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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식 묘
최면식(1891 - 1941)은 경기 포천(抱川) 사람으로, 1941년 9월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자금을 수합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그 이후 1917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활동하며 군자금 수합 및 무기 조달에 협력하였다. 그러던 중 1918년 초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일경에 붙잡혀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광복회의 재건에 힘쓰다가 1921년 9월 다시 붙잡혔으나 병보석으로 출옥한 뒤 순국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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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북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신북면사무소 3·1운동 만세시위지는 포천의 4개 면민 1,000여 명이 연합하여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신북면 만세 시위는 포천 지역 연합 만세 시위였다. 1919년 3월 29일에 중면 신사리에 사는 유중식은 “내일 신북면사무소 앞에서 만세를 부르고자 하니 여러 사람과 같이 나오라”는 통문을 받았다. 그는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는 한편 함병현·김수종에게 마을마다 통문 내용을 알리게 하여 만세 시위 계획을 널리 선전하였다. 3월 30일에 신북면사무소에는 신북면·일동면·이동면·영중면 등지에서 주민 1,000여 명이 몰려 들었다. 어느 청년이 연설에 이어 누군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도 함께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시위는 점차 폭력적인 양상으로 바뀌었으며, 일제 경찰의 발포로 3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현재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890에 이 만세시위를 기념하는 안내판 및 표지석이 건립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