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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동 묘
한은동(1897~1956)은 1919년 3월 경기도 연천군(漣川郡) 적성면(積城面) 장파리(長坡里, 현 파주군)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연천군에서는 3월 21일 만세시위가 일어나 4월 10일까지 계속되었다. 한은동은 적성면 장파리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3월 29일 밤 장파리 구장 유병성(柳秉性)ㆍ유병익(柳秉翼)ㆍ우춘산(禹春山) 등이 모인 자리에서 "다른 마을에서는 독립만세를 모두 부르고 있으니, 우리 마을도 여기에 호응하여 부르는 것이 좋겠다"고 협의하였다. 3월 31일 밤, 한은동은 마을 사람 20여 명과 함께 동산(東山)에 올라가 이주택(李柱宅)의 선창 아래 독립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었다. 1919년 7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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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홍 집
안재홍(1891~1965)은 해방 이후 민정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사학자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 중 대한민국청년외교단(大韓民國靑年外交團)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체포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귀국 후 조선일보 주필‧사장을 역임,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신간회사건, 조선어학회사건, 임시정부 활동 등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 미군정청 군정장관, 민의원 의원 등으로 건국 사업에 이바지하다가 6·25 당시 북한에 납치되었다. 1989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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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심창 흉상
원심창(1906~1971)은 경기도 진위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무정부주의 사회실현운동과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고향에서 전개된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무정부주의를 수용하여 항일운동을 벌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흑우회·흑풍회·흑우연맹·흑색공포단 등 주로 무정부주의 계열의 단체에서 활동하는 한편 의열 투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32년 중국 천진에 있는 일본영사관 등 주요 기관을 폭파할 것을 모의하였고, 항일선전문을 등사하여 상해의 한국 동포에게 배포하기도 하였다. 1933년 3월 17일에는 상해에서 주중 일본공사인 아리요시 처단을 추진하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는데, 1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풀려났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원심창 의사를 추모사업의 일환으로 평택 성동국민학교 총동창회에서 성금을 모아 그의 모교인 성동초등학교 내에 1991년 12월 20일 원심창 의사 흉상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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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탄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서탄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서탄면 주민 4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서탄면에서의 만세 시위는 4월 초에 벌어졌다. 당시 면장 윤기선은 만세 시위를 일으키자는 격문을 각 이장에게 전달하면서 3일 오전 10시까지 주민들을 인솔하여 면사무소로 모이게 하였다. 4월 3일 정오 무렵 면사무소 앞 광장에 400여 명의 주민이 모이자 윤기선은 “세계의 대세로 보건대 조선은 독립할 시기에 이르렀다. 함께 경하할 일이며 복 받을 일이다. 이번에 내가 적에게 잡혀가는 일이 있으면 면민 전체를 벌주는 일이니 계속 투쟁하라”라고 하며 만세운동의 취지를 설명한 후 선두에 서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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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6.10독립만세운동 기념비
1926년 6월 10일 조선의 마지막 국왕인 순종 황제의 인산일(因山日, 출상일)을 기하여 순수하게 2만 4,000여 명의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3.1운동을 잇는 전국적 항일운동이었던 6·10만세운동이다. 1926년이 병인년이므로 병인만세운동(丙寅萬歲運動)이라고도 부른다. 제2 6·10만세운동은 1926년 6·10만세운동에 참여한 직후인 6월 11일부터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의 학생회장 유재헌, 김동석, 노응벽, 손병석과 배재고보의 문창모, 협성신학교의 최영식 등 20여 명이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의 지하실에서 재차 만세운동을 위해 비밀리에 모의하여 6월 15일 거사일로 정하고 독립문서를 등사하고 있던 중 급습한 일본 경찰에 의해 모두 구속된 사건이다. 이렇게 항일운동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조선일보, 동아일보 그리고 시대일보에 대서특필되어서 기독교 학생들의 독립운동의 의지를 모든 국민들에게 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이 대학교로 승격되어 평택으로 이전함에 따라 제2 6·10독립만세운동의 진원지였던 신문로 학원 본관을 평택대학교에 원형 그대로 복원하여 피어선기념관을 건립하고 1999년 6월 23일 기념관 앞에 제2 6·10독립만세운동기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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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관 묘
장덕관(1887~1938)은 경기도 안성(安城) 사람으로, 1919년 양성면(陽城面)·원곡면(元谷面) 일대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여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횃불을 들고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경찰 주재소·양성 우편소·양성면 사무소·원곡면 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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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순 묘
정경순(1892~1959)은 경기도 진위(振威) 사람으로, 1919년 진위군(현, 평택군) 북면 은산리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옥고를 치렀다. 서울과 근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향리인 진위군에서 이에 호응하는 시위운동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4월 1일 거사를 계획 후 동리 사람들에게 시위계획을 알려 동참을 호소하였고, 이에 호응한 많은 이민들이 은산리 뒷산에 집결하자 이들은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에 돌입하였다. 그는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며 주재소로 몰려가 주위를 둘러싸고 기세를 올렸다. 이 일로 인하여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5월 1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상고, 7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2000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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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창 묘
이규창(1900~1970)은 경기도 안성(安城) 사람으로, 1919년 양성면(陽城面) 원곡면(元谷面) 일대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여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횃불을 들고 일제에 항거하였으며, 원곡면 사무소의 건물을 파괴·주재소를 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1년 3개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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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위초등학교 3.1운동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18일 진위공립보통학교(진위초등학교 옛 이름) 학생 20여 명이 진위면사무소 앞으로 달려나가 만세운동을 전개한 곳이다. 특히 진위초등학교와 진위면사무소는 옛 평택을 아우르던 진위현의 관아터가 있던 자리이자 3.1 만세운동이 격렬히 일어났던 지역이다. 어린 나이의 학생들이 참여했기에 더욱 의미가 있는 3.1운동 만세시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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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위현청
진위면(당시 진위군 북면)의 만세시위는 모두 다섯 차례의 만세시위가 전개됐다. 3월 18일 첫 만세시위는 진위공립보통학교 학생 20여 명이 교내에서 독립만세를 불렸으며, 이어 3월 21일 천도교인과 지역 주민들이 면사무소를 습격했다. 북면에서 가장 규모가 큰 만세시위는 3월 31일 전개됐는데, 500여 명의 군중이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장을 끌어내어 만세를 부르게 할 정도로 격렬하게 만세시위를 했다. 다음날인 4월 1일에는 은산리에서 만세의 함성소리가 울려 퍼졌고, 다음날 4월 2일까지 북면 일대에서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이처럼 북면, 현재의 진위읍은 3.1운동 당시 중심이었다. 2003년 7월 24일 진위소공원이 마련되면서 3.1운동을 기리고 옛 진위현의 현청이 있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비석과 안내판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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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면사무소 3.1운동 만세시위지
북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진위군 북면(현 진위면) 주민들이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진위군 북면 시위는 봉남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3월 11일에 봉남리에서 천도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시위하였고 3월 21일에는 봉남리와 야막리 주민 500여 명이 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 3월 31일에도 박성백, 최구홍, 유동환, 전영록 등 봉남리 주민 400여 명이 면사무소에서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박성백, 유동환, 전영록 등은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와 같은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역사를 기리고자 안내판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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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산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은산리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진위군 북면 은산리 주민들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4월 1일에 은산리 사는 정경순은 비밀리에 정문학·정재운을 만나 “지금 전국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도 만세를 불러 사람 구실을 하자”고 권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이 주민 30여명을 이끌고 마을 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외치자 산 아래에서도 많은 주민이 호응하여 함께 만세를 불렀다. 이어 최선유가 봉남리주재소로 가서 만세를 부르자고 선동하여 시위대는 면소재지인 봉남리로 행진하였다. 시위를 주도한 정경순과 최선유는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위와 같은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자 본 안내판과 동판이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