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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소년단 독립운동기념비
일제강점기 1939년 장호원제일심상소학교(현 장호원초)에 다니는 14명의 학생들은 항일 독립운동단체 「독수리소년단」을 결성하였고, 단장 박영순을 위시해 김순철·이상진·조태옥·박기순·박기하·백운호·오기환·박승연·곽태현·이상한·이범상·박정순·김만식 등 어린 학생들은 장차 독립군이 되고자 하는 목표를 세우고 단체를 조직화하였다. 단체 결성 3년째인 1942년 2월 하순 읍내 전봇대와 시내버스 창틀에 “일본은 패망하니 조선 민족은 그들에게 협조하지 말 것”과 “조선 민족 단결로 자주독립을 이루자”는 내용의 벽보를 붙이고 이 유인물을 전국 각지의 현직 군수들에게 우송하였다. 이 일로 단원 14명은 3월 전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하고 어린 단원들은 사흘 만에 풀려났으나 주범으로 간주된 단원들은 형사처분을 받았다. 단장인 박영순은 형을 선고받고 긴 세월 옥살이를 했고 박승연·박기순·이상진·곽태현 등은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일찍 마감했다. 어린 나이에 항일 벽보를 붙이는 등 독립운동을 펼친 이천 장호원 초등학생 독립운동 단체 「독수리소년단(荒鷲少年團)」을 기념하기 위해 해방 후 76년만인 2021년 12월 18일에 이천독립운동기념사업회에서 독수리소년단 독립운동기념비를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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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족산 3.1운동 만세 시위지
백족산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이천군 주민 1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이천군 청미면(현 장호원읍) 주민들은 1919년 4월 4일 밤에 백족산 정상에 올라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다. 이때 인근 여러 면의 주민들이 호응하여 연합시위를 펼쳤으며 시위에 참여한 군중은 100여 명에 달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 군경은 사방에서 발포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주민들은 산 위에서 돌을 던지며 저항하였다. 그러나 일본 군경의 집요한 발포로 백족산 시위대와 인근에서 연합시위를 벌이던 주민들은 결국 해산하였으며 사상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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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흥 동상
이수흥(1905~1929)은 1905년 9월 11일 경기 이천에서 태어나 이천 공립보통학교 수학 후, 한때 입산하여 승려생활을 하다가 1923년 19세 때 만주로 망명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義府)에서 활동하였다. 1926년 5월 국내로 들어와 참의부 제2중대 특무정사 자격으로 황해도 평산을 거쳐 경성에 잠입한 후 동소문파출소에서 일제 경찰과 교전을 벌이고 독립군 자금 모집을 위해 안성 부호의 아들을 처단하였으며 이천 현방경찰주재소와 백사면사무소를 공격하였다. 일경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투쟁을 이어나갔으나 반역자의 밀고로 체포된 후,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사형을 언도받고,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한 채 1929년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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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택수 추모비
유택수는 경기도 이천(利川) 사람으로, 동생 유남수와 함께 참의부(參議府) 국내 특파원 이수흥(李壽興)을 도와 무장항일 활동을 하였다. 1926년 5월 이수흥이 일 요인암살 및 군자금 모집 등을 목적으로 국내에 들어오자, 동소문파출소 습격 2개월 후인 동년 9월 10일 이수흥을 도와 경기도 안성에서 부호 박승륙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하다가 박승륙이 불응하자 그의 아들 박태병 등을 사살하였다. 10월 20일에 이수흥이 이천의 현방리(玄方里) 주재소 등을 습격한 뒤에는 동생과 함께 그를 도피시켜 주었으며, 10월 25일에 그는 서울 수은동(授恩洞) 전당포를 습격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하다가 주인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6년 11월 마침내 일경에 체포되었으며, 수년간의 옥고 끝에 1928년 12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1929년 2월 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유택수의 애국애족의 거룩한 혼을 영원히 기리고 계승하고자 1984년 11월에 추모비를 세웠으며 이수흥공원 내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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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연영 순국기념비
구연영(1864~1907)은 경기 광주(廣州) 사람이다. 어려서 한학(漢學)을 수학하고 한때 정부관리로 재직하였으나 기울어가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관직을 사임하였다. 그 후 일제의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와 단발령 공포에 격분, 일제를 이땅에서 구축하기 위해 1895년 12월 31일 김하락(金河洛)·조성학(趙性學)·김태원(金泰元) 등과 함께 거의(擧義)하여 경기도 이천(利川)에서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를 결성하였다. 구연영이 양근(陽根)·지평(砥平)에서 300여명, 조성학이 광주산성에서 300여명의 군사를 모집하였으며 인근 지역의 민중들이 이에 자발적으로 호응하여 농민과 관포수(官砲手)를 중심으로 900여명의 군사를 규합하였다. 따라서 이천수창의소는 경기도 연합의진의 성격을 띠었으며, 전투적이고 대규모적인 조직편제를 갖추었는데 창의대장에 민승천(閔承天), 각군도지휘(各軍都指揮)에 김하락이 선임되었고 그는 중군장(中軍將)을 맡았다. 동 의진은 1896년 1월 백현(魄峴)에서 일본군을 섬멸하였는데, 백현전투는 을미의병사상 최초의 대규모 승리였을 뿐 아니라 의병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한 쾌거였다. 이어 2월 이현(梨峴)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폈으며 전열을 재정비하여 2천여 명으로 군세(軍勢)를 증강한 후 심진원(沈鎭元)의 광주의진(廣州義陣), 이석용(李錫容)의 양근의진(陽根義陣)과 함께 남한산성의진(南漢山城義陣)을 형성하여 남한산성을 공략, 입성하였다. 이들은 산성을 방어하는 한편 서울진공을 통해 일제를 구축키로 하고 이를 위해 우선 수원(水原)을 점령하고 주변의 의진과 연합하여 서울진공계획을 추진하던 중 일제의 사주를 받은 관군의 공격으로 1896년 3월 남한산성이 함락됨으로 인해 계획이 좌절되었다. 이에 따라 동 의진은 경북 의성(義城)으로 이동하여 재기를 도모하였으나 그는 동년 4월 의진과 결별하고 이천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1897년 기독교에 입문하여 1898년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웹엣청년회를 조직,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1902년에는 전도사로서 이천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에 전념하였다. 1907년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그는 장춘명(張春明)·한창섭(韓昌燮)·차화춘(車化春) 등 수십명의 동지와 함께 구국회(救國會)를 조직하고 신도대회를 통해 매국단체 일진회(一進會)를 성토하며 항일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등 구국계몽활동을 폈다. 또한 이천·여주(驪州)·광주(廣州) 일대를 순회하며 상인들의 철시투쟁을 유도하는 등의 활동을 계속하던 중 1907년 7월 16일 일본군 수비대에 의해 구국회 지도자들이 붙잡힐 때 피살·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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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민 묘
남동민(1896~1974)은 경기도 파주(坡州) 사람이다. 1919년 3월 27일 파주군 광탄면(廣灘面) 발랑리(發郞里)에서 조무쇠, 이인옥, 이기하, 정갑석 등과 함께 같은 마을에 사는 주민 수백명을 규합하여 광탄면사무소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어 이튿날인 3월 28일에도 1,0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조리면(條理面) 봉일천리(奉日川里) 장터까지 시위행진하고 장터에 모인 군중과 합세하여 대규모의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붙잡혔다. 같은 해 6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7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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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 항일독립운동기념비
1919년 3월 광탄면 발랑리에 본부를 두고 마을주민 조무쇠, 이인옥, 남동민, 정천화, 정갑석, 이기하, 정봉화, 강흥문, 정시화 등 9명이 사전에 대규모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마침내 1919년 3월 27일, 인근 동네주민 수백 명과 광탄면사무소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했으며, 다음날 28일에도 광탄면 주민 1천여 명과 봉일천 공릉장으로 행진하여 그곳의 군중과 함께 3천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파주시 항일독립운동기념비는 3.1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6년 8월 15일에 건립한 것으로, 파주 출신 독립운동가 107명의 이름이 명각되어 있으며, 파주독립광탄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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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마을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는 파주 3·1운동 만세시위의 근거지로, 마을주민 조무쇠, 이인옥, 남동민, 정천화, 정갑석, 이기하, 정봉화, 강흥문, 정시화 등 9명은 사전에 고양 일부까지 포함한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였는데, 1919년 3월 27일 인근 동네주민 수백 명과 광탄면사무소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했으며, 다음날 28일에도 광탄면 주민 1천여 명과 봉일천 공릉장으로 행진하여 그곳의 군중과 함께 3천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2012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마을의 소중한 역사를 계승, 발전시키고자 「발랑리 태극기 마을」을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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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랑리 3.1독립만세운동기념비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는 파주 3·1운동 만세시위의 근거지로, 이곳 출신 애국지사 9명은 사전에 고양 일부까지 포함한 대규모 시위를 계획 후, 1919년 3월 27일 인근 동네주민 수백 명과 광탄면사무소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했으며, 다음날 28일에도 광탄면 주민 1천여 명과 봉일천 공릉장으로 행진하여 그곳의 군중과 함께 3천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파주 3·1운동 만세시위를 주도한 발랑리 출신의 조무쇠, 이인옥, 남동민, 정천화, 정갑석, 이기하, 정봉화, 강흥문, 정시화 등 9명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발랑리 노인회에서 2021년 3월 27일 3.1독립만세운동기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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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식 묘
김화식(1866~1943)은 충남 보령(保寧) 출신이며, 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으로 국내와 만주에서 활약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에 이어 단발령까지 강행되자 1896년 제천의 호좌의진인 유인석 의진에 가담하여 주로 유인석 의병장을 수행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후 국내에서의 항전이 불가능하게 되자 사환·통사 5, 6명과 함께 유인석의 요동행을 수행하였다. 만주에서 그는 국내와의 연계를 통해 다시 의병을 재기할 것을 유인석에게 건의하였고, 그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국내에 돌아왔다. 국내에 돌아온 그는 유인석의 제자들과 협의하여 의병봉기를 모색하는 한편, 호좌의진 의병 대장 유인석의 의병 활동 관련 자료(서간문, 포고문, 논설 등)를 모은 책인 『소의신편(昭義新編)』을 간행하였다.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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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3.1운동발상비
1919년 파주시 3·1운동 발상지인 이곳 광탄면에서는 심상각, 김웅권의 주동으로 1919년 3월 27일 봉일천 장날 19인 동지회원이 앞장서 광탄면사무소에 집결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시위행진을 하여 조리, 아동, 월롱, 광탄, 교하 등지에서 모여든 5천여 군중과 함께 조리읍사무소와 주재소를 2중 3중으로 포위 습격하였으며, 당황한 왜경의 무차별적인 발포로 1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파주 3·1운동 발상비』는 일제강점기 당시 파주 3.1운동의 발상지인 광탄 지역에서 일어난 항일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광탄면 선열의 유지를 받들어 3.1운동 정신을 계승시키고자 1978년 3월 1일 광탄중학교에 설립한 것으로, 1995년 11월 30일 광탄면사무소로 이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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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탄면사무소 3.1운동 만세시위지
광탄면사무소 3.1운동 만세시위지는 파주군 광탄면 주민들이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했던 곳이다. 1919년 3월 27일에 광탄면 발랑리 출신의 조무쇠, 이인옥, 남동민, 정천화, 정갑석, 이기하, 정봉화, 강흥문 등은 인근 주민 수백 명과 광탄면사무소 앞에서 시위를 전개했다. 다음날인 28일에는 주민 1,000여 명과 함께 조리면 봉일천리(奉日川里) 시장으로 행진하였으며, 이때 장터에 모인 군중과 합세하여 시위는 더욱 격화되었다. 주도자였던 조무쇠, 이인옥, 남동민, 정천화, 이기하, 정봉화, 강흥문은 체포되어 모두 징역 8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천화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 1919년 12월 13일 옥중 순국하였다. 이와 같은 애국선열들의 정신을 기리고자 본 안내판이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