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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준 순교추모비
박관준(1874 - 1945)은 평안남도 개천(价川) 사람으로, 기독교의 장로였으나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하였다. 1938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의회에서 「동아대국교개종헌의서(東亞大國敎改宗獻議書)」를 살포하다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이후에도 신사참배 거부와 신앙의 자유를 위한 운동을 벌였으며,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을 받고 예심중에 병이 사경(死境)에 이르자 병보석되었으나 고문의 여독으로 1945년 2월 15일 별세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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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 어록비
주기철(1897 - 1944) 목사는 일제 강점기 마산 문창 교회와 평양 산정현 교회를 담임했던 목회자이자 순교자이며 민족 운동가로, 장로교 목사로 마산 문창 교회에서 목회하는 등 목회자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식민 정책에 반대하고 싸웠던 민족 운동가였다. 일제는 전쟁 정책 수행을 위한 소위 「국민정신 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 운동의 일환으로 1935년부터 신사 참배(神社參拜)를 강요하였는데, 그는 신사 참배 강요는 기독교 신앙에 위배된다고 보아 이를 공개적으로 반대하며 저항하였으며, 이 일로 평양 산정현 교회 시무 때인 1938년 2월 이후 네 차례 투옥되는 등 일제의 강요에 맞서 투쟁하였다. 네 번째로 투옥된 지 3년 8개월이 지난 1944년 4월 21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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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학 순교기념비
김영학(1877 - 1932)은 3·1독립운동 당시 양양(襄陽)의 기독교회 목사로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으며, 동년 10월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의 지부(支部)로서 양양군단(襄陽郡團)을 결성하고 군단장(郡團長)으로 활약하며 조직확대에 힘을 쏟았다. 1920년 1월 강원도단의 조직이 발각되어 일경에 붙잡혀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국외로 나아가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 1922년 9월에 노령(露領) 해삼위(海蔘威) 방면의 선교사로 자원하여 노령 지역에서 선교사업 및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가 1929년 소련 공산당에 붙잡혀 10년의 중노동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에 복역 중 1933년 옥중에서 별세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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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옥여 동상
임옥여(1871 - 1907) 의병장은 경기도 용인(龍仁) 사람으로, 대한제국 시기에 농상공부 주사직에 있다가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침략에 항일 투쟁을 결심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정미의병기인 1907년 8월 이천창의소(利川倡義所)의 좌장(左將)이 되어 이천, 용인, 광주, 죽산, 광주 일대에서 혁혁한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1907년 11월 10일 자택에서 일군수비대의 습격을 받고 총살당해 순국하고 말았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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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삼면 3.1운동 준비지
원삼면 3·1운동 준비지는 1919년 3월 21일 용인군 원삼면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시위의 주동자들이 거사 하루 전에 모여 만세시위계획을 최종 모의하고, 태극기를 제작한 곳이다. 1919년 3월 15일 용인군 원삼면 좌항리의 황경준, 김영달, 김성남, 이은표, 이용환 등은 서울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이은표의 집에 모여 만세시위를 거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20일 밤에 평창리 도창마을 입구 최상근의 주막에서 최종 모임을 갖고, 만세시위에 쓸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21일이 되자 횃불을 들고 좌전고개에서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는 한편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알렸다. 이와 같이 최상근 주막터는 원삼면 3·1운동의 책원지였다. 김성남(1897~1953), 김영달(1901~1967), 이용환(1880~1919), 이은표(1897~1974), 최상근(1891~1943), 황경준(1883~1940)은 용인 사람이다. 1919년 3월 21일 용인군 원삼면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여 새벽 3시부터 6시까지 원삼면사무소 앞에서 많은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만세를 며 시위행진을 주동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들은 2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원산면사무소 앞에서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치며 일경과 헌병의 무차별 총격에도 굴하지 않은 채 시위를 이어나갔다. 이해 5월 9일 김성남, 김영달, 이용환은 징역 6월형을, 이은표, 최상근, 황경준은 징역 10월형을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1990년에 이용환, 이은표, 최상근에게, 1992년에 황경준에게 추서했다. 또한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김성남, 김영달에게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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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삼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원삼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3월 21일 용인군 원삼면 주민들이 모여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던 곳이다. 1919년 3월 21일 새벽 좌전고개를 출발한 시위대는 좌항리와 사암리를 거쳐 원삼면사무소에 이르렀다. 면사무소에 이르자 면사무소 주변의 고당리와 문촌리 주민이 합세하였다. 김영달·김성남·이용환 등은 중간에 합류한 황경준·김은수·최상근·안명옥 등과 함께 군중들을 이끌며 만세를 외쳤다. 한편 이은표와 이인하 등은 시위 과정에서 주민들에게 전날 만든 태극기를 나누어주었다. 시위대는 이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후 외사면 백암리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원삼면과 외사면 경계인 비둘기고개에서 일제 경찰의 발포로 해산당하였고, 황경준·김은수·최상근·김성남·안명옥 등은 해산 후 각자의 마을에서 체포되었다. 김성남(1897~1953), 김영달(1901~1967), 김은수(1884~1960), 안명옥(1882~1943), 이용환(1880~1919), 이은표(1897~1974), 최상근(1891~1943), 황경준(1883~1940)은 용인 사람이다. 1919년 3월 21일 용인군 원삼면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여 새벽 3시부터 6시까지 원삼면사무소 앞에서 많은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주동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들은 2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원산면사무소 앞에서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일경과 헌병의 무차별 총격에도 굴하지 않은 채 시위를 이어나갔다. 이해 5월 9일 김성남, 김영달, 이용환은 징역 6월형을, 김은수, 이은표, 최상근, 황경준, 안명옥은 징역 10월형을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1990년에 김은수, 이용환, 이은표, 최상근에게, 1992년에 황경준에게 추서했다. 또한 대통령표창을 1992년에 김성남, 김영달에게, 건국포장을 2006년에 안명옥에게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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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면영 묘
유면영(1873 - 1931)은 경기도 광주(廣州) 사람으로, 광주군 오포면 양벌리(五浦面 陽伐里)에 거주하고 있으면서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28일 오포면사무소 앞에서 단독으로 독립만세를 고창하자 주민 600여 명이 모여들었으며, 군중들을 이끌고 광주군청(廣州郡廳)으로 시위 행진하였다. 군청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붙잡혀, 이해 5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항고하였으나 7월 5일 경성복심법원과 8월 21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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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면영 추모비
유면영(1873 - 1931)은 경기도 광주(廣州) 사람으로, 광주군 오포면 양벌리(五浦面 陽伐里)에 거주하고 있으면서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28일 오포면사무소 앞에서 단독으로 독립만세를 고창하자 주민 600여 명이 모여들었으며, 군중들을 이끌고 광주군청(廣州郡廳)으로 시위 행진하였다. 군청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붙잡혀, 이해 5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항고하였으나 7월 5일 경성복심법원과 8월 21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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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독립운동유적(성낙중 묘)
성낙중(1894 - 1919) 선생은 1919년 용인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성낙중 선생은 원삼면 사암리와 맹리 주민 등 약 300여 명과 함께 백암리에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하는 선두에 서 있었다. 전날 면사무소가 습격당해 격양된 일제 헌병은 무차별 사격을 가했고 이에 성낙중 선생은 쏟아지는 총알에 순국하셨다. 그의 행적은 오랫동안 묻혀있었지만 2013년 우연히 발견된 『3.1운동 시 피살자 630명 명단』을 통해 발굴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1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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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3.1만세운동기념탑
용인3.1운동기념탑은 용인시 전역에서 일어난 1919년 3·1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의 요청으로 용인시가 2011년 4월에 건립한 것이다. 「숭고한 빛」을 주제로 한 스테인리스 재질의 주탑은 LED 조명을 설치해 영원히 타오르는 횃불을 상징하고 있으며, 기념탑의 바닥에는 태극기의 건곤감리가 바닥에 새겨져 있어 마치 태극기를 바닥에 펼쳐놓은 모습이다. 횃불과 태극기를 형상화하여 민족의 기상을 표현하였다. 3.1 만세운동 기념탑 좌우에는 독립만세를 부르는 화강석 군상 조형물이 배치되어 주탑을 중심으로 바닥에 놓여있는 태극기를 두고 만세운동을 펼치는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기념탑 전면 옹벽에 부착된 석면에 용인의 3.1운동 내역과 피체되어 고초를 겪은 분들의 명단을 음각으로 새겨 넣었다. 반대편에는 건립 취지문과 기념탑 건립현황을 석면에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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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인수 3대 독립항쟁기적비
의병장 해주오공인수 3대 독립항쟁 기적비는 오인수(1868 - 1935) 의병장과 아들 오광선 장군 그리고 손녀 오희영과 오희옥, 3대에 걸친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기념하여 광복 63주년을 맞아 2003년 11월 17일에 용인시 원삼면 죽능리 어현마을 입구에 해주오씨 호군공파 용인 원삼면대종회에서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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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악학교 터
삼악학교 터는 여준이 인재 양성을 위해 고향에 설립한 삼악학교가 있던 곳이다. 삼악학교는 여준에 의해 1908년 9월 원삼면 능촌리에 세워졌다. 여준은 가족과 형이 살고 있는 능촌리를 방문하여 외가측 친척인 오태선, 오용근 등과 학교 설립을 협의하였다. 설립준비과정에서 학교 건물이 없어 난관에 부딪혔으나, 오항선이 자기 집을 기부하면서 삼악학교를 건설하게 되었다. 삼악은 쌍령산·구봉산·문수산에 둘러싸인 곳에 세워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여준(1862 - 1932)의 본명은 여조현(呂祖鉉)으로 롱징(龍井) 서전서숙에서 교육활동을 하였다. 신민회에 가입하면서 이승훈과 함께 1907년 12월 오산학교 설립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후 상동청년학원에 잠시 파견되었는데, 이 시기 자신의 고향에서도 인재를 양성하고자 삼악학교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한국광복군에서 활약했던 오광선은 이 학교를 졸업한 후 여준의 추천으로 상동청년학원에 입학하여 장지영에게 교육을 받았다. 구국모험단·흥사단 단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최초의 모스크바 비행학교 유학생이었던 김공집 역시 삼악학교에서 1913년부터 1년간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